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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다 도시이에가 스에모리 성을 구원한 싸움

· 卷之七 제1화 · 원문(일본어) 쪽

에도 시대 중기 오카야마번의 유학자 유아사 조잔(湯浅常山)이 센고쿠~에도 초 무장들의 일화를 모은 『조잔키단(常山紀談)』(1739년 자서)의 한국어 번역이다. 후대에 전해진 이야기를 모은 책이라 역사적 사실과 다른 대목이 있다.

다키가와 카즈마스(瀧川一益), 삿사 나리마사(佐々成政) 등이 노부타카(信孝)를 받들어 히데요시(秀吉)와 싸울 때였다. 덴쇼(天正) 12년(1584) 9월, 나리마사는 군사 8천을 이끌고 노토(能登)의 스에모리(末森) 성을 에워쌌다. 이 성은 가가(加州) 가나자와(金澤) 성주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의 사무라이다이쇼(士大將, 한 부대를 맡은 대장) 오쿠무라 스케에몬 나가토미(奧村助右衞門永福, 뒷날의 이요伊豫)가 지키고 있었다. 나리마사는 하타모토(旗本, 대장 직속 군사)로 구원군을 막게 하고 성을 맹렬히 몰아쳤다. "이 성만 깨뜨리면 노토는 하루 만에 굴복시킬 수 있다. 구원군이 오기 전에 빼앗아라" 하고 명령했다.

오쿠무라는 겨우 3백 남짓한 군사로 여기가 마지막이라며 버텼지만, 공격이 너무 거세자 "이제 끝이다. 자결하겠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스케에몬의 아내가 고소데(小袖) 자락을 걷어 올리고 머리띠를 동여매고 칼을 허리에 차더니, 시녀들에게 죽을 물통에 담게 해서 담장 안의 사람들에게 손수 먹이며 돌아다녔다. "옛날 구스노키(楠)라던가 하는 대장이 일본 전체를 적으로 삼아 성에 틀어박혔다고 들었습니다. 내일이면 가나자와에서 구원군이 올 테니 오늘 하룻밤만 버텨 주십시오." 오쿠무라는 이를 보고 "오늘 하는 모습은 사내보다 낫구나. 이 성을 여자의 힘으로 지켜 낸대서야 분한 일이다" 하며 자부하는 빛을 보였다.

이 성이 쉽게 떨어지지 않을 것을 보고 불로 치자는 사람이 있었다. 나리마사는 "아니다. 정문(大手)의 성문을 떼어 내 도야마(富山) 성의 성문으로 삼겠다. 또 세키도산(石動山)의 승병들도 나와 뜻을 같이하고 있다. 불로 쳐서는 안 된다" 하고 명령하고, 이미 니노마루·산노마루(二三の丸)를 빼앗은 채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스에모리에서 가나자와까지는 9리쯤이다. 그날 유시(酉の刻, 오후 6시 무렵)에 이 사정을 알리며 "날이 밝을 때까지는 굳게 지키겠습니다" 하고 전해 왔다. 도시이에는 듣자마자 가나자와 성의 큰방으로 나가 토시나가(利長)를 불러 "너는 성을 지켜라" 하고 명했다. 토시나가가 "아닙니다. 맨 앞에서 달려가 삿사를 쳐부수겠습니다. 남아 있으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하고 아뢰자, 도시이에는 "그렇다면 부자가 함께 나가자. 적이 생각지도 못할 때 치는 것이 유리하다. 군사를 다 갖출 겨를은 없다. 말에 안장만 얹었거든 한 기씩이라도 달려 나가라. 한 걸음이라도 먼저 나서는 것을 오늘 밤의 공으로 삼겠다" 하고 말했다. 그리고 도미타 요고로(富田與五郞, 뒷날의 에치고노카미越後守)에게 "너는 츠바타(津幡)로 가서 후와 히코조(不破彥三)에게 스에모리 구원군의 선봉을 맡으라고 전하라" 하고 명했다. 도미타는 제 숙소로 달려 돌아가 말을 끌어내 올라타고 두 등자로 말 배를 차며 달려갔다.

도시이에는 "군사들은 모두 밥에 국을 부어 먹어라" 하고는 갑옷을 입었다. 뜰에는 검은 말을 끌어다 세워 두었다. 도시이에의 정실(뒷날의 호슌인芳春院)이 산포(三方, 제물을 올리는 나무 받침)에 노시(熨斗, 길게 저며 말린 전복으로, 출진을 축하하는 물건)를 담아 부자에게 올리고 말했다. "모두 들으시오. 나는 토시나가의 어미요. 오늘의 구원은 참으로 큰일이 걸린 싸움일 것이오. 다들 마음을 모아 공을 세우시오. 스에모리를 적에게 빼앗기거든 그대들도 싸우다 죽으시오. 나도 남의 손에 걸리지는 않겠소." 그리고 도시이에 곁으로 다가가 "적이 스에모리를 함락하거든 싸우다 죽으십시오. 토시나가도 어미의 이 말을 잘 들으시오. 이것이 살아서 하는 마지막 작별이오" 하고 말했다. 도시이에는 "아, 시원하구나. 나리마사를 쳐부수는 것은 틀림없다" 하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옷 위의 띠를 조여 매고, 묶은 끝을 잘라 버리고는 말에 올랐다. 부자의 군사는 5백 남짓에 지나지 않았다.

도시이에는 말 위에서 "우리 군사가 적은 것은 길조다. 삿사가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쳐들어가 이길 것이다. 오쿠무라를 죽게 둔다면 살 보람이 없다" 하고 말하며 츠바타 마을을 북쪽으로 지나갔는데, 그때 도미타가 말을 타고 왔다. 츠바타는 가나자와에서 4리 남짓 되는 거리다. 도시이에가 "너는 어디서 자고 있었느냐" 하고 꾸짖자 도미타는 이렇게 말했다. "츠바타로 달려가 후와의 문을 두드려 명을 전하고, 후와가 갑옷 입는 것을 보고 나왔더니 벌써 문밖에 깃발을 내세웠습니다. 어디서 잠을 잤겠습니까." 도시이에가 그래도 들어주지 않자, 도미타는 화가 나서 그날 이치반야리(一番鎗, 적과 가장 먼저 창을 맞댄 공)를 세웠다. 이는 도시이에가 무사를 분발시키는 수법이었을 것이다.

