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미 센치요(万見仙千代, ?–1578) — 모리 란마루의 라이벌이었다는 미모의 사나이
Q: 만미 센치요(万見仙千代)는 누구인가?
A: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곁에서 명령을 전하고 일을 처리하던 측근이다. 실명은 시게모토(重元)로, 출신과 생년은 알 수 없다. 1575년 가을의 문서 두 건으로 처음 기록에 나타난다. 그중 노부나가 서장은 1576년으로 보는 설도 있고, 다른 하나는 호리 히데마사(堀秀政)와 함께 서명한 연서장이다. 『신초코키(信長公記)』에 남은 활동은 1578년 한 해에 몰려 있다. 그해 정월 아즈치(安土)에 있던 그의 거처에서 다회가 열렸다. 하리마(播磨) 전선에서는 검사(検使, 전장 감찰관)로 활동했고 아즈치 스모 대회를 운영했다. 모반 소문이 돈 아라키 무라시게(荒木村重)에게 노부나가의 뜻을 물으러 간 사자 세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했다. 1578년 12월 8일 아리오카성(有岡城) 공격에서 철포대를 이끌다 전사했다. 오늘날 대중 매체는 그를 모리 란마루(森蘭丸)의 전신, 노부나가의 총애를 받은 미소년으로 그리지만 그런 모습을 뒷받침하는 동시대 기록은 없다. 확인되는 한 총애를 말하는 가장 이른 기록은 1673년 편찬물이다.
한눈에 보는 만미 센치요
| 항목 | 내용 |
|---|---|
| 이름 | 만미 센치요(万見仙千代). 실명 시게모토(重元). 『신초코키』 등에는 “마미”로 읽힌 예가 있다 |
| 날짜 | 이 글의 월일은 모두 음력이다 |
| 생몰 | 생년 미상 – 1578년(덴쇼 6년) 12월 8일. 향년 30세설이 있으나 근거가 확인되지 않는다 |
| 출자 | 미상. 미코다 나가토노카미(神子田長門守)의 아들이라는 설은 1673년 편찬물에 나온다. 출신지는 오미설·오와리설 |
| 신분 | 노부나가의 측근. 연구자들은 코쇼(小姓, 주군 곁에서 시중드는 근시) 출신으로 분류한다 |
| 첫 기록 | 1575년(덴쇼 3년) 가을. 노부나가 서장(1576년설도 있음) 또는 호리 히데마사와의 연서장 |
| 주요 직무 | 도리츠기(取次, 명령·교섭 전달), 부교(奉行, 행사·실무 책임), 검사(検使, 전장 감찰) |
| 아즈치 저택 | 1578년 정월 4일 다회, 8월 10일 난부(南部) 구나이쇼유 접대의 장소 |
| 사자 임무 | 1578년 10월 아라키 무라시게 힐문 사자(마츠이 유칸·아케치 미츠히데와 함께) |
| 전사 | 1578년 12월 8일 아리오카성 공격. 호리 히데마사·스가야 나가요리와 함께 부교로서 철포병을 이끌던 중 |
| 사후 | 위키백과는 1579년 정월 저택이 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에게 넘어갔다고 적으나 『신초코키』 본문에서는 확인되지 않음. 처자·묘소·가문 존속도 확인되지 않음 |
| 통설 vs 재검증 | ”란마루의 라이벌”, “총애받은 미소년”은 동시대 근거가 없다. 두 사람이 함께 나오는 기록조차 없고, 란마루의 첫 기록은 만미가 죽은 지 넉 달 뒤다 |
이 블로그의 일본 전국시대 인물 완전정리 시리즈는 지금까지 다이묘나 무장을 다뤘다. 영지를 받고 전투에서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만미 센치요는 처음으로 다루는 측근 실무자다. 그에게는 확인되는 영지도, 이름난 전공도 없다. 사료에 남은 그의 모습은 주군의 말을 전하고 행사를 준비하며 전선을 둘러보고 보고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기록에 남는 방식은 다르다. 전투 기록 대신 『신초코키』의 짧은 문장 속에 “만미 센치요를 보냈다”, “만미 센치요의 거처에서”처럼 이름만 짧게 나온다. 이 글은 그 문장들을 모아 한 사람의 3년을 다시 짜 맞췄다.
한국어로 “만미 센치요”를 검색하면 라이트노벨 『오다 노부나의 야망』에 나오는 동명 캐릭터가 먼저 나온다. 이 캐릭터는 이름만 빌린 창작이다. 이 글이 다루는 사람은 1578년 셋츠(摂津)에서 죽은 실존 인물이다. 그에 관한 자료는 많지 않은데 그나마 상당 부분이 현대 매체에서 덧붙은 이미지다. 여기서는 『신초코키』와 동시대 문서로 확인되는 것, 에도 시대 편찬물에서 처음 나오는 것, 현대에 만들어진 것을 나눠서 살펴본다.
1. 이름 — 만미인가 마미인가
1-1. 서명에 남은 “まん”
만미(万見)라는 성은 읽는 법부터 두 갈래다. 『신초코키』 사본의 후리가나와 공가(公家) 나카야마 타카치카(中山孝親)의 일기 『타카치카코키(孝親公記)』에는 “마미(マミ)“로 적혀 있다. 반면 호류지(法隆寺)에 전하는 문서 중에는 그가 성의 첫 글자를 가나로 써서 직접 “まん仙千代重元(만 센치요 시게모토)“라고 서명한 것이 있다. 다니구치 가쓰히로(谷口克広)는 이 서명을 근거로 “만미(まんみ)“로 읽는 것이 맞을 것이라고 추정했다(『오다 노부나가 가신 인명사전』, 1995). 오늘날 사전류와 한국어 표기 “만미”는 이 추정을 따른다.1 본인 서명과 제3자 기록이 갈리는 셈이고, 두 읽기 모두 근거가 되는 기록이 있다는 것까지만 확인된다.
같은 서명이 실명의 근거이기도 하다. 오늘날 그를 “만미 시게모토(万見重元)“라고 부르는 것도 후대 계보가 아닌 이 호류지 문서의 서명에 근거한다.1 서명에는 아명 계열의 통칭 센치요(仙千代)와 실명 시게모토가 함께 적혀 있다. 그러니 그는 이미 실명을 가진 성인이면서 통칭으로는 센치요를 계속 썼다. 『신초코키』를 비롯한 기록에는 전사할 때까지 “만미 센치요”라는 이름으로만 나온다.
