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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다 마사유키 부자 세 사람의 전말

· 卷之十七 제1화 · 원문(일본어) 쪽

에도 시대 중기 오카야마번의 유학자 유아사 조잔(湯浅常山)이 센고쿠~에도 초 무장들의 일화를 모은 『조잔키단(常山紀談)』(1739년 자서)의 한국어 번역이다. 후대에 전해진 이야기를 모은 책이라 역사적 사실과 다른 대목이 있다.

사나다 아와노카미 마사유키(眞田安房守昌幸)는 운노 고타로 유키우지(海野小太郞幸氏)의 21대 후손이다. 아버지 운노 단조 유키타카(海野彈正幸隆)가 시나노(信州)의 사나다(眞田)에 살면서 사나다를 성으로 삼았고, 다케다(武田) 가문의 가신이 되었다. 맏아들 겐타자에몬 노부츠나(源太左衞門信綱)는 나가시노(長篠)에서 전사했다. 둘째 아들은 무토 기헤에 마사유키(武藤喜兵衞昌幸)라 했다. 나가시노 전투 뒤 고사카 단조(高坂彈正)가 다섯 조목의 간언을 올렸는데, 그 가운데 한 조목에 따라 마사유키에게 형의 가문을 잇게 했다. 아버지 유키타카는 뒤에 잇토쿠사이(一德齋)라 호를 썼다. 마사유키는 신겐(信玄)의 측근(近習)으로, 열여덟 살 때 가와나카지마(川中島)에서 창을 맞대고 싸웠다. 덴쇼(天正) 10년(1582) 카츠요리(勝賴)가 스와(諏訪)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사방에서 적이 몰려오자, 마사유키는 "아가츠마(吾妻) 성에 들어가 농성하십시오" 하고 말했지만 나가사카 조칸(長坂長閑)이 그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카츠요리는 군나이(郡內)로 가다가 죽고 다케다 가문은 망했다.

호조 우지마사(北條氏政)가 군사를 내어 고후(甲府)를 빼앗으려 할 때, 마사유키는 도쿠가와(德川) 가문에 붙어 요다 노부시게(依田信蕃)와 함께 우스이 고개(碓氷嶺)에 진을 치고 호조의 군량 길을 막았다. 도쇼구(東照宮,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호조와 화친하면서, 고즈케(上野)의 누마타(沼田)를 카이(甲斐)의 츠루(都留)와 시나노의 사쿠(佐久) 두 군과 바꾸기로 약조했다. 이보다 앞서 마사유키는 누마타 성을 쳐서 빼앗아 요충지로 삼고 있었다. 사나다에게는 우에다(上田)를 주고 누마타는 우지마사에게 넘기라는 명이 내려졌다. 우에다는 본래 신겐 때부터 사나다의 거처였다. 마사유키는 '내가 도쿠가와 가문에 공을 세웠는데도 받은 것은 겨우 우에다와 누마타뿐이다. 상이 너무 박하다' 여겨 이를 거절하며 "누마타는 하사받은 땅이 아닙니다. 제 창끝으로 얻은 땅이니 까닭 없이 남에게 내줄 수는 없습니다" 하고 아뢰었다.

그러고는 도요토미(豐臣) 가문에 붙겠다는 뜻을 전해 보냈다. 마침 그때 히데요시(秀吉)는 도쇼구가 상경하지 않는 데 화가 나 있던 터라 이를 기뻐하며,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에게 은밀히 "사나다와 힘을 합하라" 하고 지시했다. 그래서 카게카츠는 군사 1,600을 사나다에게 원군으로 보냈다. 도쇼구는 본래부터 사나다를 간사한 꾀가 있는 자라 미워하던 차에 무례한 답에 노하여, 오쿠보 시치로에몬 타다요(大久保七郞右衞門忠世), 도리이 히코에몬 모토타다(鳥居彥右衞門元忠), 히라이와 시치노스케 치카요시(平岩七之介親吉), 시바타 시치쿠로 야스타다(柴田七九郞康忠)를 장수로 삼아 군사 7,000으로 우에다를 치게 했다.

