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정갑을 입고 전립을 쓴 조선 무장이 무너진 성벽과 목책 앞에서 적진 방향을 바라보는 모습을 그린 유화풍 일러스트

황진(黃進) 실록 원문 자료집 — 조선왕조실록 관련 사료 전문

이 글은 황진(1550–1593) — 황희 5대손, 진주성서 전사한 맹장의 보조 자료집이다. 조선왕조실록 사이트에서 “황진”을 검색하면 164건이 나오는데, 이 가운데 상당수는 동명이인이다. 특히 의주목사를 지낸 황진(黃璡)이 한글 표기만 같을 뿐 완전히 다른 한자를 쓰는 별개의 인물로, 검색 결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이 글에서는 한자 黃進(우리가 다루는 진주성의 그 황진)으로 특정되는 기사만 추려 원문과 함께 정리했다. 시기상 명백히 다른 인물로 판단되는 항목(예: 황진 사후인 1594년에 등장하는 첨지중추부사 황진, 함경도 察訪 황진)은 제외했다.

번역은 원문을 바탕으로 한 필자의 작업역이며, 한국고전번역원의 공식 국역이 아니다. 정확한 대조가 필요하면 각 항목의 원문 링크를 직접 확인하기 바란다.

임명과 초기 경력

동복현감 제수 — 그가 “무인, 불식문자”였다는 기록

선조수정실록 25권, 선조 24년(1591) 12월 1일 계사 원문: 李廷馣爲大司諫, 以黃進爲同福縣監。進, 武人, 不識文字, 而有勇略。從金誠一入日本還, 知倭變將起, 每衙罷便習騎射, 逐日不懈。 번역: 이정암을 대사간으로, 황진을 동복현감으로 삼았다. 황진은 무인으로 글을 알지 못했으나 용맹과 지략이 있었다. 김성일을 따라 일본에 다녀온 뒤 왜변이 곧 일어날 것을 알고, 관아 일이 끝날 때마다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기사는 두 가지를 정정해야 할 근거가 된다. 첫째, “무인, 불식문자”(武人, 정규 학문을 익히지 못한 무인)라는 표현은 본문에서 이미 다룬 “가문이 조부 대부터 무반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는 서술을 실록 원문으로 뒷받침한다. 둘째, 통신사행 동행자가 정사 황윤길이 아니라 부사 김성일로 명시되어 있다. 지금까지 참고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계열 자료는 “통신사 황윤길을 수행했다”고 썼는데, 이 실록 원문과 배치된다.

충청조방장에서 충청병사로 — 구체적 임명 경위

선조실록 35권, 선조 26년(1593) 2월 30일 을묘 원문(일부): 忠淸助防將黃進, 前在湖南, 累立戰功, 新陞堂上, 聲望已著, 此人似當。 敢啓。 上曰: “李沃遞差, 黃進除授。” 번역: 비변사가 아뢰기를 “충청조방장 황진은 전에 호남에 있으면서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고 새로 당상관에 올라 명망이 이미 드러났으니 이 사람이 적합할 듯합니다”라 하니, 임금이 “이옥은 체차하고 황진을 제수하라”고 했다.

전임 충청병사 이옥(李沃)이 노쇠하고 재주가 부족하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교체가 결정됐고, 그 후임으로 황진이 천거된 경위를 보여준다.

익산군수·조방장 승진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 8월 1일 원문: 以同福縣監黃進陞益山郡守助防將, 加通政階, 賞梨峙之功也。 번역: 동복현감 황진을 익산군수 겸 조방장으로 올리고 통정대부에 가자했으니, 이치의 공을 포상한 것이다.

