常山紀談원문 데이터베이스

목차 › 卷之十一 › e287

이시다 일당이 도쇼구를 해치려 꾀한 일

· 卷之十一 제24화 · 원문(일본어) 쪽

에도 시대 중기 오카야마번의 유학자 유아사 조잔(湯浅常山)이 센고쿠~에도 초 무장들의 일화를 모은 『조잔키단(常山紀談)』(1739년 자서)의 한국어 번역이다. 후대에 전해진 이야기를 모은 책이라 역사적 사실과 다른 대목이 있다.

게이초(慶長) 3년(1598) 8월 18일 타이코(太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났다. 그 무렵 다이토쿠인도노(台德院殿,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후시미(伏見)에 머물고 있었는데, 타이코의 병이 위중했으므로 간토(關東)로 내려가는 일을 미루고 있다가, 19일에 갑자기 후시미를 떠나 간토로 돌아갔다. 이는 도쇼구(東照宮,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원대한 헤아림이었을 것이다. 네 다이로(四老)와 부교(奉行)들이 은밀히 의논하여 "도쿠가와 님이 후시미에 있으면 권위가 날로 커질 것이다. 히데요리(秀賴) 공을 서둘러 오사카(大坂)로 옮겨 모든 이가 한데 모여 받드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도쇼구에게 강하게 청했다. 그리하여 게이초 4년(1599) 정월 10일 히데요리가 오사카로 옮겨 갔다. 도쇼구도 배웅하여 오사카로 갔다. 도쇼구는 카타기리 히가시노이치노카미 카츠모토(片桐東市正且元)의 집에 묵었는데, 12일 새벽 갑자기 길을 떠나 요도가와(淀川)를 배로 거슬러 올라갔다. 히라카타(枚方) 가까이 이르자 강기슭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혹시 해치려고 꾀하는 역도들이 아닐까 하고 놀라는데,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의 아시가루(足輕, 보병)로 보입니다" 하고 아뢰는 자가 있었다. 이윽고 배가 가까워지자 와키 고에몬(脇五右衞門) 등 모노가시라(物頭, 아시가루 부대의 대장)들이 무릎을 꿇고 기다리고 있었고, 도쇼구는 곧 후시미로 들어갔다.

원문
慶長三年八月十八日太閤逝去。其比台德院殿伏見に御座しまして、太閤の病重かりしかば、關東に赴かせ給はん事延引なりしが、俄に十九日伏見を發して關東に歸らせ給ふ。是れ東照宮遠大の神慮なるべし。四老奉行內々相計り、德川殿伏見に有りて權威日々に增長すべし。秀賴公を早く大坂へ移し、諸方一同に參り集りて尊敬すべき事然るべし、と東照宮に强て申して、同四年正月十日大坂に移居あり。東照宮も送らせ給ひて、大坂へ御出あり。片桐東市正且元が宅に御止宿有りけるが、十二日の曙に俄に打立ち給ひて、淀川を御船にて上らせ給ふ處に、枚方近く川岸に人多く群りけり。若や謀り奉る叛反の輩に有るべきか、と驚く處に、井伊直政が足輕と見ゆる、と申す者あり。程無く御船近く成りければ、脇五右衞門などいへる物頭跪きて待ち奉りて、頓て伏見に入らせ給ひぬ。

원문(일본어) 쪽 e287.p01

또 이때 가마에는 무라코시 요사에몬(村越與三右衞門)을 태우고, 도쇼구는 수행 무사들의 기마 행렬 속에 섞여 있었다고도 한다. 또 이이 나오마사는 말을 타고 마중을 나왔는데, 갑옷을 입고 그 위에 평상복을 걸치고 있었다. 나오마사의 부하들은 모두 옷 아래에 구소쿠(具足, 갑옷 한 벌)를 입었고, 활과 철포를 든 자들이 모두 합쳐 이천 명가량 왔다. 특히 도쇼구가 아끼던 말 야하치카게(彌八鹿毛)를 끌고 왔으므로, 도쇼구가 곧바로 그 말에 올라 돌아갔다고도 한다.

