호리오 요시하루(堀尾吉晴, 1543–1611) — 마츠에성을 세운 히데요시의 초기 가신
Q: 호리오 요시하루(堀尾吉晴)는 누구인가?
A: 오와리 니와군(尾張国丹羽郡, 현 아이치현 오구치초) 출신의 무장(1543–1611). 아버지가 섬기던 이와쿠라 오다 가문(岩倉織田氏)이 오다 노부나가에게 멸망한 뒤 로닌(浪人, 섬기던 주군을 잃고 떠도는 무사)이 됐다가 노부나가에게 출사해 하시바(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리키(与力, 상급 무사에게 딸려 함께 싸우는 무사)로 배속됐다. 히데요시가 나가하마 성주가 된 무렵 100석에서 시작해 와카사 다카하마, 오미 사와야마를 거쳐 1590년 도토우미 하마마츠(浜松) 12만 석의 다이묘가 됐다. 1599년 은거해 가독을 아들 타다우지(忠氏)에게 넘겼고,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인 1600년 7월 미카와 치류(池鯉鮒)의 술자리에서 칼부림에 휘말려 다쳤다. 전후 타다우지가 이즈모·오키 24만 석을 받자 함께 이즈모로 옮겼고, 1604년 타다우지가 먼저 죽자 어린 손자 타다하루(忠晴)를 후견하며 마츠에성(松江城)과 성하 도시를 세웠다. 1611년 6월 마츠에에서 죽었다. 도요토미 정권의 “산추로(三中老)” 중 한 사람, 온후한 성품의 “호토케노 모스케(仏の茂助, 부처 모스케)“로 알려져 있지만, 이 별칭과 산추로의 원형인 “고도시요리(小年寄)“라는 호칭은 모두 그의 옛 가신이 쓴 책에서 처음 확인된다.
한눈에 보는 호리오 요시하루
| 항목 | 내용 |
|---|---|
| 이름 | 호리오 요시하루(堀尾吉晴, ほりお よしはる) |
| 아명·통칭 | 니오마루(仁王丸), 코타로(小太郎)·모스케(茂助) |
| 생몰 | 1543년(덴분 12년) – 1611년 6월 17일(게이초 16년, 음력), 향년 69 |
| 출신지 | 오와리 니와군 고고쇼무라(御供所村, 현 아이치현 니와군 오구치초) |
| 아버지 | 호리오 야스하루(堀尾泰晴), 이와쿠라 오다 가문 오다 노부야스의 중신 |
| 출사 | 이와쿠라 오다 가문 멸망 후 로닌 → 오다 노부나가 → 히데요시의 요리키 |
| 관위 | 종5위하 다테와키 센조(帯刀先生, 1587년) |
| 영지 변천 | 나가하마 100석 → 다카하마 1만7천 석 → 사와야마 4만 석 → 하마마츠 12만 석(1590) |
| 은거 | 1599년 10월, 은거료로 에치젠 후추(越前府中) 5만 석 |
| 세키가하라 | 본인은 직전 치류 사건으로 부상, 아들 타다우지가 동군 참전 |
| 전후 | 타다우지가 이즈모·오키 24만 석, 요시하루는 동행해 실권 행사 |
| 대표 업적 | 하마마츠성 석벽화(발굴 성과상 추정), 마츠에성·성하 건설(1607–1611) |
| 자녀 | 킨스케(金助, 1590년 진중 사망, 계보상 장남·이설 있음), 타다우지(忠氏, 1604년 사망) |
| 후계 | 손자 타다하루(忠晴), 1633년 무후 사망으로 가문 단절 |
| 기념 | 마츠에성 오테마에 동상, 호리오 요시하루 공·마츠에 무샤교레츠(2003–) |
호리오 요시하루는 이 블로그가 먼저 다룬 이코마 치카마사와 함께 “산추로”로 묶이는 인물이다. 도쿠가와 사천왕이나 시즈가타케 칠본창처럼 전장의 무용으로 이름난 사람들과 달리, 그는 히데요시가 아직 나가하마 성주이던 시절부터 곁에 있던 초기 가신이다. 교섭과 입회, 축성과 도시 건설 같은 실무로 한 단계씩 올라간 사람이다. 전국시대 인물 가운데 드물게, 그가 만든 흔적이 아직도 일본에 남아 있는데 시마네현 마츠에시의 성과 해자와 거리가 그것이다.
호리오 요시하루를 설명하는 가장 유명한 두 단어, “호토케노 모스케”와 “산추로”(정확히는 그 원형인 “고도시요리”)는 모두 호리오 가문을 섬긴 적이 있는 오제 호안(小瀬甫庵)이 쓴 『다이코키(太閤記)』에서 처음 확인된다. 이 글에서는 이 두 호칭에 대해 짚어 보고, 그것과 별개로 사료에서 확인되는 그의 이력과 그가 세운 도시, 마지막으로 그의 가족에 대해 차례로 정리해 보려 한다.
1. 이와쿠라의 로닌에서 히데요시의 요리키로
호리오 요시하루는 덴분 12년(1543) 오와리 니와군 고고쇼무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호리오 야스하루는 오와리 북부 4군을 관할하던 슈고다이(守護代, 지방 장관인 슈고의 대리) 가문, 이와쿠라 오다 가문의 당주 오다 노부야스(織田信安)를 섬긴 중신이었다. 일본어 위키백과 등은 야스하루가 야마우치 모리토요(山内盛豊, 훗날 도사 번주가 되는 야마우치 카즈토요의 아버지)와 함께 이 가문의 중신 자리에 있었다고 적는다. 호리오 집안은 오와리 토착 무사 중에서도 주군을 가까이서 보좌하는 위치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1 오구치초 공식 사이트에는 야츠루기샤(八剱社) 경내 일대가 호리오 요시하루의 저택 터로 전해진다고 나와 있다. 경내에 석비가 서 있고, 2009년 발굴 조사에서 해자와 건물 터가 나왔다.
아명은 니오마루, 통칭은 코타로와 모스케였다. 오제 호안의 『다이코키』 권18 호리오 전에는 “열일곱 되던 해 여름 모스케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대목이 있다.2 초진은 1558년 우키노(浮野) 전투라는 설과 1559년 이와쿠라성 전투라는 설이 있는데 두 전투 모두 오다 노부나가가 이와쿠라 오다 가문을 무너뜨리기 위해 벌인 전쟁이었고, 호리오 요시하루는 아버지가 이와쿠라 오다 쪽 중신이었으니 요시하루는 나중에 섬길 노부나가의 반대편에서 첫 싸움을 치렀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1559년 이와쿠라성 전투를 초진으로 보고 이와쿠라 오다 가문 쪽에서 싸워 일번수급을 올렸다고 적지만, 이 서술의 원사료는 확인하지 못했다.1
이와쿠라 오다 가문이 멸망하자 호리오 부자는 로닌이 됐다. 이후 요시하루가 노부나가에게 출사해 기노시타(하시바) 히데요시의 요리키로 배속됐다는 것이 정설인데, 정확한 출사 연도를 특정할 근거는 찾지 못했다.1
이 과정에 대한 힌트를 주는 것이 이나바야마성으로 가는 길을 안내했다는 일화다. 미노 산중에 있던 모스케가, 1567년 이나바야마성(稲葉山城) 공략 때 길을 찾던 도키치로(히데요시)에게 성 뒤편으로 통하는 샛길을 알려 주었고 이를 계기로 발탁됐다는 이야기다. 이 장면이 확인되는 가장 이른 문헌은 18세기 말 간행된 요미혼(読本, 역사 소재의 대중 소설) 『에혼 다이코키(絵本太閤記)』(1797–1802)다. 사건으로부터 약 230년 뒤다. 시간이 더 지난 메이지 시대에는 우타가와 도요노부 같은 우키요에 화가들이 이 일화를 그림으로 남겼다. 꽤나 알려진 이야기가 된 모양이다.3 호안의 『다이코키』나 에도 막부가 편찬한 『간세이 조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에 같은 일화가 있는지는 이번 조사에서 확인하지 못했다. 아무튼 호리오 요시하루는 노부나가에게 발탁됐다고 소개되는 곳이 많지만, 이 일화가 사실이라면 그를 거둔 사람은 노부나가가 아니라 히데요시로 보인다.