1-2. 출신도 생년도 알 수 없다
아버지에 관해서는 에도 시대 병학자 야마가 소코(山鹿素行)가 1673년에 펴낸 『부케지키(武家事紀)』에 미코다 나가토노카미(神子田長門守)의 아들이라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는 만미가 죽은 지 약 95년 뒤에 편찬된 책이며, 이 가족 관계를 뒷받침하는 동시대의 문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출신지도 오미(近江)설과 오와리(尾張)설이 함께 전할 뿐이다. 왜 만미라는 성을 썼는지도 알 수 없다.2
생년 역시 미상이다. 오카다 마사히토(岡田正人)는 『오다 노부나가 소고지텐(織田信長総合事典)』(1999)에서 향년을 30세로 적었다고 하지만 그 근거는 확인되지 않는다.3 반대로 죽을 때까지 센치요라는 통칭으로 불렸다는 점을 들어 꽤 젊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1 두 견해 모두 근거가 약해서 어느 쪽도 나이를 정해 주지 못한다. 확실한 것은 1575–76년에 이미 노부나가 쪽 문서에 이름을 올릴 만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뿐이다.
2. 첫 기록 — 1575년, 호리 히데마사와 나란히
2-1. 두 장의 문서
만미 센치요가 사료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1575년(덴쇼 3년) 가을 무렵이다. 후보는 두 문서다. 하나는 『마츠에 마츠다이라 문서(松江松平文書)』에 전하는 9월 10일자 노부나가 서장이다. 다른 하나는 10월 11일자로 호리 히데마사와 만미가 함께 서명한 연서장으로 『구니토모 공유 문서(国友共有文書)』에 전한다.1 일본어 위키백과 각주에는 앞의 서장을 덴쇼 4년(1576)으로 보는 설도 있다고 적혀 있어 첫 기록의 연도는 1575년설과 1576년설로 갈린다. 첫 번째 서장에 만미가 어떤 자격으로 나오는지, 두 문서의 본문이 무엇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두 번째 문서가 남은 곳은 눈여겨볼 만하다. 구니토모(国友)는 오미 북부의 마을로, 전국시대에 철포를 만드는 대장장이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노부나가는 이 마을의 대장장이들을 직접 장악하고 있었다.4 연서장의 내용을 모르니 철포 조달과 관련된 문서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만미가 처음 기록에 등장할 때부터, 노부나가가 직접 장악한 마을에 전하는 문서에 호리 히데마사와 나란히 서명하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1575년은 오다 정권에 전환점이 된 해였다. 5월 나가시노(長篠)에서 다케다군을 꺾었고 8월에는 에치젠(越前)의 잇코잇키를 진압했다. 11월에는 가독을 노부타다에게 넘겼다. 노부나가 본인은 이듬해 아즈치성 축성에 들어간다. 영역이 넓어지면서 노부나가의 명령을 대신 전하고 실무를 처리할 사람도 더 많이 필요해졌다. 만미에 대한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이 무렵이다. 다만 9월 10일 서장이 에치젠 전투와 관련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으므로 그가 이 해 전투에 나갔다고 볼 근거는 없다.
나라 고후쿠지(興福寺) 승려들이 쓴 『다몬인닛키(多聞院日記)』에도 1576–1577년 무렵 만미의 이름이 나오는 기사가 여럿 있다. 5월 무렵에는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와 함께 츠츠이 준케이(筒井順慶)에게 야마토 지배를 통보한 사자 두 사람으로 나오고, 이듬해에는 고후쿠지 승려들이 아즈치를 다녀온 일과 관련해 만미가 문서를 써 주었다는 기사가 있다.5 다만 연월은 문맥으로 추정한 것이라 확정할 수 없다.
2-2. 측근 집단 속의 만미
노부나가 곁에는 비슷한 역할을 하는 측근들이 여럿 있었다. 호리 히데마사, 스가야 나가요리(菅屋長頼), 후쿠즈미 히데카츠(福富秀勝), 오츠 나가마사(大津長昌), 야베 이에사다(矢部家定), 하세가와 히데카즈 등이 연구서와 사전류에서 만미와 한 묶음으로 거론된다.6 이들은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아 전하고 행사와 공사를 맡으며 전장에서는 감찰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영지를 다스리는 무장과는 하는 일이 달랐다.
이 가운데 가장 이름이 알려진 호리 히데마사는 1565년 무렵 열세 살에 노부나가를 섬기기 시작해 10대 중반에 이미 쇼군 거처 공사의 부교를 맡았다.7 만미의 기록은 1575년(또는 1576년)에 시작해 1578년에 끝나므로 기록으로 확인되는 활동 기간은 3년 남짓이다. 대중서와 인터넷에는 두 사람을 “노부나가 측근의 쌍벽”으로 묶은 표현이 보이지만 연구자가 이런 평가를 내린 문헌은 확인되지 않는다. 사료에서 확인되는 만미는 호리와 같은 레벨의 측근이었고 첫 문서부터 마지막 전투까지 여러 차례 호리와 조를 이뤄 움직였다.
다니구치 가쓰히로는 노부나가 측근을 다룬 『노부나가노 신에이타이(信長の親衛隊)』(1998)에서 “만미 센치요와 모리 란마루(万見仙千代と森蘭丸)“라는 장을 따로 두어 만미를 다뤘다.8 제목대로 만미와 모리 란마루를 한 장에 묶었다. 다니구치가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서술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아 여기서 옮기지 않는다. 두 사람의 관계는 7장에서 기록의 순서로 다시 살펴본다.
3. 도리츠기와 검사 — 측근이 하던 일
3-1. “자세한 것은 아무개가 아뢸 것이다”
만미의 직무는 흔히 세 가지로 정리된다. 다른 다이묘·가신과 노부나가 사이의 도리츠기(取次, 명령과 요청을 양쪽에 전하는 중개역), 행사와 실무를 책임지는 부교, 그리고 전장에서의 검사다.1
도리츠기가 어떤 일이었는지는 노부나가 서장의 끝부분을 보면 알 수 있다. 노부나가의 편지는 본문을 짧게 쓰고 “자세한 것은 아무개가 아뢸 것이다(猶○○可申候)“라는 문구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여기 이름이 오르는 측근이 편지를 들고 가거나 따로 보충 서장을 붙여서 편지에 다 쓰지 않은 노부나가의 뜻을 말로 전했다. 상대편 입장에서 보자면 이 측근들이 곧 노부나가에게 닿는 창구였다.