원문
又此時御乘物には村越與三右衞門を乘せさせ給ひ、東照宮には陪者の騎馬の中に御雜り有りたりとも言へり。又井伊直政は馬上にて御迎に出で、物具して其上に常の衣服著たり。直政が手の者皆下に具足を著、弓鐵炮の者彼是二千許にて參り、殊に御愛ありける彌八鹿毛を引き來りければ、其儘打乘らせ給ひて歸らせ給ふとも言へり。

원문(일본어) 쪽 e287.p02

이 무렵 이미 세간에서는 갖가지 소문이 퍼져,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며 사람들이 불안해했다. 도쇼구도 저택에 굵은 대나무로 마름모꼴 울타리를 엮게 하고, 문을 활짝 열어 둔 채 적이 쳐들어오면 굳게 막아 지킬 채비를 했다. "문을 열어 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고 아뢰는 자가 있자, 도쇼구는 "문을 닫고 지키면 적에게 얕보인다. 그저 당당하게 싸울 채비를 하라" 하고 말했다고 한다. 교고쿠 타카츠구(京極高次)가 와서 "오츠(大津) 성으로 옮겨 가시지 않겠습니까?" 하고 권하자, 도쇼구는 이를 듣고 "적이 쳐들어오면 우에노다이(上の臺)로 밀고 올라가 긴사츠노미야(金札の宮) 근처에서 둥글게 진을 치고 한판 싸우겠다. 내 군사는 이천 명가량 있을 것이다. 적이 몇만이든 쳐부수기 어렵지 않다" 하고 말했다.

정월 19일, 안코쿠지 에케이(安國寺瓊長老), 이코마 우타노카미(生駒雅樂頭), 나카무라 시키부쇼유(中村式部少輔), 호리오 타테와키(堀尾帶刀) 네 사람이 네 다이로와 오부교(五奉行)의 사자로 도쇼구에게 와서,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하치스카 요시시게(蜂須賀至鎭)와의 혼인 문제를 들어 도쿠가와 가문이 제멋대로 하는 일들이 도요토미 가문을 위해 옳지 않다고 따졌다. 이 때문에 세상에는 더욱 갖가지 풍문이 돌았다.

그 무렵 사카키바라 시키부노타이후 야스마사(榊原式部大輔康政)가 후시미로 올라가려고 2월 25일 오와리(尾州)의 미야(宮)에 이르렀는데, 후시미가 소란하다는 말을 듣고 밤낮으로 길을 서둘렀다. 가는 길에 들으니 후시미에서는 이미 도쇼구의 저택에 적이 쳐들어왔다는 등의 소문이 퍼져 있었다. 26일 저녁 제제(膳所)에서 후시미에서 오는 파발꾼을 만나 "아직 싸움은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하는 말을 듣자, 야스마사는 기뻐하며 곧 제제에 진을 쳤다. 그러고는 히데요리의 명이라 칭하고 "후시미의 소란 때문에 도카이도(東海道)와 도산도(東山道) 두 가도의 통행을 막는다" 하고 알리게 하여, 세타(勢田)와 야바세(矢橋)를 사흘 동안 막았다. 그 무렵 소란을 전해 듣고 여러 지방에서 교토와 후시미로 모여드는 사람이 유난히 많았는데, 이들이 길이 막혀 구사츠(草津)와 야스(野洲)를 비롯한 곳곳에 몇만인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쌓였다. 야스마사가 사흘 뒤 미시(未刻, 오후 2시 무렵)에 세워 두었던 관문을 열자, 나그네들이 한꺼번에 교토와 후시미로 들어갔다. 야스마사가 제제를 떠나 칠천 명가량을 이끌고 후시미로 들어가니, 교토에서는 간토에서 수만의 군병이 달려왔다고 소문이 났다. 야스마사가 고구소쿠(小具足, 간단한 갑옷 차림)를 입고 머리띠를 두르고 우마지루시(馬印, 대장의 위치를 알리는 표지)를 세우고 오자, 도쇼구는 그를 앞으로 불러 손수 노시(熨斗, 축하의 뜻으로 주는 말린 전복)를 내렸다. 야스마사는 지시를 내려 창고에서 돈 수천 관을 꺼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이후(內府, 이에야스)의 군병이 육만이나 달려와 저택에서 군량을 갑자기 마련하지 못했다"고 말하게 하며 가게에서 파는 음식을 사 오게 했다. 수천 명이 교토·후시미·요도(淀)를 돌아다니며 팥밥·과자·술 같은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사 오니, 간토에서 십만 군병이 모였다고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 때문에 이시다(石田)의 계략이 헛되이 되었다고 한다.