요시하루의 녹봉에 대해 확인되는 가장 이른 수치는 히데요시가 오미 나가하마의 성주가 된 덴쇼 원년(1573) 이후 받은 100석이다. 사전류에 따라서는 110석으로 적기도 한다.4 서른 무렵의 요시하루는 영지를 가진 무장이 아니라 히데요시에게 녹봉을 받는 부하였을 뿐이고, 그가 12만 석의 영지를 가진 다이묘가 되기까지는 그로부터 17년이 걸린다.
2. “호토케노 모스케” — 별칭은 누가 붙였나
2-1. 호안의 『다이코키』에 처음 보이는 이름
요시하루를 소개하는 글은 거의 예외 없이 이 별칭으로 시작한다. 평소에는 온화해서 “부처 모스케”라 불렸지만 전장에서는 사람이 달라져, 히데요시가 “부처가 아니라 귀신 모스케”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확인되는 가장 이른 문헌은 오제 호안의 『다이코키』 권18이다. 권18에는 「호리오 다테와키 센조 요시하루 전(堀尾帯刀先生吉晴伝)」과 함께 「부처 모스케가 그 이름과 달리 도리어 사람을 벤 일(仏茂助名にしおはて還て殺人事)」이라는 항목이 있고, 이 항목에서 히데요시가 이렇게 말한다.2
仏茂助といはれつる名にしおはぬ手柄よな、仏は人を助くる物なるに、還て首を捕たるよな、けふよりは鬼…
“부처 모스케라 불리던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공이로구나. 부처는 사람을 구하는 법이거늘 도리어 목을 베어 왔구나. 오늘부터는 귀신…”
호안의 『다이코키』는 간에이 2년(1625)에 서문을 붙이고 이듬해 간행됐다. 요시하루가 죽은 지 14년 뒤, 그가 처음 전장에 나갔다는 1558년 무렵부터 치면 60년 넘게 지난 뒤의 책이다. 요시하루가 살아 있던 시기의 문서에서 “호토케노 모스케”라는 호칭이 쓰인 예는 찾지 못했다. 이 별칭이 에도 중기의 일화집 『조잔키단(常山紀談)』이나 막부 말기의 『메이쇼 겐코로쿠(名将言行録)』 같은 후대 책에 실렸다 하더라도, 모두 호안의 『다이코키』보다 늦은 시기의 기록이다.2
2-2. 저자가 옛 가신이었다는 점
그런데 이 기록이 신빙성이 있는지 판단하려면 저자의 이력을 따져봐야 한다. 저자인 오제 호안(1564–1640)은 유학자이자 의사였고, 이케다 츠네오키와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차례로 섬겼다. 그 뒤 호리오 요시하루를 섬기며 시의(侍医)이자 군학자로 일했고, 마츠에성의 설계에도 관여했다고 전한다. 요시하루가 죽은 뒤에는 한동안 로닌으로 지내다 가가의 마에다 가문에서 녹을 받았다.5
호안의 『다이코키』 권18은 히데요시 휘하 여러 무사의 전기를 모은 권인데, 여기서 호리오 전은 다케나카 한베에 같은 이름난 인물과 나란히 실렸고 분량도 많다.2 옛 주군을 기리는 마음에 분량이 늘어났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래서 그런지 호안의 저작은 동시대부터 과장이 많다는 비판을 받았다. 『미카와 모노가타리』의 저자 오쿠보 타다타카가 그의 『신초키』를 두고 허식이 많다고 지적한 것이 대표적이다.6 물론 이런 사정 때문에 호토케노 모스케라는 별칭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으나 “당대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는 근거가 그의 옛 가신이 쓴 책 한 권뿐이라는 얘기다.
3. 나가하마 100석에서 사와야마 4만 석까지 — 전장보다 실무
3-1. 한 단계씩 늘어난 녹봉
요시하루의 경력에서 가장 분명하게 확인되는 것은 영지가 늘어난 순서다. 개별 석고에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지만, 흐름은 일치한다.
| 연도 | 영지·석고 | 비고 |
|---|---|---|
| 1573년 이후 | 오미 나가하마 100석 | 히데요시의 나가하마 입성 뒤. 사전류에 따라 110석 |
| 1577년 무렵 이후 | 하리마 히메지 1,500석 | 연도 미확정. 일본어 위키백과는 1582년 항목에 둔다 |
| 1582년 무렵 | 단바 구로이 3,500석 | 야마자키 전투 후 6,284석이라는 설도 있다 |
| 1583년 | 와카사 다카하마(高浜) 1만7천 석 | |
| 1584년 | 2만 석 | |
| 1585년 | 와카사 사가키(佐柿) 2만 석 → 두 달 뒤 오미 사와야마(佐和山) 4만 석 | 같은 해 히데츠구의 슈쿠로(宿老) |
| 1587년 | 종5위하 다테와키 센조 서임 | 도요토미 성(豊臣姓) 하사 시점은 1587년설과 1590년설 |
| 1590년 | 도토우미 하마마츠 12만 석 | 오다와라 정벌 후 |
(출전: 마츠에시 조사 칼럼의 요시하루 연보, 코토방크 사전 항목, 하마마츠시박물관 특별전 안내 등. 초기 석고는 대부분 『간세이 조슈쇼카후』의 서술로 보인다.)4
1585년이 전환점이다. 이해 요시하루는 사와야마 4만 석을 받는 동시에, 히데요시의 조카 히데츠구에게 다나카 요시마사·나카무라 카즈우지·야마우치 카즈토요·히토츠야나기 나오스에와 함께 슈쿠로(宿老, 젊은 주군 곁에서 정무를 보좌하는 원로 가신)로 붙여졌다. 히데츠구가 오미 하치만에 43만 석으로 들어가자, 히데요시는 자기 밑에서 오래 일한 가신들을 그 주변 요지에 배치해 젊은 조카를 보좌하게 했다.4 이 다섯 사람은 모두 히데요시가 오래 데리고 있던 가신이었다. 요시하루가 이 무렵 히데요시에게 “믿고 맡길 수 있는 실무자”로 분류됐다는 것은 이 배치에서 알 수 있다.
