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정갑을 입고 전립을 쓴 조선 무장이 무너진 성벽과 목책 앞에서 적진 방향을 바라보는 모습을 그린 유화풍 일러스트

황진(黃進, 1550–1593) — 황희 5대손, 진주성서 전사한 맹장

1593년 6월, 진주성. 성벽 아래 잠복해 있던 왜군 저격병 한 명이 위를 향해 철환을 쏘았다. 총알은 나무 방패를 뚫고 지나가 성벽을 지키던 장수의 이마에 박혔다. 충청도병마절도사 황진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조선왕조실록은 이 장면을 이렇게 적었다. “황진은 용략이 여러 장수 가운데 으뜸이었으므로 성안에서 그를 의지했었는데, 그가 죽자 성안이 흉흉해지며 두려워했다.” 다음 날 성은 무너졌다.

황진은 조선 초기 세종을 보좌한 명재상 황희의 5대손이다. 그런 그가 무과를 택해 전장을 떠돌다 왜 하필 진주성에서 생을 마치게 됐는지, 그의 생애를 따라가 보자.

재상의 5대손, 칼을 잡다

황진은 1550년 전라도 남원 주생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장수, 자는 명보다. 황진이 황희의 5대손이라는 이야기는 실록에 직접 나온다.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아버지 황윤공, 조부 황개, 증조부 황사효로 이어지는데, 이 황사효가 1477년 문과에 급제하며 남긴 방목에 아버지 황치신, 할아버지 황희, 증조부 황군서가 그대로 적혀 있다. 황치신은 황희의 맏아들이니, 황진은 황희의 장남 계통인 셈이다.

가문의 관력은 세대를 내려오며 눈에 띄게 낮아졌다. 황희의 아들 대만 해도 맏아들 황치신이 호조판서를, 막내 황수신이 1467년 영의정을 지냈다. 손자 황사효는 문과에 급제해 사헌부 지평·장령·집의 같은 청요직을 거쳤지만 최종 관직은 동지중추부사(종2품)에 그쳤다. 증손 황개에 이르면 아예 문반이 아니라 무반 명예직인 부사직(副司直)이고, 황진의 부친 황윤공은 뚜렷한 관력이 확인되지 않는다. 그가 받은 좌의정 직함도 실제 관력이 아니라, 아들 황진이 순절한 공을 기려 사후에 추증된 것이다.

1576년, 27세의 황진은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이 됐다. 황희의 후손이니 당연히 문반일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이미 조부 대부터 이 집안은 문반이라 보기 힘들었다. 실록은 그를 아예 “무인으로, 글을 알지 못했다”고 적었다. 이후 거산도찰방과 함경도 안원보 권관을 거쳐 다시 선전관에 재임했고, 1590년 무렵에는 통신사행에 참여해 일본에 다녀왔다. 정사는 황윤길이었지만, 부사 김성일과 함께 움직였다고 실록은 기록했다. 일본의 정세를 살피고는 전쟁이 머지않았다고 판단해 사비를 털어 보검 한 쌍을 사 왔고, “머지않아 적이 올 텐데 이 칼을 써야겠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귀국 후에는 제용감주부를 거쳐 동복현감에 임명됐다. 이 시기 그는 틈틈이 병법을 연구했다고 하는데, 이 준비가 몇 년 뒤 실전에서 그대로 쓰이게 된다.

같은 날, 두 개의 전장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황진은 전라도관찰사 이광을 따라 용인에서 왜군과 맞섰으나 패했다. 다만 별동대를 이끌던 그의 부대만은 군사를 온전히 지켜 돌아왔다고 실록은 적었다. 이후 진안과 안덕원에서 적을 격퇴하며 전공을 쌓았고 익산군수와 전라도조방장을 겸하게 됐다.

그해 7월 8일, 전라도를 향해 남하하던 왜군을 막기 위해 완주 웅치와 금산 서쪽 이치에서 거의 동시에 두 개의 전투가 벌어졌다. 황진은 웅치 방어선 1진에서 의병장 황박과 함께 조선군의 후퇴를 지원했고, 정상의 3진을 맡은 김제군수 정담은 포위된 채 물러나기를 권하는 참모들에게 “차라리 적 하나를 죽이고 죽을지언정, 몸을 빼어 달아나 적이 마음대로 몰아치게 하지는 못하겠다”고 말하고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 웅치 전투 자체는 조선군의 퇴각으로 끝났다. 왜군은 이때 전사한 조선군의 시신을 길가에 묻고 무덤 위에 “조선국의 충간의담(忠肝義膽)을 조문한다”는 비문을 세웠다고 실록은 전한다.