만미가 이 역할을 한 흔적으로 소개된 사례가 하나 있다. 덴쇼 6년(1578)으로 추정되는 7월 22일자로 노부나가가 간토의 오타 도요(太田道誉, 스케마사 資正)에게 보낸 서장 끝에 “만미 센치요가 아뢸 것이다”에 해당하는 문언이 있다고 한다(전사본 표기는 猶万以仙千世可申候也). 그해 3월 우에스기 겐신이 죽은 뒤 간토 정세를 다룬 편지다.9
3-2. 하리마 전선의 검사
1578년 봄 오다 정권의 서쪽 전선은 하리마였다.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가 모리(毛利) 가문 공략을 맡아 하리마로 들어갔지만 미키성(三木城)의 벳쇼 나가하루(別所長治)가 모리 쪽으로 돌아서면서 전선이 흔들렸다.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만미는 이해 5월 이전부터 서쪽으로 향한 히데요시 쪽에 파견돼 있었다.1
6월 노부나가는 노부타다를 대장으로 한 군세를 보내 벳쇼 쪽 지성인 간키성(神吉城)을 쳤다. 『신초코키』 권11의 6월 16일자 기사에는 검사가 만미 센치요를 포함해 일곱 명 적혀 있다. 오츠 나가마사, 미즈노 구조(水野九蔵), 오츠카 마타이치로(大塚又一郎), 하세가와 히데카즈, 야베 이에사다, 스가야 나가요리다.10 검사는 노부나가를 대신해 전장에 나가 각 부대가 어떻게 싸우는지 지켜보고 보고하는 감찰관이다. 직접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은 아니지만, 누가 공을 세웠고 누가 명령을 어겼는지가 이 사람들의 보고로 노부나가에게 올라갔다.
같은 달 29일 노부나가는 효고(兵庫)와 아카시(明石) 사이, 아카시와 다카사고(高砂) 사이의 길이 멀다며 뱃길로 오는 해적 등을 경계할 거점을 마련하라고 명했다. 츠다 노부즈미(津田信澄)가 야마시로슈(山城衆, 야마시로 지방 무사들)를 거느리고 나갔고 만미도 함께 파견돼 적당한 자리를 살폈다. 좋은 산을 발판으로 거점을 만들어 두었고 만미는 돌아와 그 상황을 보고했다.11 자리를 살피고 돌아와 보고하는 일이었으니, 현장을 지켜보고 알린다는 점에서 앞의 검사 임무와 성격이 같다.
4. 아즈치의 1578년 — 저택, 다회, 스모
4-1. 정월 4일, 만미의 거처에서 열린 다회
만미 센치요라는 이름이 『신초코키』에 자주 나오는 것은 1578년(덴쇼 6년) 권11부터이고, 그 첫 장면은 정월 4일 아즈치에서 열린 다회다.1
권11에는 정월 초하루 노부나가가 아즈치에서 노부타다를 비롯한 열두 명에게 차를 내린 다회가 먼저 나온다. 이어 전년 겨울 노부타다에게 내려진 명물 도구를 언급한 문장이 있고, 곧바로 다음 줄에 “정월 4일 만미 센치요의 거처에서 다회가 열렸다. 이때의 인원은 아홉 명”이라고 나와 있다. 아홉 명은 원문에 관직명과 통칭으로 적혀 있고, 해설서들은 이들을 다케이 세키안(武井夕庵)·마츠이 유칸(松井友閑)·하야시 히데사다(林秀貞)·다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하세가와 요지(長谷川与次)·이치하시 나가토시(市橋長利)·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하시바 히데요시·하세가와 소닌(長谷川宗仁)으로 본다.12 오다 가문의 원로 가신과 군단장, 정권의 행정 실무자, 다도에 밝은 상인 출신 측근이 한자리에 모인 셈이다.
이 무렵 노부나가 정권에서 다회는 취미 모임 이상의 자리였다. 노부나가는 명물 다기를 모아 공을 세운 가신에게 나눠 줬고 다회를 여는 것 자체를 허락받은 가신만의 특권으로 삼았다. 훗날 히데요시가 이것을 “오차노유 고세이도(御茶湯御政道)“라고 불렀다.13 그런 자리로 만미의 거처가 쓰인 것이다. 원문에는 이 다회를 개최한 사람이 누군지는 명시돼 있지 않다.
인터넷 소설 등에는 만미가 “아즈치 가신단 가운데 가장 큰 저택”을 받았다는 말이 자주 나오지만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14 어떠한 사료나 발굴로도 만미 센치요의 저택이 어디에 위치했는지 확인되지 않으며, 그 규모도 알 수 없다.15
4-2. 난부 접대와 스모 대회
만미의 거처는 외교 접대에도 쓰였다. 『신초코키』에 따르면 8월 5일 무츠 쓰가루의 난부 구나이쇼유(南部宮内少輔)가 매 다섯 마리를 바쳤고, 8월 10일 노부나가는 난부를 만미 센치요의 거처로 불러 대접하게 했다. 원문에는 난부가 이 자리에서 감사 인사를 올렸다고 나와 있다.16
8월 15일에는 아즈치에서 큰 스모 대회가 열렸다. 『신초코키』에는 오미와 교토 일대의 스모 선수를 비롯해 1,500명을 아즈치로 불러들였다고 나와 있다. 노부나가는 스모를 무척 좋아해서 여러 차례 대회를 열었는데 이날 대회를 진행한 부교는 츠다 노부즈미·호리 히데마사·만미 센치요·가모 우지사토(蒲生氏郷) 등 열한 명이다.17 해질 무렵 노부나가는 부교들 가운데 힘이 세다고 소문난 두 사람의 대결을 보고 싶어 했고, 부교들에게 스모를 청했다. 호리·가모·만미 등 다섯 명이 먼저 나선 뒤 두 사람이 붙었다. 몇 달 전 하리마 전선에서 감찰을 하던 사람이 이번에는 주군의 오락 행사를 맡았고 직접 스모를 하기도 했다.