영남 추격전 배치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1593) 5월 1일 원문: 都元帥金命元、巡邊使李薲、全羅兵使宣居怡追賊, 下嶺南; 忠淸兵使黃進、全羅防禦使李福男, 各以其兵會, 權慄領新兵, 踰雲峯, 赴嶺南, 皆列屯昌寧、宜寧等邑, 以臨賊境。 번역: 도원수 김명원, 순변사 이빈, 전라병사 선거이가 적을 추격해 영남으로 내려갔고, 충청병사 황진과 전라방어사 이복남이 각각 병력을 이끌고 모였으며, 권율은 신병을 이끌고 운봉을 넘어 영남으로 가서 모두 창녕·의령 등지에 진을 벌여 적의 경내에 다다랐다.

웅치·이치 전투 (1592)

전라도 방어선 배치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 6월 1일 원문(일부): 分布防禦使郭嶸、同福縣監黃進、全州義兵將黃璞、羅州判官李福男、金堤郡守鄭湛于熊峴、梨峴等關隘, 以防賊入。 번역: 방어사 곽영, 동복현감 황진, 전주의병장 황박, 나주판관 이복남, 김제군수 정담을 웅현·이현 등 요충지에 나누어 배치해 적의 진입을 막게 했다.

웅치·이치 전투의 전개와 결과 — 정담의 최후, 황진의 방어, 그리고 왜군의 평가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 7월 1일 원문(발췌): 全羅節制使權慄遣兵敗倭賊于熊峙, 金堤郡守鄭湛死之。倭兵又犯梨峙, 同福縣監黃進敗之。 …鄭湛自初力戰, 親射殺紅旗下白馬賊將, 賊披靡而郤。旣而羅州軍退, 湛孤軍被圍, 將佐勸湛退陣, 湛曰: “寧殺一賊而死, 不忍奉身而走, 使賊長驅也。” 堅立不動, 發矢必中。俄而賊兵四圍, 兵皆散逸, 湛力詘死之。 …倭將又擧大軍犯梨峙, 權慄督黃進提縣兵, 與偏裨魏大奇、孔時億等, 據峴大戰。賊攀厓而上, 進依樹禦丸, 射矢如破, 發無不中。終日交戰, 賊兵大敗, 伏尸流血, 草木爲之腥臭。是日進中丸少沮, 慄督將士繼之, 故得捷。倭中稱朝鮮三大戰, 而梨峙爲最。李福男、黃進由此著名。賊聚熊峙陣亡之尸埋路邊, 作數大塚, 書其上曰: “弔朝鮮國忠肝義膽。”

번역: 전라절제사 권율이 병사를 보내 왜적을 웅치에서 물리쳤는데 김제군수 정담이 이 싸움에서 전사했다. 왜병이 또 이치를 침범하니 동복현감 황진이 이를 물리쳤다. …정담은 처음부터 힘써 싸워 직접 활로 홍기 아래 백마 탄 적장을 쏘아 죽였고 적이 물러났다. 이윽고 나주군이 물러나 정담의 고립된 군대가 포위되자 장수와 참모들이 정담에게 물러나기를 권했는데, 정담이 말하기를 “차라리 적 하나를 죽이고 죽을지언정, 몸을 빼어 달아나 적이 마음대로 몰아치게 하지는 못하겠다” 하고 굳게 서서 물러나지 않고 활을 쏘아 반드시 명중시켰다. 이윽고 적병이 사방을 포위하니 병사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나고, 정담은 힘이 다해 전사했다. …왜장이 다시 대군을 동원해 이치를 침범하니, 권율이 황진을 독려해 현의 병사를 이끌고 편비 위대기·공시억 등과 함께 고개를 근거로 크게 싸웠다. 적이 벼랑을 타고 오르자 황진은 나무에 의지해 탄환을 막으며 활을 쏘아 명중시키지 않는 것이 없었다. 종일 교전해 적병이 크게 패했고, 시체가 널브러지고 피가 흘러 초목이 그 비린내로 물들었다. 이날 황진이 총알에 맞아 기세가 조금 꺾였으나 권율이 장병을 독려해 이어가게 하여 승리를 거뒀다. 왜인들은 조선의 3대 전투를 논하며 이치를 최고로 쳤다. 이복남과 황진은 이로써 이름을 떨쳤다. 적은 웅치에서 전사한 시체들을 길가에 묻고 큰 무덤 몇 개를 만들어 그 위에 **“조선국의 충간의담(忠肝義膽)을 조문한다”**고 써놓았다.