도쇼구는 야규 마타에몬(柳生又右衞門)이 이시다의 사무라이다이쇼(士大將, 한 부대를 이끄는 무사 대장) 시마 사콘(島左近)과 같은 지방 출신이라 친하다는 말을 듣고 "사콘에게 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그가 무어라 하는지 듣고 오라" 하고 명했다. 야규가 사콘을 만나 세상 이야기를 하다가 "앞으로 어찌 될 것 같소?" 하고 묻자, 사콘은 듣고 "지금 마츠나가(松永)·아케치(明智) 두 사람 같은 지모와 결단을 지닌 자가 없으니 무슨 일이 있겠소" 하고 웃었다. 그 까닭은 이러했다. 언젠가 이시다가 밀모를 꾸밀 때 사콘이 말했다. "도요토미 가문을 위한다면 이대로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제 생각이 있습니다. 큰일을 꾀하려면 자기가 뜻한 바를 오로지 결단하여 조금도 머뭇거려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작년부터 해치울 수 있었던 기회를 여러 번 헛되이 놓치셨습니다. 이미 때를 잃었습니다. 세상 형편을 잘 살펴보면 이시다 가문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대개 도쿠가와 님에게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 가문의 존망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루가 지나는 것도 아깝습니다. 이제는 그저 옳고 그름을 굽혀서라도 지금껏 소원했던 여러 대장들에게도 몸을 낮추고, 원한이 남지 않게 처리하여 사귀고 가까이 지내며 잠시 때를 기다리는 것도 한 가지 계책일 것입니다." 미츠나리(三成)가 "그러니 설령 한때 뜻을 이룬다 해도 뒤탈이 없을 방도를 꾀하는 것이다" 하고 말하자, 사콘은 이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한때 이길 수만 있다면 뒤에 무슨 위태로울 일이 있겠습니까. 나이후와 가까운 사람들을 헤아려 보면 그 군사는 이만을 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편은 본디 뜻을 함께하는 큰 영지의 사람들이 있고, 또 가까운 지방의 군사를 모으면 금세 달려와 오륙만에는 이를 것입니다. 카게카츠(景勝) 경이 사이(采配, 지휘채)를 잡고 지휘하여 간토를 쳐부순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그러고는 다시 생각한 바를 꺼내려는데 손님이 와서 미츠나리가 자리를 떴다. 가시하라 히코에몬(樫原彥右衞門)이 남아 사콘을 향해 "참으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마츠나가 단조(松永彈正)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는 둘도 없는 악역의 무리이지만, 일을 결단하는 데에는 누가 그들과 견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결론이 나지 않는 논의를 깨뜨려 줄 사람으로는 그런 이들이야말로 의지할 만한데" 하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야규에게 그렇게 대답했다는 것이다.