4-3. 1578년 한 해의 기록
지금까지 본 1578년의 기사를 한곳에 모으면 다음과 같다. 대부분 『신초코키』 권11의 기사이고, 오타 도요 앞 서장을 뺀 나머지는 위키문헌에 실린 『신초코키』 본문에서 확인했다.
| 시기(덴쇼 6년) | 일 | 만미의 역할 | 함께 나오는 인물 |
|---|---|---|---|
| 정월 4일 | 다회(주최자 명시 없음) | 장소(자기 거처) 제공 | 니와 나가히데, 하시바 히데요시 등 손님 9명 |
| 6월 16일 | 하리마 전선 간키성 공격 | 검사 | 오츠 나가마사·미즈노 구조·오츠카 마타이치로·하세가와 히데카즈·야베 이에사다·스가야 나가요리 |
| 6월 29일 | 효고–다카사고 사이 해안 경계 거점 | 파견(자리 물색)·보고 | 츠다 노부즈미 |
| 7월 22일(추정) | 오타 도요 앞 노부나가 서장 | 구두 전달 담당 | (원문 미확인) |
| 8월 10일 | 난부 구나이쇼유 접대 | 장소(자기 거처) 제공 | 난부 구나이쇼유 |
| 8월 15일 | 아즈치 스모 대회 | 부교(스모도 함) | 츠다 노부즈미·호리 히데마사·가모 우지사토 등 |
| 10월 21일 | 아라키 무라시게 힐문 | 사자 | 마츠이 유칸·아케치 미츠히데 |
| 11월 하순 이후 | 가부토야마 수색 | 호리와 함께 명령 수행 | 호리 히데마사 |
| 12월 8일 | 아리오카성 공격 | 부교로서 철포병 인솔, 전사 | 호리 히데마사·스가야 나가요리 |
한 해 동안 의례, 접대, 감찰, 공사, 행사 운영, 교섭, 전투가 모두 들어 있다. 노부나가가 이 사람에게 무엇이든 맡겼다는 인상을 준다. 그런데 이게 만미 개인이 특별히 다재다능해서 그랬다기보다는 이 시기 노부나가의 측근들이 하는 일이 이렇게 다양했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2장에서 본 대로 호리 히데마사·스가야 나가요리 같은 측근들도 명령 전달, 행사와 공사, 전장 감찰을 함께 맡았다.6 만미는 기록이 한 해에 몰려 있다 보니 유독 눈에 띌 뿐이다.
5. 아라키 무라시게 힐문 — 세 사람의 사자
5-1. “무엇이 불만인가”
1578년 10월, 셋츠 일대를 맡고 있던 아라키 무라시게가 노부나가를 배반하려 한다는 보고가 여러 곳에서 들어왔다. 무라시게는 이케다 가문의 가신에서 출발해 셋츠 한 지역을 맡을 만큼 노부나가의 신임을 받은 무장이었고 이 무렵에는 하리마 전선에도 나가 있었다. 무라시게가 돌아서면 교토와 하리마 전선 사이의 길목이 끊기고,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와 모리 가문에게 셋츠까지 통째로 넘어간다.
『신초코키』 권11의 10월 21일 기사에 따르면 노부나가는 처음에 이 보고를 믿지 않았다. 그는 마츠이 유칸과 아케치 미츠히데, 그리고 만미 센치요를 보내 “무엇이 불만인가, 생각하는 바를 말하면 들어주겠다”는 뜻을 전하게 했다. 무라시게는 조금도 야심이 없다고 답했다. 노부나가는 기뻐하며, 다른 뜻이 없다면 어머니를 인질로 보내고 아즈치로 와서 직접 알현하라고 했지만 무라시게는 끝내 오지 않았다.18
무라시게가 해명하러 아즈치로 가다가 도중에 이바라키성(茨木城)에서 가신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清秀)에게 “노부나가는 한 번 의심한 사람을 반드시 없앤다”는 말을 듣고 되돌아갔다는 이야기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이야기는 『신초코키』가 아니라 다테이리 무네츠구(立入宗継)의 회고록에서 나온 것으로 소개된다. 다테이리는 교토의 상인이자 궁중 창고 관리인이었다.19
5-2. 왜 이 세 사람이었나
『신초코키』에는 세 사람을 고른 이유가 나와 있지 않다. 미츠히데에 대해서는 그의 딸이 무라시게의 아들 아라키 무라츠구(荒木村次)의 아내였으니 인척을 보내 설득하려고 뽑았을 것이라는 설명이 일반적이다.18 다만 이것도 연구자와 해설자의 추정이고 사료에 그렇게 나와 있지는 않다.
마츠이 유칸은 사카이를 관할하고 노부나가의 외교·재정 실무를 오래 맡아 온 원로 행정가였다. 세 사람을 나란히 놓으면 정권의 원로 실무자와 무라시게의 인척, 그리고 노부나가 곁에서 직접 말을 전하는 측근으로 짜인 구성이다. 만미의 몫은 아마 노부나가의 뜻을 그대로 옮기고 무라시게의 대답을 그대로 가져오는 일이었을 것이다. 앞 장에서 본 “자세한 것은 아무개가 아뢸 것이다”의 역할과 같다. 세 사람의 구성에 대한 이 단락의 설명은 필자의 해석이다.
영어권 블로그에는 만미가 원래 무라시게의 코쇼였는데 노부나가가 데려갔다는 이야기, 그래서 옛 주인을 설득하러 갔다는 식의 극적인 설명도 보인다.20 사실이라면 흥미로운 이야기이기는 하겠으나 이 이야기는 출전을 전혀 찾을 수 없다.
5-3. 셋츠 출진
설득이 실패하자 11월 노부나가는 직접 셋츠로 출진했다. 이 무렵 무라시게 쪽이던 다카츠키성(高槻城)의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과 이바라키성의 나카가와 키요히데가 차례로 노부나가에게 돌아섰다. 11월 6일에는 2차 키즈가와구치 해전에서 구키 수군이 모리 수군에게 승리하면서 이시야마 혼간지로 가는 바닷길도 막혔다.