진주성 전투 배경과 방어 준비 (1593년 6월)

최경회의 보고 — 심유경의 협상 통보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1593) 7월 10일 원문(일부): 慶尙右兵使崔慶會馳啓曰: “與黃進等退守晋州, 權慄等退守宜寧矣。…” 번역: 경상우병사 최경회가 치계하기를 “황진 등과 함께 진주로 물러나 지키고, 권율 등은 의령으로 물러나 지켰습니다…”라고 하며 심유경이 전한 고니시 유키나가(平行長)의 협상 관련 내용을 보고했다.

김천일의 방어 준비 보고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1593) 7월 10일 원문(일부): 十五日, 全羅兵使宣居怡、助防將李繼鄭、忠淸兵使黃進、助防將鄭名世、京畿助防將洪季男、慶尙右兵使崔慶會、復讐義將高從厚等, 相繼馳到。 …臣與崔慶會、黃進等, 艱難收合, 而竝不過三千餘名。 번역: 창의사 김천일이 치계하기를, 15일에 전라병사 선거이, 조방장 이계정, 충청병사 황진, 조방장 정명세, 경기조방장 홍계남, 경상우병사 최경회, 복수의장 고종후 등이 잇달아 달려와 도착했다고 전했다. “신이 최경회·황진 등과 함께 어렵사리 병력을 수합했으나 모두 3천여 명에 불과합니다”라며 병력 부족을 우려했다.

배경과 지휘 체계 정리 — 순성장 임명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1593) 6월 1일, 3번째 기사 원문(일부): 金千鎰等料撿城中倉穀甚富, 謂諸將曰: “此足以共守矣。” 卽日分軍。 金千鎰、崔慶會爲都節制, 千鎰統義兵, 慶會統官兵, 黃進爲巡城將, 諸道官義兵畫地分守, 戒嚴待變。 번역: 김천일 등이 성 안의 창고 곡식이 매우 넉넉함을 헤아려 보고 여러 장수에게 “이 정도면 함께 지킬 만하다”고 말하고, 그날로 군을 나누었다. 김천일과 최경회를 도절제로, 김천일은 의병을, 최경회는 관군을 통솔하게 하고, 황진을 순성장(巡城將)으로 삼아 각 도의 관군·의병이 구역을 나누어 지키며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곽재우가 “차라리 성 밖에서 지원병이 되겠다”며 입성을 거부한 일화도 이 기사에 함께 나온다.

진주성 함락의 경과 — 세 가지 버전

같은 사건에 대해 실록은 최소 세 개의 서로 다른 기록을 남겼다: ①탈출한 생존자의 증언을 옮긴 보고, ②선전관의 현지 조사 보고, ③사관이 종합 편찬한 정리본(수정실록). 세부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핵심 사실(28일 황진 전사, 29일 함락)은 세 기록 모두 일치한다.

① 생존자 인발의 증언 (황해방어사 이시언 경유 보고)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1593) 7월 16일, 4번째 기사 원문(발췌): 自二十二日至二十八日, 倭賊圍城四面, 其廣至於五里許, 散遣餘兵, …四隣各官高山深谷要害處, 彌漫屯聚設伏, 使我軍彼此阻隔, 不得外援。又以竹木, 多作高梯, 塗以泥土, 俯壓城內, 放砲其上, 注丸如雨, 城中逢丸致死者, 日至百餘人。**兵使黃進, 二十八日, 額上中丸卽死。**二十九日午後, 擧陣迫城下, 一時陷城, 城中血戰不勝。 번역: 22일부터 28일까지 왜적이 성 사면을 둘레 5리에 걸쳐 포위하고, 나머지 병력을 나누어 보내 인근 고을의 험한 산과 깊은 골짜기 요충지마다 매복시켜 아군이 서로 막혀 외부 지원을 받지 못하게 했다. 또 대나무로 높은 사다리를 여럿 만들어 진흙을 바른 뒤 성 안을 내려다보며 포를 쏘아, 탄환이 비처럼 쏟아지니 성 안에서 탄환에 맞아 죽는 자가 하루 100여 명에 이르렀다. 병사 황진은 28일 이마에 탄환을 맞고 즉사했다. 29일 오후 왜적의 모든 진이 성 밑으로 다가와 일시에 성을 함락했고, 성 안에서는 혈전을 벌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증언자 인발 본인이 신북문을 지키다 화살이 떨어져 성 밖으로 뛰어내려 시체 더미에 숨었다가 밤에 몰래 빠져나왔다는 탈출담으로 이어진다.

