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시대에 그린 히젠 사가성 그림 지도. 겹겹의 해자로 둘러싸인 네모난 성곽 한가운데에 혼마루와 천수가 그려져 있고, 그 바깥으로 무사 저택 거리와 논이 펼쳐진다(작자 미상,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소장, 퍼블릭 도메인)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1538–1618) — 번주가 되지 않은 사가번의 시조

Q: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는 누구인가?

A: 히젠(肥前, 지금의 사가현·나가사키현 일대)의 다이묘 류조지(龍造寺) 가문을 섬긴 무장이다. 1538년 류조지 가문의 외손으로 태어났고, 주군 류조지 타카노부(龍造寺隆信)와는 외사촌이자 의붓동생이었다. 타카노부가 1584년 오키타나와테 전투(沖田畷の戦い)에서 전사하자 류조지 가문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그를 주군 가문과 나란히 대우했고, 임진왜란 때는 1만 2,000명을 이끌고 함경도 함흥에 주둔했다. 그러나 동시대 문서에서 그가 류조지 가문의 가독(家督, 집안의 대표 자리)을 넘겨받은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1607년 다이묘로서 류조지 종가의 마지막 당주였던 타카후사(高房)가 아내를 죽이고 자해한 사건이 일어난 뒤 가독은 그의 아들 카츠시게(勝茂)가 이었다. 사가번(佐賀藩)의 초대 번주는 카츠시게이고 나오시게는 번조(藩祖, 번의 시조)로 모셔진다. 1618년 81세로 죽었고, 사후 150여 년 뒤 그를 신으로 모시는 신사가 세워졌으며, 1795년에는 닛포 다이묘진(日峯大明神)이라는 신호(神號)를 받았다.

한눈에 보는 나베시마 나오시게

항목내용
이름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어릴 적 이름 히코호시마루(彦法師丸), 노부야스(信安)·노부마사(信昌)·노부나리(信生)를 거쳐 1589년 나오시게로 개명
관직히다노카미(飛驒守), 1589년 종5위하 카가노카미(加賀守)
생몰1538년(텐분 7) – 1618년 6월 3일(겐나 4, 서양력 7월 24일). 향년 81세(세는나이)
출신히젠 사가군 혼조(本庄). 아버지 나베시마 키요후사(鍋島清房), 어머니는 류조지 이에즈미(龍造寺家純)의 딸
류조지 가문과의 관계타카노부와 외사촌 사이. 타카노부의 어머니 케이긴니(慶誾尼)가 아버지 키요후사와 재혼해 의붓형제가 되었다고 전함
대표 전투1570년 이마야마 야습, 1584년 오키타나와테(패전, 타카노부 전사)
류조지 가문 안의 지위1584년 주군 마사이에(政家)가 피로 서명한 기청문(起請文, 서약서)으로 나오시게의 의견을 따르겠다고 맹세. 1586년 가문 운영을 정식으로 위임. 1590년 히데요시의 영지 배분 문서에서 가신 가운데 최대인 4만 4,500석
임진왜란1592년 2번대(가토 기요마사와 함께) 1만 2,000명, 함흥 주둔. 1597년 아들과 4번대 단독 편성
세키가하라아들 카츠시게가 서군으로 참전, 사죄 뒤 야나가와의 타치바나 가문을 공격해 본령 안도
가독1607년 아들 카츠시게가 주군 가문인 류조지 가문의 가독을 이음. 막부 편찬 계보는 1590년 나오시게가 가독을 이었다고 적지만, 동시대 문서에서 당주는 타카후사
죽음1618년 사가 타후세(多布施) 저택. 귀에 난 혹이 짓물러 음식과 약을 끊었다고 전함
사후1772년 닛포샤(日峯社, 지금의 마츠바라 신사) 창건, 1795년 닛포 다이묘진

이 블로그에서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가토 기요마사와 함께 함경도까지 올라간 2번대 장수로, 타치바나 긴치요의 남편 무네시게가 지키던 야나가와를 친 군대의 대장으로 이미 몇 번 등장했다. 가신에서 다이묘가 된 사람들은 대개 주군을 몰아내거나 독립해서, 어느 한 시점에 자기 이름으로 영지를 차지했다. 하지만 나오시게의 경우는 달랐다. 주군 류조지 타카노부가 죽은 1584년부터 아들 카츠시게가 류조지 가문의 가독을 이은 1607년까지 23년 동안, 당주 자리에는 타카노부의 아들 마사이에(政家)와 손자 타카후사가 차례로 앉아 있었고 나오시게는 계속해서 가신으로서 실제로 가문을 움직이는 일을 맡았다. 그렇다고 류조지 가문이 이름만 남은 것도 아니었다. 나오시게는 류조지 일문·중신과 합의해 가문을 운영했고, 자신이 쓴 글에서는 주군 가문의 신하로 처신했다. 그런데도 타카노부가 죽은 그해부터 류조지 일문 안에서는 나오시게가 가문을 노린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 의심은 그가 죽은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 글은 주군 마사이에가 나오시게에게 준 기청문(起請文, 신불에 맹세하는 서약서)과 히데요시가 보낸 슈인조(朱印状, 붉은 인장을 찍은 공식 문서), 1607년 나오시게가 마사이에에게 보낸 서장, 시마즈 가문 가로가 쓴 일기, 조선 측 『선조실록(宣祖實錄)』을 기준으로 삼았다. 이마야마(今山) 야습이나 오키타나와테 같은 전투 장면은 대부분 1700년대 이후 사가 쪽에서 나온 편찬물에서 나온다. 1702년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가 쓴 『한칸후(藩翰譜)』의 나베시마 가문 항목도 문서와 하나하나 맞춰 보았다. 본문의 『한칸후』 인용 문구를 누르면 한칸후 원문(일본어)의 해당 부분이 새 탭에서 열린다.

1. 류조지 가문의 외손 — 출생과 의붓형제

흰 예복에 검은 관을 쓰고 홀을 쥔 채 팔각 대좌 위에 정좌한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상반신. 옷 전체에 나베시마 가문의 행엽 카몬이 금빛으로 놓여 있다
나베시마 나오시게 초상화(부분). 사가번 화가 미우라 시산(三浦子璨, ?–1794) 그림, 나베시마 호코카이 조코칸 소장

나오시게는 1538년 히젠 사가군 혼조(本庄)에서 나베시마 키요후사(鍋島清房)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생일까지 적은 동시대 기록은 없지만 『한칸후』에는 1563년에 26세, 1618년에 81세로 죽었다고 나오고, 18세기 사가번 쪽 기록 『호쿠히센시(北肥戦誌)』에는 1541년에 4세, 1551년에 14세라고 나온다. 두 기록의 나이 계산이 모두 1538년생을 기준으로 하고 있고, 『사가시사(佐賀市史)』도 같다.

나베시마 가문은 원래 사가 근교의 작은 토호였다. 나오시게의 아버지 키요후사가 류조지 이에즈미(龍造寺家純)의 사위가 된 경위는 이렇게 전해진다. 1530년 쇼니(少弐) 가문과 오우치(大内) 가문이 맞붙은 타데나와테(田手畷) 싸움에서 나베시마 일족이 류조지 이에카네(龍造寺家兼)를 도와 공을 세웠고, 그 상으로 키요후사가 이에카네의 손녀, 곧 이에즈미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그러니 나오시게의 외조부는 류조지 이에즈미이고, 외증조부는 류조지 가문을 다시 일으킨 이에카네다. 이에즈미의 아들 치카이에(周家)의 아들이 훗날의 타카노부이므로, 나오시게와 타카노부는 처음부터 외사촌 사이였다.1

어린 시절 나오시게는 오기(小城)의 치바 타네츠라(千葉胤連)에게 양자로 갔다. 『호쿠히센시』와 『시료소란(史料綜覧)』에 따르면 1541년 네 살에 양자로 가서 1551년 열네 살에 양자 관계를 끝내고 혼조로 돌아왔다. 『한칸후』에는 1563년 아리마 하루즈미(有馬晴純)가 치바를 칠 때 나오시게가 어릴 적 길러 준 은혜를 갚으려고 앞장서 싸웠다며 “이것이 공명의 시작인가” 하는 주석이 붙어 있다.

1-1. 케이긴니의 재혼

나오시게가 타카노부의 의붓동생이 된 것은 타카노부의 어머니 케이긴니(慶誾尼)가 나오시게의 아버지 키요후사와 재혼했기 때문이다. 타카노부의 아버지 치카이에는 1545년에 이미 죽었고, 나오시게의 생모는 1548년에 죽었다고 전한다.

재혼 장면은 『한칸후』에 길게 나온다. 홀로 지내는 키요후사에게 케이긴니가 “노년의 벗을 중매해 주겠다”며 가마를 보냈는데, 맞아들이고 보니 가마에 탄 사람이 케이긴니 자신이었다. 놀라는 키요후사에게 그는 타카노부가 어려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잃고 믿을 사람이 없으니 “그대의 아들들을 내 자식으로 삼아 타카노부의 형제로 만들려고(わらは子として、隆信が兄弟とせんと思へば)” 이렇게 일을 꾸몄다고 말한다. 같은 이야기가 사가번 쪽 전쟁 이야기책 『히요군키(肥陽軍記)』에도 있는데, 여기서는 케이긴니가 “세상에 뜻밖의 변이 생겨도 가업을 지킬 사람은 노부나리(信生, 나오시게)“라고 마음먹고 길일에 몸소 가마를 탔다고 되어 있다.

케이긴니가 스스로 찾아갔다는 이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동시대 문서는 찾지 못했다. 1720년에 사가 쪽에서 엮은 『호쿠히센시』에는 오히려 재혼 이야기가 없다. 그래도 재혼 자체를 의심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사가번이 편찬한 『나오시게코후(直茂公譜)』와 『나오시게코후 코호(直茂公譜考補)』가 재혼한 해를 1556년으로 적었고, 근세사 연구자 다카노 노부하루(高野信治)도 이 연도를 따른다. 또한 케이긴니가 이후 나베시마 쪽 기록에서 가문의 미래를 내다본 “현명한 여성”으로 거듭 그려진다는 점도 분명하다.2

1-2. 다섯 개의 이름

나오시게는 평생 이름을 여러 번 바꿨다. 사가번 기록과 동시대 문서에서 확인되는 이름은 이렇다.