이 출진 중의 기사에 만미의 이름이 한 번 더 나온다. 『신초코키』 권11에는 백성들이 가부토야마(甲山)에 오두막을 짓고 올라가 있는 것을 노부나가가 문제 삼았다고 나와 있다. 노부나가는 호리 히데마사와 만미 센치요에게 명해 각 부대의 난폭한 자들(乱妨人)을 보내 산마다 뒤지게 했고, 이들이 사람을 베기도 하고 군량 따위를 제멋대로 빼앗아 오기도 했는데 그 수가 끝이 없었다고 한다. 베고 빼앗은 대상은 문맥상 산으로 피한 백성으로 읽히지만 원문이 명시하지는 않고, 수치도 없다.21 측근은 교섭과 의례뿐 아니라 전쟁터에서 주군의 명령을 집행하는 일도 맡았다.
6. 12월 8일 아리오카 — 전사와 그 이야기의 층위
6-1. 12월 8일의 공격
무라시게가 틀어박힌 아리오카성은 성곽과 무사 마을, 상인 마을까지 해자와 토루로 한꺼번에 둘러싼 소가마에(惣構) 구조였다. 남북 약 1.7km, 동서 약 0.8km에 이르는 큰 성으로, 북·서·남쪽에는 따로 요새도 두었다.22
12월 8일 신시(오후 4시 무렵)부터 오다군이 이타미(伊丹)로 다가붙었다. 『신초코키』에 따르면 호리 히데마사·만미 센치요·스가야 나가요리 세 사람이 부교로서 철포병을 거느리고 마을 입구(町口)까지 밀고 들어갔고, 그다음에 궁수대가 화살로 불을 질러 마을을 태우라는 명이 내려졌다. 유시(오후 6시 무렵)부터 해시(오후 10시 무렵)까지 성벽 가까이 붙어 공격했고, 만미는 성벽 앞에서 버티다 전사했다.23 이 기사는 원문에서 “만미 센치요가 전사했다”는 한 줄로 끝난다. 이날 공격은 성을 떨어뜨리지 못했다.
6-2. 전사 장면은 어디서 왔나
만미의 죽음을 다룬 글에는 흔히 극적인 장면이 붙는다. 공을 세우려는 마음에 들떠 스스로 담을 넘다가 나기나타(長刀)에 꿰뚫렸고 노부나가가 그 죽음을 크게 애석해했다는 것이다. 이 장면의 요소들을 출전별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 요소 | 내용 | 출전과 성립 시기 | 신뢰도 |
|---|---|---|---|
| 사자 파견 | 마츠이 유칸·아케치 미츠히데와 함께 무라시게를 힐문 | 『신초코키』 권11(오타 규이치, 1600년대 초 정리, 사건 후 약 25–30년) | 높음(원문 확인) |
| 전사 | 호리·스가야와 함께 부교로서 철포병을 이끌고 성벽 앞까지 다가갔다가 전사 | 『신초코키』 권11 | 높음(원문 확인) |
| 담을 넘다 나기나타에 찔림 | 스스로 담을 넘으려다 나기나타에 꿰뚫려 죽음 | 『호안신초키(甫庵信長記)』(오제 호안, 1610년대 성립·1620년대 간행, 사건 후 약 33–44년, 위키백과 서술로만 확인), 하야시 라잔(林羅山) 『쇼군키(将軍記)』(1640년대)24 | 낮음(윤색이 많은 후대 기록) |
| 공명심 | 공을 세우려는 마음에 들떠 무리했다 | 현대 해설(『부케지키』에는 “가장 먼저 성에 뛰어들었다”고만 나옴) | 근거 없음 |
| 근시의 총애 | 노부나가 근시의 총애받는 남자(寵男) | 『부케지키』(야마가 소코, 1673, 사건 후 약 95년)25 | 낮음(후대 편찬물) |
| 성에 가장 먼저 뛰어듦 | 부성을 쌓은 뒤 장수들을 위로하러 갔다가 성을 시찰하고 가장 먼저 성에 뛰어들어 전사 | 『부케지키』(1673) | 낮음(『신초코키』의 순서와 어긋남) |
| 노부나가의 애도 | 노부나가가 크게 탄식하고 애석해했다 | 『부케지키』(1673). 현대 해설이 『신초코키』를 출전으로 내세우나 12월 8일 기사에 해당 문언이 없음 | 낮음(후대 편찬물에만 있음) |
| 공격 시각 | 신시(오후 4시 무렵) 접근, 유시(오후 6시 무렵)부터 해시(오후 10시 무렵)까지 성벽 앞 공격 | 『신초코키』 권11 | 높음(원문 확인) |
| 피해 | 오다군 약 2,000명 손실 | 『다몬인닛키』 12월 12일 조에 “2천여 명 손실”이라는 풍문 기사(OCR 판독, 날짜는 9일 새벽으로 적혀 8일과 어긋남). 『신초코키』에는 수치가 없음 | 낮음(전해 들은 풍문) |
오제 호안의 『호안신초키』는 오타 규이치의 『신초코키』를 바탕으로 쓰면서 의도적으로 창작과 윤색을 섞었다는 평가를 받는 책이다.26 담을 넘다 찔렸다는 장면은 이 책에 있다고 하나 그 원문은 확인되지 않는다. 같은 모티프는 하야시 라잔의 『쇼군키』(1640년대)에도 나온다. 반면 『신초코키』에는 성벽 앞에서 버티다 전사했다고만 나오고 담을 넘었다는 서술은 없다. 그러니 믿을 만한 기록으로는 만미가 철포병을 이끌고 성벽에 다가갔다가 전사했다는 데까지만 말할 수 있다. 어떻게 죽었는지, 노부나가가 그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동시대 기록으로는 알 수 없다. 노부나가가 크게 애석해했다는 서술은 확인되는 한 1673년 『부케지키』가 가장 이르다.
만미가 앞장서서 무리하게 성벽에 붙었다는 인상은 이 공격이 실패한 싸움이었다는 사실과 쉽게 결합한다. 공격은 실패했고 측근이 죽었으니 누군가 무리했을 것이라는 식이다. 하지만 같은 날 같은 철포대를 이끈 호리 히데마사와 스가야 나가요리는 살아남았다. 이들이 무엇을 달리 했는지를 보여 주는 기록은 없다. 소가마에로 둘러싸인 큰 성을 힘으로 쳤다가 실패했고 그 싸움에서 지휘관 한 사람이 죽었다. 사료만 놓고 보면 이 이상을 말하기 어렵다.
