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다 아와노카미 마사유키(眞田安房守昌幸)는 운노 고타로 유키우지(海野小太郞幸氏)의 21대 후손이다. 아버지 운노 단조 유키타카(海野彈正幸隆)가 시나노(信州)의 사나다(眞田)에 살면서 사나다를 성으로 삼았고, 다케다(武田) 가문의 가신이 되었다. 맏아들 겐타자에몬 노부츠나(源太左衞門信綱)는 나가시노(長篠)에서 전사했다. 둘째 아들은 무토 기헤에 마사유키(武藤喜兵衞昌幸)라 했다. 나가시노 전투 뒤 고사카 단조(高坂彈正)가 다섯 조목의 간언을 올렸는데, 그 가운데 한 조목에 따라 마사유키에게 형의 가문을 잇게 했다. 아버지 유키타카는 뒤에 잇토쿠사이(一德齋)라 호를 썼다. 마사유키는 신겐(信玄)의 측근(近習)으로, 열여덟 살 때 가와나카지마(川中島)에서 창을 맞대고 싸웠다. 덴쇼(天正) 10년(1582) 카츠요리(勝賴)가 스와(諏訪)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사방에서 적이 몰려오자, 마사유키는 "아가츠마(吾妻) 성에 들어가 농성하십시오" 하고 말했지만 나가사카 조칸(長坂長閑)이 그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카츠요리는 군나이(郡內)로 가다가 죽고 다케다 가문은 망했다.
호조 우지마사(北條氏政)가 군사를 내어 고후(甲府)를 빼앗으려 할 때, 마사유키는 도쿠가와(德川) 가문에 붙어 요다 노부시게(依田信蕃)와 함께 우스이 고개(碓氷嶺)에 진을 치고 호조의 군량 길을 막았다. 도쇼구(東照宮,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호조와 화친하면서, 고즈케(上野)의 누마타(沼田)를 카이(甲斐)의 츠루(都留)와 시나노의 사쿠(佐久) 두 군과 바꾸기로 약조했다. 이보다 앞서 마사유키는 누마타 성을 쳐서 빼앗아 요충지로 삼고 있었다. 사나다에게는 우에다(上田)를 주고 누마타는 우지마사에게 넘기라는 명이 내려졌다. 우에다는 본래 신겐 때부터 사나다의 거처였다. 마사유키는 '내가 도쿠가와 가문에 공을 세웠는데도 받은 것은 겨우 우에다와 누마타뿐이다. 상이 너무 박하다' 여겨 이를 거절하며 "누마타는 하사받은 땅이 아닙니다. 제 창끝으로 얻은 땅이니 까닭 없이 남에게 내줄 수는 없습니다" 하고 아뢰었다.
그러고는 도요토미(豐臣) 가문에 붙겠다는 뜻을 전해 보냈다. 마침 그때 히데요시(秀吉)는 도쇼구가 상경하지 않는 데 화가 나 있던 터라 이를 기뻐하며,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에게 은밀히 "사나다와 힘을 합하라" 하고 지시했다. 그래서 카게카츠는 군사 1,600을 사나다에게 원군으로 보냈다. 도쇼구는 본래부터 사나다를 간사한 꾀가 있는 자라 미워하던 차에 무례한 답에 노하여, 오쿠보 시치로에몬 타다요(大久保七郞右衞門忠世), 도리이 히코에몬 모토타다(鳥居彥右衞門元忠), 히라이와 시치노스케 치카요시(平岩七之介親吉), 시바타 시치쿠로 야스타다(柴田七九郞康忠)를 장수로 삼아 군사 7,000으로 우에다를 치게 했다.
마사유키는 성에서 1리쯤 떨어진 가가가와(加賀川)를 적이 건널 때 강 한가운데서 치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카이 출신 로닌 이타가키 슈리(板垣修理)가 "설령 강을 반쯤 건넌 적을 쳐서 이득을 보더라도 상대는 미카와(三河)·토토미(遠江)의 노련한 무사들이니, 적의 후진인 니노미(二の見)가 이길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역주: 니노미(二の見)는 선진 뒤에 대기하는 제2진이다. 선진이 밀리면 2진이 되받아쳐 이긴다는 뜻이다.] 마사유키는 "옳은 말이다" 하고, 성 가까운 도이시(砥石) 성에 맏아들 노부유키(信之)를, 야즈(矢津) 성채에 야즈 다지마(矢津但馬)를 들여보내 지키게 했다. 적은 반드시 소메야다이라(染屋平)로 밀고 올 것이니 약한 척 받아 주다가 불시에 찌르고 나가겠다는 계책이었다. 또 성 밖 오노야마(小野山) 그늘에 마을 사람들을 숨겨 두었다.
공격군은 나아가 마을 어귀로 밀고 들어왔다. 외곽(惣郭) 안 옆 골목에는 목책을 엇갈리게 세우고 발을 걸어 두었는데, 그 뒤에 숨은 복병이 조총을 쏘아 댔다. 마사유키는 생각해 둔 곳까지 적을 끌어들인 뒤 성문 세 방향에서 한꺼번에 치고 나가니, 공격군은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많은 자가 죽었다. 도이시와 야즈에서도 쳐들어오고 마을 사람들도 뒤엉켜 싸우자, 오쿠보는 열네댓 기로 버티며 싸우면서 가가가와까지 물러났다. 도리이는 높은 길로 물러났는데, 도이시의 군사가 막아서려고 뒤쫓아 오는 바람에 5, 6초(町) 사이에 많은 자가 죽었다.