이름·관직확인 시점근거
히코호시마루(彦法師丸)1541–1551년『시료소란』·『호쿠히센시』
사에몬노다이후 노부야스(左衛門大輔 信安)1565년 4월 11일혼조 신사 보전 상량 명문(형 노부후사와 함께 발원주)
노부마사(信昌)1570–1579년1579년 사찰 관리 문서
노부나리(信生)1582–1586년1582년 개명(『호쿠히센시』), 1584년 마사이에의 기청문 수신인, 1586년 기청문 서명 “나베시마 히다노카미 노부나리”
카가노카미 나오시게(加賀守 直茂)1589년 정월 7일궁중 일기 『오유도노노우에노 닛키(御湯殿上日記)』에 근거한 『시료소란』

『한칸후』에는 나오시게가 1584년 타카노부가 죽자 곧바로 카가노카미(加賀守) 나오시게로 이름을 바꿨다고 나오지만, 1586년에 쓴 기청문 서명이 여전히 “히다노카미(飛驒守) 노부나리”이므로 이 시점은 맞지 않는다. 그가 나오시게라는 이름을 쓴 것은 히데요시 정권 아래서 종5위하 카가노카미에 서임되고 도요토미 성과 하시바 성을 받은 1589년부터다.3

2. 이마야마 야습과 행엽 카몬 (1570)

검은 갑옷에 붉은 끈을 두르고 왼쪽에 투구를 내려놓은 채 앉은 나베시마 나오시게. 머리를 민 노년의 모습으로, 허리에 큰 칼과 작은 칼을 찼다
갑옷 차림의 나베시마 나오시게 초상화(작자 미상, 에도 시대 이전, 퍼블릭 도메인)

1570년 여름, 분고(豊後)의 오토모 소린(大友宗麟)은 세력을 키워 가던 류조지 타카노부를 치려고 사가성을 포위했다. 8월 20일 사가성 북쪽 이마야마에 진을 친 오토모 쪽 부대가 밤사이 기습을 받아 무너졌고, 대장 오토모 하치로(大友八郎)가 죽었다. 이것이 이마야마 전투다. 나베시마 쪽 편찬물에서는 이 싸움이 나오시게의 큰 공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이마야마 전투에 대해 동시대 문서로 확인되는 것은 많지 않다. 타카노부가 8월 26일 가신 나리마츠 노부카츠(成松信勝)에게 준 칸조(感状, 전공을 인정하는 문서)에는 “지난 20일 이마야마에서 분고 진영을 무너뜨릴 때 오토모 하치로를 베어 잡은 일은 비할 데 없는 공명”이라고 쓰여 있다. 이 문서에 나오시게의 이름은 없다. 패전 소식을 들은 소린이 8월 22일 히젠의 타지리 아키타네(田尻鑑種)에게 보낸 답장에는 “싸움에서 흔한 일이니 조금도 놀랄 것 없다”는 말이 들어 있다. 오토모의 본진과 다른 방면의 포위군은 그대로 남았고, 류조지와 오토모는 그해 10월 화친했다. 류조지 가문 연구자 호리모토 가즈시게(堀本一繁)는 이 승리가 국지적이었으며 류조지 가문은 이후에도 오토모에 대한 종속 자세를 유지했다고 본다.4

2-1. 나오시게가 이끌었다는 이야기

나오시게가 야습을 제안하고 앞장섰다는 이야기는 이 글에서 확인한 동시대 문서에는 보이지 않고 후대 편찬물에 나온다. 이번에 대조한 기록 가운데 연대가 분명한 것으로 가장 이른 것은 사건 132년 뒤의 『한칸후』다. 세 기록을 나란히 놓으면 이렇다.

항목『히요군키』(성립 연대 미상)『한칸후』(1702)『호쿠히센시』(1720)
오토모 군 규모소린 본진, 도세츠 등 3만여 기10만여 기북쪽 3만여 기. 10만 기는 성안의 소문
야습을 권한 사람노부나리가 진언, 타카노부가 웃으며 허락노부나리가 타카노부에게 권함노부나리가 진언했으나 아무도 따르지 않자 케이긴니가 군의에 나와 질타
출발 병력17기 → 300여 기 → 700여 기17기, 타카노부가 뒤이어 돌입17명 → 300 → 700, 별동대 따로
오토모 하치로를 벤 사람나리마츠 노부카츠언급 없음나리마츠 노부카츠

표의 노부나리(信生)는 나오시게가 1582–1586년에 쓴 이름이다. 세 기록에는 모두 이 이름으로 나오지만, 이마야마 무렵의 이름은 『시료소란』에 노부마사(信昌)로 나온다.

『한칸후』에는 나오시게가 “자기 수하 17기로(おのが手勢十七騎にて)” 앞장서고 타카노부가 뒤따라 쳐들어갔다고만 나오고, 동시대 칸조에 이름이 남은 나리마츠의 공은 빠져 있다. 『호쿠히센시』에서는 예순이 넘은 케이긴니가 군의 자리에 들어와 “성안 꼴을 보니 모두 고양이를 만난 쥐 같구나”라고 꾸짖어 야습이 결정된다. 기록마다 공을 돌리는 방향이 다르다. 『한칸후』는 나오시게 한 사람에게 공을 모으고, 『호쿠히센시』는 케이긴니의 질타를 새로 넣는다.

그렇다고 나오시게가 이 싸움과 무관했다는 뜻은 아니다. 사료편찬소가 동시대 문서와 후대 기록을 함께 검토해 세운 『시료소란』의 강문(綱文, 사건 요약문)에는 “타카노부의 장수 나베시마 노부마사(信昌) 등이 이마야마에서 오토모 하치로를 습격해 베었다”고 되어 있다. 나오시게가 야습에 참여한 장수 가운데 하나였다고 말하는 데까지는 무리가 없다. 오토모 하치로라고 나오는 장수의 실명은 기록마다 치카사다(親貞)·치카히데(親秀)로 갈리는데, 정작 오토모 가문 쪽 기록에는 이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5

2-2. 행엽 카몬은 오토모에게서 왔나

나베시마 가문의 카몬(家紋)은 행엽(杏葉, 교요)이다. 말 장식에서 온 무늬로, 오토모 가문의 카몬이기도 했다. 나오시게가 이마야마에서 이 카몬을 빼앗아 왔다는 유래담이 있다. 『한칸후』에서는 나오시게 본인이 남에게 회고한 형식으로 나온다. 오토모 진영에 숨어들어 신호를 기다리는데 화톳불에 비친 행엽 카몬이 아름다워 “이기면 저것을 가져다 내 카몬으로 삼으리라 생각했는데(取て我が紋とせん者をと思ひしが)” 정말 이겼으니 길한 선례로 삼자며 원래의 켄비시(剣菱) 카몬을 버리고 행엽으로 바꿨다는 내용이다.

같은 장면이 『히요군키』에도 행엽으로 나오지만 『호쿠히센시』에서는 장막의 카몬이 「양하 둥근 무늬(茗荷の丸)」이다. 오토모 가문이 양하 무늬를 행엽이라 불렀다는 지적도 있어 두 무늬가 같은 것을 가리켰을 가능성은 있다. 바꾸기 전 카몬이 켄비시였다고 쓴 것은 확인한 기록 가운데 『한칸후』뿐이다. 『히요군키』의 성립 연대를 알 수 없으므로 이 유래담이 처음 언제 등장했는지는 확정할 수 없다. 연대가 분명한 기록으로는 이 유래담도 『한칸후』가 가장 이르다.

실물로 확인되는 것은 행엽이 17세기 전반에 이미 나베시마 가문의 카몬이었다는 사실이다. 나베시마 호코카이(鍋島報效会, 나베시마 가문 전래 자료를 관리하는 재단)에 전하는 불탄 갑옷 가운데 하나는 앞장식과 토시에 행엽 무늬 쇠장식이 달려 있고, 초대 번주 카츠시게 시대의 도구 장부와 내용이 일치한다. 언제부터 행엽을 썼는지는 알 수 있어도, 그것이 이마야마에서 왔다는 것까지는 증명하지 못한다.6

2-3. 류조지 가문의 확장과 나오시게

히젠·치쿠고·히고 북부를 그린 지도. 히젠 동부에 사가성과 그 곁의 혼조·하스이케, 북쪽의 이마야마·오기·다쿠가 있고, 서남쪽에 스코성·다케오, 동쪽 치쿠고에 야나가와성, 히고에 쇼다이성, 시마바라 반도에 오키타나와테, 서남단에 이사하야·나가사키가 표시되어 있다
나오시게 시대 북서 규슈의 주요 지점(령국 경계는 에도 말기 기준). 일본 인문학오픈데이터공동이용센터(CODH)의 옛 령국·군 경계 데이터를 가공, CC BY-NC 4.0

이마야마 이후 10여 년 동안 류조지 가문은 히젠을 거의 통일하고 치쿠고(筑後)·히고(肥後)까지 손을 뻗었다. 이 시기 나오시게가 주어로 나오는 『시료소란』의 항목은 1574년 스코성(須古城) 히라이 츠네하루(平井経治)를 그 동생을 꾀어 몰아낸 일, 1579년 히고 쇼다이성(小代城)을 항복시킨 일, 같은 해 타이초인(泰長院)이라는 절에 다른 절의 관리를 맡긴 일 정도다. 1580년 무렵 류조지 가문의 영지 배분 장부에 따르면 나오시게의 지행(知行, 가신이 받은 영지)은 530정(町)으로, 형 노부후사(500정)와 다른 중신들을 웃돌아, 류조지 일족과 새로 복속한 고쿠진(新参)을 빼면 가신단에서 가장 컸다.

나오시게가 주군의 신임을 계속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이야기가 다르다. 『한칸후』에는 타카노부가 나오시게를 멀리하려고 1579년 야나가와성(柳川城)을 주었다고 나오지만, 야나가와는 1581년 타카노부가 카마치 시게나미(蒲池鎮並)를 죽일 때까지 카마치 가문이 지키던 성이었다. 『호쿠히센시』에 따르면 나오시게는 1582년 무렵부터 타카노부의 아들 마사이에와 함께 야나가와성에 머물며 치쿠고와 히고를 다스렸다. 후계자와 함께 보냈으니, 멀리하려고 야나가와를 주었다는 『한칸후』의 설명과는 맞지 않는다.7

야나가와에 머물던 이 무렵 나오시게는 히데요시와도 연락하고 있었다. 혼노지의 변 한 달 뒤이자 타카노부가 아직 살아 있던 1582년 7월 11일, 하시바 히데요시는 나오시게가 보낸 남만 모자(南蛮帽子)에 고맙다는 서장을 보냈다. 가로세로 10cm 남짓한 작은 종이에 쓴 밀서로, 나베시마 호코카이에 남아 있다. 나오시게는 주군과 별도로 히데요시와 직접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8

3. 오키타나와테 — 타카노부의 죽음 (1584)

옅은 청색 평상복에 검은 에보시를 쓰고 부채를 쥔 채 앉은 류조지 타카노부의 상반신. 오른쪽 위에 카이묘 泰巌宗龍大居士와 날짜 天正十二年三月廿四日, 이름 隆信이 적혀 있다
류조지 타카노부 초상화. 오른쪽 위에 전사한 날짜 덴쇼 12년(1584) 3월 24일이 적혀 있다(작자 미상, 17세기, 나리마츠 가문 전래, 사가현립박물관 전시, 퍼블릭 도메인)

1584년 3월 24일, 타카노부는 시마바라 반도의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를 치러 갔다가 아리마를 도우러 온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의 군대에 오키타나와테에서 크게 졌고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 56세였다. 좌우가 늪인 좁은 길에 본대가 갇힌 것이 패인이었다고 전한다.

이 전투에서 나오시게가 맡은 자리는 사가번 기록마다 조금씩 다르다. 『호쿠히센시』에는 처음에 마사이에와 나오시게가 가운데 길을 맡기로 했는데 24일 아침 갑자기 타카노부가 가운데 길로 가고 두 사람은 산 쪽으로 돌라는 명령이 왔다고 나온다. 『나오시게코후 코호』는 마사이에를 사가에 남기고 나오시게에게 가운데 길을 맡겼다고 하는 등 세부가 다르다. 어느 기록이든 나오시게의 부대는 타카노부 본대가 무너지는 동안 살아남았다.9

3-1. 간언과 자결 만류

나오시게가 출진을 말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오시게코후 코호』에서 나오시게는 야나가와성에서 출진 소식을 듣고 “이제 가문이 망할 때가 왔다. 그래도 안 되더라도 간언은 해 보겠다”고 하며 스코로 달려가 타카노부에게 덕으로 다스리라는 긴 간언을 올린다. 『한칸후』도 타카노부가 “노부나리의 계책을 쓰지 않고(隆信、信生が謀を用ゐずして)” 출진했다고 나온다. 그러나 이 간언을 뒷받침하는 동시대 문서는 찾지 못했다. 『나오시게코후 코호』는 1841년에 완성된 책이다.