1587년에는 종5위하 다테와키 센조(帯刀先生)에 서임됐다. “다테와키”만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지만 정식 직명은 다치하키노 오사(帯刀長)이고, 다테와키 센조는 그 별칭으로 동궁 경호를 맡는 다테와키 도네리(帯刀舎人)의 장을 가리키는 옛 관직명이다. 사전의 독음은 다치하키노 센조다.4 『다이코키』에는 그의 전기가 「호리오 다테와키 센조 요시하루 전」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3-2. 무공보다 입회와 인도
요시하루가 히데요시 휘하에 있는 동안 전투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생각보다 확인하기 어렵다. 1582년 이전 호리오 관련 동시대 문서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시마네대학의 호리오 가문 관계 사료 목록도 덴쇼 10년(1582) 문서가 첫 번째다.7 널리 알려진 역할들을 출전 수준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전투·사건 | 전해지는 역할 | 확인 수준 |
|---|---|---|
| 나가시노 전투(1575) | 참전설 | 2차 해설서에 참전설이 있으나 출전 사료 미확인 |
| 미키성 포위(1578–1580) | 부성(付城) 구루미야마노우에(久留美山ノ上) 배치 | 일본어 위키백과 부성 일람에 기재, 전거 사료 미확인 |
| 돗토리성 포위(1581) | 참전설 | 구체적 근거 없음 |
| 빗추 다카마츠성(1582) | 시미즈 무네하루 할복의 검사(検使, 할복을 지켜보는 입회 관리) | 표준 전기의 서술, 1차 사료 미확인 |
| 야마자키 전투(1582) | 철포 부대장, 덴노잔 선점 | 덴노잔 선점은 호안 『다이코키』의 서술로 연구상 의문시 |
| 코마키·나가쿠테(1584) | 하구로(羽黒)의 옛 보루 수비 | 『도요토미 히데요시보(豊臣秀吉譜)』(에도 시대 편찬물), 동시대 사료 미확인 |
| 오다와라 정벌(1590) | 히데츠구 휘하로 야마나카성 공격 | 표준 전기의 서술 |
(출전: 국립국회도서관 레퍼런스 협동 데이터베이스 답변, 각 전투 관련 사전 항목, 호리오 관련 해설 기사)8
표에서 보듯 “호리오 요시하루가 이 전투에서 이런 공을 세웠다”고 단정할 수 있는 장면은 거의 없다. 그 대신 여러 전기가 공통으로 전하는 역할이 있다. 성을 포위한 뒤 항복 조건을 교섭하고, 성을 넘겨받고, 적장의 할복에 입회하는 일이다. 미키·돗토리·다카마츠로 이어지는 히데요시의 이른바 3대 포위전에서 요시하루가 성 인도 교섭과 검시역을 맡았다는 서술이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개별 사례로는 다카마츠성의 시미즈 무네하루 할복에 검사로 입회했다는 서술만 확인했고, 미키와 돗토리의 개별 사례는 확인하지 못했다.9 각각의 장면에 대한 1차 사료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요시하루와 관련된 기록은 전투 후의 처리와 관련해 더 많이 나오는 것은 일관적이라 하겠다.
4. 하마마츠 12만 석
4-1. 흙의 성을 돌의 성으로
덴쇼 18년(1590) 오다와라 정벌이 끝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간토로 옮겨 가자, 이에야스가 10여 년 동안 본거로 쓰던 하마마츠성에 요시하루가 들어갔다. 석고는 12만 석이 통설이고, 처음 10만 석이었다가 12만 석이 됐다는 서술도 있다.10 이에야스의 옛 영지인 도카이도 해안 지역을 히데요시의 오래된 가신들이 나눠 맡은 것이었다. 스루가 후추에는 나카무라 카즈우지, 가케가와에는 야마우치 카즈토요, 요시다에는 이케다 테루마사가 들어갔다.
발굴 조사로 드러난 모습은 흥미롭다. 이에야스 시대의 하마마츠성은 높은 석벽도 천수도 없이 흙을 쌓은 토루로 둘러싼 성이었다. 이것을 높은 석벽과 기와지붕 망루, 성문, 천수를 갖춘 근세 성곽으로 바꾼 것은 호리오 시대로 보인다는 것이 현재의 견해다. 지금 남아 있는 천수대는 자연석을 그대로 쌓은 노즈라즈미(野面積み) 방식이고, 한 변 약 21미터의 조금 일그러진 사각형이다. 하마마츠시는 이 천수를 호리오 가문이 다스린 16세기 말에 처음 세운 것으로 본다.11 요시하루는 영내의 후타마타성과 도바야마성도 석벽을 갖춘 성으로 고쳤다고 한다.
하마마츠 시대의 검지나 법령 같은 영지 경영 문서는 이번 조사에서 확인하지 못했다. 사찰 경내의 죽목 벌채 금지와 우부미 염전 과세가 있었다고 소개하는 자료가 있으나, 문서 자체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에야스 시대 토성이었던 하마마츠성이 호리오 요시하루의 시대에 석벽을 갖춘 성이 된 것으로 보이며, 후에 요시하루가 마츠에성의 천수를 지으면서 하마마츠성의 천수를 참고해 설계했다는 견해도 있다.11
4-2. 사이단바시 — 돌아오지 못한 아들과 어머니의 다리
하마마츠 12만 석을 받은 1590년은 요시하루 가문에 가장 슬픈 해이기도 했다. 오다와라 원정에 따라나섰던 아들 호리오 킨스케(堀尾金助)가 그해 6월 12일 진중에서 열여덟 살로 죽었기 때문이다. 사인은 병사설과 전사설이 있는데 병사 쪽이 유력하다고 하지만, 믿을 만한 기록은 없다.12
다만 킨스케가 정말 요시하루의 친아들인지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다. 『호리오씨 계도』와 『간세이 조슈쇼카후』는 그를 요시하루의 장남으로 올렸지만, 일족인 호리오 가타야스(堀尾方泰)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나고야시는 “요시하루의 일족(장자, 종형제 등의 설이 있으나 불상)“이라고 안내한다.12 다만 요시하루가 같은 해 교토 묘신지(妙心寺) 안에 탑두(塔頭, 큰 절 경내의 부속 사원) 슌간인(俊巖院)을 세웠고, 그 이름이 킨스케의 법명 “이츠간세이슌(逸岩世俊)“에서 왔다는 점은 요시하루와 킨스케가 아주 가까운 관계였음을 보여 준다. 이 절은 1636년 이름을 바꿔 지금의 슌코인(春光院)이 됐고, 호리오 가문의 보리사(菩提寺, 집안의 위패를 모시는 절)로 이어졌다.13
킨스케의 어머니는 아들의 명복을 빌며 오와리 아츠타(熱田)의 사이단바시(裁断橋)를 놓았다고 전한다. 그리고 33회기를 맞은 겐나 8년(1622), 다리를 다시 놓으면서 난간의 청동 장식 기보시(擬宝珠)에 가나로 된 글을 새겼다.14
てんしやう十八ねん二月十八日に、おだはらへの御ぢん、ほりをきん助と申す、十八になりたる子をたゝせてより、又ふためとも見ざるかなしさのあまりに、いま此はしをかける成、はゝの身には、らくるいともなり、そくしんじやうぶつし給へ、いつがんせいしゆんと、後のよの又のちまで、此かきつけを見る人は、念仏申給へや、卅三年のくやう也
“덴쇼 18년 2월 18일, 오다와라 출진에 호리오 킨스케라 하는 열여덟 된 아들을 떠나보낸 뒤로 다시는 보지 못한 슬픔이 너무 커서, 이제 이 다리를 놓는다. 어미의 몸에는 흐르는 눈물이 되기도 한다. 즉신성불하소서, 이츠간세이슌이여. 뒷세상의 또 그 뒤까지, 이 글을 보는 사람은 염불을 외워 주소서. 33년의 공양이다.”