도시이에의 군사가 잇달아 달려와 3천 남짓이 되자 이를 두 갈래로 나누어, 한 갈래는 적의 뒤를 치고 한 갈래는 적의 하타모토로 쳐들어갔다. 나리마사의 군사는 지쳐 있던 데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공격을 받았고, 오쿠무라까지 문을 열고 치고 나오자 나리마사는 크게 패했다. 덴쇼 12년 9월 11일의 싸움이다. 나중에 들으니, 나리마사는 산등성이 끝을 넘어가 흩어진 군사를 모아 진을 다시 세우고 "두고 보아라. 이제 마에다라는 자가 이긴 기세를 타고 진을 흐트러뜨린 채 덤벼 올 것이다. 그때 되돌아서서 도시이에를 치겠다" 하며 척후 두 기를 보냈다. 그러나 척후는 돌아와 "적은 성을 등지고 조용히 있을 뿐, 덤벼 올 기색이 없습니다" 하고 아뢰었다. 나리마사의 계책은 빗나갔다.

원문
瀧川一益、佐々成政等信孝を推崇て秀吉と弓箭を取りしに、天正十二年九月成政八千の兵を率ゐて、加州金澤の城主前田利家の士大將奧村助右衞門永福後に伊豫が守る所の能登の末森の城を圍む。成政旗本を以て後卷を押へ嚴しく攻むる。此城だに打破らば、能登は一日に討ち從ふべし。後卷無き中に乘取れ、と下知しけり。奧村僅に三百許の士卒にて爰を詮度と防ぎけるに、餘りに强く攻められて、今は是までなり自害せん、と云ひけるに、助右衞門が妻小袖を搔い取り鉢卷をし刀を橫たへ、女房に粥を手桶に入れさせ、塀裡の人々に自ら飮ませ、昔楠とやらん云ひし大將の、日本國を敵にして城に籠りたりと聞く。明日は金澤より後詰の候べきに只一夜防ぎ給へ、と云ひて打廻るを、奧村見て、今日の振舞男子に優れり。此城を女の力にて持得んは口惜し、と自負の色あり。此城手易く落つ可からざるを見て、火攻にせんと云ふ者あり。成政、否々大手の城門を取りて富山の城門とすべし。又石動山の衆徒も吾に心を合す。火攻には爲可からず、と下知して、旣に二三の丸を攻取りて夜の明くるを待ち居たり。末森より金澤へ行程九里許、其日酉の刻に斯と告げて、夜の明くる迄は堅く守るべし、と申し送る。利家聞きも敢へず金澤の城の廣間へ出で、利長を呼んで、汝は城の留守せよ、と下知せらる。利長、否々眞先駈けて佐々を打破るべし。殘止らん事思ひも寄らず、と申されければ、利家、然らば父子打向ひ、敵の不意を討に利有らん。軍兵を整ふるに及ぶ可からず。馬に鞍だに置くならば一騎駈に打出でよ。一足も疾出づるを今宵の功と爲可し、とて富田與五郞後越後守に、汝津幡に行きて不破彥三に末森の後卷の先手せよと言へ、と下知せらる。富田己が宿所に馳せ歸り、馬引き出し打乘り、諸鐙を合せて駈け行きけり。利家、士卒皆汁を掛けて飯を喰へ、とて物具せらる。庭には黑の馬を引き立てたり。利家の北の方後芳春院三方に熨斗を入れ父子に參らせられ、扨人々聞き給へ、我は利長の母なり。今日の後卷は誠に大事の軍なるべし。各心を合せ功名し給へ。末森を敵に取られなば各達も討死し給へ。我も人手にかゝり候まじ、とて利家の側近く進み寄り、末森を敵攻め落しなば討死せさせ給へ。利長も母が此詞を能く聞かれよ。生死の別れなり、と言はれしかば、利家、あら心よや。成政を打破らん事必定なり、と言ひも敢ず、物具の上帶を締め、結べる端を切つて捨て馬に打乘り、父子の兵五百許に過ぎざりけり。利家馬上にて、味方の小勢は吉事なり。佐々が思ひも寄らざる所に切つて懸り打勝つべし。奧村討たせなば生き甲斐無し、と言ひつゝ、津幡の町を北へ打過ぎられたる時、富田乘り來る。津幡は金澤より四里餘の行程なり。利家、汝何處くに寢て有りけるぞ、と罵らるゝを、富田聞きて、津幡に馳附き不破が門を叩き申し渡し、不破物具著て候を見て打出で候へば、はや門外に旗を指出し候ひぬ。何國にか寢申す可き、と言ふ。利家尙聞き入れざりしかば、富田怒つて其日の一番鎗を合せけり。是利家士を激するの術なるべし。利家の士卒追々馳せ附ければ三千餘りに成りけるを、二陣に分け、一陣は敵の後に打懸り、一陣は敵の旗本に突いて懸る。成政軍兵疲れし上思ひ寄らざる所に、奧村も門を開きて打つて出でしかば、成政大に敗北せり。是天正十二年九月十一日の軍なり。後に聞くに、成政山の尾崎を越え、敗軍を集め陣を立直し、見よ〱今前田と言ふ男が、勝ちに乘り陣を亂して懸り來るべし。大返にして利家を打取るべし、とて物見二騎を出せしが、乘り歸りて、敵は城を後に當て、靜り返りて懸り來るべき物色候はず、といふ。成政謀違ひけり。

원문(일본어) 쪽 e169.p01

스에모리(末盛) 구원의 일은 『가에츠 갓센키(加越合戰記)』에도 실려 있는데, 큰 줄기는 같고 작은 데만 다르며 더 자세하므로 함께 여기에 적는다.