패전 직후의 나오시게에 대해서는 두 가지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호쿠히센시』에는 퇴각하던 나오시게가 주군을 따라 죽겠다며 예닐곱 번이나 적진으로 말머리를 돌리려 했고, 그때마다 가신 나카노 시키부(中野式部)가 갑옷 소매에 매달려 말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나오시게코후 코호』에는 자결하려던 나오시게를 시키부가 말렸다는 이야기가 “아야베 우쿄(綾部右京)가 늘 하던 이야기”라는 출처와 함께 실려 있다. 『나오시게코후 코호』의 이야기는 가신 집안에 대대로 전해 오던 구전을 후대에 책을 편찬하면서 받아 적은 것이다. 여하튼 주군을 잃었지만 전투에서 살아남은 나오시게는 미에(三會)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건너 25일 야나가와성으로 돌아왔다고 전한다.10

3-2. 타카노부의 수급

동시대 기록이 분명하게 남은 것은 타카노부의 수급이 어떻게 되었는가다. 시마즈 가문 가로 우와이 캇켄(上井覚兼)의 일기에 따르면 수급은 3월 26일 히고 사시키(佐敷)의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 진영에 도착했다. 그날 시마즈 진영에서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고 낮은 사람이고 할 것 없이 몰려들어 적장의 수급을 구경했고, 27일 요시히사가 수급을 검분하고 한참 동안 합장하며 명복을 빌었다.

시마즈 쪽은 수급을 사가로 돌려보내려 했다. 사가번 쪽 기록 『후몬슈(普聞集)』에 따르면 사자가 치쿠고 에노키즈(榎津)까지 와서 이 뜻을 전하자 사가 쪽은 합의 끝에 “운이 다한 해골은 쓸 데가 없다”며 받지 않았고, 사자는 히고 타카세(高瀬)의 간교지(願行寺)에 수급을 맡기고 돌아갔다. 수급을 거절한 사람이 나오시게였다거나 케이긴니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후몬슈』에는 “사가 쪽의 합의”로만 나와 있고 특정 인물을 가리킨 근거는 찾지 못했다.11

4. 가문 운영을 떠맡다 — 기청문에서 히데요시의 슈인조까지

타카노부가 죽었을 때 후계자 마사이에는 29세였다. 『한칸후』에는 마사이에가 아직 어려 가문이 망하게 되자 일족과 가신들이 나오시게를 사가성으로 불러들여 “임시로 영국의 일을 맡겼다(權に國中の事を行はしむ)“고 나온다. 마사이에가 어렸다는 부분은 틀렸고, 나오시게도 곧바로 사가성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한동안 야나가와에 있다가 사가 동쪽의 하스이케(蓮池)로 옮겨 정무를 보았다. 하지만 큰 줄기는 맞다. 이 무렵부터 나오시게는 류조지 가문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그 과정은 다행히 당사자들이 주고받은 문서가 남아 있어 추적할 수 있다. 사가번 편찬물 안에 사본으로 남은 이 문서들을 분석한 사람이 규슈의 근세사 연구자 다카노 노부하루다.

4-1. “부자·형제처럼” — 1584년 마사이에의 기청문

타카노부가 죽고 보름쯤 지난 4월 8일, 마사이에는 피로 수결한 기청문을 나오시게에게 주었다.

一 従最前家を被存候上者、於于今茂親子兄弟之様ニ、何篇無腹蔵可申承之事 一 於虎口其方及難儀者、乍勿論見捨申間敷事 〔中略〕 一 我等依若輩、可請異見、無腹蔵承候者、如何躰ニ被仰候共、気ニ懸申間敷之事

진작부터 가문을 지켜 주셨으니 지금도 부자·형제처럼 무슨 일이든 숨김없이 말씀을 나누겠다. 싸움터에서 그대가 곤경에 빠지면 물론 버리지 않겠다. (중략) 내가 아직 미숙하니 의견을 청하겠다. 숨김없이 들려준다면 어떤 말씀을 하셔도 마음에 두지 않겠다.

— 류조지 마사이에가 나베시마 노부나리에게 준 혈판 기청문(1584년 4월 8일, 일부)

주군이 가신에게 존경어를 쓰고 “의견을 청하겠다”고 맹세한 문서다. 6월에는 마사이에가 평시든 전시든 “노부나리의 지시대로” 하고 따르지 않는 자는 처분을 맡기겠다는 서장을 다시 보냈다. 같은 시기 류조지 일문 안에서는 “나오시게가 가문을 노린다”는 소문이 돌았고, 마사이에는 6월 23일 이를 부정하는 기청문까지 써야 했다. 나베시마가 류조지를 빼앗는다는 의혹은 후대의 해석이 아니라 타카노부가 죽은 그해부터 있었다.12

4-2. “기력이 다했다” — 1586년의 가문 운영 위임

2년 뒤인 1586년 4월, 류조지 가문의 일문·중신과 마사이에, 나오시게 사이에 다시 기청문이 오갔다. 이번에는 가문 운영(御家裁判)을 나오시게에게 정식으로 맡기는 문서였다. 나오시게는 먼저 사양했다. 그가 일문·중신에게 낸 기청문에는 “가문 운영을 맡으라 하셨으나 기력이 다해 못 하겠다고 사양했는데, 여러분이 그 뜻을 어기지 말라 하시니 우선 조언에 따르겠다”고 쓰여 있다. 이때 쓴 서명이 “나베시마 히다노카미 노부나리”다.

나머지 두 쪽의 문서는 더 직설적이다. 마사이에는 “설령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더라도 여러분과 상의하지 않고 내 뜻대로 히다노카미의 처지를 바꾸지 않겠다”고 썼다. 일문·중신은 마사이에에게 “마사이에의 독단으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 어기면 우리는 마사이에와 갈라서겠다”고 썼다. 다카노는 이 문서들을 근거로 가문 운영 위임이 나오시게 한 사람에게 전권을 준 것이 아니라 일문·중신과의 합의제였고, 그 배경에 마사이에와 일문·중신의 대립이 있었다고 해석했다. 다카노가 본 대립의 구도는 이렇다. 마사이에는 나오시게에게 전폭적인 신뢰와 기대를 보냈고, 일문·중신은 나오시게를 상대적인 위치에 두고 견제하면서 마사이에의 독단도 막으려 했다. 다카노의 해석대로라면 나오시게는 주군을 밀어낸 사람이 아니었고, 그를 믿는 주군과 그를 견제하는 일문·중신 사이에서 합의로 세워진 운영자였다.13

4-3. 히데요시가 본 나오시게

1587년 히데요시가 규슈를 평정하자 류조지 가문은 사가·칸자키(神埼) 등 히젠 7군을 안도(安堵, 영지 소유를 공인함)받았다. 나오시게도 따로 히데요시에게 영지 슈인조를 받았다. 일찍부터 히데요시와 통하던 그는 규슈 정벌 때 히데요시의 지령을 현지 다이묘들에게 전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해 11월 히데요시가 나오시게에게 보낸 슈인조는 “류조지와 그대는 모든 일에 빈틈이 없도록 각오하고 충절에 힘쓰라”는 말로 끝난다. 주군 가문과 가신을 한 줄에 나란히 놓은 문장이다. 이듬해 나오시게는 나가사키 다이칸(代官, 직할지 관리)에 단독으로 임명되었고, 1589년에는 종5위하 카가노카미가 되었다. 다카노는 도요토미 정권이 나오시게를 사실상 독립적인 다이묘의 격으로 대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14

류조지 가문 안의 정리도 이어졌다. 1588년 11월 28일 마사이에는 적자 나가호시마루(長法師丸, 훗날의 타카후사)를 나오시게의 양자로 삼고 나오시게에게 류조지 성을 주는 대신, 나오시게의 적자 이세마츠마루(伊勢松丸, 훗날의 카츠시게)의 상속도 보장한다는 문서를 써 주었다. 나오시게는 류조지 성을 사양했다. 다카노는 그 첫째 이유를 나오시게가 일문·중신의 반발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보면서도, 류조지를 벗어나 히데요시에게 독립 다이묘로 인정받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사가번 편찬물에는 마사이에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를 통해 나오시게에게 국정을 맡기는 일을 히데요시에게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나온다.15

4-4. 1590년의 지행 배분과 “국정 위임” 슈인조

어린 타카후사를 당주로 세우고 나오시게가 가문 운영을 맡는 이 구도를 도요토미 정권이 문서로 확정한 것이 1590년 정월 8일 히데요시가 류조지 타카후사 앞으로 낸 지행 배분 슈인조다. 사본이 나베시마 호코카이에 남아 있다. 히젠 30만 9,902석을 가신들에게 나누는 내용인데, 나오시게(“鍋嶋加賀守”)가 4만 4,500석으로 일문·중신 가운데 가장 많고 카츠시게(“龍造寺いせ松”)가 9,000석이다. 수신인은 다섯 살짜리 타카후사다. 같은 해 마사이에는 병을 이유로 은거했다. 명목상 류조지 당주는 타카후사이고, 나오시게는 그 가신단 안에서 최대 규모의 영지를 가진 가신이었다. 다카노는 이 문서로 나오시게가 “류조지 타카후사를 당주로 하는 류조지 체제 안에 다시 자리매김되었다”고 보았다.

사가번 쪽 기록은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인다. 『나오시게코후』에는 정월 슈인조 두 달 뒤 나오시게에게 “더욱 국무를 맡으라”는 명이 내려와 히젠 35만 7,030석의 슈인조를 받았다고 나오고, 『호쿠히센시』에는 그 날짜가 3월 7일로 되어 있다. 『한칸후』에도 “나오시게가 정무를 처리하라는 명을 받았다(直茂政務を沙汰すべきよしの仰を承る)“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 35만 석 슈인조는 원본도 사본도 확인되지 않는다. 나베시마 가문 문서의 슈인조를 여럿 분석한 다카노의 논문도 이 문서는 다루지 않는다. 현재로서는 사가번 편찬물이 전하는 내용으로만 볼 수 있다.16

4-5. 스스로 가신이라 쓰다

도요토미 정권이 나오시게를 어떻게 대했든 나오시게 자신은 계속해서 류조지 타카후사의 가신이라는 형식을 지켜 행동했다. 1592년 조선 출병 때도 도요토미 정권은 군역을 일곱 살 타카후사가 아니라 나오시게에게 부과했다. 그런데 조선에 있던 1592년 11월 28일 나오시게가 히젠의 신사들에 올린 원문(願文, 신불에 비는 글)에는 “도요토미노아손 타카후사의 구족·가중(家中, 가신단) 상하”를 위해 비는 대표로 자기 이름을 올렸다. 영지를 받고 군대를 이끄는 사람은 나오시게였지만, 이 원문에서 그는 류조지 가신단의 대표로 처신했다.17

5. 임진왜란 — 함흥 주둔과 끌려간 사람들

1592년 임진왜란에서 나오시게는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2번대에 소속됐다. 진립서(陣立書, 출병 편성표)에 따르면 2번대는 가토 1만, 나베시마 1만 2,000, 사가라 나가츠네(相良長毎) 800으로 모두 2만 2,800명이었다. 대장은 가토였지만 병력은 나베시마 쪽이 더 많았다. 4월 부산에 상륙한 2번대는 경상도를 거쳐 북상해 5월 3일 한성에 들어갔다.18

5-1. 함흥의 나오시게

한성 점령 이후 가토와 나오시게는 함경도 방향으로 향했다. 함경도에서 두 사람은 사실상 따로 움직였다. 가토는 북쪽 끝 회령까지 올라가 두 왕자를 사로잡았고 길주·북청 같은 북부 거점에 수비대를 두었다. 나오시게는 남쪽의 함흥에 본진을 두었다. 조선사편수회가 종군 승려의 일기와 사가번 기록 등을 근거로 정리한 『조선사(朝鮮史)』에는 1592년 7월 나오시게가 함흥에 진을 치고 덕원·문천·고원·영흥·정평·홍원·단천 등 여러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며 관리와 백성을 달래고 조세를 거두어 “오래 머물 계책”을 세웠다고 나온다. 점령지 행정이었다.