원문
此頃旣に世間さま〲に言振し、如何なる事か出來らん、と人々危みおもへり。東照宮も御屋敷に大竹にて菱垣を結はせられ、御門を押し開き、敵寄せ來らば堅固に防ぎ守らせ給ふべき設あり。御門を開く事然る可からず、と申す者有りければ、門を閉ぢて守らば敵に悔らるゝなり。只押晴れて軍の支度をせよ、と仰せ有りけるとぞ。京極高次參りて、大津の城へ引移らせられんや、と進め申されけるを聞召し、敵寄せば上の臺へ押し上げ、金札の宮の邊にて眞丸に成りて一合戰すべし。吾兵二千許や有らん。敵何萬もあれ打破る事難からず、と仰せられけり。正月十九日、安國寺瓊長老、生駒雅樂頭、中村式部少輔、堀尾帶刀四人四老五奉行の使として、東照宮に參りて、伊達政宗、福島正則、蜂須賀至鎭緣組の事によりて、德川家獨擅なる事共、豐臣家の爲然る可からざる由申す旨あり。依りて世の中愈樣々なる風說あり。其頃榊原式部大輔康政伏見に上るとて、二月二十五日尾州宮に著きけるが、伏見の騷がしき由を聞き、日夜道を急ぎて、道すがらにて聞けば、伏見にて、旣に東照宮の御館へ敵押し寄せたりなどと言ひ振らす。二十六日の晚膳所にて伏見よりの飛脚に行逢ひ、未だ弓箭は始まり申さぬ、と言ふを聞き、康政悅んで則ち膳所に陣し、秀賴の下知と稱し、伏見の騷に附き東海、東山兩道の人留すると振れさせ、勢田、矢橋を三日押留めたり。其比の騷しきに諸國より聞傳へ、京伏見に集る人殊の外多かりしに、押留められ、草津、野洲を始めとして、何萬といふ數計るべからず。扨康政三日の後未刻に、構へたる關所を開かせたれば、旅人一同に京伏見に入る。康政膳所を立ちて、七千許の人を率ゐて伏見へ入りければ、京にて關東より數萬の軍兵馳著きたり、とひ振らす。康政小具足著て鉢卷し、馬印押立てて參りければ、御前に召して御手づから御熨斗を下されけり。康政下知して、御藏より料足數千貫出させ、人々に分渡し、內府の軍兵六萬にて駈け著きたれば、館にて兵粮の用意俄に設け兼ねたり、と言はせて店屋物を買ひ來らしむ。數千人、京、伏見、淀に馳廻りて、赤飯菓子酒樣の物一つも殘らず買ひ來れば、關東より十萬の軍兵集りたり、と人々思はぬ者も無し。是に依りて石田が謀空しくなると言へり。東照宮、柳生又右衞門は、石田が士大將島左近と同國の好にて懇なりと聞召され、左近方へ行きて物語して、彼は如何にか言ふらん。聞きて來れ、と仰有りしかば、柳生左近に逢ひて世間の物語し、如何に成るべき事ならん、と言ひければ、左近聞きて、今松永、明智二人の智謀決斷有る人無ければ何事か有るべき、と打笑ひけり。此子細は、或時石田密謀に及びけるに、左近、豐臣家の爲を存ぜんに斯くあらで止むべきや。然れども爰に存ずる旨あり。大事を企つるには、我志す處を無二無三に決斷して、少しも猶豫有るべからず。然るに去年より度々仕課すべき圖を空しく外し給ふ事多し。旣に時を失ひぬ。能々世の有樣を見るに、石田の家を惡む人々、大かた德川殿に心を寄せたり。當家の存亡計るべからず。一日の過ぐるも殘り多し。只理を非に曲げて、唯今まで疎遠の諸大將達へも遜りて、遺恨無く計ひて交り親しみ、暫く時を待つべきも一つの計策にてこそ、と言ひければ、三成、されば縱令一時に能く志を遂ぐるとも、後の安かるべき樣を計るなり、と言ひけるに、左近、否々事能く一時に勝を得るならば、後に何の危き事か候べき。內府に親しき人々を積るに、其兵二萬に過ぐべからず。味方素より心を合する大國の人々、又近國の兵を集むるとも、忽馳寄つて五六萬には及ぶべし。景勝卿采配を取つて下知し、關東を攻破らんに何程の事か候可き、とて又存ずる旨を言ひ出しけるに、客の來て三成坐を立ちければ、樫原彥右衞門居殘りて左近に向ひ、如何にも仰せ然る事なり。松永彈正、明智光秀は無雙の惡逆の者なれど、事を決斷するに誰か相並ぶべき。此詮議の破り相手に賴む可きものを、と言ひけるとかや。其に依りて斯く柳生には答へけるとなり。

원문(일본어) 쪽 e287.p03

번역: historyfol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