② 날짜별 상세 경과 (같은 날 5번째 기사)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1593) 7월 16일, 5번째 기사

가장 상세한 기록이다. 요약하면:

  • 6월 24일: 창의사 김천일(병력 300명), 충청병사 황진(700명), 경상우병사 최경회(500명), 의병복수장 고종후(400명), 부장 장윤(300명) 등이 속속 입성. 앞서 6월 19일에는 전라병사 선거이·홍계남이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물러나 지키자”고 했으나 김천일이 반대해 막았고, 선거이·홍계남은 결국 성 밖 운봉에 진을 쳤다.
  • 6월 21일: 왜군 기병 200여 명이 동북산에 출몰.
  • 6월 22일: 왜군 대군 도착, 2대로 나뉘어 진을 침. 첫 교전에서 화살로 30여 명 명중, 왜군 격퇴. 초경·2경·3경까지 이어진 야간 공방.
  • 6월 23일: 낮 3전3퇴, 밤 4전4퇴.
  • 6월 25일: 왜군이 동문 밖에 흙을 채워 언덕(토산)을 쌓고 그 위에 흙집을 지어 성 안을 내려다보며 포격. 황진도 성 안에 맞서는 높은 언덕을 쌓았는데, 황혼부터 밤새 옷과 갓을 벗고 직접 돌을 짊어져 날랐다. 성 안 남녀가 감격해 눈물을 흘리며 힘을 다해 도와 하룻밤 만에 완성했다. 현자총통으로 적의 토굴을 명중시켜 부수니 적이 흩어졌다.
  • 6월 26일: 왜군이 나무궤에 생가죽을 씌워 각자 지고 성을 부수려 했으나 성 안에서 큰 돌을 굴려 막음. 왜군이 동문 밖에 판옥을 세우고 불을 놓아 성내 초가가 불탐. 목사 서예원이 겁먹어 쓰러지자 김천일이 장윤을 가목사로 삼음. 폭우로 활과 화살이 풀어지고 병력이 지친 상황에서 왜군이 항복을 권유하는 글을 던졌다: “대국의 병사도 항복했는데 너희가 감히 항거하느냐.” 성 안에서는 답서로 “우리는 죽을 때까지 싸울 뿐이다. 천병 30만이 지금 너희를 추격해 다 죽이려 한다”고 답하니, 왜군이 볼기를 두드리며 “당나라 장수는 이미 다 물러갔다”고 조롱했다.
  • 6월 27일: 왜군이 동서 양문 밖에 언덕 5개를 쌓고 대나무 시렁을 엮어 성 안을 내려다보며 포격, 성 안 사망자 300여 명. 4륜 궤짝(장갑 공성 기구)을 앞세워 철추로 성벽을 뚫으려 하자 김해부사 이종인이 적 5명을 연달아 사살하고 나머지는 불로 태워 물리침.
  • 6월 28일: 이종인이 지키던 곳으로 돌아오니 밤사이 서예원이 경계를 소홀히 해 성벽이 뚫리려 하고 있어 크게 질책. 격전 끝에 황진이 성 아래를 내려다보며 “오늘 싸움에 적 사망자가 천여 명에 이른다”고 말한 직후, 성 아래 잠복해 있던 적이 위로 철환을 쏘았는데 나무판을 가로질러 튀어 황진의 왼쪽 이마에 맞았다. 황진이 총에 맞아 죽으니(혹은 죽지 않고 함락 때 피살됐다고도 함) 성 안이 흉흉하고 두려워했다.
  • 6월 29일: 서예원이 황진을 대신해 순성장이 됐으나 겁먹어 갓을 벗고 말을 타고 눈물흘리며 다녔다. 최경회가 서예원을 목베려다 그만두고 장윤으로 교체했는데, 장윤도 곧 총에 맞아 전사했다. 미시(오후 1~3시경), 동문 성벽이 비로 인해 무너지자 왜군이 개미처럼 붙어 올라왔다. 서북문도 뚫리자 창의사군이 무너져 촉석루로 모였다. 김천일은 “나는 마땅히 여기서 죽겠다”고 말하고 아들 상건과 함께 남강에 투신했다. 성 안 사망자는 6만여 명(혹은 8만여 명, 혹은 3만이라고도 함)으로 전해진다.