권율의 지휘 아래 동복현 군사를 이끌고 이치를 사수하던 황진은 나무에 몸을 의지한 채 활을 쏘아 조총을 막았다. 종일 이어진 교전 끝에 총알에 맞아 기세가 잠시 꺾였지만, 권율이 병사들을 독려해 결국 승리를 거뒀다. 왜군 스스로 조선의 3대 전투 가운데 이치를 최고로 꼽았을 만큼 치열한 싸움이었다. 황진이 총상을 입은 곳은 이 웅치가 아니라 같은 날 벌어진 이치 전투였다. 두 전투가 같은 날 가까운 지역에서 벌어진 탓에 훗날 여러 기록에서 부상을 입게 된 장소가 혼재돼 있는데, 이치 쪽 기록이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두 전투 모두 조선군이 전술적으로는 밀렸지만 퇴각한 병력이 안덕원 전투에서 반격에 성공하면서 왜군은 다시 웅치를 넘어 금산으로 물러났다. 결과적으로 전주는 지켜졌고 전라도는 전쟁 내내 일본군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후방기지로 보급과 구원군의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9일의 진주성 전투

이듬해인 1593년, 황진은 2월 전라병사 선거이와 함께 수원에서 왜군과 맞붙었고, 3월에는 충청도병마절도사에 임명돼 진을 안성으로 옮겼다. 전임자 이옥이 나이 들고 재주가 부족하다는 탄핵을 받아 물러난 자리였는데, 비변사는 “전에 호남에 있으면서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고 명망이 이미 드러났다”며 황진을 천거했다. 그리고 석 달 뒤인 6월, 왜군 대군이 진주성을 재차 노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앞서 1592년 김시민이 지켜낸 진주대첩의 설욕전이었다.

애초 황진은 성 밖에서 지원하는 쪽을 택하려 했다. 충청도 병마절도사인 그가 진주성 수비를 직접 맡을 이유는 없으니 밖에서 싸우는 게 낫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창의사 김천일이 그를 붙잡았다. 황진은 “이미 창의사와 공약을 했으니 저버릴 수 없다”며 성으로 들어가는 쪽을 택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병력 700명을 이끌고 김천일(300명), 병마절도사 최경회(500명)와 함께 성으로 들어가 9일 동안 버텼다. 성안 지휘 계통은 매끄럽지 않았다. 관군과 의병이 뒤섞인 지휘부 사이에는 “주객 간에 어색한 점이 많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 그런 가운데서도 황진은 옷과 갓을 벗고 직접 돌을 짊어져 날라 동문 밖에 대응 진지를 하룻밤 만에 세웠다. 성 안 사람들이 그 모습에 감격해 눈물을 흘리며 힘을 보탰다고 실록은 전한다. 이렇게 세운 진지에서 화포인 현자총통으로 왜군의 토성을 파괴하며 수성전을 이끌었고, 이 과정에서 적 1천여 명을 살상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시대 화포 현자총통 유물 사진
황진이 진주성에서 사용한 것과 같은 종류의 화포, 현자총통(玄字銃筒).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공공누리 제1유형.

6월 20일 오후, 왜군 200여 명이 처음으로 성 동쪽 아래까지 진격해 접전을 벌였으나 화살에 밀려 물러났다. 22일부터는 왜군이 성 사면을 둘레 5리에 걸쳐 포위하고, 인근 산과 골짜기 곳곳에 병력을 나눠 매복시켜 외부 지원군이 접근하지 못하게 막았다. 대나무로 엮은 높은 사다리에 진흙을 발라 성벽 위를 내려다보며 포를 쏘아댔는데, 실록에 남은 한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이 포화에 하루 100여 명씩 성 안 사람이 죽어 나갔다. 26일에는 왜군이 항복을 권하는 글을 성 안으로 던졌다. “대국의 병사도 항복했는데 너희가 감히 항거하느냐.” 성 안에서는 “우리는 죽을 때까지 싸울 뿐이다. 천병 30만이 지금 너희를 추격해 다 죽이려 한다”고 답서를 보냈고, 왜군은 볼기를 두드리며 “당나라 장수는 이미 다 물러갔다”고 조롱했다.

28일 새벽, 김해부사 이종인이 밤새 지키던 성첩으로 돌아와 보니 서예원이 경계를 소홀히 한 틈에 적이 몰래 성벽을 뚫어 놓아 성이 곧 무너질 지경이었다. 이종인이 크게 노해 질책하는 사이 적이 성 아래로 몰려들었고, 성 안에서는 죽기로 싸워 적 사망자가 매우 많았다. 적장 한 명이 총에 맞아 죽자 나머지 적병이 그 시체를 끌고 물러갔다. 황진이 성 안을 내려다보며 “오늘 싸움에 적 사망자가 천여 명에 이른다”고 말한 바로 그 순간, 성벽 아래 잠복해 있던 적 하나가 위를 향해 철환을 쏘았다. 총알은 나무판을 가로질러 튀어 황진의 왼쪽 이마에 맞았고, 그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 앞서 인용한 것과 같이 실록은 그의 죽음이 성안 사기에 미친 영향에 대해 짧지만 분명하게 기록을 남겼다. “황진은 용략이 여러 장수 가운데 으뜸이었으므로 성안에서 그를 의지했었는데, 그가 죽자 성안이 흉흉해지며 두려워했다.” 그가 살아 있었더라면 성이 하루라도 더 버텼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죽은 다음 날인 29일, 폭우로 무너진 동문 성벽 틈으로 왜군이 개미떼처럼 붙어 올라와 밀려들었고 진주성은 함락됐다. 성이 무너지기 직전 김천일, 고종후, 최경회는 촉석루에서 남강으로 몸을 던져 성과 최후를 함께 했다.