도시이에는 가가 안의 이시카와(石川)·가호쿠(川北)와 노토 전체를 다스리며 가나자와 성에 있었다. 나리마사는 엣추(越中)의 슈고(守護)로 니이카와(新川) 군 도야마 성에 있었는데, 엣추 다테야마(立山)의 사라사라고에(さら〱越)라는 험한 길을 겨우 종자 백 명쯤 거느리고 몰래 넘어 동쪽 미노(東美濃)로 나갔다. 그리고 노부카츠(信雄)에게 "히데요시와 오다 집안이 싸우는데, 큰 적이라 쉽게 이기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나리마사가 북쪽에서 쳐 올라가 앞뒤로 협공해 히데요시를 멸한다면 가가·노토·에치젠(越前) 세 곳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약조했다. 다시 사라사라고에를 넘어 도야마로 돌아와서는 삿사 헤이자에몬(佐々平左衞門), 진보 아키노카미(神保安藝守)와 의논했다. 나리마사에게는 딸이 둘 있었는데 하나는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보내 두었으므로, 그 동생을 도시이에의 둘째 아들 토시마사(利政)에게 시집보내겠다고 헤이자에몬을 시켜 말을 넣게 했다. 두 집안이 인연을 맺으니 경사라고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덴쇼 12년 7월 23일, 나리마사의 사자 삿사 헤이자에몬이 가나자와로 가서 축하 예물을 갖추어 보냈다. 도시이에는 성실한 사람이라 나리마사에게 간계가 있는 줄도 모르고 답례품을 주며 기뻐했고, 무라이 마타베에(村井又兵衞)를 답례 사자로 삼았다. 나리마사는 "8월은 꺼리는 달입니다" 하며 혼례를 미루어 두고, 밤마다 북쪽 망루에서 군사 회의를 열었다. 이를 눈치채고 몰래 도시이에에게 알린 사람이 있었다. 도시이에는 참인지 거짓인지 가리기 어렵다고 여기면서도 "방심했다가 뜻밖의 변고에 지면 활과 화살을 잡은 몸의 수치다" 하고, 가가와 엣추의 경계 아사히야마(朝日山)에 성을 쌓았다. 무라이 마타베에를 대장으로 1천 5백 남짓을 두어 지키게 하려고 목책을 둘러치던 참에, 8월 28일 나리마사 쪽에서 삿사 헤이자에몬과 마에노 코헤에(前野小兵衞)에게 군사 5천을 딸려 밀고 들어왔다. 가가의 군사들 가운데는 머물 채비를 하러 가나자와로 돌아간 자도 있어, 그때 성에는 7, 8백밖에 없었다.

그러나 무라이는 아주 굳센 자라서 우리 편을 북돋우고 있었다. 마침 도시이에의 우마마와리(馬廻り, 대장 곁을 지키는 기마 무사) 아와가 토하치(阿波賀藤八)와 에미 모쥬로(江見茂十郞)가 둘러보러 와 있었으므로, 무라이가 "서둘러 돌아가 이 사정을 알려 주시오" 하고 부탁했다. 두 사람은 얼굴빛이 변해 "가나자와에 있었더라도 이런 일을 들었다면 달려왔을 것이오. 마침 여기 와 있었던 것이 다행인데 그냥 돌아가라니 그런 법이 있소" 하고 화를 냈다. 무라이는 "참으로 든든한 말이라 더할 나위 없이 기쁘오. 다만 가는 길에 잇키(一揆, 봉기한 무리)가 일어날 것은 틀림없소. 돌아가는 길이 두렵거든 여기 머무르시오" 하고 말했다. 두 사람은 이 말을 듣고 "그러면 우리가 길의 잇키가 무서워 돌아가지 않으려 한다는 말이오. 그렇다면 달려가서 알리겠소" 하며 말에 올라, 가나자와까지 4리 반쯤 되는 길을 단숨에 달려가 알렸다. 도시이에는 "그렇다면 구원하라" 하고 후와 히코조, 다노무라 사부로시로(田野村三郞四郞), 가타야마 나이젠(片山內膳), 오카지마 키사부로(岡島喜三郞), 하라 오키(原隱岐), 다케베 스케쥬로(武部助十郞) 등을 거느리고 소라고둥을 불게 하며 서둘러 달려갔다. 마침 큰비가 쏟아지자 나리마사의 군사도 단번에 깨뜨리기는 어렵다고 여겼는지 성을 치지 않고 물러갔다.

이 일로 화친이 깨지자, 노토(能州)의 나나오(七尾)에는 도시이에의 동생 고로베에 야스카츠(五郞兵衞安勝), 같은 마에다 집안의 마고에몬 요시츠구(孫右衞門良繼), 다카바타케 오리베(高畠織部), 나카가와 세이로쿠(中川淸六), 쵸 쿠로자에몬(長九郞左衞門) 등 3천 남짓을 두었다. 노토·가가·엣추의 경계인 스에모리에는 오쿠무라 스케에몬에 센슈 도노모노스케(千秋主殿助)와 도이 이요(土井伊豫)를 딸려 1천 5백쯤을 두었다. 가가의 츠바타 성에는 마에다 우콘(前田右近)을, 엣추와의 경계인 도리고에(鳥越)에는 메카다 마타에몬(目加田又右衞門)과 니와 겐쥬로(丹羽源十郞)를 두었다. 나리마사도 구리카라(倶利加羅) 고개에 성을 쌓아 삿사 헤이에몬(佐々平右衞門)에게 2천 남짓을 주었고, 도나미(利波) 성에는 마에노 코헤에에게 2천을 주었다. 아오야마(靑山) 성에는 그 지방 무사 기쿠치 이즈노카미(菊地伊豆守)를 두었고, 아라야마(荒山)에 성을 쌓아 진보 아키노카미 우지하루(神保安藝守氏春)의 가로(家老, 중신) 후쿠로이 하야토(袋井隼人)에게 지키게 하여 나나오를 견제했다. 진보는 나리마사의 사위다. 4천의 군사로 모리야마(森山)를 지켰다.

도시이에가 이 사정을 히데요시에게 알리자, 히데요시는 듣고 삿사를 의심하며 말했다. "가가에 마타자에몬(又左衞門, 도시이에)을 둔 것은 내 계산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도시이에는 군사가 적어도 반드시 나리마사를 이길 것이다. 곧 군사를 내어 나리마사를 쳐서 멸하겠다." 그러고는 사자에게 황금 30냥을 주었다.