③ 선전관 유대기의 현지 조사 보고 — “왼쪽 이마”

선조실록 41권, 선조 26년(1593) 8월 30일 원문(일부): 二十八日, 忠淸兵使黃進左額逢丸, 不至重傷, 陷城時被殺。 번역: 28일, 충청병사 황진이 왼쪽 이마에 탄환을 맞았는데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고, 성이 함락될 때 피살됐다.

다른 기록들과 달리 이 보고는 “탄환을 맞았지만 중상은 아니었고, 실제로는 함락 당시 피살됐다”는 이설을 전한다. 앞선 인발의 증언(즉사)과는 미묘하게 다른 버전이다.

④ 수정실록의 종합 정리 — 사관의 논평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1593) 6월 1일, 5번째 기사

날짜별 경과는 위 ②와 대체로 일치한다. 이 기사 말미의 사관 논평(史論)이 특히 중요하다:

원문(발췌): 我朝自前代, 未遇大敵, 國內大城, 高不過三丈, 上無樓櫓, 下有坑塹, 率淺狹可越。晋城本壘石淺築, 城中糧峙雖足, 鬪士不過數千人。賊以十倍之衆, 迭休暴戰, …千鎰等徒以忠義, 激勵士衆。黃進、李宗仁、張潤、金俊民等, 皆冠軍勇武, 故能摧敗賊衆, 殺傷相當, 九日而力盡, 則其非戰守之失明矣。 번역: 우리나라는 전대부터 큰 적을 만난 적이 없어 국내 큰 성도 높이가 3장을 넘지 않고 위에 누각도 없이 아래에 구덩이만 있어 대체로 얕고 좁아 넘을 만했다. 진주성은 본래 돌을 얕게 쌓은 성으로, 성 안에 군량은 넉넉했으나 싸울 병사는 수천 명에 불과했다. 적은 10배의 병력으로 번갈아 쉬며 맹공했다… 김천일 등은 오직 충의로써 병사들을 독려했다. 황진·이종인·장윤·김준민 등은 모두 군중에서 으뜸가는 용맹한 무장이었기에 적을 물리치고 서로 대등하게 살상할 수 있었으나, 9일 만에 힘이 다했으니, 이는 방어 전술의 실패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사관은 이어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키요마사가 겉으로 서로 다투는 척하며 실은 조선이 진주성을 포기하지 못하게 만들어 충신·용장을 한 성에서 모두 죽게 만든 것이 히데요시의 계책이었다고 분석한다.