명문에 적힌 2월 18일은 어머니가 아들을 오다와라 출진으로 떠나보낸 날이다. 다른 사료로 교차 확인되지는 않는다. 그가 진중에서 죽은 6월 12일이 아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죽은 날보다 아들을 전쟁터로 보낸 날이 더 사무쳤던 모양이다. 이 기보시는 나고야시 지정 문화재로 나고야시박물관이 소장하고 있고, “일본 굴지의 명문”으로 소개된다.
5. 산추로 — 직함의 출처와 실제로 확인되는 주선
5-1. “산추로”라는 이름은 언제 생겼나
도요토미 정권 말기에는 다섯 명의 다이로(五大老, 최고 원로 다이묘)와 다섯 명의 부교(五奉行, 실무 행정 관료)가 있었다. 여기에 더해 이코마 치카마사·나카무라 카즈우지·호리오 요시하루 세 사람이 “산추로(三中老)“로 임명돼, 다이로와 부교의 의견이 맞지 않을 때 중재했다는 설명이 널리 퍼져 있다. 한국어 위키백과도 요시하루를 “도요토미 정권의 삼중로 중 한 명”으로 소개한다.15
이 호칭의 원형이 확인되는 가장 이른 문헌 역시 오제 호안의 『다이코키』다. 권13에는 이코마·나카무라·호리오 세 사람이 “고슈쿠로(小宿老)“로 열거되고, 권20에는 히데츠구 사건 뒤 히데요시가 이렇게 정해 두었다며, 세 사람은 다이로와 부교 사이에 불화가 생기면 옳지 않은 쪽을 강하게 간언하라는 대목이 있고, 여기서는 이들을 “고도시요리(小年寄)“라 부른다.16 “산추로(三中老)“라는 표기가 『다이코키』 본문에 있는지는 이번 조사에서 확인하지 못했다. 서문이 1625년, 간행이 1626년이니 히데요시 사망으로부터 따져도 27–28년 뒤다. 그다음은 야마가 소코의 『부케지키(武家事紀)』(1673)로 75년 뒤이고, 에도 막부가 19세기에 편찬한 『도쿠가와 짓키(徳川実紀)』로 이어진다. 즉, 이 호칭에 대해서도 동시대 사료는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16
“산추로”, “고도시요리(小年寄)”, “고슈쿠로” 같은 호칭이 요시하루의 옛 가신이 쓴 책에서 처음 쓰였다는 점은 2장에서 본 별칭 호토케노 모스케와 동일하다. 이에 대한 현대 연구자들의 판정은 다음과 같다.
| 연구자 | 견해 | 판정의 강도 |
|---|---|---|
| 미야모토 요시미(宮本義己) | 도요토미 정권의 기본 사료에서 확인되지 않으며 호안 『다이코키』 등에 근거한 “후대의 창작” | 명시적 부정 |
| 와타나베 다이몬(渡邊大門) | 현재 연구에서 정식 직제로 인정되지 않으며, 근래 이 판단이 더 굳어졌다 | 강한 부정 |
| 다카하시 요스케(高橋陽介) | 산추로가 있었는지, 세 사람이 이에야스에게 힐문사로 갔는지는 1차 사료로 확인할 수 없다 | 확인 불가 |
| 다니구치 가쓰히로(谷口克広) | 요시하루를 섬긴 호안이 경력이 비슷한 치카마사·카즈우지를 더해 “고도시요리”로 삼아 옛 주군에게 권위를 입혔다 | 성립 경위의 해석 |
(출전: 일본어 위키백과 「산추로(三中老)」 항목의 연구자 견해 요약, 와타나베 다이몬의 기고. 다카하시는 『1차 사료로 보는 세키가하라 전투(一次史料にみる関ヶ原の戦い)』 개정판(2017), 다니구치는 『노부나가·히데요시와 가신들(信長・秀吉と家臣たち)』(2011)를 출전으로 든 위키 요약으로 확인했고, 각 연구자의 원 저작은 직접 확인하지 못했다.)17
산추로의 존재를 지지하는 근거도 하나 있기는 하다. 게이초 5년(1600) 5월 7일, 부교 마에다 겐이·마시타 나가모리·나츠카 마사이에와 나카무라·이코마·호리오가 함께 서명해 이이 나오마사 앞으로 아이즈 출진을 미루도록 권한 서장이 『레키다이코안(歴代古案)』과 『고콘쇼소쿠슈(古今消息集)』 등에 사본으로 실려 전한다. 산추로 실재론의 거의 유일한 근거로 쓰여 온 문서다. 그러나 미야모토는 세 사람이 부교들과 나란히, 그것도 부교보다 윗자리에 서명한 형식 자체가 부자연스럽다고 봤고, 와타나베는 문서 자체를 “매우 의심스럽다”고 평가하며 수신자가 이이 나오마사인 점도 이상하게 본다.17
정리하면 이렇다. “산추로”라는 정식 직제가 있었다는 근거는 동시대 사료에서 확인되지 않고, 이 호칭은 호리오 가문과 연고가 있는 호안의 편찬물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것이 현재 연구의 대체적 견해다. 하지만 연서장의 진위 논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어서, “완전한 후대의 창작이다”라고까지 확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5-2. 그렇다면 확인되는 주선 활동은 무엇인가
그런데 산추로라는 이름의 직함이 아니었다고 해서 요시하루가 이 시기에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히데요시 사후의 긴장 속에서 그가 양쪽을 중재하는 역할을 했음을 보여 주는 자료는 따로 있다.
가장 유력한 것은 게이초 4년(1599) 2월 5일자로 이이 나오마사가 요시하루에게 보냈다는 감사장이다. 이에야스와 반 이에야스 측(마에다 토시이에·이시다 미츠나리 등)의 대립을 조정한 요시하루의 주선(周旋)에 대해 이에야스의 중신이 감사를 표한 문서로 소개된다.18 그 무렵 이에야스와 네 다이로·다섯 부교는 이에야스가 다테·후쿠시마·하치스카 가문과 멋대로 혼인을 약속한 문제로 대립하다가 서로 기청문(起請文, 신불에 맹세하며 쓰는 서약서)을 교환해 화해했다. 요시하루가 이 화해 과정에서 무언가 역할을 한 모양이다. 이와 반대로 이 혼인 문제 때 요시하루가 이코마·나카무라와 함께 이에야스 저택에 힐문사로 갔다는 널리 알려진 장면은, 앞서 본 대로 1차 사료로 확인되지 않고, 『덴겐짓키(天元実記)』·『오치보슈(落穂集)』·『한칸후』 같은 후대 편찬물에서 나온다. 같은 해 가을 이른바 “이에야스 암살 계획” 소동을 요시하루가 중재했다는 이야기도 근거를 찾지 못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이 시기 호리오 요시하루와 이에야스의 관계다. 게이초 4년(1599) 10월 1일, 요시하루는 고령을 이유로 은거하고 하마마츠 12만 석을 아들 타다우지에게 넘겼다. 이때 이에야스가 은거료로 에치젠 후추 5만 석을 줬는데 이는 도요토미 가신이 이에야스에게서 영지를 받은 첫 사례로 거론되기도 한다. 일본어 위키백과가 대중 교양서인 이시이 유(石井悠)의 『마츠에번(松江藩)』(2012)을 근거로 그렇게 적은 것이고, 마츠에시 연보에는 이런 표현이 없다.19 마츠에시 조사 칼럼의 연보에는 이것이 “에치젠 루스이야쿠(留守居役, 주군이 없는 동안 성과 영지를 맡는 직임)로서 5만 석”으로 기록돼 있어, 은거료로 준 것이라기보다 에치젠 지역의 일부를 관리하라고 맡긴 성격으로 보인다. 이 5만 석을 이에야스가 도쿠가와 가문의 당주 입장에서 준 것인지, 아니면 도요토미 정권의 다이로로서 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느 쪽이든 히데요시가 죽고 1년이 지난 시점에 요시하루 부자가 이미 이에야스와 가까운 관계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6. 치류의 칼부림과 세키가하라
6-1. 게이초 5년 7월 19일, 치류
게이초 5년(1600) 6월, 이에야스는 아이즈의 우에스기 카게카츠를 치러 동쪽으로 떠났다. 하마마츠에서 요시하루와 타다우지가 이에야스를 맞아 대접했고, 이에야스는 타다우지만 데려가고 요시하루에게는 에치젠으로 돌아가라고 했다.20 요시하루는 에치젠으로 가는 길에 미카와의 역참 치류(池鯉鮒, 현 아이치현 치류시)에 들렀다.
