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초(慶長) 2년(1597) 조선은 번병선(番兵船, 바다를 지키는 배) 수백 척을 가라시마(から島, 거제도)에 두고 일본 군선을 막았다. 여러 장수 사이에 번선(番船)을 빼앗을 의논이 있었다. 가토 사마노스케 요시아키(加藤左馬助嘉明)는 "눈에 다 담지 못할 만큼 많은 대군을 적은 군세로 어찌 이기겠소" 하고 말했으나, 몰래 휘하 사람들에게 지시해 다섯 명, 열 명씩 배에 태워 번선 쪽으로 저어 가게 했다. 요시아키는 "법을 어기는 자들을 붙잡아 말려라" 하며 잇달아 배를 내보냈는데, 얼마 뒤 "내가 직접 말리지 않으면 그치지 않겠다" 하고 내뱉고는 배에 올라 저어 나갔다. 가와이 쇼다유(河合庄大夫), 같은 집안의 쇼지로(庄次郞), 오기노 사쿠에몬(荻野作右衞門), 가기카케의 산스케(かぎ懸の三介)[역주: 가기카케(鉤懸)는 갈고리를 걸어 끌어당긴다는 말이다.], 이렇게 다섯 사람이 올라타 번선 무리 속으로 밀고 들어갔다. 산스케가 "배는 어느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요시아키는 "한가운데 있는 대장선(本船)에 대라" 하고 지시하고는 곧 옮겨 탔다. 적은 그 기세에 겁을 먹고 배 밑으로 들어가 칼을 뽑고 화살촉을 나란히 겨누고 기다렸는데, 요시아키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뛰어드니 따르는 자들이 어찌 남아 있겠는가. 잇따라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베어 대장선을 빼앗자, 여러 장수도 뒤따라 배를 밀고 나왔다. 이미 철포 화약에 불이 옮겨 붙어, 불타는 배를 빼앗는 자가 많았다. 가와이 쇼지로는 열여섯 살이었는데, 뛰어들려다 바다에 빠져 죽었다. 츠쿠다 지로베에(佃次郞兵衞)와 가토 곤시치로(加藤權七郞)가 뛰어난 공명을 세웠다. 요시아키 한 사람의 무용으로 7월 16일 대낮에 밀고 들어가, 한 척에 5백 명, 3백 명씩 타고 있던 번선 120척을 얼마 안 되는 군사로 모조리 베어 바다에 가라앉힌 것은 예나 지금이나 드문 일이다. 히데요시(秀吉)는 칸조(感狀, 공을 인정하는 문서)를 주고, 6만 2천 석에 녹을 더해 10만 석을 주었다. 이케다(池田) 가문의 중신 이케다 카와치(池田河內)의 아내는 요시아키의 딸이니, 카와치의 아들 이가(伊賀)는 요시아키의 외손자다. 이가가 젊었을 때 외할아버지에게 무공을 물었더니 "이제는 늙어서 지난 일은 다 잊었다"고만 하고 말았다. 가라시마의 해전을 묻자 "열대여섯 살 된 고쇼(小姓, 주군 곁에서 시중드는 소년 가신)가 배를 옮겨 타다가 화살에 맞아 바다에 떨어져 죽었다. 가엾기 그지없다" 하고 이 일만 이야기하고 다른 일에는 미치지 않았다고 한다.
가토 요시아키가 몰래 앞질러 나가 공명을 세운 일
에도 시대 중기 오카야마번의 유학자 유아사 조잔(湯浅常山)이 센고쿠~에도 초 무장들의 일화를 모은 『조잔키단(常山紀談)』(1739년 자서)의 한국어 번역이다. 후대에 전해진 이야기를 모은 책이라 역사적 사실과 다른 대목이 있다.
慶長二年朝鮮の番兵船數百艘をから島に置きて日本の軍船を防ぐ。諸將番船を乘取るべき評定有り。加藤左馬助嘉明、目に餘る大軍を小勢をもて爭か打勝つべき、と言はれしが、密に手の者に下知し、五人十人船に乘り番船の方に漕向ふ。嘉明、法を背く者共を押留めよ、とて追々船を出されしが、稍有りて、我押止ずば止らじ、と言捨て船に乘り漕出す。河合庄大夫、同庄次郞、荻野作右衞門、かぎ懸の三介五人打乘りて番船の中に押入たり。三介、船は何れ、と問ふ。正中の本船に著けよ、と下知し、軈て乘移る。敵其勢に恐れ、船底に入りて劔を拔き鏃を揃へて待ちかけたるに、嘉明少もためらはず飛込みたれば、從者なにかは殘るべき、續いて飛入りて撫切にして本船を乘取りたれば、諸將も追續き船を押出し來る。旣に鐵炮の藥に火移り、燒船を乘取る者多し。河合庄次郞は十六歲なるが、飛入るとて海に飛込溺死す。佃次郞兵衞、加藤權七郞勝れたる功名せり。嘉明一人の武勇にて七月十六日白晝に押寄せ、番船百二十艘、一艘に五百人三百人乘組たるを、僅の士卒にて悉く海に切沈めたるは古今に稀なる事共なり。秀吉感狀を與へ、六萬二千石に增祿して十萬石を與へらる。池田家の長臣池田河內が妻は嘉明の女にて、河內が男伊賀は外孫なり。伊賀若き時外祖父に武功の事を尋ねければ、今は年老て過ぎつる事皆忘れたり、とのみ言ひて止ぬ。から島の船軍の事を問ふに、十五六歲なる小姓の船に乘移る時、矢に中り海に落ちて死したりき。不便の至りなり、と只此事を語りて他の事に及ばざりしとぞ。
번역: historyfol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