9월 11일, 나리마사는 스에모리로 밀고 가서 2리쯤 떨어진 츠보이야마(坪井山)에 험한 곳을 앞에 두고 진을 쳤다. 삿사 헤이자에몬, 야마시타 진파치(山下甚八), 마에노 코헤에를 비롯한 8천 남짓이 성으로 다가와 바깥 성곽의 민가에 불을 지르려 했다. 도이 이요는 "적에게 민가를 태우게 두고서는 살 보람이 없다" 하며 2백쯤을 거느리고 쳐 나가 마구 싸웠으나, 큰 적과 맞붙어 끝내 전사했다. 성 안의 군사도 여기가 마지막이라며 버텼으므로 쉽게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나리마사는 구원군이 마음에 걸린다며 진보 아키노카미 우지하루에게 4천 남짓을 딸려 가와시리(川尻)라는 곳에 진을 치게 하고 가가에서 오는 길을 막았다. 도시이에는 스에모리에서 소식이 오자마자 가나자와를 떠났고, 후와 히코조와 무라이 마타베에를 선봉으로 삼았다.

원문
末盛後卷の事、加越合戰記に見えし處、大同小異にて詳なる故併せて爰に記す。利家は加州の內石川川北能登全州を治め、金澤の城に有り。成政は越中の守護にて、新川郡富山の城に有りしが、越中立山さら〱越の難所を、僅に從者百許にて忍びて打通り、東美濃へ出で、秀吉と織田家の弓箭、大敵に手易く勝ち難からん。成政、北國より攻登りて前後より挾み打ちて秀吉を亡しなんには、加賀、能登、越前三州を賜はり候へ、と信雄に相約し、又さら〱越より富山に歸り、佐々平左衞門、神保安藝守と相計り、成政の二人の女有りし中、一人は秀吉へ人質に出し置きたりしかば、其妹を利家の二男利政に妻す可き由を平左衞門して言せしかば、兩家緣を結び目出度し、と言ひ合へり。天正十二年七月二十三日、成政の使佐々平左衞門金澤に赴き、祝ひの物取揃へ相贈りけり。利家篤實の人なれば、成政の奸謀有りとも知らず、引き出物して悅びの上、村井又兵衞を謝禮の使とせらる。成政、八月は忌み候、とて延置き、夜々北の櫓にて軍評定せられけるに、心附きて密に利家に知らす者あり。利家虛實辨へ難しと雖も、怠りて不意の變に打負けなば弓箭取る身の恥辱なり、とて加越の堺朝日山に城を構へ、村井又兵衞を大將として、千五百餘りにて守らしめん爲め柵を附け廻る處に、八月二十八日成政より佐々平左衞門、前野小兵衞に五千の兵を指添へて押寄せたり。加賀の者共居住の支度せんとて金澤に歸りたるも有りて、折節七八百には過ぎざりけり。然れども村井大剛の者にて、味方を勇め立つる處に、利家馬廻りの士阿波賀藤八、江見茂十郞見廻ひに參り合せしが、急ぎ歸りて注進を賴まばや、と云ひければ、兩人色を變じ、金澤に在りとも斯る事を聞かば馳せ來る可きに、參合せたるこそ幸なれ。然るに空しく歸れと言ふ事や有る、と怒りければ、村井聞きて、誠に賴母しき事悅ぶに餘り有り。但し路次に一揆起りなんは必定なり。各歸りに恐あらば爰に止られよ、と云ひしかば、兩人此詞を聞きて、扨は路の一揆を恐れて歸るまじとや。然らば駈け歸つて申さん、とて馬に打乘り、金澤へ四里半許なる道を只一時に馳歸り、斯と申せば、利家、然らば後卷せよ、とて不破彥三、田野村三郞四郞、片山內膳、岡島喜三郞、原隱岐、武部助十郞などを打具し、貝を吹せ揉に揉んでぞ急がれける。折しも大雨降りしかば、成政の兵も一時に攻破り難しとや思ひけん、城を攻めずして引歸しぬ。是より和談破れければ、能州七尾には利家の弟五郞兵衞安勝、同孫右衞門良繼、高畠織部、中川淸六、長九郞左衞門等三千餘にて籠め置き、能登加賀越中の堺末盛に奧村助右衞門に千秋主殿助、土井伊豫を添て、千五百許籠められたり。加州津幡の城には前田右近、越中の堺鳥越には目加田又右衞門、丹羽源十郞を籠めたり。成政も倶利加羅の嶺に城を構へ、佐々平右衞門二千餘、利波の城には前野小兵衞に二千、靑山の城には國士菊地伊豆守、荒山に城を築き、神保安藝守氏春の家老袋井隼人に守らせて七尾の押とす。神保は成政の聟なり。四千の兵をもて森山を守りけり。利家斯と秀吉に告げられければ、秀吉聞きて佐々を疑ひ、加州に又左衞門を置きつるは吾謀りしに違はざりけり。利家兵少しと雖も必ず成政に切り勝つべし。頓て師を出し、成政を討亡すべきよ、とて使者に黃金三十兩與へられぬ。九月十一日成政末盛へ押寄せ、二里許傍の坪井山に切所を前に當てて陣し、佐々平左衞門、山下甚八、前野小兵衞を始として八千餘攻寄せ、外構の町家に火を懸けんとす。土井伊豫、敵に町家を燒かれては生甲斐無し、とて二百許にて突いて出で、散々に戰ひけれ共、大敵に掛け合はせ終に討死す。城兵も爰を專途と防ぎける間、速に落つ可しとも見えざりしかば、成政後卷心元無し、とて神保安藝守氏春に四千餘を差添へて、川尻と言ふ所に陣して、加州の道を塞ぎたり。利家末盛より告げ來ると等しく金澤を打立ち、不破彥三、村井又兵衞を先陣とす。

원문(일본어) 쪽 e169.p02

다른 설에는, 나리마사가 맹렬히 공격해 니노마루·산노마루와 물 긷는 곳(水の手)을 빼앗고 혼마루(本丸)까지 몰아붙였다고 한다. 스에모리의 파발꾼은 숨이 끊어질 듯이 가나자와로 달려와 편지 상자를 내던졌다고 한다.