7월 19일, 가리야 성주 미즈노 타다시게(水野忠重)가 요시하루를 대접하는 술자리를 열었다. 타다시게는 이에야스의 외숙이다. 이 자리에 동석한 가가이 시게모치(加賀井重望)가 타다시게를 찔러 죽였고, 요시하루도 다쳤다. 시게모치는 그 자리에서 죽었는데, 대부분의 자료는 요시하루가 그를 베었다고 전하지만, 미즈노 가신들이 죽였다고 적는 안내문도 있다.21 가리야 3만 석은 7월 25일 이에야스를 따라 출진 중이던 타다시게의 아들 미즈노 카츠나리가 돌아와 이었다.
날짜와 장소, 세 사람의 이름까지는 모든 자료가 일치하나 그 밖의 부분은 자료마다 다르다.
| 쟁점 | 전하는 내용 | 출전·확인 수준 |
|---|---|---|
| 살해 동기 ① | 술자리 말다툼 끝의 우발적 살해 | 『일본인명대사전』 등 사전 항목. 가장 보수적인 서술 |
| 살해 동기 ② | 이시다 미츠나리의 사주. 시게모치가 지녔다는 미츠나리의 증문에 미즈노 타다시게와 요시하루 두 사람을 죽이면 미카와·도토우미를 준다고 적혀 있었다 | 『무샤모노가타리(武者物語)』(1656년 간행)를 인용한 일본어 위키백과. 가리야시 해설은 에도 초기 『도다이키(当代記)』 기사라고 소개하나 원문 미확인 |
| 살해 동기 ③ | 오타니 요시츠구의 권유로 미츠나리가 가가이에게 이에야스 암살을 은밀히 명했고, 미즈노 살해는 그 일이 여의치 않자 벌어졌다는 서술 | 『도쿠가와 짓키』 「도쇼구고짓키(東照宮御実紀)」 권4 할주(19세기 막부 편찬), 사건 후 200년 이상 뒤 |
| 요시하루의 부상 | 창에 열일곱 군데를 찔리고도 반격했다 | 현대 해설에 반복되나 1차 출전을 찾지 못함 |
| 뺨의 흉터 | 슌코인의 요시하루 목상 왼뺨에 깊은 흉터가 새겨져 있으며 이 사건의 상처로 추정 | 추정 단계 |
| 오인 소동 | 타다시게의 가신들이 요시하루를 범인으로 오인했고, 그 소식이 이에야스에게 전해져 부자가 의심받았다 | 일화 단계 |
(출전: 가리야시·치류시 공식 안내, 사전 항목, 호리오 관련 해설)22
치류시 관광 안내는 “미츠나리의 명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하지만 진상은 불명”이라고 안내한다. 세키가하라 직전의 긴장 상태 속에서 이에야스의 외숙이 살해됐으니 서군의 공작으로 해석하고 싶어지는 사건이지만, 동기를 확정할 사료는 없다. 요시하루가 이 사건에서 크게 다쳤다는 것, 가해자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는 것까지가 사료로 확실히 확인되는 사실이다. 치류의 호조지(宝蔵寺)에는 지금도 시게모치의 묘와 함께, 주군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지고 자결한 미즈노 가신 두 사람을 기리는 “오이바라즈카(追腹塚)“가 있다.22
이 부상 때문에 요시하루는 두 달 뒤 세키가하라 본전에 나가지 못했다. 쉰여덟 살이었다.
6-2. 타다우지의 세키가하라
다친 요시하루를 대신해 이에야스의 동군에 선 것은 아들 타다우지였다. 그를 둘러싼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오야마 평정(小山評定, 1600년 7월 이에야스가 시모츠케 오야마에서 여러 다이묘를 모아 이시다 미츠나리 거병에 대한 대응을 논의했다는 군사 회의)의 “성 헌상” 일화다. 평정 직전 오랜 친구 야마우치 카즈토요가 타다우지를 찾아와 거취를 상의했고, 타다우지가 “나는 내 성을 나이후(内府, 이에야스가 1596년에 오른 조정 관직 나이다이진 内大臣의 별칭)께 내놓을 생각”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런데 평정이 열리자 카즈토요가 먼저 “제 가케가와성을 병량째 바치겠다”고 말해 이에야스를 크게 기쁘게 했다는 줄거리다.23
이 일화는 아라이 하쿠세키의 『한칸후(藩翰譜)』(1702)에 실려 있다. 사건 약 100년 뒤의 책이다. 『한칸후』는 성을 내놓겠다고 먼저 말한 사람이 타다우지이고 카즈토요가 이를 자기 안으로 이에야스에게 올렸다고 전한다. 카즈토요 자신의 발안으로 전하는 이야기도 있어 서로 충돌하지만 출전은 특정하지 못했다. 시라미네 준(白峰旬) 등은 이에야스 서장의 날짜가 후세에 고쳐졌을 가능성 등을 들어 오야마 평정 자체가 통설대로 열렸는지를 의심한다. 발안자 논쟁과 평정 실재 논쟁이 겹쳐 있어, 이 일화는 『한칸후』가 전하는 이야기로만 소개할 수 있다.
전후 처분은 문서로 확인된다. 게이초 5년 10월 30일자 서장에 이에야스의 논공행상 소식으로 “호리 시나노 님(堀信濃殿)”, 곧 시나노노카미 타다우지에게 이즈모·오키 두 구니(国, 옛 일본의 지방 행정 단위)가 주어졌다는 내용이 있고, 이듬해 타다우지 명의로 가신에게 토지를 나눠 준 지행목록(知行目録, 영지를 나눠 준 내역을 적은 문서)도 남아 있다. 석고는 24만 석이다.24 하마마츠 12만 석의 두 배였다. 이즈모를 받은 사람은 요시하루가 아니라 타다우지였지만, 요시하루도 함께 이즈모로 옮겨 실권을 나눠 쥐었다. 마츠에번의 “초대 번주”로 요시하루를 꼽는 경우가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7. 마츠에를 세우다 — 아들을 잃고 손자를 맡다
7-1. 갓산토다성에서 호숫가 언덕으로
1600년 겨울, 호리오 부자는 이즈모의 옛 중심지인 갓산토다성(月山富田城, 현 시마네현 야스기시)에 들어갔다. 아마고 가문과 모리 가문이 차례로 거점으로 삼은 이름난 산성이었다. 그러나 골짜기 안의 중세 산성은 병농 분리된 가신단을 성 아래에 모아 살게 하는 근세 성하 도시를 만들기에는 땅이 좁았다.25 호리오 가문은 새 거점을 찾기 시작했다.