사후 — 포상, 추증, 그리고 그를 향한 왕의 회고

비변사의 포상 청원 — 옷과 갓을 벗고 돌을 진 장면의 재확인

선조실록 41권, 선조 26년(1593) 8월 4일 원문(일부): 忠淸兵使黃進, 身先士卒, 殊死力戰。西城自頹, 進脫衣與笠, 親自負石, 爲士卒先, 徹夜(董)役, 以至誠開諭, 城中男女感激效力, 一夜畢築。翌日賊退, 進俯視城下積屍曰: “昨夜之戰, 賊死者幾至千餘。” 有賊潛伏發丸, 正中其頂而死。 번역: 충청병사 황진은 병사들보다 앞장서 죽기로 싸웠다. 서쪽 성이 무너지려 하자 황진은 옷과 갓을 벗고 직접 돌을 져 날라 병사들보다 앞장섰고, 밤새 공사를 감독하며 지극한 정성으로 타일러 성 안 남녀가 감격해 힘을 다하니 하룻밤 만에 쌓기를 마쳤다. 이튿날 적이 물러가자 황진이 성 아래 쌓인 시체를 내려다보며 “어젯밤 싸움에 적 사망자가 거의 천여 명에 이른다”고 말했는데, 적이 잠복해 쏜 탄환이 정확히 정수리에 맞아 죽었다.

추증 등급을 둘러싼 임금의 직접 발언 — “황진이 최고였다”

선조실록 41권, 선조 26년(1593) 8월 7일 원문(일부): 上敎曰: “金千鎰, 何獨爲贊成耶? 黃進, 自前有軍功, 今此守城時, 最爲戮力云。功不下於金千鎰, 而何乃只爲判書?…” 傳曰: “金千鎰, 固前有功矣, 今番晋州守城, 黃進爲最, 觀其所爲, 亦甚壯烈, 一城之人, 莫不仰戴云。…” 번역: 임금이 하교하기를 “김천일은 어찌 홀로 찬성이 되는가? 황진은 이전부터 군공이 있었고 이번 수성 때도 가장 힘써 싸웠다고 하는데, 공이 김천일에 못지않은데 어찌 판서에 그치는가?…”라 했다. 다시 전교하기를 “김천일이 이전부터 공이 있었던 것은 맞지만, 이번 진주성 수성에서는 황진이 최고였다. 그가 한 일을 보면 매우 장렬하여, 온 성 사람이 그에게 의지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라 했다.

이 논의 끝에 황진은 김천일과 같은 1품(우찬성)으로 추증이 결정된다.

공식 추증 기사

선조실록 41권, 선조 26년(1593) 8월 7일, 10번째 기사 원문: 贈判決事金千鎰爲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守忠淸兵馬節度使, 黃進爲議政府右贊成兼判義禁府事守慶尙右道兵馬節度使… 번역: 판결사 김천일을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수충청병마절도사로, 황진을 의정부우찬성 겸 판의금부사 수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추증하고…

왕의 뒤늦은 회고 — 함안성을 미리 경고한 지도

선조실록 46권, 선조 26년(1593) 12월 4일 원문(일부): 上曰: “咸安, 當初不入可也。 黃進云: ‘咸安不可守’, 此人可惜。 進手畫一圖, 投送于宣傳官處, 此城必被陷沒, 以此圖進於上前云。 予見咸安爲城, 左右大山, 俯瞰城中, 果若此圖, 則非可城之地。 當初輕易入守, 終致潰散矣。” 번역: 임금이 말하기를 “함안은 애초에 들어가지 않는 게 옳았다. 황진이 ‘함안은 지킬 수 없다’고 말했다는데, 이 사람이 아깝다(애석하다). 황진이 직접 지도를 그려 선전관 편에 보내며 ‘이 성은 반드시 함락될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 그림을 내 앞에 올렸다고 한다. 내가 보니 함안이라는 성은 좌우로 큰 산이 있어 성 안을 내려다볼 수 있으니, 과연 이 그림과 같다면 지킬 만한 땅이 아니다. 처음에 가볍게 여겨 들어가 지키다가 결국 궤멸에 이르렀다”고 했다.