함흥의 나베시마 군은 조선 관군과 의병의 공격을 여러 번 받았다. 1592년 10월 이유일(李惟一) 등이 함흥을 공격했다가 물러났고, 11월에는 북병사 성윤문(成允文)과 의병장 유응수(柳應秀) 등이 원평(元平)에 진을 쳤다가 나오시게의 출격으로 크게 졌다. 한국어 자료 가운데에는 나오시게가 북관대첩에서 정문부(鄭文孚)에게 패했다고 쓴 것이 있는데, 정문부 의병이 포위한 길주성은 가토 쪽 수비대가 지키던 곳이다.19

1593년 1월 평양에서 일본군이 패하자 히데요시는 가토와 나오시게에게 함경도에서 물러나라고 명했다. 『시료소란』에 따르면 이해 2월 조선의 두 왕자(임해군·순화군)가 함흥에서 후하게 대접받은 데 대해 나오시게에게 감사한다는 문서가 나베시마 가문 문서에 남아 있다. 3월 나오시게는 함흥을 떠나 한성으로 철수했다. 『시료소란』에는 명의 심유경이 두 왕자를 돌려보내고 철수하라고 요구했을 때 응하지 않은 장수로 가토와 나오시게가 함께 나온다.20

5-2. 김해의 “도요토미 나오시게”

1593년 6월의 제2차 진주성 전투에 나베시마 군도 참전했다. 그 뒤 나오시게는 경상도 김해의 죽도성(竹島城)을 지켰다. 이 무렵 그는 조선 측 기록에 이름을 남긴다. 『선조실록』 1594년 11월 18일에는 “일본의 도요토미 나오시게(豐臣直茂)가 조선 이 장군 막하에 다시 답한다”로 시작하는 편지가 실려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가 화친을 의논하고 싶어 하니 이치에 밝은 사람을 김해로 보내 달라는 내용이다. 1596년 통신사 황신(黃愼)이 얻은 일본 문서에도 “죽도, 나베시마 카가노카미(鍻嶋加賀守)“라는 글자가 나온다.21

5-3. 정유재란의 4번대

나오시게는 1597년 4월 귀국해 오사카에서 히데요시를 만났고, 곧 다시 출정했다. 이번에는 가토와 같은 부대가 아니었다. 1597년 2월 21일 자 진립서에서 “나베시마 카가노카미·같은 시나노노카미(信濃守)”, 곧 나오시게·카츠시게 부자는 1만 2,000명으로 4번대를 단독으로 맡았다. 『시료소란』에 따르면 부자는 8월 16일 모리 히데모토·가토 기요마사·구로다 나가마사 등과 함께 황석산성을 함락했고, 8월 23일에는 전라도 금구와 김제 사이를 오가며 싸웠다. 11월 나오시게는 경상도 칠원·함안·창원·의령 네 고을을 맡아 민정 규정을 내렸다. 『선조실록』 1598년 9월 28일에는 “김해부에 1만여 명이 있으니 곧 풍직무(豐直茂)가 거느리는 것”이라고 나와 있다.

『한칸후』에는 정유재란 때 나오시게가 하치스카 이에마사·안코쿠지 에케이와 함께 “조선의 이쿠사부교(軍奉行, 전투 지휘·군무를 맡은 직책)“를 맡았다고 되어 있다. 『시료소란』에는 나오시게가 이런 직책을 맡았다는 강문이 없고, 정유재란 때 각 부대를 감독한 이쿠사메츠케(軍目付, 군 감찰관)를 조사한 고치대학의 쓰노 도모아키(津野倫明) 연구의 명단에도 나오시게는 보이지 않는다.22

나오시게는 히데요시가 죽은 1598년 겨울 다른 장수들과 함께 철수했다.

5-4. 끌려간 사람들

흰 바탕에 짙은 남색으로 소나무 위의 새 두 마리와 바위, 구름을 그린 둥근 청화 백자 접시. 가장자리에 구름 무늬 띠가 둘려 있다
소나무에 새 무늬 접시. 1620~40년대 히젠에서 구운 초기 이마리 양식 청화 백자(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CC0)

나베시마 군이 조선에서 데려간 사람들 가운데 기록이 가장 구체적으로 전해지는 사람은 홍호연(洪浩然)이다. 사가현이 지정한 홍씨 집안 전래 자료의 해설에 따르면 그는 1593년 6월 말 제2차 진주성 전투 때 진주 근교 산청에서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군대에 붙잡혔다. 열두 살 무렵이었다. 일본에 건너가 교토의 선종 사찰에서 공부한 그는 글씨를 잘 쓰는 것으로 이름을 얻었고 카츠시게의 측근이 되었다. 훗날 조선으로 돌아가겠다고 청해 허락을 받았지만, 배를 타기 전 사가번 경계에서 다시 불려 와 뜻을 접었다고 한다. 1657년 카츠시게가 죽자 그 소식을 들은 홍호연은 사가의 아미다지(阿弥陀寺)에서 할복했다.23

한국 독자에게 더 익숙한 이름은 아리타 자기의 시조로 모셔지는 이삼평(李参平)이다. 『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와 『세계대백과사전(世界大百科事典)』 같은 일본 백과사전에는 그가 나오시게의 가신 다쿠 야스시게(多久安順)가 데려왔다고 전해진다는 도공이라고 나온다. 그가 유명한 건 1616년 아리타의 이즈미야마(泉山)에서 조선식 백자를 구울 수 있는 원료 돌을 찾아냈다는 이야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의 출처는 후손 가나가에(金ヶ江) 집안의 문서인데, 이 문서가 언제 쓰였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실재가 확인되는 것은 1655년 8월에 죽은 가나가에 산베에(金ヶ江三兵衛)라는 사람이다. 일본 백과사전들은 이 산베에를 이삼평의 일본 이름으로 본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의 아리타 자기가 이삼평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사가현립 큐슈도자문화관은 1610년대 아리타의 도자기 생산이 마을 서쪽의 조선인 도공 집단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1616년 산베에가 다른 도공들과 함께 아리타로 옮겨 와 이즈미야마의 원료석을 발견했다고 “전한다”고 설명한다. 이삼평이 처음 자기를 구웠다고 전하는 텐구다니(天狗谷) 가마는 발굴 조사로 1630년경부터 1660년대까지 쓰인 가마로 밝혀졌다. 다케오의 고토 이에노부(後藤家信)가 데려왔다는 도공 종전(宗伝)은 다케오 우치다에 가마를 열었고, 그가 죽은 뒤 아내 백파선(百婆仙)이 일족을 이끌고 아리타 히에코바(稗古場)로 옮겼다. 아리타 자기는 여러 영주가 데려간 많은 조선인 도공들이 함께 일으킨 산업이었다.24

6. 세키가하라 — 서군에 선 아들과 야나가와 공격 (1600)

히데요시가 죽은 뒤의 나오시게에 대해서는 『한칸후』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1599년 히데요시가 남긴 오사카의 부교(奉行)들과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의 갈등으로 오사카와 후시미 사이가 소란해지자 “나오시게가 가장 먼저 후시미에 와서(直茂最初に伏見に來て)” 이에야스의 저택을 지켰고, 이에야스가 크게 기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일은 다른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아 나베시마 가문 쪽에 전해지는 전승으로 보아야 한다.

이듬해 세키가하라 전쟁이 일어났을 때 나오시게는 사가에 있었다. 나베시마 군을 이끌고 간사이에 있던 것은 21세의 아들 카츠시게였다. 『한칸후』에 따르면 카츠시게는 우에스기 토벌에 나선 이에야스를 따라 동쪽으로 가다가 이시다 미츠나리가 오미의 에치가와(愛知川)에 관문을 세워 길을 막고 오사카의 부교들이 히데요리의 명을 내세우자, 히데요리의 명을 거스를 수 없다며 되돌아가 서군에 섰다. 카츠시게는 후시미성 공격에 가담했고, 이어 이세의 아노츠성(安濃津城)과 마츠사카성(松坂城)을 공격한 뒤 노시로(野代)에 진을 쳐 나가시마성의 동군을 견제했다. 9월 14일 미츠나리 쪽이 오가키로 불렀지만 대신 지킬 사람이 없다며 남았고, 이튿날 세키가하라 본전의 패보를 들었다. 카츠시게는 본전에 참가하지 않았다.25

6-1. 사죄와 조건

『한칸후』에는 소식을 들은 나오시게가 크게 놀라 사자를 보내 “나는 전부터 나이후(內府, 이에야스)와 맹세한 바가 있다. 동쪽 군세를 향해 활을 당기지 말라”고 아들을 말렸다고 나온다. 사죄의 경로는 기록마다 다르다. 『한칸후』에서는 카츠시게의 가신이 몰래 구로다 나가마사를 찾아갔고, 나가마사가 이이 나오마사와 의논해 이에야스에게 아뢰자 이에야스가 “이에야스는 그의 아버지 나오시게와 약조한 바가 있다(家康彼が父直茂と約せし事あり)“며 그 자리에서 용서했다. 사료편찬소의 『시료소란』에서는 카츠시게가 이이 나오마사, 혼다 마사노부, 그리고 사가 출신 학승 칸시츠 겐키츠(閑室元佶)를 통해 사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이 나오마사는 두 쪽 기록에 모두 나온다. 오이카와 와타루(及川亘)의 2026년 연구도 구로다 나가마사 등의 주선을 언급한다.