7. 사후 — 저택과 직무, 그리고 같은 이름
7-1. 사후, 저택과 자리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만미가 죽고 해가 바뀐 1579년(덴쇼 7년) 정월 아즈치에서 가신들의 저택이 재배치됐다. 만미의 옛 저택은 하세가와 히데카즈에게 돌아갔고 하세가와가 쓰던 저택에는 다카하시 토라마츠(高橋虎松)가 들어갔다는 서술이다. 위키백과는 다니구치 가쓰히로의 사전(1995)과 『아즈치닛키(安土日記)』를 근거로 들지만, 『신초코키』 권12 본문에서는 이 기사가 확인되지 않는다. 다카하시 토라마츠는 『신초코키』에 덴쇼 9년(1581) 10월 지행을 받는 기사로만 나온다.27
하세가와 히데카즈는 만미와 함께 간키성 검사를 맡았던 동료다. 그가 이 무렵부터 기록에 부쩍 자주 나오는 것을 만미의 자리와 직무를 이어받은 결과로 보는 견해가 있다.27 1579년 5월 아즈치 종론(安土宗論, 정토종과 니치렌종의 교리 논쟁) 때 노부나가의 사자로 나선 것은 『신초코키』 권12에 따르면 스가야 나가요리·야베 이에사다·호리 히데마사·하세가와 히데카즈 네 사람이었다.
7-2. 란마루는 센치요 사후 넉 달 뒤에야 처음 등장한다
만미 센치요를 모리 란마루와 엮는 이야기는 흔하다. 란마루보다 먼저 총애를 받은 코쇼였다거나, 두 사람이 노부나가의 총애를 두고 경쟁했다는 식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같이 나오는 동시대 기록은 없다. 란마루(사료상 이름은 모리 란(森乱), 실명은 나리토시(成利))가 『신초코키』에 처음 나오는 것은 1579년 4월 18일, 시오카와 호키노카미(塩河伯耆守)에게 은 100매를 전하는 사자로서다.28 만미가 전사한 지 넉 달 뒤다. 두 사람이 같은 시기에 경쟁했다는 이야기는 기록의 순서와 맞지 않는다.
만미를 “노부나가의 총애를 받은 미소년”, 남색 상대로 그리는 이미지는 더 근거가 없다. 외모나 남색을 언급한 동시대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1673년 야마가 소코는 『부케지키』에서 만미를 “노부나가 근시의 총애받는 남자(寵男)“라고 적어, 총애를 말하는 서술 자체는 후대에 이미 있었다.25 이 문구는 용모를 말하지 않고, 이 표현이 남색 관계를 뜻하는지도 이 글로는 확정할 수 없다. 이 서술이 오늘날의 미소년 이미지로 이어진 경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7-3. 1581년의 “만미 센치요”
만미 이야기에서 가장 풀리지 않는 대목은 그가 죽은 뒤에 있다. 『신초코키』 권14의 1581년(덴쇼 9년) 9월 8일 기사에는 노부나가가 가토 요주로(賀藤与十郎) 등 네 명을 불러내 각각 지행(知行, 가신에게 주는 영지)을 주었다는 대목이 있고, 그 네 명 가운데 “만미 센치요”(원문 표기는 萬見仙千代)가 있다.29 원문에는 이 사람과 전사한 만미의 관계가 나와 있지 않다. 만미는 1578년 12월에 이미 죽었으니 이 기사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오타 규이치가 이름을 잘못 적었을 수도 있고 아버지의 통칭을 물려받은 아들이 있었을 수도 있다.
아들이었다면 만미가 자식을 둘 만한 나이였다는 뜻이 되지만, 이것만으로 나이를 가늠할 수는 없다. 일부 애호가는 여기서 더 나아가 만미 센치요라는 사람이 둘이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30 하지만 어느 쪽이든 근거가 되는 기사는 이 한 줄뿐이다. 만미의 아내와 자식, 그가 거느렸던 가신들이 어디로 갔는지, 만미 가문이 이어졌는지는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묘소도 알려져 있지 않다.
8. 인물평 — 사료로 확인되는 만미 센치요
만미 센치요에 대해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몇 살에 죽었는지, 가족이 있었는지 모른다. 이름을 어떻게 읽는 건지조차 100% 확정할 수가 없다. 대중 매체가 그려 온 란마루와 노부나가의 총애를 다툰 미소년, 공을 세우려 무리하다 죽은 젊은이라는 이미지는 모두 현대 매체와 에도 시대 책들에서 비롯된 이야기다.
1575년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만미 센치요는 동쪽의 다케다, 서쪽의 모리와 오사카의 혼간지를 동시에 상대하고 있는 노부나가를 대신해 사람들에게 노부나가의 뜻을 전달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확인되는 영지도, 전장에서 공을 세운 기록도 없다.
그가 직접 부대를 이끌고 싸운 기록은 12월 8일 아리오카 공성전 하나뿐인데 공교롭게도 그는 이 싸움에서 전사했다. 한 달 반쯤 전 자신이 노부나가의 말을 전하러 갔던 아라키 무라시게의 성이었다. 이듬해 정월 그의 아즈치 저택은 하세가와 히데카즈에게 넘어갔고, 넉 달 뒤 『신초코키』에는 모리 란마루가 처음 등장한다.