진주성 남강변에 자리한 촉석루 전경
남강 위에 자리한 진주성 촉석루. 김천일 등이 성 함락 직전 최후를 맞은 곳이다. Wikimedia Commons, CC BY-SA.

진주성 전투, 그 후

황진은 사후 우찬성에 추증되고 시호 무민을 받았다. 처음 조정은 김천일에게만 그 등급을 주려 했는데, 선조가 직접 “이번 진주성 수성에서는 황진이 최고였다. 온 성 사람이 그에게 의지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며 황진에게도 같은 벼슬을 내리도록 했다. 진주 창렬사에 배향됐고 고향 남원에도 그를 모신 사당이 있다. 황진의 손자 황위는 훗날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다고 전한다.

황진이 배향된 진주 창렬사 경내 전경
황진이 김천일·최경회 등과 함께 배향된 진주 창렬사.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그와 함께 성에서 전사한 김해부사 이종인은 젊어서부터 황진과 가까운 사이였다. 실록은 둘이 “의리와 열정으로 서로를 인정하며 생사를 함께하기로 약속했는데, 마침내 그 뜻대로 됐다”고 적었다. 선조는 몇 달 뒤에도 황진을 다시 떠올렸다. 그가 생전에 함안성의 지형을 직접 지도로 그려 “이 성은 반드시 함락될 것”이라 미리 경고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전해 듣고는 “황진이 함안은 지킬 수 없다고 했다는데, 이 사람이 아깝다”고 말했다.

430여 년이 지난 2024년, 전북에서는 “무민공 황진장군 학술심포지엄”이 열렸다. 전북대 하태규 교수가 “임진왜란 호남 방어선과 웅치·이치, 황진장군”을, 해군교육사령부 이상훈이 “진주성 전투에서의 황진 장군의 역할과 의미”를 발표하며 그의 행적을 다시 짚었다. 2025년 10월에는 국회에서도 그를 재조명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지역에서는 그를 “이순신 장군도 인정한 맹장”이라 부르며 잊혀 있던 이름을 다시 불러내는 중이다.


출처 및 사실 확인

이 글은 사실 확인을 여러 차례 거쳤다. 아래는 어떤 서술이 어느 수준의 자료에 근거하는지 신뢰도별로 정리한 것이다. 실록 원문 전문은 별도로 정리해 두었다 → 황진(黃進) 실록 원문 자료집

공식·1차 자료로 확인됨

2차 자료 수준 통설 (1차 사료 미확인)

미확정·유보 항목

  • 이치 전투의 실록 표기 — 졸기는 “호치(湖峙)“로 적는다. 다른 자료로 볼 때 이치를 가리키는 이표기로 보이나 완전히 확정하지는 못했다.
  • 남원 사당의 정확한 명칭 — 문헌마다 정충사(旌忠祠)와 민충사(愍忠祠)로 갈린다. 본문에서는 명칭을 특정하지 않았다.
  • 선무공신 등급 — 선조실록 181권에 “선무공신 부류로 정훈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어 책록 자체는 확인되나, 정식 등급(1~3등)까지는 확정하지 못했다.
  • 황사효의 최종 관직 — 문과방목은 동지중추부사(종2품), 백과사전 기술은 사헌부 지평·장령·집의까지. 문중 계열 자료의 예조판서·대사헌설은 공신력 있는 출처에서 확인되지 않아 채택하지 않았다.

검증 후 채택하지 않은 서술

  • “충청병사 황진이 죽산산성에서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격퇴했다” — 일부 온라인 자료가 실록 기사로 인용하나, 해당 날짜 원문을 직접 조회한 결과 그런 기사 자체가 없다.
  • “구갑차(귀갑차)를 앞세운 왜군이 무너진 성벽 틈으로 밀려들었다” — 실록 원문의 함락 당일 서술에는 수레가 등장하지 않는다. 27일에 나오는 장갑 수레는 이종인이 불태워 격퇴한 별개 장면이다.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1호 “황진초상” — 한글 표기가 같을 뿐 한자가 다른 동명이인(黃縉/黃璡 계열, 황성원의 아들)의 초상이라 이 글에서는 쓰지 않았다. 임진왜란의 황진(黃進)은 전하는 초상이 없다.

현대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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