원문
一說に、成政嚴く攻めて、二三の丸水の手を乘取り、本丸に攻詰めたり。末森の飛脚息切るばかりに金澤に馳來り、文箱を投げけるとぞ。

원문(일본어) 쪽 e169.p03

11일 미시(未の刻, 오후 2시 무렵)의 일이다. 도시이에는 "스에모리는 물이 모자라다. 히로오카(廣岡)의 물을 길어 소라 껍데기에 담아서 서둘러 뒤따라오너라. 구원 가는 선물로 삼겠다" 하고 명했다. 또 같은 가가의 마츠토(松任)라는 곳은 가나자와에서 3리쯤 떨어진 토시나가의 거성이었으므로 "서둘러 스에모리로 향하라" 하고 전했다.

가나자와에서 4리쯤 되는 츠바타 성으로 서둘러 다가가자, 동생 우콘 히데츠구(右近秀繼)가 성곽 밖으로 마중 나와 "토시나가를 기다리시겠습니까" 하고 물었으므로 성으로 들어갔다. 토시나가는 술시(戌の刻, 오후 8시 무렵)쯤 츠바타에 닿았다. 도시이에는 기뻐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나리마사와 젊은 시절부터 여러 번 싸움터를 함께했지만, 나리마사가 이 도시이에를 앞지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렇다고 나리마사를 깔볼 수는 없지만, 앞뒤 가리지 않고 한판 붙어 이기는 것은 손바닥 안에 있다." 그렇게 기세를 올리며 나아가려는데, 데라니시 지헤에 뉴도(寺西治兵衞入道)가 우콘과 의논해 아뢰었다. "스에모리는 벌써 떨어졌을 것입니다. 게다가 가와시리에서는 진보가 많은 군사로 길을 막고 있다고 하니, 구원은 어찌하시겠습니까." 도시이에는 크게 화를 냈다. "비겁한 간언은 결코 입 밖에도 내지 말라. 사람의 목숨은 한 대에 그치지만 이름은 만대에 남는다고 했다. 오쿠무라와 도이를 버려 죽게 하고 나면, 설령 일본의 주인이 된다 해도 이 수치는 씻을 수 없다. 나리마사가 대군이라면 대군이라도 좋다. 내 우마마와리만으로도 시원하게 싸워 승부를 내기에 모자람이 없다. 무라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나는 반드시 한판 싸우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마타베에는 "싸우는 것 말고 따로 따질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했다. 도시이에는 기뻐하며 "무라이의 마음도 나와 같다" 하고 곧 떠나려 했다.

그러자 우콘이 오차즈케(茶漬飯)를 내오며 "마침 솜씨 좋은 점쟁이 야마부시(山伏, 산에서 수행하는 승려)가 있습니다. 불러서 싸움을 점쳐 보시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도시이에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그래라" 하며 불러들였다. 쉰 살쯤 된 야마부시였다. 그가 품에서 책을 꺼내자 도시이에가 "어쨌든 구원하러 가기로 정했다. 잘 보아라" 하고 말했다. 야마부시는 책을 품에 도로 넣고 "오늘은 길일이고 시각도 좋은 시각입니다" 하고 말했다. 도시이에는 "너는 노련하구나. 곧 이기고 와서 상을 주겠다" 하며 흡족하게 떠나 기세 좋게 밀고 나아갔다. 무라이와 후와가 선봉, 하라 오키, 마에다 마타지로(前田又次郞), 가타야마 나이젠이 2진, 다노무라 사부로시로, 아오야마 요소베에(靑山與惣兵衞), 곤도 젠자에몬(近藤善左衞門), 마에다 케이지로(前田慶次郞)가 뒤를 이었다. 미야카와 다지마(宮川但馬)가 무샤부교(武者奉行, 군세를 감독하는 직)였다고 한다.

가와시리 이쪽으로 1리쯤 되는 다카마츠(高松)라는 곳에서 도시이에는 투구를 쓰고, 투구 끈이 남은 것을 잘라 버렸다. 사람들은 '그렇다면 오늘이 마지막 싸움이구나' 하고 살아 돌아갈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도시이에의 측근 무사(近習) 시노하라 칸로쿠(篠原勘六)는 스물셋이었는데 가래톳(橫根)을 앓아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래도 꼭 따라나서겠다고 하자, 도시이에는 "너는 남아 있다가 내가 죽거든 성을 굳게 지키며 히데요시의 구원을 기다려라. 그래도 안 되거든 그때 할복하라" 하고 명했다. 그래서 남았으나, 가마를 타고 요리키(與力, 상급 무사에게 딸려 함께 싸우는 무사) 20기를 거느리고 가와시리 가까이에서 따라잡아 "시노하라 칸로쿠가 왔습니다"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를 들은 사람들은 "참으로 굳센 자다" 하고 입을 모았다.

가와시리 쪽에서는 츠바타에 사람을 붙여 살피게 했는데, 그가 달려 돌아와 "마에다 부자가 츠바타까지는 나왔지만 구원하러 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고 아뢰었다. 진보는 이 말을 듣고 크게 경계를 늦추었다. 도시이에는 선봉으로 말을 몰고 가서 무라이와 후와에게 "바닷가를 한 줄로 서서 말 혀를 묶고, 될 수 있는 대로 조용히 지나가라" 하고 명했다.[역주: 말이 울지 못하도록 혀를 묶는 것으로, 몰래 행군할 때 쓰던 방법이다.] 척후가 "진보가 군사를 내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고 아뢰자, 다시 도미타 에치고(富田越後, 이때는 로쿠자에몬六左衞門이라 했다)를 척후로 보냈다. 그는 달려 돌아와 "적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강에 박힌 말뚝이 많은 것을 사람으로 잘못 본 것이겠지요. 어서 밀고 나가십시오" 하고 아뢰었다. 도시이에가 "강 말뚝이라는 것은 무엇으로 알았느냐" 하고 묻자 에치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 말씀입니까. 무사라면 늘어선 줄이 그렇게 고르게 맞을 리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래도 확실히 보려고 강 한가운데까지 말을 몰고 들어가 차분히 보았습니다. 이것을 잘못 보았다면 다시는 활과 화살을 잡지 않겠습니다." 도시이에는 "네가 본 것이 옳다. 무사의 본보기로 삼아라" 하고 기뻐했다.

