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초(慶長) 3년(1598) 8월 18일 타이코(太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났다. 그 무렵 다이토쿠인도노(台德院殿,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후시미(伏見)에 머물고 있었는데, 타이코의 병이 위중했으므로 간토(關東)로 내려가는 일을 미루고 있다가, 19일에 갑자기 후시미를 떠나 간토로 돌아갔다. 이는 도쇼구(東照宮,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원대한 헤아림이었을 것이다. 네 다이로(四老)와 부교(奉行)들이 은밀히 의논하여 "도쿠가와 님이 후시미에 있으면 권위가 날로 커질 것이다. 히데요리(秀賴) 공을 서둘러 오사카(大坂)로 옮겨 모든 이가 한데 모여 받드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도쇼구에게 강하게 청했다. 그리하여 게이초 4년(1599) 정월 10일 히데요리가 오사카로 옮겨 갔다. 도쇼구도 배웅하여 오사카로 갔다. 도쇼구는 카타기리 히가시노이치노카미 카츠모토(片桐東市正且元)의 집에 묵었는데, 12일 새벽 갑자기 길을 떠나 요도가와(淀川)를 배로 거슬러 올라갔다. 히라카타(枚方) 가까이 이르자 강기슭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혹시 해치려고 꾀하는 역도들이 아닐까 하고 놀라는데,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의 아시가루(足輕, 보병)로 보입니다" 하고 아뢰는 자가 있었다. 이윽고 배가 가까워지자 와키 고에몬(脇五右衞門) 등 모노가시라(物頭, 아시가루 부대의 대장)들이 무릎을 꿇고 기다리고 있었고, 도쇼구는 곧 후시미로 들어갔다.
이시다 일당이 도쇼구를 해치려 꾀한 일
에도 시대 중기 오카야마번의 유학자 유아사 조잔(湯浅常山)이 센고쿠~에도 초 무장들의 일화를 모은 『조잔키단(常山紀談)』(1739년 자서)의 한국어 번역이다. 후대에 전해진 이야기를 모은 책이라 역사적 사실과 다른 대목이 있다.
또 이때 가마에는 무라코시 요사에몬(村越與三右衞門)을 태우고, 도쇼구는 수행 무사들의 기마 행렬 속에 섞여 있었다고도 한다. 또 이이 나오마사는 말을 타고 마중을 나왔는데, 갑옷을 입고 그 위에 평상복을 걸치고 있었다. 나오마사의 부하들은 모두 옷 아래에 구소쿠(具足, 갑옷 한 벌)를 입었고, 활과 철포를 든 자들이 모두 합쳐 이천 명가량 왔다. 특히 도쇼구가 아끼던 말 야하치카게(彌八鹿毛)를 끌고 왔으므로, 도쇼구가 곧바로 그 말에 올라 돌아갔다고도 한다.
원문
이 무렵 이미 세간에서는 갖가지 소문이 퍼져,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며 사람들이 불안해했다. 도쇼구도 저택에 굵은 대나무로 마름모꼴 울타리를 엮게 하고, 문을 활짝 열어 둔 채 적이 쳐들어오면 굳게 막아 지킬 채비를 했다. "문을 열어 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고 아뢰는 자가 있자, 도쇼구는 "문을 닫고 지키면 적에게 얕보인다. 그저 당당하게 싸울 채비를 하라" 하고 말했다고 한다. 교고쿠 타카츠구(京極高次)가 와서 "오츠(大津) 성으로 옮겨 가시지 않겠습니까?" 하고 권하자, 도쇼구는 이를 듣고 "적이 쳐들어오면 우에노다이(上の臺)로 밀고 올라가 긴사츠노미야(金札の宮) 근처에서 둥글게 진을 치고 한판 싸우겠다. 내 군사는 이천 명가량 있을 것이다. 적이 몇만이든 쳐부수기 어렵지 않다" 하고 말했다.
정월 19일, 안코쿠지 에케이(安國寺瓊長老), 이코마 우타노카미(生駒雅樂頭), 나카무라 시키부쇼유(中村式部少輔), 호리오 타테와키(堀尾帶刀) 네 사람이 네 다이로와 오부교(五奉行)의 사자로 도쇼구에게 와서,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하치스카 요시시게(蜂須賀至鎭)와의 혼인 문제를 들어 도쿠가와 가문이 제멋대로 하는 일들이 도요토미 가문을 위해 옳지 않다고 따졌다. 이 때문에 세상에는 더욱 갖가지 풍문이 돌았다.