용서에는 조건이 붙었다. 서군에 섰던 야나가와의 타치바나 무네시게를 쳐서 죄를 갚으라는 것이었다. 9월 25일 이에야스와 히데타다를 만난 카츠시게는 류조지 타카후사를 오사카에 남겨 두고 사가로 돌아갔다. 나베시마 부자는 10월 14일 사가를 나서 먼저 모리 히데카네(毛利秀包)의 구루메성을 접수했고, 10월 20일 야나가와 북쪽의 에가미(江上)·하치인(八院)에서 타치바나 군을 크게 깨뜨렸다. 이 싸움의 자세한 경위는 타치바나 긴치요 편에서 다뤘다. 그 뒤 구로다 조스이와 가토 기요마사가 무네시게에게 성을 내놓으라고 권해 야나가와성이 넘어갔다. 12월에는 구로다·가토·나베시마가 함께 시마즈 가문을 치러 히고 미나마타까지 나아갔으나, 시마즈가 사죄 뜻을 밝히자 군사를 되돌렸다.26

그 결과 아들 카츠시게가 세키가하라에서 서군 측에 섰음에도 나베시마 가문은 본령이 그대로 안도되었다. 오이카와 와타루(2026)는 이때 나오시게에게 35만 7,000여 석의 본령이 안도되었다고 쓴다. 이 수치는 사가번 편찬물에 나오는 것이고, 안도 문서의 원문은 확인하지 못했다. 『한칸후』는 이 수치를 카츠시게의 손자인 2대 번주 미츠시게(光茂)가 가문을 이은 부분에 붙여 놓았다.27

7. 류조지 가문의 끝 — 타카후사 사건과 카츠시게의 승계

검은 정장 차림에 관을 쓰고 홀을 든 채 옆을 향해 앉은 노년의 나베시마 카츠시게. 녹색 바닥 위에 앉아 있고 오른쪽 뒤로 칼이 보인다
나오시게의 아들이자 사가번 초대 번주 나베시마 카츠시게 초상화(작자 미상, 1661년, 나베시마 호코카이 조코칸 소장, 퍼블릭 도메인)

세키가하라 뒤 도쿠가와 정권은 나베시마 부자를 사실상 사가의 다이묘로 대했다. 도쿄대 사료편찬소의 오이카와 와타루가 2026년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1604년 윤8월 명목상의 당주 류조지 타카후사가 종5위하 스루가노카미에 서임되고 히데타다를 섬기며 에도에 머물게 되었다. 오이카와는 이 에도 근무가 사실상 인질의 성격이 강했고, 막부가 사가번 운영은 나오시게에게 맡기고 그 적자 카츠시게에게 이에야스의 양녀를 시집보냄으로써 나오시게 다음은 카츠시게가 잇는다는 방침을 보였다고 해석했다. 타카후사가 에도로 가기 전까지 사가성에서는 명목상의 당주 타카후사가 성주의 거처인 혼마루에, 카츠시게는 후계자로서 니노마루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28

7-1. 1607년 3월의 사건

1607년 3월 3일, 에도 사쿠라다의 저택에서 타카후사가 아내를 찔러 죽이고 자신도 배를 갈랐다. 그는 바로 죽지 않았다. 아내는 나오시게의 양녀였다. 『카츠시게코후 코호(勝茂公譜考補)』에 따르면 혼다 마사노부와 오쿠보 타다치카가 찾아와 까닭을 물었지만 타카후사는 대답하지 않았고, 막부는 “난심(亂心)“으로 결론 내렸다. 타카후사는 그해 9월 6일 22세로 죽었고, 아버지 마사이에도 10월 2일 52세로 죽었다. 류조지 종가는 다이묘 가문으로서는 여기서 끝났다.

카츠시게가 류조지 가독을 이어받은 시점은 연구자마다 다르게 본다. 『카츠시게코후 코호』의 설명은 이렇다. 타카후사가 죽은 뒤 막부가 류조지 일문을 에도로 불러 총령(惣領, 집안의 적통)을 이을 사람을 천거하라 했고, 일문은 나오시게가 이을 만하지만 나이가 많으니 적자 카츠시게를 총령으로 삼아 달라고 청했다. 오이카와는 2023년 심포지엄 발표에서 다른 결론을 냈다. 6월 14일 자 카츠시게 서장에 막부의 가독 승인에 대한 답례를 상의하라는 지시가 있으므로 승계는 타카후사가 살아 있던 5월에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동시대 서장에 근거한 해석이라 무게가 실린다. 시점이 류조지 타카후사가 살아 있을 때인지, 아니면 사망한 후인지는 다르지만 어찌 됐든 가독을 이어받은 사람은 나오시게가 아니라 카츠시게였다.29

7-2. “누구를 겨냥한 것입니까”

사건 다섯 달 가까이 뒤인 1607년 7월 26일, 나오시게는 마사이에에게 서장을 보냈다. 류조지 일문인 다쿠 가문에 사본이 전한다.

一 隆信樣御戰死以來、御家御相談候樣ニと、色々相歎候得共、親類中誰人まても御家可續、一言被相副人無之候而、誠ニ不辨のたんそくにて、今迄如斯相續之事 〔中略〕 一 今度藤八郎殿、御腹被召候儀、誰人ニ御あて被成候哉

타카노부 님 전사 이래 가문 일을 함께 의논해 주십사 여러모로 청했으나, 친척 가운데 누구 하나 가문이 이어지도록 한마디 거들어 준 사람이 없어 참으로 변변찮은 한탄 속에 지금까지 이렇게 이어 왔습니다. (중략) 이번에 토하치로(타카후사) 님이 배를 가르신 것은 누구를 겨냥하신 것입니까.

—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류조지 마사이에에게 보낸 서장(1607년 7월 26일, 일부)

같은 서장에서 나오시게는 조선 출병 중 히데요시가 “토하치로에게는 가독을 맡기지 않는다. 영지와 군역은 카가노카미에게 맡기니 토하치로에게는 천 석이든 오백 석이든 주어 가신으로 두라”고 했지만 자신이 여러 말씀을 드려 끝내 타카후사를 주인으로 받들었다고 썼다. 히데요시의 이 말은 다른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의 편자도 이 문서에 “나오시게가 마사이에에게 보낸 변명”이라는 표제를 달았다. 서장의 내용을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타카후사의 자해가 나베시마 가문을 향한 항의로 해석되고 있었고 나오시게 본인도 그것을 강하게 의식했다는 점은 이 문서로 알 수 있다.30

7-3. 류조지 일문과 하쿠안의 소송

가독을 이은 뒤에도 나베시마 가문은 류조지 일족을 버리지 않았다. 타카후사의 동생 야스요시(安良)는 매년 쌀 천 표를 받았고 성을 무라타(村田)로 바꿔 사가번 안에서 류조지 본가 격으로 남았다. 타카노부의 동생(다쿠·스코)과 아들(다케오), 일족 류조지 이에하루(이사하야)를 시조로 하는 다쿠(多久)·스코(須古)·다케오(武雄)·이사하야(諫早)의 네 집안도 성을 바꿔 번의 친족으로 자리 잡았다. 다카노는 초기 사가번이 이 네 집안과 상의해 운영하는 연합 정권의 성격을 띠었다고 본다. 이들을 번주 일족과 같은 격(親類同格)으로 정한 것은 카츠시게의 손자인 2대 번주 미츠시게 때의 일이다.31

그렇다고 해서 원래 류조지 쪽의 반발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타카후사의 아들로 전하는 하쿠안(伯庵)이 1634년 무렵부터 여러 차례 막부에 류조지 가문을 다시 세워 달라고 소송했지만 모두 기각되었고, 그는 아이즈로 보내져 그곳에서 죽었다. 『한칸후』는 하쿠안을 스에아키(季明)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이 일을 짧게 다루고 “자세한 일은 모른다(精しき事を知らず)“는 말로 끝맺는다. 같은 단락에서 타카후사가 26세에 죽었다고 한 것은 틀린 숫자다.

이 승계가 찬탈이었느냐는 질문은 에도 시대에도 있었다. 막부가 1812년 완성한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에는 1590년 나오시게가 류조지 집안을 이었다고 나오고, 편자는 그가 나베시마 성을 그대로 썼기 때문에 “찬탈했다는 오명을 쓴 것이 아닐까”라는 주를 달았다. 현대 연구는 단순한 찬탈론을 피한다. 다카노 노부하루는 1607년의 가독 상속을 다루며 이렇게 정리했다.

豊臣氏・徳川氏ともに、公儀権力の立場として求めたのは、正当ではあるものの形式的な「家督」の存続ではなく、自らが希求した近世的秩序形勢に忠実に対応しうる〝強力〟=近世大名の創出であった。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이 공의(公儀) 권력으로서 바란 것은 정당하기는 하나 형식적인 “가독”의 존속이 아니라, 자기들이 바라는 근세적 질서 형성(形勢)에 충실히 대응할 수 있는 ‘강력한’ 근세 다이묘의 창출이었다.

— 다카노 노부하루, 「근세 초기 다이묘의 ‘오이에’에 대하여(近世初期大名の「御家」について)」(1988)

풀어 말하면, 도요토미와 도쿠가와 정권은 형식상 정당한 류조지 가문을 지키기보다 새 시대의 통치를 실제로 감당할 수 있는 나베시마 부자를 다이묘로 세우는 쪽을 택했다는 것이다.

사가의 주인이 류조지 가문에서 나베시마 가문으로 바뀐 것은 갑자기 한순간에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1584년 타카노부가 죽은 뒤 나오시게가 일문·중신과 합의해 가문을 운영하는 체제가 자리 잡았고, 1587년 규슈 평정 이후에는 히데요시가 나오시게를 류조지 가문과 따로 대우했다. 1604년에는 막부가 타카후사를 에도로 불러올리고 카츠시게에게 이에야스의 양녀를 시집보내 나오시게 다음은 카츠시게라는 방침을 보였고, 1607년 타카후사 사건을 거쳐 카츠시게가 류조지 가독을 이었다. 나오시게가 그 과정 내내 실권을 쥐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1587년 이후 고비마다 중대한 결정을 내린 것은 나베시마 가문이 아닌 도요토미와 도쿠가와의 중앙 정권이었다.32

7-4. 나베시마 고양이 소동

류조지에서 나베시마로 사가 지역의 주인이 바뀐 이 일은 250년쯤 지나 괴담의 소재가 되었다. 「나베시마 고양이 소동(鍋島化け猫騒動)」이라는 이야기다. 판본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줄거리는 이렇다. 사가의 영주가 함께 바둑을 두던 맹인을 죽인다. 그러자 죽은 사람의 어머니가 기르던 고양이가 원한을 품고 성안의 여인으로 둔갑해 밤마다 영주를 괴롭힌다. 결국 충직한 가신이 고양이의 정체를 알아채고 물리친다. 1889년에 간행된 책에는 죽임을 당하는 사람의 이름이 “류조지 마타시치로(龍造寺又七郎)“로 나온다. 이름만 봐도 류조지 가문의 원한을 다룬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를 무대에 올리려 했던 첫 시도는 1853년이다. 가부키 작가 3대 세가와 조코(三代目 瀬川如皐)가 『하나노 사가 네코마타조시(花埜嵯峨猫魔稿)』를 썼는데, 제목의 “사가”는 소리가 같은 교토의 지명 사가(嵯峨)로 바꿔 놓았고 영주 이름도 나오시마 다이료 나오시게(直島大領直繁)라는 가명이었다. 그래도 사가번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고, 이 작품은 사가번의 항의로 상연되지 못했다고 전한다. 이후 1864년의 가부키, 메이지 시대의 야담과 출판물로 이야기가 퍼졌다.33

8. 만년과 닛포 다이묘진

8-1. 정어리를 굽던 아내

나오시게의 첫 부인은 다카기 히젠노카미(高木肥前守)의 딸이었는데 이혼했다. 두 번째 부인 요타이인(陽泰院)은 이시이 츠네노부(石井常延)의 딸 히코츠루(彦鶴)로, 첫 남편이 전사한 뒤 친정에 와 있던 사람이다. 두 사람이 만난 장면은 사가번 무사의 구술을 1716년에 받아 적은 『하가쿠레(葉隠)』에 나온다.