출처
1차·준1차 사료 (『신초코키』는 위키문헌 전사본으로 대조, 나머지는 연구서·해설을 통한 재인용)
- 오타 규이치(太田牛一), 『신초코키(信長公記)』 권11(덴쇼 6년)·권12(덴쇼 7년)·권14(덴쇼 9년) — 위키문헌 「信長公記/我自刊我書」 전사본(池田本 등 사본·교주본과는 대조하지 않음)
- 만미 센치요 서명 문서 「まん仙千代重元」 (『호류지 문서(法隆寺文書)』)
- 덴쇼 3년 9월 10일 노부나가 서장 (『마츠에 마츠다이라 문서(松江松平文書)』), 덴쇼 3년 10월 11일 호리 히데마사·만미 연서장 (『구니토모 공유 문서(国友共有文書)』)
- 덴쇼 6년 추정 7월 22일 노부나가 서장(오타 도요 앞) — 개인 블로그 전사본으로만 확인(「猶万以仙千世可申候也」)
- 『다몬인닛키(多聞院日記)』 (NDL 디지털컬렉션 pid 1207457·1207471, OCR 판독)
- 나카야마 타카치카(中山孝親), 『타카치카코키(孝親公記)』 (읽기 “マミ”의 근거로 재인용)
- 『다테이리 사쿄노스케 뉴도 류사키(立入左京亮入道隆佐記)』 (이바라키 회군 일화의 출전으로 거론, 원문 미열람)
에도 시대 편찬물 (성립 시기 명시)
- 오제 호안(小瀬甫庵), 『호안신초키(甫庵信長記)』 (1610년대 성립, 1620년대 간행) (원문 미열람, 위키백과 서술로만 확인)
- 하야시 라잔(林羅山), 『쇼군키(将軍記)』 (1640년대 편수, 『国史叢書 将軍記』 1, 1915, NDL 디지털컬렉션 OCR)
- 야마가 소코(山鹿素行), 『부케지키(武家事紀)』 (1673년) — NDL 디지털컬렉션 OCR로 해당 대목 확인(개별 글자는 이미지 대조 필요)
현대 연구·사전 (서지 확인, 본문은 대부분 2차 요약 경유)
- 谷口克広·高木昭作, 『織田信長家臣人名辞典』, 吉川弘文館, 1995(제2판 2010)
- 谷口克広, 『信長の親衛隊 — 戦国覇者の多彩な人材』, 中公新書 1453, 1998
- 川本斉一, 「謎多き万見仙千代重元像」, 『歴史研究』 57-1·2, 2015 (서지만 확인)
- 岡田正人, 『織田信長総合事典』, 雄山閣, 1999
- 砂川博, 『天正六年十月 荒木村重「逆心」 — 伊丹有岡城から尼崎城へ』, 岩田書院, 2023 (서지만 확인)
- 日本建築学会中国支部 研究報告集, 「安土城伝羽柴秀吉邸跡に関する考察(その1)」
공식·표준 참고자료
- 伊丹市 「有岡城跡」, 兵庫県立歴史博物館 「有岡城」, 滋賀県 「特別史跡安土城跡の調査と整備」
- 일본어 위키백과 「万見重元」·「神子田正治」·「堀秀政」·「長谷川秀一」·「森成利」·「有岡城の戦い」·「荒木村重」·「甫庵信長記」·「御茶湯御政道」 항목, Weblio 「信長の側近」, 코토방크 「長谷川秀一」
전문 사이트·대중 매체 (신뢰도 C–E)
- BUSHOO!JAPAN 『信長公記』 연재(158화·169화), 歴史ハック 『信長公記』 11권 해설, 戦国ヒストリー, 攻城団ブログ, サライ.jp, 名古屋刀剣博物館
- 개인 블로그: 今日は何の日?徒然日記, 上様団子, クニの部屋, 森乱に関する覚え書き, えびけん
- 웹소설 소개문(카쿠요무·에브리스타)
확인하지 못한 것
- 『신초코키』는 위키문헌 전사본으로 본문을 확인했지만 池田本 등 사본·교주본과는 대조하지 않았고, 『오다 노부나가 몬조노 켄큐』의 문서 번호는 확인하지 못했다. 호류지 문서의 서명 「まん仙千代重元」과 오타 도요 앞 서장의 문구는 2차 자료에 인용된 것을 다시 옮긴 것이고, 이 글에서 요지만 옮긴 기사도 있다.
- 다니구치 가쓰히로의 『신에이타이』 「만미 센치요와 모리 란마루」 장과 『오다 노부나가 가신 인명사전』 항목은 목차와 2차 요약으로만 확인했다. 「謎多き万見仙千代重元像」(『歴史研究』 57-1·2, 2015)은 川本斉一의 글로, 만미를 주제로 다룬 거의 유일한 글로 보이지만 서지만 확인했고 본문을 보지 못했다.
- 1575년(또는 1576년)의 두 초견 문서와 호류지 서명 문서의 내용은 확인하지 못했다. 『다몬인닛키』의 만미 기사는 OCR로만 보았고 연월을 확정하지 못했다. 『호안신초키』 원문은 열람하지 못했다.
- 한국어로 만미 센치요를 다룬 단행본·논문은 찾지 못했다.
- 『부케지키』는 OCR 전문에서 해당 대목을 확인했다. OCR이라 개별 글자(특히 「寵男」)는 이미지 대조가 필요하다.
