常山紀談원문 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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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시 하치오지 성이 함락된 일

· 卷之九 제9화 · 원문(일본어) 쪽

에도 시대 중기 오카야마번의 유학자 유아사 조잔(湯浅常山)이 센고쿠~에도 초 무장들의 일화를 모은 『조잔키단(常山紀談)』(1739년 자서)의 한국어 번역이다. 후대에 전해진 이야기를 모은 책이라 역사적 사실과 다른 대목이 있다.

무사시(武州) 하치오지(八王寺) 성주 호조 무츠노카미 우지테루(北條陸奧守氏昭)는 오다와라(小田原)에 가 있고 가신들이 성을 지키고 있었다.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와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는 이 성을 치려고, 먼저 항복한 호조 우지쿠니(北條氏邦)를 시켜 성으로 사자를 보내 "오다와라는 이미 무너졌다. 어서 성을 내주어라" 하고 전했다. 나카야마(中山), 곤도(近藤), 가노(狩野) 등은 따르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우지테루가 항복했다면 우리에게 증서를 내려 성에서 나오라고 명했을 것이다. 그렇지도 않은데 항복한다면 무사의 흠이다. 우지쿠니 같은 겁쟁이는 성 안에 한 사람도 없다." 도시이에와 카게카츠도 그 의리에 감탄했지만 그만둘 수는 없었으므로 1만 5천의 군사로 성을 에워쌌다.

아마카스 키요나가(甘糟淸長)가 쳐들어가 불을 질렀다. 가노 잇안(狩野一庵), 곤도 데와 스케자네(近藤出羽助實), 가네코 사부로에몬 이에시게(金子三郞右衞門家重)는 죽기로 쳐 나와 싸우다 전사했다. 요코지 겐모츠(橫地監物)는 우지테루의 으뜸가는 중신이었다. 불길이 치솟자 오늘이 마지막이라며 마구 싸웠으므로 공격군에서 죽은 자가 많았다. 나카야마 가게유 이에노리(中山勘解由家範)는 무용이 뛰어난 장수로, 특히 하치조 슈리 미츠토모(八條修理滿朝)의 마술(馭法)을 이어받아 간토(關東)에서 견줄 자가 없다고 일컬어지던 사람이었다. 그는 큰 적에게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2백쯤을 거느리고 쳐 나가 여기가 마지막이라며 칼을 휘둘렀으나, 공격군이 새 군사를 번갈아 넣으며 몰아치자 겨우 15, 16명만 남았다.

도시이에가 "누구 나카야마와 연고가 있는 자가 없느냐" 하고 묻자, 마츠야마(松山)에서 항복한 네기시 가즈에 사다나오(根岸主計定直)의 아내가 나카야마의 아내와 자매 사이이고, 고이와이 우타노스케(小岩井雅樂助)는 나카야마에게 마술을 배운 제자라고 아뢰었다. 도시이에는 "어서 나카야마에게 우리 편이 되라고 전하라" 하며 두 사람을 성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러나 나카야마는 이미 자결했고 그 아내도 자결했는데, 아직 숨이 붙어 있었으므로 몇 마디 말을 나누고 달려 돌아와 이를 알리니 도시이에는 몹시 아까워했다. 겐모츠는 포위를 뚫고 달아났다.

호조 가문의 간토 성이 많았지만 이즈(豆州)의 니라야마(韮山) 성 말고는 대부분 항복했는데, 하치오지의 군사는 성을 베개 삼아 싸우다 죽었다. 도쇼구(東照宮,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를 듣고 그 의리에 감탄해, 나카야마의 맏아들 스케로쿠로 테루모리(助六郞昭守)와 둘째 아들 사스케 노부요시(左介信吉)에게 녹을 내렸다. 테루모리의 아들 노부모리(信守)는 오사카(大坂) 싸움에서 공을 세웠다. 노부요시는 뒤에 미토 주나곤(水戶中納言)을 섬겨 비젠노카미(備前守)라 칭했다. 가노 카즈히로(狩野一廣)의 아들 슈젠(主膳)도 도쿠가와 가문을 섬겼다.

원문
武州八王寺の城主北條陸奧守氏昭は、小田原に有りて家臣留守したりしに、前田利家、上杉景勝攻めんとて、先に降參しける北條氏邦に使を城に遣らせ、小田原旣に破れぬ。疾城を渡し候へ、と言ひ送る。中山、近藤、狩野等從はず。氏昭降參せば證書を賜はりて城を出づべき旨下知すべし。然らずして降參せば士の瑕瑾なり。氏邦が如き臆病者は一人も城中に候はず、と答へけり。利家景勝も其義に感ずと雖も、扨止むべからざれば、一萬五千の兵をもて圍まれけり。甘糟淸長攻入つて火を掛くる。狩野一庵、近藤出羽助實、金子三郞右衞門家重死狂ひに切つて出で討死す。橫地監物は氏昭の第一の長臣なり。火燃え上れば今日を限りに散々に戰ひけるに、寄手討るゝ者多し。中山勘解由家範は武勇の將、殊に八條修理滿朝が馭法を傳へ、關東無雙と世に稱せらるゝ人なり。大敵に少しもひるまず、二百許にて突いて出で、爰を最期と切つて廻るに、寄手新手を入替へ攻めければ、僅十五六人に討爲されけり。利家、誰か中山緣有る、と問はるゝに、松山の降人根岸主計定直が妻は中山が妻と兄弟なり。小岩井雅樂助は中山が馭法の弟子なる由を申す。利家、疾く中山に味方に屬せよと言ふべし、とて兩人を城中へ入れられしに、中山旣に自害して其妻も自害したるが、未だ息かゝりて有りければ、詞を交して馳歸り、斯と言へば利家大に惜まれけり。監物は切り脫けて逃げ出でけり。北條家關東の城々多しと雖も、豆州韮山の城の外は多く降參しけるに、八王寺の兵城を枕に戰死せし事を東照宮聞し召し、其義を感じ思召され、中山が嫡子助六郞昭守二男左介信吉に祿賜はり、昭守が子信守大坂の軍に功有り。信吉は後水戶中納言に仕へて備前守と稱す。狩野一廣が子主膳も仕へ奉りけり。

원문(일본어) 쪽 e203.p01

번역: historyfol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