오쿠보 쪽에서는 도리이 군이 패하는 것을 보고 타다요 혼자 말머리를 돌렸다. 아우 헤이스케 타다타카(平介忠孝)〔뒤의 히코자에몬(彥左衞門)〕는 검은 갑옷에 은빛 호랑나비 사시모노(指物, 등에 꽂는 깃발)를 꽂고 말을 달려와 뛰어내려, 창을 들고 버티고 서 있다가 밀려드는 적 가운데 맨 앞의 병사를 찔러 쓰러뜨렸다. 타다요가 되돌아서는 것을 보고 마츠다이라 시치로에몬(松平七郞右衞門)을 비롯한 이들이 되돌아왔다. 헤이스케가 조금 높은 곳에 버티고 섰으므로 사나다 군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양쪽 사이가 겨우 10간(間)쯤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타다요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헤키 고에몬(日置五右衞門)이 타다요의 진 앞을 지나가려 했다. 헤이스케가 "저자가 적이다. 미츠마키(三つ卷)를 달지 않았다" 하고 말했는데, 헤키는 무엇을 착각했는지 이쪽을 아군으로 여기고 "헤키 고에몬이다" 하고 이름을 대며 지나가려 했다.[역주: 미츠마키(三つ卷)는 아군끼리 알아보려고 몸에 감아 단 표지다.] 그때 아다치 젠이치로 마사사다(足立善一郞政定)가 창을 집어 들고 안장 앞테를 찔렀다. 고에몬의 종자가 창을 고쳐 잡고 젠이치로를 찔렀다. 고에몬이 헤이스케 앞을 달려 지나가려 하자 헤이스케가 또 찔렀으나, 종자들이 창을 나란히 세워 헤이스케에게 맞섰다. 그 틈에 고에몬이 말을 몰아 빠져나가는데, 게타 진로쿠로(氣多甚六郞)가 놓치지 않으려고 뒤쫓으며 허벅지 끝을 찔렀다. 그러자 고에몬은 뒤를 돌아보며 "가와나카지마에서 온 원군인 줄 알았다가 큰일 날 뻔했다" 하고 말하고는 달려 빠져나갔다.
타다요는 히라이와의 진으로 가서 "적은 드문드문 흩어져 쫓아오고 있소. 내 뒤를 받쳐 준다면 치고 나가겠소" 하고 말했다. 그러나 치카요시는 "적은 소수지만 틀림없이 근처에 복병이 있을 것이오" 하며 나아가지 않았다. 그 사이에 마사유키는 성으로 물러나 들어갔다. 이날 사카이 요쿠로(酒井與九郞)가 후군(殿)을 맡으며 적의 목을 베었으니, 그날 첫째가는 공명이었다.
이튿날 타다요와 야스타다가 사나다의 지성(枝城) 마리코(丸子)를 치려고 치쿠마가와(千曲川)를 건너자, 사나다가 이를 보고 운노마치(海野町)로 밀고 나와 야에하라(八重原)에서 말 탄 무사끼리 맞붙어 싸웠다. 타다요가 도리이와 히라이와에게 "뒤를 받쳐 주면 적의 한가운데를 끊고 쳐 잡을 수 있소" 하고 말했으나 따르지 않았고, 사나다는 물러갔다. 아군은 야에하라에 진을 치고 사나다도 성을 나와 진을 쳐서, 아시가루(足輕, 보병)끼리 교전이 있었다. 양쪽 모두 잔디 흙담을 쌓고 목책을 세운 채, 적의 논에서 벼를 베어 가는 일로 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하마마츠(濱松)에서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 오스가 야스타카(大須賀康高)를 비롯한 5,000여 원군이 왔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지시로 카게카츠가 대군을 이끌고 사나다를 뒤에서 도우러 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장수들은 의논해 진을 거두었다.
마사유키의 둘째 아들 사에몬노스케 노부시게(左衞門佐信仍, 흔히 사나다 유키무라로 알려진 인물)〔이 이름을 어떤 책에서는 노부타카로 읽는다. 어느 쪽이 옳은지 알 수 없다〕가 뒤를 쫓으려 했다. 그러나 적이 크게 되돌아서서 싸울 기색인 것을 마사유키가 보고 노부시게를 말려 쫓지 않았다. 장수들이 돌아간 뒤 마사유키는 크게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다. "도쿠가와 님은 참된 영웅이다. 원군을 받아 성을 치려는 기색을 드러냈기에 나는 그 계략에 빠져 막는 데만 마음을 쓰고, 밤에 기습하거나 새벽에 들이치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 꾀를 써서 불시에 물러간 것은 내 계책으로는 미칠 수 없는 일이다."
그 뒤 도쇼구가 다이코(太閤, 히데요시)와 화친하자, 사나다는 카게카츠의 원군에도 기댈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시나노와 카이의 사람들에게 부탁해 히데요시를 통해 도쿠가와 가문에 다시 복속하겠다는 뜻을 아뢰니, 허락이 내려졌다. 덴쇼 15년(1587) 정월 7일 마사유키는 시나노 후카시(深志)의 오가사와라 우콘다유 사다요시(小笠原右近大夫貞慶, 이본에는 우쿄다유)와 함께 슨푸(駿府)에 와서 도쇼구를 알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