황진이 생전에 함안성의 지형적 약점을 직접 지도로 그려 조정에 보고했다는, 그의 전술적 안목을 보여주는 일화다. 왕이 그의 죽음을 직접 애석해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황진의 졸기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1593) 6월 1일, 7번째 기사 (본문에 이미 인용. 황희 5대손·좌찬성/우찬성 정정 참조)

이종인의 졸기 — “생사를 함께하기로 약속했는데, 마침내 그 뜻대로 됐다”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1593) 6월 1일, 8번째 기사 원문: 李宗仁驍果絶倫, 有飛將之稱。少時任俠不羈, 與黃進友善, 以義烈相許, 約同死生, 竟如其志。追贈兵曹判書。 번역: 이종인은 날래고 과감하기가 비할 데 없어 ‘비장(飛將)‘이라는 칭호가 있었다. 젊어서 의협심이 강해 얽매이지 않았고, 황진과 사이가 좋아 의리와 열정으로 서로를 인정하며 생사를 함께하기로 약속했는데, 마침내 그 뜻대로 됐다. 병조판서에 추증됐다.

지금까지 다룬 자료 중 황진의 개인적 인간관계를 보여주는 거의 유일한 기록이다. 김해부사 이종인과는 젊어서부터 가까운 사이였고, 두 사람 다 실제로 진주성에서 함께 전사했다.

부장 오잠의 이야기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1593) 8월 1일 원문(일부): 晋城之陷, 黃進副將吳潜獨當一隊, 射賊無數, 賊滿城中, 猶射不已, 矢盡然後, 乘馬突擊而死。 번역: 진주성이 함락될 때 황진의 부장 오잠이 홀로 한 부대를 담당해 무수히 적을 쏘아 죽였고, 적이 성 안에 가득 차도 여전히 활쏘기를 멈추지 않다가 화살이 다한 뒤에야 말을 타고 돌격해 전사했다.

의병장 변사정이 오잠의 공이 황진에 못지않은데 포상이 미치지 못했다며 올린 상소에 나오는 내용이다.

함께 싸운 이의 아내가 올린 청원 — “8일간 포위”

선조실록 96권, 선조 31년(1598) 1월 26일 원문(일부): 癸巳夏, 與忠淸兵使黃進, 一時行軍, 共守晋州, 被圍八日, 晝夜拒戰, 終至陷城而死。 번역: 계사년(1593) 여름 충청병사 황진과 함께 행군해 진주성을 함께 지켰는데, 8일간 포위된 채 밤낮으로 항전하다 결국 성이 함락되며 전사했다.

전사한 의병 심우신(沈友信)의 아내가 남편의 추증을 청원하며 올린 글이다. “8일간 포위”라는 표현은 앞서 사관 논평의 “9일 만에 힘이 다했다”(포위 시작부터 함락까지 9일째)와 정확히 부합한다.

선무공신 책록 — 그동안 확인하지 못했던 것

선조실록 181권, 선조 37년(1604) 11월 1일 원문(일부): 宣武功臣類, 參於正勳。宋言愼等二十二人, 亦爲有功, 各加一資。金千鎰、黃進、高敬命、趙憲、金沔, 誠爲可嘉, 兼有功。 但已極追褒, 其子孫可錄用。 번역: 선무공신 부류로 정훈에 참여했다. 송언신 등 22인 역시 공이 있어 각각 한 자급씩 더했다. 김천일·황진·고경명·조헌·김면은 참으로 가상하고 아울러 공이 있다. 다만 이미 지극히 추포했으니 그 자손을 등용함이 옳다.

본문에서 “선무공신 정식 책록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유보적으로 서술했는데, 이 기사는 황진이 선무공신 반열에 이름을 올렸음을 명시한다. 다만 이미 사망 후 별도로 추증된 상태였기에 공신 등급(1등·2등·3등) 자체보다는 “자손 등용” 차원에서 다뤄지고 있어, 정공신 책봉 명단(선무공신 18인)에 정식으로 들었는지는 이 기사만으로는 확정하기 어렵다. 별도 확인이 필요하다.


원본 검색 자료 안내

이 정리에 사용한 원본 검색 결과(황진 키워드로 조선왕조실록 전체를 검색한 164건, 동명이인 포함)는 별도로 보관 중이며, 위 목록은 그중 인물 황진(黃進)에 관련된 31건을 추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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