그리하여 군사를 나아가게 해 지나가는데, 진보는 꿈에도 이를 몰랐다. 뒤늦게 알아차렸지만, 도시이에는 이마하마(今濱)라는 곳 오른쪽 위의 산에 군사를 붙여 진을 쳤다. 날이 밝자 도시이에는 말을 타고 돌며 "군량을 먹어라. 오늘 싸움은 틀림없이 이길 테니 마음 놓아라" 하고 명하니, 모두 말에서 내렸다. 여기서 보니 토시나가의 군사가 7, 8백쯤, 두 선봉이 1천 3백쯤, 하타모토가 1천 5백을 넘지 않았다. 도시이에는 "오늘 싸움에서 공을 세우는 자는 특별히 상을 주겠다. 혹 전사하더라도 그 자손을 결코 저버리지 않겠다" 하고 큰 소리로 명했다.

그러고 나서 산을 내려가 군사를 나아가게 하니 길이 두 갈래였다. 한 갈래는 스에모리로 가는 길, 한 갈래는 나리마사의 하타모토로 가는 길이었다. 무라이가 "츠보이야마로 밀고 가서 나리마사를 사로잡겠습니다" 하고 아뢰었다. 도시이에는 듣고 "옳은 말이지만, 나리마사는 틀림없이 험한 곳을 앞에 두고 진을 쳤을 것이다. 그저 스에모리로 달려가 적을 쫓아 무너뜨리고 성 안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것이 어떠냐" 하고 말했다. 무라이는 받들어 "그렇게 하시는 것이 옳습니다. 성 안의 무사들이 지금 하신 말씀을 들으면 얼마나 고마워하겠습니까" 하고 말했다.

머지않아 스에모리 가까이 밀고 들어가자, 무라이의 부하들이 적의 목을 많이 베어 왔다. 스에모리에서는 니노마루에 틀어박혀 있던 센슈 도노모노스케, 다키츠 킨에몬(瀧津金右衞門) 등이 공격해 들어오는 적을 몰아내며 힘껏 싸웠으나 전사자가 많이 났다. 혼마루도 이미 위태로워 보였지만, 오쿠무라 스케에몬은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그때 모래 언덕(砂山) 쪽 아침 안개가 갠 틈으로 도시이에의 우마지루시(馬印, 대장의 위치를 알리는 표지)가 보이자, 성 안의 사람들은 힘을 얻어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뻐했다. 구원이 조금만 늦었더라도 성은 떨어졌을 것이다. 활로를 연 것은 오로지 도시이에가 재빠르게 군사를 움직인 덕분이었다.

무라이 마타베에와 다노무라 사부로시로를 비롯한 이들이 창을 찔러 넣으며 마구 싸웠는데, 나리마사 쪽 선봉 대장 삿사 요자에몬(佐々與左衞門)을 무라이가 찔러 쓰러뜨리자 무사 30여 명이 나란히 쓰러져 전사했다. 도시이에의 선봉이 요자에몬을 베고 함성을 지르며 몰아쳐 무너뜨리니 공격군이 패해 달아났다. 도시이에는 이를 보고 뒷문(搦手) 쪽으로 돌았다. 공격군 쪽에도 뛰어난 군사가 많이 남아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도시이에의 하타모토 50기쯤이 조용히 다가갔다. 그때 한다 한베에(半田半兵衞)가 맨 앞으로 나서서 "이치반야리" 하고 이름을 외치는 것을 사쿠라 진스케(櫻甚助)가 철포로 쏘았는데, 왼손에 맞아 한베에는 창을 끌어안고 쓰러졌다. 한베에와 진스케는 사촌 사이였는데, 진스케가 사시모노(指物, 등에 꽂는 깃발)를 보고 그를 알아보았다. 진스케도 "한베에가 살지 못하면 몹쓸 짓을 한 것이다" 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뒤에 전해졌다고 한다.

도시이에가 금박 종이를 찢어 단 사이하이(采配, 지휘채)를 잡고 "적의 철포가 거세다. 꾸물거리다가는 안 된다. 그저 덤벼들어 쫓아 무너뜨려라" 하고 명하자, 군사들은 거리낌 없이 앞다투어 덤벼들어 적을 밀어 무너뜨렸다. 공격군은 많이 죽고 패해 달아났으며, 가나자와의 군사들은 와 하고 승리의 함성을 올렸다.

도시이에는 성 안으로 말을 타고 들어가 맨 먼저 오쿠무라에게 말을 건넸다. "이번 농성의 활약은 말로 다할 수 없다. 이 도시이에가 아무리 마음을 썼더라도 네가 못난 자였다면 성을 내주었을 것이다. 또 함락당했다면 얼마나 원통했겠느냐. 이런 공명이 또 있겠느냐." 그렇게 그를 치켜세웠다. 그때 노무라 덴베에(野村傳兵衞)와 야마자키 히코에몬(山崎彥右衞門)이 서로 동시에 창을 맞댔다며 첫째와 둘째를 다투었다. 도시이에는 "한다가 맨 앞에 달려 나갔으나 운이 없어 깊은 상처를 입고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도 용사의 뜻은 드러났다. 두 사람이 동시에 창을 맞댔지만 덴베에가 이름을 외쳤으니 첫째는 노무라로 정한다" 하고 명하고, 두 사람에게 1천 석의 녹을 더해 주었다고 한다. 한베에는 상처가 낫자 2천 석을 주고 무사 15명을 요리키로 붙여 주었다.