새 성의 위치를 두고 부자가 의견이 갈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요시하루는 신지코(宍道湖) 호숫가의 아라와이야마(荒隈山)를, 타다우지는 지금 성이 있는 가메다야마(亀田山)를 원했다. 타다우지는 아라와이야마가 너무 넓어 24만 석으로는 유지하기 어렵다고 반대했고, 타다우지가 죽은 뒤 요시하루가 아들의 뜻을 따라 가메다야마로 정했다는 줄거리다. 일부 해설 사이트가 이 이야기를 소개하지만, 출전과 성립 시기는 확인하지 못했다.26
7-2. 타다우지의 급사
게이초 9년(1604) 8월 4일, 타다우지가 20대 후반의 나이로 갑자기 죽었다. 여기에도 널리 알려진 전설이 있다. 성터를 물색하러 다니던 타다우지가 가모스 신사(神魂神社)에 들러, 신관이 말리는데도 “국주로서 봐야 한다”며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는 신성한 연못 고나리이케(小成池)를 들여다봤다. 돌아올 때 얼굴이 보랏빛이었고(마츠에성 공식 사이트에는 창백했다고 나와 있다) 곧 병석에 누워 죽었다는 이야기다. 금족지에서 독사에 물렸다는 변형도 있다.27
이 전설의 가장 이른 출전은 찾지 못했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이시이 유의 『마츠에번』(2012) 28쪽을 근거로 든다. 사인에 가장 가까운 기록은 요시하루의 종제 호리오 다지마(堀尾但馬)가 남긴 『호리오 고키(堀尾古記)』인데, 여기에는 “타다우지 님, 8월 4일에 세상을 떠나심(忠氏様、八月四日に御遠行)“이라는 한 줄만 있고 사인은 없다.27 확인되는 것은 이즈모를 받은 지 4년 만에 영주가 죽었다는 사실이다.
뒤를 이은 손자 타다하루는 1599년생으로, 이때 나이가 겨우 여섯 살이었기 때문에 예순두 살의 할아버지 요시하루가 다시 정무를 맡았다. 후견 기간에는 일족이자 필두 가로(家老, 다이묘 가문의 최고위 가신)였던 호리오 가와치노카미 부자가 가독을 노렸다는 역모가 발각돼, 가와치노카미 부자가 유배 뒤 할복한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28 요시하루의 만년은 은거한 원로의 한가한 시절이 아니었다. 아들을 잃었고, 어린 손자를 지켜야 했으며, 영지를 새로 일궈야 했다.
7-3. 1607년 착공, 1611년 정월의 기도찰
게이초 12년(1607), 요시하루는 가메다야마에서 공사를 시작했다. 호숫가 언덕 위에 천수를 올리고, 언덕 둘레에 물길을 파서 해자로 삼고, 습지를 메워 무사와 상인이 살 땅을 만드는 일이었다. 지금 마츠에 시내를 돌아 흐르는 호리카와(堀川)가 이 성의 해자다. 설계에는 앞서 본 오제 호안이 관여했다고 전한다.29 성이 완성된 1611년에는 갓산토다 성하에 있던 조안지(城安寺)를 마츠에로 옮겨 즈이오지(瑞應寺)로 고치고, 옛 영지 하마마츠에서 승려 슌류(春龍)를 불러 초대 주지로 삼았다. 하마마츠와 마츠에를 잇는 인연이다.30
마츠에성이 언제 완성됐는지는 여러 설이 있었다. 요시하루가 완공을 앞두고 급사했다는 설, 죽기 반년 전에 완성됐다는 설, 요시하루 사후에도 미완성이었다는 설이 병존했다.31 그런데 두 장의 나무판이 발견되면서 이 논쟁이 정리됐다.
천수 4층에 있던 삼나무 기도찰 두 장에는 “여의주경을 독송해 길이 번영하기를 받든다(奉讀誦如意珠経長栄処)”, “대반야경 600부를 전독해 무운장구를 받든다(奉轉讀大般若経六百部武運長久処)“는 글과 함께 “게이초 16년 정월 길일(慶長十六年正月吉祥日)“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 이 기도찰은 1937년 확인된 뒤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 마츠에시는 현상금까지 걸고 찾았고, 2012년 5월 시사 편찬 담당자들이 마츠에 신사에 보관된 목찰 사이에서 “慶長十六”이라는 글자를 찾아냈다. 기도찰의 못 구멍은 천수 지하층 기둥의 못 구멍과 맞아떨어졌다. 1766년에 필사된 『고조나이 소켄스(御城内惣間数)』(국문학연구자료관 소장)의 첩지에도 천수 4층에 게이초 16년 대반야찰이 있다는 메모가 남아 있다. 이 첩지는 1787년 무렵 붙은 것으로 보인다.32
이로써 천수는 늦어도 1611년 정월에는 완성돼 있었다는 사실이 확정됐고, 이것이 2015년 7월 8일 마츠에성 천수가 국보로 지정되는 결정적 근거가 됐다.32 요시하루는 천수의 완공을 보고 죽은 것이다. 다만 기도찰이 증명하는 것은 천수의 완공이고, 성곽 전체와 성하 도시가 언제 다 갖춰졌는지까지 알려 주지는 않는다.
7-4. 1611년 6월, 그리고 22년 뒤
게이초 16년(1611) 6월 17일, 요시하루는 새로 옮겨 온 마츠에에서 죽었다. 향년 69. 사인을 적은 기록은 확인하지 못했다. 법명은 슌코인 과거장 기준으로 “法雲院殿松庭世栢大居士”라고 전한다(정확한 일본어 발음은 불명이다.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前楓”이 더 붙은 표기가 실려 있다).33 묘소도 한 곳으로 정할 수 없다. 야스기시 히로세초의 간쿠라지(巌倉寺)에 요시하루의 묘라고 전하는 오륜탑이 있고, 교토 슌코인과 고야산 오쿠노인에도 호리오 가문의 석탑이 있다. 고야산의 요시하루 탑 정면에는 “게이초 12년(1607) 4월”과 요시하루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마츠에시 조사보고서는 이 탑을 요시하루가 생전에 미리 세운 역수탑(逆修塔, 살아 있을 때 자신의 공양을 미리 올리는 탑)으로 본다. 세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들 타다우지가 죽고 3년이 지났고 요시하루의 어머니가 4월 6일에 죽은 무렵이다. 마츠에시 조사 칼럼이 요시하루의 묘소를 “의문”이라는 제목으로 다룰 만큼 정리되지 않은 문제다. 흔히 요시하루의 묘로 소개되는 마츠에의 엔조지(圓成寺)는 요시하루가 세운 절이지만, 절 이름은 손자 타다하루의 법명에서 왔고 경내의 오륜탑도 타다하루의 것이다.33
요시하루가 후견한 타다하루는 성인이 돼 마츠에를 다스렸지만, 간에이 10년(1633) 9월 서른다섯 살로 아들 없이 죽었다. 죽기 직전 사위 이시카와 카도카츠를 중계 양자로 세워 외손에게 가문을 잇게 해 달라고 막부에 청했지만 허락받지 못했고, 호리오 가문은 무사단절(無嗣断絶)로 영지를 잃었다. 이듬해 교고쿠 타다타카가 이즈모·오키 26만 석으로 들어왔고, 1638년에는 마츠다이라 나오마사가 들어와 이후 230년 동안 마츠다이라 가문이 마츠에를 다스렸다.34 요시하루가 죽고 22년 만의 일이었다.