Footnotes
-
일본어 위키백과 「万見重元」 항목(谷口克広·高木昭作 『織田信長家臣人名辞典』(吉川弘文館, 1995) pp.410–411 등 인용). 검색 결과 요약으로 확인. ↩ ↩2 ↩3 ↩4 ↩5 ↩6 ↩7
-
일본어 위키백과 「万見重元」·「神子田正治」 항목(山鹿素行 『武家事紀』 인용). 『武家事紀』 巻十四続集 神子田 항목의 「長門カ子ヲ萬見仙千代ト號ス」는 NDL 디지털컬렉션 OCR로 확인했다. ↩
-
岡田正人, 『織田信長総合事典』(雄山閣, 1999). 일본어 위키백과 「万見重元」 항목 재인용, 본문 미열람. ↩
-
名古屋刀剣博物館, 「三英傑と国友鉄砲鍛冶」. ↩
-
『多聞院日記』(NDL 디지털컬렉션 pid 1207457·1207471, OCR 판독): 「信長ヨリ明智十兵衞·万見專千代兩使ニテ」「朱印ハ不出、如有來可納之由、万見仙千代書出來了」 등. 연도는 문맥으로 추정했다. ↩
-
일본어 위키백과 「堀秀政」 항목. ↩
-
谷口克広, 『信長の親衛隊 — 戦国覇者の多彩な人材』(中公新書 1453, 1998). 중앙공론신사 서지·목차로 장 구성만 확인. ↩
-
「天正6年、織田信長から太田資正へ届いた印判状は?」(クニの部屋, 개인 블로그). 원문 미대조. ↩
-
『信長公記』 권11 간키성 공격 기사(6월 16일). 위키문헌 「信長公記/我自刊我書」 전사본으로 원문 확인. 원문은 통칭 표기이고 실명 비정은 일본어 위키백과 「万見重元」 항목을 따랐다. 명단 끝의 祝彌三郞은 “교대 근무를 지시했다(御番替に被仰付)“는 문구에 걸려 있어 일곱 명에 넣지 않았다. ↩
-
『信長公記』 권11 덴쇼 6년 6월 29일 기사. 위키문헌 전사본으로 원문 확인(「兵庫と明石之間 明石より高砂之間道の程遠く候間舟手の海賊等爲警固 津田七兵衞 山城衆相加 万見仙千代被遣可然地を見計置可申之趣 御諚にて能山を足懸りに拵置 仙千代は罷歸樣子言上候し也」). ↩
-
『信長公記』 권11 덴쇼 6년 정월 4일 기사. 위키문헌 전사본으로 원문 확인(「正月四日に 萬見仙千代所にて御ひらき之被成御會 此時之人數九人」). 손님의 실명 비정은 BUSHOO!JAPAN 「信長公記第158話」, 戦国ヒストリー 「信長と茶の湯」 등 해설을 경유. ↩
-
일본어 위키백과 「御茶湯御政道」 항목. ↩
-
카쿠요무 『蛍の車輪 仙千代ものがたり』, 에브리스타 『伝説の小姓 〜織田信長に愛された男、万見仙千代の半生〜』 작품 소개문. ↩
-
滋賀県, 「特別史跡安土城跡の調査と整備」; 日本建築学会中国支部 研究報告集, 「安土城伝羽柴秀吉邸跡に関する考察(その1)」. ↩
-
『信長公記』 권11 덴쇼 6년 8월 5일·10일 기사. 위키문헌 전사본으로 원문 확인(「万見仙千代 所へ南部めし寄られ御振舞被仰付此時御禮被申候也」). ↩
-
『信長公記』 권11 덴쇼 6년 8월 15일 기사. 위키문헌 전사본으로 원문 확인. 가모 우지사토와 통칭(忠三郞)의 대응은 사전류의 비정. ↩
-
『信長公記』 권11 「荒木攝津守企逆心並伴天連事」(10월 21일). 위키문헌 전사본으로 원문 확인. 歴史ハック 「信長公記・11巻その5 荒木村重の謀反」, 攻城団ブログ 「明智光秀と荒木村重」, 上様団子 “Those Beloved Traitors” 등은 해설로 참조. ↩ ↩2
-
일본어 위키백과 「荒木村重」 항목; 『立入左京亮入道隆佐記』(위키문헌, 원문 미열람); 砂川博, 『天正六年十月 荒木村重「逆心」』(岩田書院, 2023, 서지만 확인). ↩
-
「たった一度の合戦記録~信長の側近・万見重元」(今日は何の日?徒然日記, 개인 블로그); “Nobunaga’s List of Valets”(上様団子, 영문 블로그). ↩
-
『信長公記』 권11 「安部二右衞門御忠節之事」 조. 위키문헌 전사본으로 원문 확인(「百姓等悉甲山へ小屋上り仕候…堀久太郞 万見仙千代 被仰付諸手の亂妨人打付山々をさかし或切捨或兵粮其外思々取來事無際限」). 문구의 주어와 대상이 모호해 본문처럼 옮겼다. ↩
-
伊丹市 「有岡城跡」; 兵庫県立歴史博物館 「有岡城」. ↩
-
『信長公記』 권11 12월 8일·11일 기사. 위키문헌 전사본으로 원문 확인(「堀久太郞 万見仙千代 菅谷九右衞門兩三人爲御奉行鐵炮放を召列町口へ押詰…万見仙千代 討死候」). 전사본의 「西刻」는 酉刻의 오기로 읽었다. 일본어 위키백과 「万見重元」·「有岡城の戦い」 항목도 참조. ↩
-
林羅山, 『将軍記』(『国史叢書 将軍記』 1, 1915, NDL 디지털컬렉션 pid 3441720, OCR 전문으로 직접 확인): 「萬見仙千代、塀を乘らんとして、長刀に貫かれて死す」. ↩
-
山鹿素行, 『武家事紀』 巻十三続集 「織田家臣」(『山鹿素行先生全集』 1915, NDL 디지털컬렉션 pid 946584, OCR 전문으로 직접 확인. 글자 오인식이 있을 수 있다). 「萬見仙千代、信長近侍ノ寵男也 … 荒木攝津守村重逆心ニ付テ、伊丹ニ付城ヲカコ諸將相守ルノ時、萬見仙千代諸將慰勞ノ使ニ行テ、伊丹ノ城ヲ巡見シ、一番ニ城ニ乘入テ打死ス、信長大ニ歎惜」(OCR는 仙千代를 「佃千代」로 잘못 읽은 곳이 있다). ↩ ↩2
-
일본어 위키백과 「甫庵信長記」 항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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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長谷川秀一」·「万見重元」 항목(谷口克広 1995 p.411과 『安土日記』를 근거로 듦). 『信長公記』 권12 본문(위키문헌 전사본)에서 저택 재배치 기사는 찾지 못했다. 아즈치 종론의 사자 기사(菅屋九右衞門·矢部善七郞·堀久太郞·長谷川竹)는 권12 원문으로 확인. 코토방크 「長谷川秀一」. ↩ ↩2
-
『信長公記』 권12 덴쇼 7년 4월 18일 기사. 위키문헌 전사본으로 원문 확인(「四月十八日 塩河伯耆守へ銀子百枚被遣候 御使森乱 中西權兵衞相副被下」). 일본어 위키백과 「森成利」 항목; 「森乱(森蘭丸)とはどんな人物?」(サライ.j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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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長公記』 권14 덴쇼 9년 9월 8일 기사. 위키문헌 전사본으로 원문 확인(「九月八日 賀藤與十郞 萬見仙千代 猪子 安西 四人被召出御知行分々に被仰付忝次第也」). ↩
-
「⑲織田家の男達の男色事情(謎の近習万見仙千代は二人いた?)」(森乱に関する覚え書き, 개인 블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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