나리마사의 하타모토에도 구원군이 왔다는 소식이 들어가자 "그렇다면 한판 붙자" 하며 8천쯤이 밀고 나왔다. 도시이에는 이를 보고 "지금 이 기세 오른 군사라면 적이 백만이라도 두려울 것 없다" 하며 선봉은 마타베에, 2진은 성주이니 오쿠무라, 3진은 후와 히코조로 정했다. 노토의 그 지방 무사 쵸 쿠로자에몬이 4, 5백쯤을 거느리고 달려왔다. 적인지 아군인지 분명하지 않아 척후를 보내 보니 쵸의 군사였다. 쵸는 "늦게 달려온 것이 원통하다. 무사의 운이 다했다" 하며 분해했다. 척후로 갔던 와키타 젠자에몬(脇田善左衞門)과 노무라 시치베에(野村七兵衞)가 이를 듣고 달려 돌아와 자세히 아뢰자, 도시이에는 쵸에게 크게 감탄했다. 모두가 저마다 쵸의 뜻을 칭찬하니, 도시이에는 "결코 늦은 것이 아니다. 작지 않은 명예다" 하는 글에 서약서를 붙여 쵸에게 주었다.

나리마사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내보냈던 군사를 거두어 산을 따라 물러갔다. 마침 무사 수행을 하러 와 있던 혼다 산야(本多三彌)는 "무작정 덤벼들어 나리마사를 베어야 하는데" 하고 말했지만, 사람들이 "용맹한 장수 나리마사이니 저렇게 가볍게 물러난 것이다" 하고 말해 뒤쫓지 않고 그만두었다. 벤 목은 753이었다고 한다.

도시이에는 나리마사가 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헛되이 물러가는 것에 화를 내면서도 "물러나는 척하다가 츠바타 성으로 밀고 올지도 모른다" 하고, 오쿠무라를 성에 남기고 군사를 많이 두고서 스에모리를 떠났다. 군사가 잇달아 더해져 1만쯤이 되었다. 다시 후와와 무라이를 선봉으로 삼아 바닷가로 나아가 츠바타로 들어갔으나, 나리마사는 츠바타로 밀고 오지 않고 물러갔다. 삿사의 군사가 금빛 노시 모양의 사시모노를 달고 있어서 츠보이야마가 온통 번쩍여 보였는데, 도시이에는 이를 바라보며 "참으로 훌륭한 진용이구나. 머지않아 나리마사를 멸하고 저 사시모노를 우리 군사들에게 꽂게 하겠다" 하고 말했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이 승리를 듣고 "일본에 견줄 데가 드문 무공이다" 하고 칭찬했다고 한다. 도시이에는 오쿠무라에게 그날 들게 했던 우마지루시와, 금박 종이를 찢어 단 사이하이를 매단 갑옷을 내려 그의 공을 기렸다고 한다.