內衆燒き申され候へ共大勢にて中々間に合ひ申さず、陽泰院樣、のれんの陰より御覽成され候が、つと御出で、大竈の下の火を搔き出し、鰯籠を打移し、大團扇にて煽ぎ立て、箕にかすり込み、炭を簸出し、その儘差出され候。直茂公御覽成され、「あの樣に働きたる女房を持ち度し」と思召込まれ、その後御通ひなされ候。

집안사람들이 정어리를 구웠지만 사람이 많아 도무지 따라가지 못했다. 요타이인 님이 발 뒤에서 보고 계시다가 불쑥 나와 큰 아궁이 밑의 불을 긁어내고, 정어리 바구니를 쏟아 붓고, 큰 부채로 부쳐 대고, 키에 쓸어 담아 숯을 까불러 내고는 그대로 내놓으셨다. 나오시게 공이 이를 보시고 “저렇게 일하는 여자를 아내로 두고 싶다”고 마음먹으시고 그 뒤로 드나드셨다.

— 『하가쿠레』 권3

타카노부의 출진을 따르던 무리가 이시이 집안에 들러 도시락을 먹던 날의 일이다. 『하가쿠레』에는 밤에 찾아가던 나오시게가 “도둑이야” 소리에 쫓겨 해자를 뛰어넘다가 발바닥을 조금 베였다는 이야기까지 붙어 있다. 사가시의 정리에 따르면 두 사람은 이후 50년 가까이 부부로 지냈고 카츠시게를 비롯한 자녀 여섯을 두었다. 요타이인은 1629년 89세로 죽었다. 『하가쿠레』에는 추운 밤 나오시게가 아랫사람들이 얼마나 추울지 걱정하자 요타이인이 백성들은 고타츠도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는 이야기, 사형이 정해진 가신을 두고 부부가 함께 눈물을 흘려 카츠시게가 사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34

8-2. 타후세 은거와 귀의 혹

나오시게가 공식적으로 언제 은거했는지는 사전마다 1607년설과 1610년설로 다르게 나온다. 만년의 나오시게는 사가성 북쪽의 타후세(多布施) 저택에서 지냈다. 그사이 카츠시게는 1608년부터 사가성을 크게 고쳐 쌓아 1611년 혼마루에 들어갔다.35

그의 죽음은 『하가쿠레』에 자세히 나온다. 귀에 혹이 생기자 누군가 거미줄로 감아 자르면 떨어진다고 했고, 그대로 했더니 자리가 짓무르고 점점 썩어 들어갔다.

我等唯今まで、人の爲に良き樣にとばかり何事も致し候へども、聞き候處に違有之て、我知らずに誤り候事ありと見え、天道より耳に御尤めある事と存じ候。くされ死しては子孫の耻に候間、大破に不成內に死に候へかし。

나는 지금까지 남에게 좋도록만 무슨 일이든 해 왔지만, 들은 것에 어긋남이 있어 나도 모르게 그르친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늘이 귀를 꾸짖으시는 것이라 여긴다. 썩어 죽으면 자손의 수치이니 크게 망가지기 전에 죽고 싶다.

— 『하가쿠레』 권3

그 뒤로 나오시게는 그저 병이라고만 하며 깊이 숨기고 음식을 끊고 약도 먹지 않았다. 카츠시게가 부모의 임종에 약을 드시게 하지 않으면 훗날 면목이 없다고 간청하자 “그렇다면 시나노노카미를 위해서이니 가벼운 약을 먹겠다”고 했다. 1618년 6월 3일 나오시게는 81세로 죽었다. 카이묘(戒名, 사후에 불교식으로 붙이는 이름)는 코덴지덴 닛포 소치 다이코지(高傳寺殿日峯宗智大居士)다.

그는 살아 있을 때 타후세 저택에 자신의 묘비를 미리 세우고 그 땅을 절터로 삼아 묻히겠다고 했다. 사가시가 사가번 기록을 바탕으로 정리한 설명에 따르면, 사가성 북쪽을 지키는 자리이니 자신이 거기 묻혀 있으면 가신들이 그 땅을 적에게 밟히게 두지 않으려고 싸울 것이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그 절이 소치지(宗智寺)다. 묘비는 메이지 시대에 나베시마 가문의 보리사 코덴지(高伝寺)로 옮겨져 지금은 요타이인의 묘와 나란히 서 있다.36

돌 기단 위에 다듬지 않은 높은 자연석 묘비 두 기가 나란히 서 있고, 양옆에 석등이 놓여 있다. 뒤로 짙은 상록수가 둘러싸고 앞쪽에 매화가 피어 있다
사가 코덴지의 나오시게 묘(왼쪽)와 요타이인 묘(Pekachu 촬영, 2016, CC BY-SA 4.0)

8-3. 『하가쿠레』의 닛포 님

나오시게가 죽고 100년 가까이 지난 1716년, 2대 번주 미츠시게를 섬겼던 야마모토 츠네토모(山本常朝)의 이야기를 다시로 츠라모토(田代陣基)가 받아 적은 『하가쿠레』가 완성되었다. “무사도란 죽는 것”이라는 구절로 유명한 이 책에서 나오시게는 “닛포 님(日峯樣)“으로 불리며 가문의 근본으로 받들어진다. 서두의 「야인노칸단(夜陰の閑談)」에서 츠네토모는 가신이 배워야 할 것은 남의 학문이 아니라 류조지 이에카네와 나베시마 가문의 선조, 타카노부, 나오시게로 이어지는 이 집안의 내력이라고 말한다.

釋迦も孔子も楠木も信玄も、終に龍造寺、鍋島に被官懸けられ候儀、これなく候へば、當家の家風には叶ひ申さゞる事に候。

석가도 공자도 구스노키도 신겐도 끝내 류조지·나베시마의 가신이 된 적이 없으니 이 집안의 가풍에는 맞지 않는 일이다.

— 『하가쿠레』 권1 「야인노칸단」

이 책에서 류조지와 나베시마는 하나의 집안으로 이어져 있다. 『하가쿠레』에는 나오시게가 남긴 벽서(壁書)라며 “큰일의 궁리는 가볍게 하라”는 구절도 인용되어 있다. 나오시게의 유훈으로 전하는 21개조 벽서는 역대 번주에게 대대로 전해졌지만, 언제 누가 정리한 것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37

8-4. 닛포 다이묘진

1772년 8대 번주 나베시마 하루시게(鍋島治茂)는 나오시게를 모시는 닛포샤(日峯社)를 세웠다. 그의 카이묘의 “닛포”를 따서 이름을 붙인 신사다. 1795년 나오시게는 닛포 다이묘진(日峯大明神)이라는 신호를 받았고, 1817년에는 요타이인도 함께 모셔졌다. 메이지 시대에는 카츠시게에 이어 류조지 타카노부·마사이에·타카후사도 같은 신사에 합사되었다. 류조지 가독을 내준 집안과 이어받은 집안이 한 신사에 함께 모셔진 것이다. 이 신사가 지금의 마츠바라 신사(松原神社)다. 1924년에는 타후세에 나오시게의 동상이 세워졌으나 1944년에 태평양 전쟁으로 물자가 부족해지자 금속 공출로 철거되었다.

사가 사람들은 지금도 봄가을 마츠바라 신사의 제례를 “닛포상(日峯さん)“이라고 부른다.38

출처

1차·준1차 사료

  • 류조지 타카노부 칸조(1570년 8월 26일, 나리마츠 노부카츠 앞), 오토모 소린 서장(1570년 8월 22일, 타지리 아키타네 앞). 『호쿠히센시』 권19 전재
  • 류조지 마사이에 혈판 기청문(1584년 4월 8일), 가문 운영 위임 기청문(1586년 4월), 마사이에 판물(1588년 11월 28일). 다카노 노부하루 1988 번각
  • 도요토미 히데요시 슈인조(1587년 11월 15일, 나베시마 나오시게 앞), 류조지 타카후사 앞 지행 배분 슈인조 사본(1590년 정월 8일), 진립서(1597년 2월 21일). 나베시마 호코카이 소장, 문화유산 온라인
  • 나베시마 나오시게 원문(1592년 11월 28일). 『보쇼나베시마케 몬조(坊所鍋島家文書)』 758호, 다카노 노부하루 1988 인용
  • 나베시마 나오시게 서장(1607년 7월 26일, 류조지 마사이에 앞). 『다쿠케 몬조(多久家文書)』,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제12편 5 수록
  • 우와이 캇켄(上井覚兼) 일기 1584년 3월 26–27일. 『일본인의 박애(日本人の博愛)』(1941) 사료편 재인용
  • 『선조실록』 선조 27년(1594) 11월 18일, 29년(1596) 12월 29일, 31년(1598) 9월 28일.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제11편 6·7, 제12편 5. 도쿄대학 사료편찬소,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3450629·3450630·782854
  • 『시료소란(史料綜覧)』 권10–13. 도쿄대학 사료편찬소,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1150985·1140509·2994258·2994259
  • 『조선사(朝鮮史)』 제4편 제9권. 조선사편수회,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3439892. 『선묘중흥지』·『민씨임진록』 등 조선 측 기록 수록
  • 참모본부 편, 『니혼센시 초센에키(日本戦史 朝鮮役)』 경과표(1924).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936357

근세 편찬물

  •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한칸후(藩翰譜)』(1702) 권8상 나베시마 항목. 저본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780523, 한칸후 원문 사이트
  • 『히요군키(肥陽軍記)』. 『카이테이 시세키슈란(改定史籍集覧)』 제15책,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1920302
  • 『호쿠히센시(北肥戦誌)』(1720). 『코쿠시소쇼(国史叢書)』본,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3441745·3441746
  • 『하가쿠레(葉隠)』(1716). 야마무라 타카시(山村魏) 교정본(1937),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1074360
  • 『나오시게코후(直茂公譜)』, 『나오시게코후 코호(直茂公譜考補)』(1841), 『카츠시게코후 코호(勝茂公譜考補)』(1843), 『후몬슈(普聞集)』, 『토류카후(藤龍家譜)』, 『고토케 지세키(後藤家事蹟)』, 『모토시게코 넨푸(元茂公年譜)』. 『다이니혼시료』 수록분, 다카노 노부하루 1988, 문화유산 온라인·사가시 해설 인용으로 확인
  •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1812), 『쇼카케이후(諸家系譜)』. 『다이니혼시료』 제12편 5 수록분
  • 『간에이쇼카케이즈덴(寛永諸家系図伝)』(1643). 다카노 1988 재인용
  • 『나베시마 네코소도(鍋島猫騒動)』(1889).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885060

현대 연구자·연구 기관

  • 다카노 노부하루(高野信治), 「근세 초기 다이묘의 ‘오이에’에 대하여(近世初期大名の「御家」について)」, 『규슈문화사연구소 기요(九州文化史研究所紀要)』 33, 1988. DOI
  • 오이카와 와타루(及川亘), 「게이초 6~9년의 나베시마 나오시게·카츠시게와 도쿠가와 이에야스(慶長六~九年の鍋島直茂・同勝茂と徳川家康)」, 『도쿄대학 사료편찬소 연구기요』 36, 2026. PDF
  • 이토 아키히로(伊藤昭弘), 「17세기 사가번의 매와 매사냥터(17世紀佐賀藩における鷹と鷹場)」, 『다카·다카바·칸쿄 켄큐(鷹・鷹場・環境研究)』 3, 2019
  • 『사가시사(佐賀市史)』 제1권, 1977. 『고카코쿠 하이분초(五ヶ国配分帳)』 인용 포함
  • 사가신문, 「사가번 계승에 새로운 설(佐賀藩継承で新説)」, 2023년 11월 21일. 링크
  • 모리토모 다카시(守友隆), 「게이초 5년(1600) 야나가와 전투에 관한 연구(慶長5年(1600)柳川合戦に関する研究)」, 나베시마 호코카이 연구조성 보고서 제7호. PDF
  • 나베시마 호코카이, 『조코칸보(徴古館報)』 34호(2017) 「번조 나베시마 나오시게 공과 닛포샤」전. PDF
  • 사가현립 큐슈도자문화관, 「아리타 자기의 역사」. 일본 관광청 다언어 해설문 데이터베이스. 링크