호리오의 이름이 마츠에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호리오 고키』를 남긴 종제 호리오 다지마는 마츠다이라 가문에 출사했고, 그 자손은 마츠에번의 번사로 메이지 유신까지 이어졌다.35 교토의 보리사 슌간인은 1636년 타다하루의 딸이 시집간 이시카와 가문이 후원자가 되면서 이름을 슌코인으로 바꿨다.
출처
1차·준1차 사료와 금석문 (이번 조사에서는 모두 공공기관 해설·사전·검색 결과를 통해 확인했다)
- 사이단바시 기보시 명문 — 겐나 8년(1622), 나고야시박물관 소장(나고야시 지정 문화재)
- 마츠에성 천수 기도찰 2매 — 게이초 16년(1611) 정월, 마츠에역사관 소장(국보 마츠에성 천수의 부 지정)
- 게이초 5년(1600) 10월 30일자 서장(“堀信濃殿”), 게이초 6년(1601) 호리오 타다우지 지행목록
- 게이초 4년(1599) 2월 5일자 이이 나오마사 감사장 — 원문·소장처 미확인
- 게이초 5년(1600) 5월 7일자 연서장(『古今消息集』 등 수록, 진위 논란)
- 『堀尾古記』 — 요시하루의 종제 호리오 다지마가 남긴 기록(일본어 위키백과 인용을 통해 확인)
- 『言経卿記』 — 야마시나 토키츠네의 일기(도쿄대학 사료편찬소 해제를 통해 확인)
편찬물·역사소설 (성립 시기 명시)
- 小瀬甫庵 『太閤記』 — 간에이 2년(1625) 서문, 이듬해 간행. 권13·권18·권20(Wikisource 史籍集覧本, 검색 결과를 통해 확인)
- 山鹿素行 『武家事紀』 — 1673년
- 新井白石 『藩翰譜』 — 1702년 무렵
- 『絵本太閤記』 — 1797–1802년
- 『寛政重修諸家譜』 — 1812년 완성
- 『徳川実紀』 — 1809–1843년 막부 편찬
- 『当代記』 — 에도 초기(치류 사건 서장 기사는 가리야시 해설을 통해 확인, 원문 미확인)
현대 연구·연구자 견해
- 宮本義己, 高橋陽介, 谷口克広의 산추로 관련 견해 — 일본어 위키백과 「三中老」 항목의 요약을 통해 확인
- 渡邊大門, 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 기고 「豊臣政権に三中老が存在し、徳川家康の会津征討を止めさせようとしたのは事実か」
- 稲田信・内田文恵・居石由樹子, 「再発見の祈祷札 松江城天守創建に関わる祈祷札について」, 『松江城研究』 2
- 西尾克己, 松江市 調査コラム 第27回 「堀尾吉晴の墓所と石塔についての疑問」 및 자료 「堀尾吉晴(後半期)の年譜」
- 松江市 調査コラム 第1回·第26回·第71回
- 松江市史編集委員会 編, 『마츠에시사 통사편3 근세I(松江市史 通史編3 近世I)』, 松江市, 2019 (견본 PDF를 통해 확인)
- 追手門学院大学附属図書館 『信長記』 해제
- 시마네대학 부속도서관 「堀尾氏関係史料目録」, 松江市 『堀尾氏発給文書及び系譜集―慶長五年以前―』
공식·표준 참고자료
- 名古屋市 熱田区 「堀尾金助と裁断橋」, 名古屋市博物館 「裁断橋擬宝珠」, 文化遺産オンライン
- 国宝松江城 공식 사이트 「歴史・藩主」·「逸話」, 松江市 「国宝指定について」
- 浜松市 「浜松城の石垣」, 浜松市博物館 특별전 「浜松城主 堀尾吉晴」 안내
- 刈谷市 「水野勝成の生涯」, 知立観光ナビ 「加賀野井弥八郎秀望墓」·「追腹塚」
- 大口町 「堀尾吉晴邸趾」, 美浜町 「国吉城址」
- しまね観光ナビ 「円成寺」, 京都市 관광 「春光院」
- 松江観光協会·마츠에 무샤교레츠 공식 사이트
- 国立国会図書館 レファレンス協同データベース(미키 합전의 호리오 모스케 관련 답변)
- 코토방크(kotobank.jp) 「堀尾吉晴」·「堀尾忠氏」·「堀尾忠晴」·「加賀井重望」·「三中老」·「武家事紀」·「京極忠高」
- 일본어 위키백과 「堀尾吉晴」·「堀尾忠氏」·「堀尾忠晴」·「堀尾金助」·「春光院」·「三中老」·「小瀬甫庵」·「加賀井重望」·「松江藩」·「藩翰譜」·「太閤記」·「白峰旬」·「山崎の戦い」·「清水宗治」·「石川廉勝」 항목
- 한국어 위키백과 「호리오 요시하루」
- 立命館大学 アート・リサーチセンター 「絵本太閤記と浮世絵」
- Historist 「小瀬甫庵」, Weblio 「堀尾吉晴」·「堀尾忠晴」
전문 사이트·대중 매체 (신뢰도 C–D, 개별 각주에 표시)
- サライ.jp(小学館), WEB歴史街道(PHP), 中国新聞デジタル, 文化遺産の世界, 日立ソリューションズ 「未来へのアクション」 松江城 기사, 刀剣ワールド, 刀剣コレクション桑名, じゃらん, 出世の街 浜松, rekishi-miryoku, 4travel, 気ままに江戸, 戦国史跡
확인하지 못한 것
- 이번 조사는 작업 환경의 네트워크 제한 때문에 위의 웹 자료 대부분을 검색 결과 요약으로만 확인했고, 원문 페이지와 사료 활자본을 직접 열람하지 못했다. 인용한 『다이코키』 문구와 연구자 견해는 원문 대조가 필요하다.
- 호리오 요시하루를 단독으로 다룬 학술 연구서는 찾지 못했다. 연구 성과의 중심은 마츠에시·야스기시·오구치초의 「堀尾吉晴公共同研究会」(2017–2021) 보고서와 마츠에역사관 특별전 도록 『戦国の世を馳せた武将 堀尾吉晴』(ハーベスト出版, 2021)이며, 두 자료 모두 열람하지 못했다.
- 이나바야마성 길안내 일화가 호안 『다이코키』나 『간세이 조슈쇼카후』에 실려 있는지. 립쓰메이칸대 해설 요약에는 『에혼 다이코키』가 부친을 호리오 타다에몬(忠右衛門)으로 적는다고 되어 있으나 원문은 대조하지 못했다.
- 이이 나오마사 감사장(1599년 2월 5일)의 원문과 소장처, 에치젠 후추 5만 석의 법적 성격과 세키가하라 이후의 처리.
- 치류 사건의 가장 이른 기록과 “열일곱 군데 창상”의 출전.
- 타다우지 급사에 얽힌 가모스 신사 전설과 성터를 둘러싼 부자 대립 일화의 출전.
- 요시하루의 사인. 법명의 한글 독음(어느 자료에도 후리가나가 없다).
- 한국어로 된 호리오 요시하루 단독 연구서·번역서는 찾지 못했다.