원문
十一日未の刻の事なり。末森は水に乏し、廣岡の水を汲みて榮螺に入れ、急ぎ追附よ。後卷の土產にせん、とぞ下知せられける。偖同國松任と言ふ所、金澤より三里許隔りて利長居城なれば、疾く〱末森へ向はれよ、と言ひ送られけり。金澤より四里許なりける津幡の城へ急ぎ押附けられしかば、弟の右近秀繼廓外に出向ひ、利長を待る可きや、と言はれしかば城に入られしに、利長戌の刻ばかりに津幡に馳せ著かれけり。利家悅んで、吾成政と若き頃より數度の軍に逢ひつれども、利家を越したる事一度もあらず。然れども成政侮るべきには非れども、無二無三に一合戰して勝利を得ん事掌の中に有り、と大音揚げて呼はり勇み進まれけるに、寺西治兵衞入道右近と相議し、早や末森は落ちたるならん。殊更川尻に神保多勢にて道を切り塞ぐと聞え候へば、後卷は如何候はん、と申す。利家大に怒り、汚き諫は必ず口にも出すまじき事ぞとよ。人は一代名は末代とこそ聞け。奧村や土井を捨殺して已來、假令日本の主となる共此恥辱雪ぐ可からず。成政大軍にも有らばあれ、吾馬廻り計にても快く軍して勝負を決せん事不足なし。如何に村井、汝は如何に思ふぞ。是非一戰と思ひ定めたるぞ、と詞を掛けられしかば、又兵衞聞きも敢ず、有無の一戰の外何の是非か候べき、と云ふ。利家悅んで、村井が心も吾に同じ、とて早打立たれしに、右近茶漬飯を進め、且上手の占師の山伏の候。召して軍を占はせられんや、と問ふ。利家氣色良からねど、夫々とて呼出されけり。五十許の山伏なり。懷より書物を取出す。利家ともあれ後卷に決定したるよ。能見よ、と言はれしに、山伏書物を懷に入れ、今日吉日なり、時も吉時なり、と言へば、利家、汝功者なり。頓て打勝ち賞美すべし、と快げに打出で、勇み進んで押行きけり。村井、不破先陣、原隱岐、前田又次郞、片山內膳二陣、田野村三郞四郞、靑山與惣兵衞、近藤善左衞門、前田慶次郞押續く。宮川但馬武者奉行たりと言へり。川尻の此方一里許高松と言ふ所にて、利家冑を取つて著、忍びの緒の餘りたるを切つて捨てられしかば、偖は今日限の軍よ、と人人生きて歸るべしと思ひも寄らず。篠原勘六とて利家の近習の士二十三に成りしが、橫根を煩ひ起臥も心に任せず。然れども是非打立つべき、とせしを、汝は殘り留りて、吾討たれなば堅く城を守りて秀吉の後卷を待ち候へ。叶はずば其時腹を切れ、と下知せられしかば殘りけるが、乘物に乘り與力の士二十騎打具し、川尻近く成りて馳附き、篠原勘六參り候ひぬ、と大音に呼りければ、是を聞く人々、天晴剛の者なり、と云ひ合へり。川尻よりは津幡に人を附けて窺はするに、馳歸りて、前田父子津幡まで出でたれども、後卷有べしとは見えず、と言ふを聞きて、神保は大に備を寬めけり。利家先陣に乘行きて、村井不破に濱際を一騎打に馬の舌を卷かせ、如何にも靜に押通れ、と下知せらる。神保は兵を押出し待ちかけたり、と物見の言ひしかば、又富田越後此時六左衞門といへりを物見とせらる。馳歸りて、敵は一人も候はず。川の杭の多く候を人と見誤りたるならん。疾う〱押せられ候へ、と申す。利家、川杭とは何を證にせん、と問はるゝに、越後、されば候、武者ならば並びの揃ひ候事有るまじと存ず。猶も慥に見ん爲に、川中迄馬を打入れて、心靜に見て候。是を見損じ候程ならば再び弓箭は取るまじ、と申す。利家、汝が見る所こそ正しけれ。士の手本にせよ、と悅ばれけり。偖兵を進めて押通るに、神保是をば夢にも知らず。後れて聞附けたれ共、利家は今濱と言へる右の上なる山に兵を押附け陣せられしに、夜明けにければ利家馬を乘廻し、兵粮を遣ひ候へ。今日の軍勝つべき事心易かるべし、と下知して、皆馬より下りたり。爰にて見れば利長七八百許、兩先陣千三百許、旗本千五百には過ぎざりけり。利家、今日の軍に功名せん輩は取分て賞すべし。若討死せば必ず子孫を見放すまじ、と高らかに下知せられ、夫より山を下りて兵を進むるに、道二筋有り。一筋は末森の道、一筋は成政旗本への道なり。村井、坪井山へ押寄せ、成政を虜にせん、と申す。利家聞きて、尤なれども、成政必ず嶮を前に當ててや陣すらん。只末森へ馳附け敵を追崩し、城中の者共に力を附けんは如何に。村井承り、可㆑然候。城中の士共只今の仰を承り、さぞ辱からん、と言へり。程無く末森近く押詰めたれば、村井が者共餘多首を取來る。末森には二の丸に籠りたる千秋主殿助、瀧津金右衞門已下寄手攻め入るを追出し、力の限り戰ひけるが、討死餘多に及べり。本丸も旣に危く見ゆれ共、奧村助右衞門少も氣を屈せず、支戰ひける處に、砂山に當て朝霧の晴間に利家の馬印見えしかば、力を得勇み悅ぶ事大方ならず。今少し後卷遲かりせば城陷るべきに、運を開きしは偏に利家迅速の兵機を得られし故なりけり。村井又兵衞、田野村三郞四郞を始として、鎗を打入れ散々に戰ひけるが、成政先陣の大將佐々與左衞門を村井突伏せければ、士三十餘人枕を並べて討死す。利家の先陣佐々を討ち取り、閧を作りかけ切崩せしかば、寄手敗北しけるを、利家見て搦手へ廻られけり。寄手にも究竟の兵餘多有りて待ちかけたれば、利家旗本五十騎許靜に懸りける所に、半田半兵衞眞先に進み、一番鎗と名乘りける所を、櫻甚助鐵炮にて擊ちたりしかば左の手に當り、鎗を抱きて倒れたり。半兵衞と甚介は從弟なりしが、指物にて見知りける故、甚介も、半兵衞存命へずば不便なる事を爲たるよ、と淚を流しけると後には聞えけるとかや。利家、敵の鐵炮烈し、延々にせば叶ふまじ。たゞ懸りて追崩し候へ、と金の切裂の采配を取つて下知せられしかば、會釋も無く競ひかゝりて押崩す。寄手餘多討たれて敗北せしかば、金澤の士勝閧を㗢とぞ上げたりける。利家城中に乘入りて奧村を首詞を掛け、今度籠城の働言語の及ぶべきに非ず。利家如何に思ふとも、汝が言ひ甲斐無くて城を明くるか。又攻落されなば口惜かる可きに、斯る功名やある、と勇め立てらる。其時野村傳兵衞、山崎彥右衞門一度に鎗を合せたり、とて一二の爭論せり。利家、半田が眞先駈したるに冥加無く深手負、志を遂げざれども勇士の志は顯れたり。二士一同に鎗を合せたれども傳兵衞名乘たれば、一番をば野村に極めたるぞ、と下知せられ、二人に千石の加祿を與へられけるとぞ。半兵衞は疵癒えて二千石與へ、士十五人與力に附けられけり。成政の旗本へも後卷の由聞えしかば、然らば一軍せん、とて八千許押出す。利家是を見て、此勇める勢には百萬もあれ恐るゝに足ず。先陣は又兵衞せよ。二陣は城主なれば奧村、三番は不破彥三と定められけり。能州の國士長九郞左衞門四五百許にて馳來る。敵味方分明ならねば物見を遣るに長が兵なり。遲く馳附きつる事口惜き事なり。弓箭の冥利に盡きたり、と憤りけるを、物見の脇田善左衞門、野村七兵衞聞きて馳歸りて具に申せば、利家長を感ぜらるゝ事大方ならず。皆とり〲に長が志を褒立つれば、努々後れたるに非ず。淺からざる譽なり、と誓紙を添へたる書を長に與へられたり。成政如何に思ひけん、打出したる兵を引き纏ひ、山に添うて引退く。折しも武者修行して來り居たりし本多三彌は、無二無三に掛りて成政を討ち取るべきに、と云ひけれども、猛將の成政なればこそ手輕く引拂ひたれ、と人々言ひしかば附慕はずして止みにけり。討取りし首七百五十三とぞ聞えし。利家は成政城を攻め落さず空しく引返す事を怒り、引退く體にして津幡の城へ寄せんも計り難し、とて奧村を城に止め兵を數多指置きて末森を打出でられしに、追々に兵加はり一萬許に成りにけり。又不破村井を先陣として濱邊に指掛り、津幡に馬を入れられしかども、成政は津幡に押寄せずして引取りけり。佐々が軍兵金の熨斗の指物したれば、坪井山は輝き渡りて見えけるを利家打詠め、天晴見事なる備立よ。頓て成政を攻亡し、我士卒に指さすべきよ、と言はれけるとぞ。秀吉此勝利を聞き、日本に比類少き武功と賞せられぬるとかや。利家奧村に其日持たせられし馬印、金の切裂の采配著けられし甲冑を賜りて賞せられしといへり。

원문(일본어) 쪽 e169.p04

번역: historyfol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