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나가(信長)가 시해당했을 때 도쇼구(東照宮,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센슈(泉州, 이즈미) 사카이(堺)에 있었다. 사람들은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이 적은 수로 이런 난리 속에서 먼 미카와(三河)까지 어떻게 물러나실 수 있겠는가" 했다. 도쇼구는 본디 지리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가슈(河州, 카와치)의 이이모리노미야(飯森の宮)는 요새가 될 만한 땅이니, 그곳을 지키며 싸우자" 하고 말했다. 그리하여 모리구치(森口)에 이르렀을 때, 교토에 사자로 가던 혼다 타다카츠(本多忠勝)가 길에서 변고를 듣고 되돌아와 "적은 대군일 것입니다. 어서 영지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하고 아뢰었다. 도쇼구가 이를 듣고 "길잡이는 어찌하겠느냐. 적이 길을 막을 것은 뻔하다. 어이없이 당한다면 원통하지 않겠느냐" 하고 말하던 참에, 노부나가가 접대역으로 딸려 보낸 하세가와 타케마루(長谷川竹丸)가 "이 지방 가타노군(交野郡) 츠다(津田) 일대에는 노부나가의 은혜를 입은 자가 많으니 길을 안내하게 하겠습니다" 하고 아뢰었다. 그래서 우츠고에(宇津越)를 거쳐 야마시로(山城)의 소라쿠군(相樂郡)을 지나 기즈가와(木津川)를 건너고, 거기서 우지바시(宇治橋) 위쪽으로 1리쯤 동쪽의 여울을 건너 고슈(江州, 오미)의 시가라키(信樂)로 나가기로 했다. 또 이가(伊賀)의 우에노(上野)에서 가부토고에(鹿伏兎越)를 넘어 이세(伊勢)의 시로코(白子)에 이르러 배를 타는 것이 좋겠다고 정했다. 타다카츠는 돈보기리(蜻蛉斬, 잠자리 베기)라 이름 붙인 창을 들고 그 근처 백성들을 데려와 "이분을 안내해 드려라" 하고 일렀다. 그 뒤로 지나는 마을마다 그렇게 하니, 츠다에서도 길잡이가 왔다. 그날은 야마시로 소라쿠군 야마다무라(山田村)에서 묵었는데, 곳곳에서 마음을 기울인 사람들이 많이 와서 호위했다.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梅雪)는 여기까지 따라왔다가 갈라져 떠났다.
도쇼구가 이즈미의 사카이에서 영지로 돌아간 일
에도 시대 중기 오카야마번의 유학자 유아사 조잔(湯浅常山)이 센고쿠~에도 초 무장들의 일화를 모은 『조잔키단(常山紀談)』(1739년 자서)의 한국어 번역이다. 후대에 전해진 이야기를 모은 책이라 역사적 사실과 다른 대목이 있다.
바이세츠는 우지(宇治)에서 고하타고에(木幡越)를 거쳐 고슈의 다카시마(高島)에 이르고, 노슈(濃州, 미노)로 가서 고슈(甲州, 카이)로 돌아가겠다고 말하고 갈라졌는데, 야마시로의 츠즈키군(綴喜郡)에서 잇키(一揆, 무장한 농민 무리)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이튿날 기즈가와에 이르렀다. 섶을 실은 배 두 척이 있었다. 타다카츠가 빌려 달라고 했으나 응하지 않자 "괘씸한 놈이로구나. 베어 버리겠다" 하니, 겁을 먹고 태워 주었다. 이윽고 다 건너자 두 척을 모두 부수어 버렸다. 그다음 날에는 잇키가 이시하라무라(石原村)에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야마토(大和)에서부터 따라온 요시카와 젠베에(吉川善兵衞)와 그 아들 슈메노스케(主馬助)가 떡갈나무 가지를 우마지루시(馬標, 대장의 위치를 알리는 표지)로 삼아 앞장서 달려가 쫓아냈다. 도쇼구는 "떡갈나무를 집안 문장으로 삼아라" 하고 말했다고 한다. 거기서 우지타와라(宇治田原)의 토착 무사 야마구치 겐바(山口玄蕃)가 식사를 바쳤고, 우지가와(宇治川)에 이르니 배가 없었다. 사카키바라(榊原)의 무사 하라다 사에몬(原田左衞門)이 말을 몰고 들어가 얕은 곳을 더듬어 건넜다. 사카이 타다츠구(酒井忠次)가 배 한 척을 찾아내 도쇼구를 건네 드렸고, 잡병까지 모두 건널 수 있었다. 고슈 시가라키까지는 험한 길이었지만 호위하며 따르는 사람이 많아 잇키도 손을 대지 못했다. 다라오 시로베에 미츠토시(多羅尾四郞兵衞光敏)는 대대로 시가라키를 다스려 온 사람인데, 그 아들 조베에(長兵衞)가 마중을 나왔다. 사람의 속은 알 수 없다며 모두 두려워하자 타다카츠가 말했다. "아닙니다. 미츠토시가 적이 될 생각이라면, 그 집에 들어가지 않으시더라도 놓아 보내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차라리 들어가십시오." 모두 옳은 말이라 하여 그 집에 들르니, 정성껏 상을 차려 대접해 주어 일행은 그동안의 고단함을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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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때 타다카츠가 "다라오에게 딴마음이 있어 보이면 붙잡아 찔러 죽이겠다" 하고 말했기 때문에 들렀다고도 한다.
5일에는 다카미 고개(高見嶺)를 넘었다. 수행하던 핫토리 한조 마사나리(服部半藏正成)는 본디 이가 태생이었으므로, 타다카츠가 지시해 이가 길을 안내하게 했다. 이가의 토착 무사들이 많이 와서 호위했고, 가미츠게(上柘植)에서 3리 반쯤 되는 가부토고에라는 깊은 산을 넘어 6일에 시로코 해안에 닿았다. 하세가와 타케마루 히데카즈(秀一, 후에 도고로(藤五郞))를 비롯해 야마토·야마시로·이가의 무사들에게 작별을 허락하며, 때가 되면 하마마츠(濱松)로 오라고 정중하게 일렀다. 거기서부터 무사히 미카와로 돌아갔다. 이가는 지난해 9월 노부카츠(信雄)가 쳐들어가 복속시켰을 때 숨은 자들을 찾아내 죽이는 데만 힘을 쏟았다. 그래서 이가의 토착 무사들이 미카와로 와서 도쇼구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많았으므로, 그 일족들이 모두 나서서 호위했다고 한다. 곧이어 아케치(明智)를 치기 위해 군사를 냈을 때 이가의 토착 무사들이 모여들자, 대부분을 오반(大番, 경호 부대)에 넣고 은상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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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historyfol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