Foot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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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토방크 「堀尾吉晴」; 大口町 「堀尾吉晴邸趾」; 일본어 위키백과 「堀尾吉晴」(검색 결과 요약을 통해 확인). 야마우치 모리토요와 나란히 서명한 문서가 있다는 서술은 문서명·소장처를 특정하지 못해 본문에서 뺐다. 오구치초 공식 페이지에는 저택 터의 지정 구분이 적혀 있지 않다. ↩ ↩2 ↩3
-
小瀬甫庵 『太閤記』 巻十八 「堀尾帯刀先生吉晴伝」·「仏茂助名にしおはて還て殺人事」(Wikisource, 史籍集覧 1900년판 저본). 인용 문구는 Wikisource 史籍集覧본 원문과 대조했다. 성립 연도는 일본어 위키백과 「太閤記」·Weblio 「小瀬甫庵の太閤記」. ↩ ↩2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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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命館大学 アート・リサーチセンター 「絵本太閤記と浮世絵」 B1-09 「堀尾茂助勇力」; 刀剣コレクション桑名 「稲葉山城の戦いが描かれた浮世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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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江市 調査コラム 第27回 자료 「堀尾吉晴(後半期)の年譜」(西尾克己); 코토방크 「堀尾吉晴」; 浜松市博物館 특별전 「浜松城主 堀尾吉晴」 안내; 일본어 위키백과 「堀尾吉晴」. 1585년 사와야마 4만 석은 『마츠에시사 통사편3(松江市史 通史編3)』과 石井悠 『松江藩』(2012) 21쪽을 근거로 한다. 마츠에시 연보 자료는 1587년부터 시작해 1585년 항목이 없다. ↩ ↩2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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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小瀬甫庵」; Historist 「小瀬甫庵」; 日立ソリューションズ 「未来へのアクション」 마츠에성 편(축성 설계 관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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追手門学院大学附属図書館 『信長記』 해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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島根大学附属図書館 「堀尾氏関係史料目録」; 松江市 『堀尾氏発給文書及び系譜集―慶長五年以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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国立国会図書館 レファレンス協同データベース 「三木(兵庫県)の合戦時に登場した『堀尾茂助』の詳細が知りたい」(『国史大辞典』·『寛政重修諸家譜』 제11책 인용); 刀剣ワールド 「三木合戦古戦場」; 일본어 위키백과 「山崎の戦い」·「清水宗治」; サライ.jp 「劇中ではスルーされてしまった天下分け目の”天王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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サライ.jp 「徳川家康と石田三成の仲介役を果たし、国宝・松江城を築く|三英傑に仕え『全国転勤』した武将とゆかりの城【堀尾吉晴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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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토방크 「堀尾吉晴」; 浜松市博物館 특별전 안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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浜松市 「浜松城の石垣」; 出世の街 浜松 「浜松城跡の発掘調査」; サライ.jp 위 기사; 浜松情報BOOK 「堀尾吉晴」(경내 벌채 금지·염전 과세 언급). 마츠에성 천수가 하마마츠성 천수를 참고했다는 견해는 출처 페이지를 특정하지 못했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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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古屋市博物館 「裁断橋擬宝珠」(“요시하루의 일족(장자, 종형제 등의 설이 있으나 불상)”); 名古屋市 熱田区 「堀尾金助と裁断橋」; 일본어 위키백과 「堀尾金助」.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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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春光院」; 京都市 관광 「春光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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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古屋市博物館 「裁断橋擬宝珠」; 文化遺産オンライン 「裁断橋擬宝珠」; 名古屋市 熱田区 「堀尾金助と裁断橋」. 명문은 해설에 실린 가나 표기를 옮겼으며, 조사 표기에 자료마다 작은 차이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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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위키백과 「호리오 요시하루」; 코토방크 「三中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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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瀬甫庵 『太閤記』 巻十三·巻二十(Wikisource 원문 확인); 코토방크 「武家事紀」; 일본어 위키백과 「三中老」.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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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三中老」(宮本義己·高橋陽介·谷口克広의 견해 요약); 渡邊大門, 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 「豊臣政権に三中老が存在し、徳川家康の会津征討を止めさせようとしたのは事実か」.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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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堀尾吉晴」; 東京大学史料編纂所 『大日本古記録 言経卿記』 해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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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堀尾吉晴」(석고 서술의 근거는 石井悠 『松江藩』 22쪽); 松江市 調査コラム 第27回 자료 「堀尾吉晴(後半期)の年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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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堀尾吉晴」; 刈谷市 「水野勝成の生涯(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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刈谷市 「水野勝成の生涯(2)」; 코토방크 「加賀井重望」(『日本人名大辞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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刈谷市 「水野勝成の生涯(2)」; 『徳川実紀』 「東照宮御実紀」 巻四(Wikisource 원문 확인); 『武者物語』는 일본어 위키백과 「加賀井重望」의 인용을 통해 확인; 知立観光ナビ 「加賀野井弥八郎秀望墓」·「追腹塚」; 코토방크 「加賀井重望」; 일본어 위키백과 「堀尾吉晴」·「加賀井重望」·「春光院」; 刀剣ワールド 「堀尾吉晴」.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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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歴史街道 「堀尾忠氏~小山評定での山内一豊『パクリ事件』」; 일본어 위키백과 「藩翰譜」·「白峰旬」; 気ままに江戸 「どうする家康」 연재(야마우치 측 기록 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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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松江藩」·「堀尾忠氏」(게이초 5년 10월 30일자 서장 인용); 松江市 보도자료 「新発見!堀尾忠氏知行目録」(2017); 松江市 調査コラム 第71回 「松江藩初代藩主・堀尾忠氏の発給文書について」; 国宝松江城 공식 사이트 「歴史・藩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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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에시사 통사편3 근세I(松江市史 通史編3 近世I)』 견본 PDF 「第一節 松江藩の成立と堀尾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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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立ソリューションズ 「松江城」 기사; 歴史探訪ナビ 등 해설 사이트. 국보 마츠에성 공식 사이트 「逸話」 페이지에는 이 이야기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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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堀尾忠氏」(『堀尾古記』 인용); 코토방크 「堀尾忠氏」; 国宝松江城 공식 사이트 「逸話」(얼굴빛이 창백했다는 변형); 松江市 調査コラム 第1回(호리오 다지마).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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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lio 「堀尾忠晴」; 国宝松江城 공식 사이트 「逸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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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立ソリューションズ 「未来へのアクション」 마츠에성 편; 일본어 위키백과 「小瀬甫庵」. 국보 마츠에성 공식 사이트 「歴史・藩主」 페이지에는 호안 언급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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しまね観光ナビ 「円成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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刀剣ワールド 「堀尾吉晴」(세 설의 병존); 일본어 위키백과 「松江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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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国新聞デジタル(2015-05-16); 文化遺産オンライン 「松江城天守祈祷札」; 文化遺産の世界 「松江城天守が国宝に指定されるまでの歩み」; 松江市 「国宝指定について」; 稲田信・内田文恵・居石由樹子, 『松江城研究』 2.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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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江市 『近世大名・堀尾吉晴とその一族の石塔』(고야산 역수탑 명문); 松江市歴史叢書 수록 논문 「春光院に所在する来待石製石塔群について」(법명, 시마네대 리포지터리); 코토방크 「堀尾吉晴」; 일본어 위키백과 「堀尾吉晴」; じゃらん 「堀尾吉晴の墓(巌倉寺)」; 松江市 調査コラム 第26回·第27回; しまね観光ナビ 「円成寺」.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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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토방크 「堀尾忠晴」·「京極忠高」; 일본어 위키백과 「堀尾忠晴」·「石川廉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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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江市 調査コラム 第1回 「堀尾但馬の子孫・堀尾方善の後半生」; 일본어 위키백과 「春光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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