공식·표준 참고자료

  • 문화유산 온라인(文化遺産オンライン): 「나베시마 나오시게 앞 도요토미 히데요시 슈인조」(293640), 「류조지 타카후사 앞 도요토미 히데요시 슈인조 사본」(246181), 「도요토미 히데요시 슈인조(게이초의 역 진립)」(221794), 「불탄 갑옷(焼損具足)」(213254), 「홍씨 집안 전래 홍호연 관계 자료(洪家伝来洪浩然関係資料)」(251165)
  • 코토뱅크(コトバンク):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이삼평(李参平)」, 「다쿠 야스시게(多久安順)」, 「나베시마 소동(鍋島騒動)」, 「하나노 사가 네코마타조시(花埜嵯峨猫稿)」(코토뱅크 표제. 본문 표기는 花埜嵯峨猫魔稿), 「마츠바라 신사(松原神社)」, 「사가번(佐賀藩)」. 「이삼평」 항목이 인용한 『히요큐쇼로쿠(肥陽旧章録)』는 직접 확인하지 못함
  • 사가시: 「요타이인과 코덴지 묘소(陽泰院と高伝寺墓所)」,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소치지(鍋島直茂と宗智寺)」, 「홍호연과 아미다지(洪浩然と阿弥陀寺)」, 「사가시 마츠바라 주변 역사 현창 연표(佐賀市松原周辺における歴史顕彰等略年表)」
  • 사가현, 「사가성 관계 연표(佐賀城関係年表)」
  • 레퍼런스 협동 데이터베이스, 「나베시마번의 카몬 ‘행엽’에 대해 알고 싶다」(사가시립도서관 회답, 『일본의 가문과 성씨(日本の家紋と姓氏)』 인용)

확인하지 못한 것

  • 1590년 나오시게에게 “국무”를 맡겼다는 35만 7,030석 슈인조의 원본이나 사본
  • 『히요군키』와 『나오시게코후』의 성립 연대, 행엽 카몬 유래담의 최초 출전
  • 이삼평의 1616년 이즈미야마 발견을 전하는 가나가에 집안 문서의 성립 시기, 나베시마 군이 데려간 조선인의 전체 수
  • 1600년 이에야스가 나오시게에게 보낸 서장 원문
  • 『오토모케 몬조로쿠(大友家文書録)』의 이마야마 싸움 연대·대장 이름, 『다이니혼코키로쿠(大日本古記録)』판 우와이 캇켄 일기
  • 21개조 벽서의 성립 시기와 진위
  • 직접 열람하지 못한 연구: 호리모토 가즈시게(堀本一繁) 1998·스즈키 아쓰코(鈴木敦子) 2016(『니혼 레키시(日本歴史)』), 野口朋子 2007(『사가현립 사가성 혼마루 역사관 연구기요(佐賀県立佐賀城本丸歴史館研究紀要)』), 쓰노 도모아키(津野倫明)의 정유재란 이쿠사메츠케 연구(『인문과학연구(人文科学研究)』), 오이카와 와타루의 2023년 발표를 담은 『‘보쇼나베시마케 몬조’를 다시 읽는다(「坊所鍋島家文書」を読みなおす)』(2024), 이와마츠 요스케(岩松要輔)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2016), 中村知裕 「나베시마 나오시게 고찰(鍋島直茂考)」(2025)

Footnotes

  1. 『한칸후』 권8상 나베시마 항목 f096.p001·p002(저본 780523_0074L–0075R). 『호쿠히센시』 국사총서본(일본 국립국회도서관 3441745) 텐분 20년 부분, 『시료소란』 권10 텐분 20년 시사이(是歳). 키요후사의 혼인 경위는 『한칸후』와 『호쿠히센시』에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으나 둘 다 후대 편찬물이다. ↩

  2. 『한칸후』 f096.p002, 『히요군키』 권2 「龍公之御母堂鍋島清房公江御入輿之事」(『카이테이 시세키슈란』 제15책). 『사가시사』 제1권 652–669쪽. 재혼한 해는 다카노 노부하루 1988 7쪽과 주9(출전 『나오시게코후』 제1, 『나오시게코후 코호』 1건). 관련 논문: 스즈키 아쓰코(鈴木敦子), 「‘현녀’ 케이긴니와 나베시마번의 정당성(「賢女」慶誾尼と鍋島藩の正当性)」, 『니혼 레키시(日本歴史)』 817, 2016(서지만 확인, 직접 열람하지 못함). ↩

  3. 1565년 혼조 오오츠카 다이묘진(本庄大塚大明神) 보전 상량 명문 「願主 鍋島三郎兵衛藤原信房 同名左衛門大輔同姓信安」은 『사가시사』 제1권 661쪽 전재. 1579년 「信昌」은 『시료소란』 권11 덴쇼 7년 5월 12일(출전 泰長院文書), 1582년 노부나리 개명은 『호쿠히센시』 권27 「龍造寺久家鍋島信生改名の事」, 1586년 기청문 서명은 『사가시사』 673쪽, 1589년 서임·개명은 『시료소란』 권12 덴쇼 17년 정월 7일(출전 御湯殿上日記 등). 『한칸후』 f096.p004는 개명을 1584년 직후로 적는다. ↩

  4. 칸조와 소린 서장은 『호쿠히센시』 권19(일본 국립국회도서관 3441746) 전재. 소린 서장 원본의 소재는 확인하지 못했다. 『시료소란』 권10 겐키 원년 8월 20일. 호리모토 가즈시게, 「류조지 가문의 전국 다이묘화와 오토모 가문 히젠 지배의 성쇠(竜造寺氏の戦国大名化と大友氏肥前支配の消長)」, 『니혼 레키시(日本歴史)』 598, 1998의 논지는 일본어 위키백과 「今山の戦い」의 요약을 통해 확인했고 원문은 직접 열람하지 못했다. 화친은 『호쿠히센시』 10월 1일, 『히요군키』 9월. ↩

  5. 『히요군키』 권3 「大友再出陣付信生公今山夜討之事」, 『한칸후』 f096.p002, 『호쿠히센시』 권19. 『시료소란』 권10의 강문은 「隆信ノ将鍋島信昌等、親貞ヲ今山ニ襲ヒテ之ヲ斬リ」. 오토모 쪽 『오토모케 몬조로쿠(大友家文書録)』는 이마야마 싸움을 다른 해와 다른 대장으로 적는다고 하나 원문은 확인하지 못했다. ↩

  6. 『한칸후』 f096.p003(저본 780523_0075L), 『히요군키』 권3, 『호쿠히센시』 권19. 오토모 가문이 양하 둥근 무늬를 행엽이라 불렀다는 지적은 레퍼런스 협동 데이터베이스의 사가시립도서관 회답이 『일본의 가문과 성씨(日本の家紋と姓氏)』를 인용해 소개한 것이다. 불탄 갑옷은 문화유산 온라인 213254. 野口朋子, 「나베시마 가문의 카몬 행엽에 대하여(鍋島家の家紋・杏葉紋について)」, 『사가현립 사가성 혼마루 역사관 연구기요(佐賀県立佐賀城本丸歴史館研究紀要)』 2, 2007은 직접 열람하지 못했다. ↩

  7. 『시료소란』 권11 덴쇼 2년 6월, 7년 3월, 7년 5월 12일. 530정은 『사가시사』 제1권 669쪽이 인용한 『고카코쿠 하이분초(五ヶ国配分帳)』. 카마치 시게나미 살해는 『시료소란』 권11 덴쇼 9년 5월(출전은 모두 편찬물), 『호쿠히센시』 권26 「蒲池鎮竝誅伐の事」. 『호쿠히센시』에는 나오시게가 사가에서 열린 그 연회 자리에 함께 있었고 이후 잔당 소탕에 가담했다고 나오지만, 살해를 함께 꾸몄다는 근거는 찾지 못했다. 야나가와 재성은 『호쿠히센시』 권27 「久家・鍋島飛驒守信生、倶に築河に在城」. 『한칸후』 f096.p004의 1579년 야나가와성 하사는 카마치 가문이 1581년까지 야나가와를 지킨 사실과 맞지 않는다. ↩

  8. 나베시마 호코카이 조코칸 제80회 기획전 「번조 나베시마 나오시게 공과 닛포샤」(2017) 출품 목록과 『조코칸보』 34호. 1582년 7월 11일 자 히데요시 서장은 1954년 『사가현 사료 집성(佐賀県史料集成)』 편찬 조사 때 확인되어 번각되었고, 원본은 이 전시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

  9. 『다이니혼시료』 제11편 6, 덴쇼 12년 3월 24일(일본 국립국회도서관 3450629). 『호쿠히센시』 권28 「高來軍龍造寺隆信戰死の事」, 『나오시게코후 코호』 권4. 『고토케 지세키(後藤家事蹟)』는 배치 교환의 방향을 조금 다르게 전한다. 타카노부의 나이 56세는 『한칸후』 f096.p004. ↩

  10. 『나오시게코후 코호』 권4(『다이니혼시료』 제11편 6 수록) 「早國家ノ滅亡時至レリ」, 「常ニ綾部右京カ物語也」. 『호쿠히센시』 권28 「信生も討死すべしと、六七度に及び取つて返されけるを、中野式部少輔、信生の鎧の袖にすがりて」. 『나오시게코후 코호』의 성립 연도는 조코칸 제80회전 출품 목록. ↩

  11. 우와이 캇켄 일기 덴쇼 12년 3월 26·27일 「此日從有馬、隆信之頸到來候、貴賤群集候て見候也」(『일본인의 박애(日本人の博愛)』 사료편 재인용, 『다이니혼코키로쿠(大日本古記録)』판과는 대조하지 못함). 『후몬슈』 권7(『다이니혼시료』 제11편 6 수록) 「佐賀方評議ヲ決シ…不運ノ髑體更ニ所用ナシ」. ↩

  12. 다카노 노부하루, 「근세 초기 다이묘의 ‘오이에’에 대하여」, 『규슈문화사연구소 기요(九州文化史研究所紀要)』 33, 1988. 기청문은 『나오시게코후 코호』 5건(乾) 수록본을 다카노가 번각한 것이며, 인용은 다카노 논문 7–8쪽의 번각을 옮겼고 제3·5조는 줄였다. 하스이케 이주는 『후몬슈』(『다이니혼시료』 제11편 6). 마사이에의 나이는 『쇼카케이후』의 1556년생 기록으로 계산했다. 『한칸후』 f096.p004는 마사이에를 “いまだ幼き”라고 쓴다. ↩

  13. 다카노 노부하루 1988. 기청문 원문 「御家裁判之儀雖被申付候、更根気相盡候条、難罷成之由遂御詫言候処」, 「縦政家気色二不相似合之儀雖有之、各二無談合、政家為自分、到飛騨守、身体不可有相違之事」, 「為政家御一存、不可有其沙汰候、若於彼条相違之儀者、各中対政家可相離申事」. 대립 구도는 다카노 1988 15쪽 「直茂へ全幅の信頼と期待を寄せる政家と、直茂を相対的・客体的に位置づける一門・重臣との対立である」. 다카노는 같은 절에서 이 위임이 「家督と支配の分離ではなく、両者が不可分」임을 보여 준다고 정리한다(11쪽). ↩