그 무렵 사카키바라 시키부노타이후 야스마사(榊原式部大輔康政)가 후시미로 올라가려고 2월 25일 오와리(尾州)의 미야(宮)에 이르렀는데, 후시미가 소란하다는 말을 듣고 밤낮으로 길을 서둘렀다. 가는 길에 들으니 후시미에서는 이미 도쇼구의 저택에 적이 쳐들어왔다는 등의 소문이 퍼져 있었다. 26일 저녁 제제(膳所)에서 후시미에서 오는 파발꾼을 만나 "아직 싸움은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하는 말을 듣자, 야스마사는 기뻐하며 곧 제제에 진을 쳤다. 그러고는 히데요리의 명이라 칭하고 "후시미의 소란 때문에 도카이도(東海道)와 도산도(東山道) 두 가도의 통행을 막는다" 하고 알리게 하여, 세타(勢田)와 야바세(矢橋)를 사흘 동안 막았다. 그 무렵 소란을 전해 듣고 여러 지방에서 교토와 후시미로 모여드는 사람이 유난히 많았는데, 이들이 길이 막혀 구사츠(草津)와 야스(野洲)를 비롯한 곳곳에 몇만인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쌓였다. 야스마사가 사흘 뒤 미시(未刻, 오후 2시 무렵)에 세워 두었던 관문을 열자, 나그네들이 한꺼번에 교토와 후시미로 들어갔다. 야스마사가 제제를 떠나 칠천 명가량을 이끌고 후시미로 들어가니, 교토에서는 간토에서 수만의 군병이 달려왔다고 소문이 났다. 야스마사가 고구소쿠(小具足, 간단한 갑옷 차림)를 입고 머리띠를 두르고 우마지루시(馬印, 대장의 위치를 알리는 표지)를 세우고 오자, 도쇼구는 그를 앞으로 불러 손수 노시(熨斗, 축하의 뜻으로 주는 말린 전복)를 내렸다. 야스마사는 지시를 내려 창고에서 돈 수천 관을 꺼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이후(內府, 이에야스)의 군병이 육만이나 달려와 저택에서 군량을 갑자기 마련하지 못했다"고 말하게 하며 가게에서 파는 음식을 사 오게 했다. 수천 명이 교토·후시미·요도(淀)를 돌아다니며 팥밥·과자·술 같은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사 오니, 간토에서 십만 군병이 모였다고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 때문에 이시다(石田)의 계략이 헛되이 되었다고 한다.
도쇼구는 야규 마타에몬(柳生又右衞門)이 이시다의 사무라이다이쇼(士大將, 한 부대를 이끄는 무사 대장) 시마 사콘(島左近)과 같은 지방 출신이라 친하다는 말을 듣고 "사콘에게 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그가 무어라 하는지 듣고 오라" 하고 명했다. 야규가 사콘을 만나 세상 이야기를 하다가 "앞으로 어찌 될 것 같소?" 하고 묻자, 사콘은 듣고 "지금 마츠나가(松永)·아케치(明智) 두 사람 같은 지모와 결단을 지닌 자가 없으니 무슨 일이 있겠소" 하고 웃었다. 그 까닭은 이러했다. 언젠가 이시다가 밀모를 꾸밀 때 사콘이 말했다. "도요토미 가문을 위한다면 이대로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제 생각이 있습니다. 큰일을 꾀하려면 자기가 뜻한 바를 오로지 결단하여 조금도 머뭇거려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작년부터 해치울 수 있었던 기회를 여러 번 헛되이 놓치셨습니다. 이미 때를 잃었습니다. 세상 형편을 잘 살펴보면 이시다 가문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대개 도쿠가와 님에게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 가문의 존망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루가 지나는 것도 아깝습니다. 이제는 그저 옳고 그름을 굽혀서라도 지금껏 소원했던 여러 대장들에게도 몸을 낮추고, 원한이 남지 않게 처리하여 사귀고 가까이 지내며 잠시 때를 기다리는 것도 한 가지 계책일 것입니다." 미츠나리(三成)가 "그러니 설령 한때 뜻을 이룬다 해도 뒤탈이 없을 방도를 꾀하는 것이다" 하고 말하자, 사콘은 이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한때 이길 수만 있다면 뒤에 무슨 위태로울 일이 있겠습니까. 나이후와 가까운 사람들을 헤아려 보면 그 군사는 이만을 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편은 본디 뜻을 함께하는 큰 영지의 사람들이 있고, 또 가까운 지방의 군사를 모으면 금세 달려와 오륙만에는 이를 것입니다. 카게카츠(景勝) 경이 사이(采配, 지휘채)를 잡고 지휘하여 간토를 쳐부순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그러고는 다시 생각한 바를 꺼내려는데 손님이 와서 미츠나리가 자리를 떴다. 가시하라 히코에몬(樫原彥右衞門)이 남아 사콘을 향해 "참으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마츠나가 단조(松永彈正)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는 둘도 없는 악역의 무리이지만, 일을 결단하는 데에는 누가 그들과 견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결론이 나지 않는 논의를 깨뜨려 줄 사람으로는 그런 이들이야말로 의지할 만한데" 하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야규에게 그렇게 대답했다는 것이다.
원문
번역: historyfol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