  14. 문화유산 온라인 293640 「鍋島直茂宛て豊臣秀吉朱印状」(1587년 11월 15일) 「竜造寺并其方事、諸式無如在様令覚悟、忠節専用思召候也」. 규슈 정벌 때의 역할과 1588년 나가사키 다이칸 임명, 다카노의 평가 「独立した大名として対応していたと評価することも可能」은 다카노 노부하루 1988. 1587년 나오시게가 받은 영지의 범위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다. ↩

  15. 다카노 노부하루 1988(『토류카후(藤龍家譜)』 4 수록 판물 「長法師丸、就養子契約之儀、并名字竜造寺之事、到飛騨守令附与訖、然者於伊勢松丸も、相続之儀可為肝要之状」). 성 사양의 이유는 다카노 1988 15쪽 「その第一の理由は、この竜造寺一門・重臣の反発を憂慮したためであったと思われる」, 16쪽 「秀吉による独立大名取り立ての〝二心・野心〟があったからであろう」. ↩

  16. 문화유산 온라인 246181 「龍造寺高房宛て豊臣秀吉朱印状写」 해설(해설 본문의 “天正8年”은 덴쇼 18년의 오기). 타카후사·마사이에 몫의 석고는 이 해설과 다카노 1988의 각주가 서로 다르다. 『나오시게코후』는 같은 해설의 인용, 『호쿠히센시』 권30 「三月七日、國事を勤むべき旨台命あり。肥前國三十五萬七千三十石の御朱印頂戴」. 『한칸후』 f096.p004(저본 780523_0076L). ↩

  17. 다카노 노부하루 1988이 인용한 『보쇼나베시마케 몬조』 758호 「豊臣朝臣高房九族家中上下」, 서명 「豊臣朝臣鍋嶋加賀守直茂」. 타카후사는 1586년생(『쇼카케이후』). ↩

  18. 『조선사』 제4편 제9권 250–251·254·266쪽(일본 국립국회도서관 3439892). 일본어 위키백과 「文禄・慶長の役」은 가토 8,000명으로 적은 이설도 함께 싣는다. ↩

  19. 『조선사』 제4편 제9권 312·358·366쪽(출전 『선묘중흥지』·『민씨임진록』·『나오시게코후 코호』 권6·7 등), 참모본부 편 『니혼센시 초센에키(日本戦史 朝鮮役)』 경과표 8쪽(일본 국립국회도서관 936357). 길주 포위와 가토 측 수비대는 같은 경과표 「鄭文孚等吉州城ヲ圍ム」, 「清正其士ヲ吉州ニ遣ス」. 북관대첩 패전설은 한국어 위키백과 「나베시마 나오시게」(2026년 10월 확인, 각주 없음). ↩

  20. 『시료소란』 권13 분로쿠 2년 2월(지면 10쪽,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2994259) 「朝鮮ノ二王子…鍋島直茂ニ咸鏡道咸興ニ於ケル厚遇ヲ謝ス、鍋島文書」, 같은 해 4월 「加藤清正·鍋島直茂等、肯ゼズ」. 철수는 『니혼센시 초센에키』 경과표 9쪽. ↩

  21. 『시료소란』 권13 분로쿠 2년 6월 29일(출전에 『나오시게코후 코호』), 같은 권 김해 주둔 관련 항목. 『선조실록』 선조 27년 11월 18일 「日本豐臣直茂, 再答朝鮮李將軍幕下」, 선조 29년 12월 29일 「竹島, 鍻嶋加賀守」. ↩

  22. 문화유산 온라인 221794(진립서 「鍋嶋加賀守・同信濃守」), 『시료소란』 권13 게이초 2년 4월 6일·8월 16일·8월 23일·11월 10일, 『선조실록』 선조 31년 9월 28일 「右道金海府, 約有一萬餘名, 卽豐直茂所領」. 『한칸후』 f096.p006 「朝鮮の軍奉行を承る」. 이쿠사메츠케 명단은 쓰노 도모아키의 고치대학 『인문과학연구(人文科学研究)』 게재 연구를 검색 결과 요약으로만 확인했다. 귀국 시기는 자료가 갈린다. 문화유산 온라인 221794 해설은 1592년 도해 뒤 한 번도 귀국하지 않다가 1597년 귀국했다고 하고, 다카노 1988 19쪽은 「文禄三年朝鮮より帰国した直茂は、勝茂を伴って上洛」이라고 쓴다. 이 귀국을 다룬 쓰노 도모아키 「朝鮮出兵における鍋島直茂の一時帰国について」(『인문과학연구』 13, 2006)는 직접 열람하지 못했다. ↩

  23. 문화유산 온라인 251165 「洪家伝来洪浩然関係資料」 해설 「文禄2(1593)年6 月末の第2 次晋州城攻防戦の際に、晋州近郊の山清郡で鍋島直茂の軍に捕らえられた」. 사가시, 「洪浩然と阿弥陀寺」. ↩

  24. 코토뱅크 「李参平」(世界大百科事典·日本大百科全書·山川日本史小辞典·日本人名大辞典), 「多久安順」, 「宗伝」, 「百婆仙」. 사가현립 큐슈도자문화관 해설과 텐구다니 가마 해설은 일본 관광청 다언어 해설문 데이터베이스(R2-01921·R2-01962). 1616년설의 근거로 위 사전들은 『히요큐쇼로쿠(肥陽旧章録)』 수록 「覚」 또는 「金ケ江日記」를 든다. ↩

  25. 『한칸후』 f096.p006(저본 780523_0076L–0077R). 『시료소란』 권13 게이초 5년 8월 1일·8월 24일·9월 14일·9월 15일(출전에 『카츠시게코후 코호』 등). ↩

  26. 『한칸후』 f096.p006, 『시료소란』 권13 게이초 5년 9월 25일 「鍋島勝茂、井伊直政·本多正信·相國寺圓光寺ノ元佶等ニ賴リテ、罪ヲ德川家康ニ謝ス」, 10월 20일, 12월. 출진일 10월 14일은 모리토모 다카시의 보고서. 구로다 나가마사 등의 주선과 35만 7,000여 석 안도는 오이카와 와타루 2026 머리말 「長政等の取り成しもあって…直茂に三五万七千石余りの本領が安堵された」. ↩

  27. 오이카와 와타루 2026(『나오시게코후』 등 편찬물 근거). 코토뱅크 「佐賀藩」(世界大百科事典: 본번 35만 7,036석). 『한칸후』 f096.p006 미츠시게 부분 「嫡孫光茂家を繼ぐ」, 「三十五万七千石餘」. ↩

  28. 오이카와 와타루 2026. 「慶長九年(一六〇四)閏八月には名目上の佐賀藩主である龍造寺高房が従五位下駿河守に叙任され、秀忠に附属させられて江戸に詰めることも決まった。高房の江戸詰めは証人としての意味合いが強く」. 니노마루·혼마루 거주는 같은 논문 1603년 항목 「本丸には名目上の国主である龍造寺高房が居住したと考えられる」(근거 『보쇼나베시마케 몬조』 219호 등). 카츠시게와 이에야스 양녀(오카베 나가모리의 딸)의 혼례는 1605년 5월이고, 오이카와는 혼담이 1604년 윤8월에 정해졌다고 본다. ↩

  29. 『쇼카케이후』 류조지 타카후사 항목(일본 국립국회도서관 11223301) 「同十二年三月三日於江戸乱心内室刺殺其身自殺雖然不即死」, 「慶長十二年丁未九月六日歿時廿二歳」. 아내의 위패(코덴지)와 『카츠시게코후 코호』 3, 마사이에의 사망은 『다이니혼시료』 제12편 5. 『카츠시게코후 코호』의 편자는 3월 17일 자 마사이에 서장을 근거로 3월 3일설을 의심했다. 오이카와의 새로운 설은 사가신문 2023년 11월 21일 보도로 확인했고, 정식 보고서인 사가현립도서관 편 『‘보쇼나베시마케 몬조’를 다시 읽는다(「坊所鍋島家文書」を読みなおす)』(2024)는 직접 열람하지 못했다. 타카후사가 죽은 곳은 에도라는 기록과 사가로 돌아간 뒤라는 기록이 갈린다. 『조코칸보』 34호는 타카후사를 1590년 6세, 사망 때 23세로 적어 『쇼카케이후』와 한 살 차이가 난다. 이 글은 『쇼카케이후』를 따랐다. ↩

  30. 『다쿠케 몬조』 1호, 『다이니혼시료』 제12편 5 게이초 12년 9월 6일 수록. 히데요시의 말 부분 원문 「藤八郎事家督ニハ被仰付間敷候、國知行役等之義者、加賀守へ被仰付候間、藤八郎事ハ、千石成共五百石成共被下、家中ニ可被召置」. ↩

  31. 『카츠시게코후 코호』(『다이니혼시료』 제12편 5 수록), 다카노 노부하루 1988. 친류동격의 제정 시기는 이토 아키히로 2019. ↩

  32. 하쿠안의 소송은 다카노 노부하루 1988 32쪽, 아이즈 유배는 『쇼카케이후』와 『다이니혼시료』 제12편 5 편자 주. 『한칸후』 f096.p005(저본 780523_0076L)는 타카후사를 26세에 죽었다고 쓰지만 『쇼카케이후』·『간세이초슈쇼카후』는 22세다. 하쿠안과 스에아키가 같은 사람인지는 계보마다 다르다. 『간세이초슈쇼카후』 편자 주 「鍋島を称するかゆへに簒立の名を被るものか」는 『다이니혼시료』 제12편 5 인용. 다카노 인용문은 1988 논문 32쪽. 『간에이쇼카케이즈덴(寛永諸家系図伝)』·『간세이초슈쇼카후』가 1590년 마사이에가 나오시게에게 가독을 넘겼다고 적는 것은 다카노 1988 4쪽. ↩

  33. 코토뱅크 「鍋島騒動」(デジタル大辞泉·世界大百科事典 등), 「花埜嵯峨猫稿」(世界大百科事典: 사가번의 항의로 상연되지 않음). 브리태니커 소항목사전은 같은 해 에도 나카무라자 초연으로 적는다고 해 사전 사이에 차이가 있다. 『나베시마 네코소도』(1889,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885060). ↩

  34. 『하가쿠레』 권3(일본 국립국회도서관 1074360 프레임 89·93). 첫 부인은 「直茂公の御前妻は、高木肥前守の娘にて候」. 사가시, 「陽泰院と高伝寺墓所」. ↩

  35. 코토뱅크 「鍋島直茂」(日本人名大辞典+Plus는 1607년, 日本大百科全書는 1610년). 사가현, 「佐賀城関係年表」. ↩

  36. 『하가쿠레』 권3(프레임 89–90). 사망일과 나이는 『한칸후』 f096.p006 「八十一歲にて、元和四年六月三日に卒す」. 묘와 절의 경위는 사가시, 「鍋島直茂と宗智寺」(『나오시게코후』·『모토시게코 넨푸(元茂公年譜)』 근거). ↩

  37. 『하가쿠레』 권1(프레임 6·19). 『하가쿠레』의 성립과 21개조 벽서의 전래는 『조코칸보』 34호. ↩

  38. 『조코칸보』 34호, 사가시 「佐賀市松原周辺における歴史顕彰等略年表」, 코토뱅크 「松原神社」. 마츠바라 신사로 이름이 바뀐 해는 자료마다 다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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