마사유키는 성에서 1리쯤 떨어진 가가가와(加賀川)를 적이 건널 때 강 한가운데서 치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카이 출신 로닌 이타가키 슈리(板垣修理)가 "설령 강을 반쯤 건넌 적을 쳐서 이득을 보더라도 상대는 미카와(三河)·토토미(遠江)의 노련한 무사들이니, 적의 후진인 니노미(二の見)가 이길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역주: 니노미(二の見)는 선진 뒤에 대기하는 제2진이다. 선진이 밀리면 2진이 되받아쳐 이긴다는 뜻이다.] 마사유키는 "옳은 말이다" 하고, 성 가까운 도이시(砥石) 성에 맏아들 노부유키(信之)를, 야즈(矢津) 성채에 야즈 다지마(矢津但馬)를 들여보내 지키게 했다. 적은 반드시 소메야다이라(染屋平)로 밀고 올 것이니 약한 척 받아 주다가 불시에 찌르고 나가겠다는 계책이었다. 또 성 밖 오노야마(小野山) 그늘에 마을 사람들을 숨겨 두었다.

공격군은 나아가 마을 어귀로 밀고 들어왔다. 외곽(惣郭) 안 옆 골목에는 목책을 엇갈리게 세우고 발을 걸어 두었는데, 그 뒤에 숨은 복병이 조총을 쏘아 댔다. 마사유키는 생각해 둔 곳까지 적을 끌어들인 뒤 성문 세 방향에서 한꺼번에 치고 나가니, 공격군은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많은 자가 죽었다. 도이시와 야즈에서도 쳐들어오고 마을 사람들도 뒤엉켜 싸우자, 오쿠보는 열네댓 기로 버티며 싸우면서 가가가와까지 물러났다. 도리이는 높은 길로 물러났는데, 도이시의 군사가 막아서려고 뒤쫓아 오는 바람에 5, 6초(町) 사이에 많은 자가 죽었다.

오쿠보 쪽에서는 도리이 군이 패하는 것을 보고 타다요 혼자 말머리를 돌렸다. 아우 헤이스케 타다타카(平介忠孝)〔뒤의 히코자에몬(彥左衞門)〕는 검은 갑옷에 은빛 호랑나비 사시모노(指物, 등에 꽂는 깃발)를 꽂고 말을 달려와 뛰어내려, 창을 들고 버티고 서 있다가 밀려드는 적 가운데 맨 앞의 병사를 찔러 쓰러뜨렸다. 타다요가 되돌아서는 것을 보고 마츠다이라 시치로에몬(松平七郞右衞門)을 비롯한 이들이 되돌아왔다. 헤이스케가 조금 높은 곳에 버티고 섰으므로 사나다 군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양쪽 사이가 겨우 10간(間)쯤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타다요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헤키 고에몬(日置五右衞門)이 타다요의 진 앞을 지나가려 했다. 헤이스케가 "저자가 적이다. 미츠마키(三つ卷)를 달지 않았다" 하고 말했는데, 헤키는 무엇을 착각했는지 이쪽을 아군으로 여기고 "헤키 고에몬이다" 하고 이름을 대며 지나가려 했다.[역주: 미츠마키(三つ卷)는 아군끼리 알아보려고 몸에 감아 단 표지다.] 그때 아다치 젠이치로 마사사다(足立善一郞政定)가 창을 집어 들고 안장 앞테를 찔렀다. 고에몬의 종자가 창을 고쳐 잡고 젠이치로를 찔렀다. 고에몬이 헤이스케 앞을 달려 지나가려 하자 헤이스케가 또 찔렀으나, 종자들이 창을 나란히 세워 헤이스케에게 맞섰다. 그 틈에 고에몬이 말을 몰아 빠져나가는데, 게타 진로쿠로(氣多甚六郞)가 놓치지 않으려고 뒤쫓으며 허벅지 끝을 찔렀다. 그러자 고에몬은 뒤를 돌아보며 "가와나카지마에서 온 원군인 줄 알았다가 큰일 날 뻔했다" 하고 말하고는 달려 빠져나갔다.

타다요는 히라이와의 진으로 가서 "적은 드문드문 흩어져 쫓아오고 있소. 내 뒤를 받쳐 준다면 치고 나가겠소" 하고 말했다. 그러나 치카요시는 "적은 소수지만 틀림없이 근처에 복병이 있을 것이오" 하며 나아가지 않았다. 그 사이에 마사유키는 성으로 물러나 들어갔다. 이날 사카이 요쿠로(酒井與九郞)가 후군(殿)을 맡으며 적의 목을 베었으니, 그날 첫째가는 공명이었다.

이튿날 타다요와 야스타다가 사나다의 지성(枝城) 마리코(丸子)를 치려고 치쿠마가와(千曲川)를 건너자, 사나다가 이를 보고 운노마치(海野町)로 밀고 나와 야에하라(八重原)에서 말 탄 무사끼리 맞붙어 싸웠다. 타다요가 도리이와 히라이와에게 "뒤를 받쳐 주면 적의 한가운데를 끊고 쳐 잡을 수 있소" 하고 말했으나 따르지 않았고, 사나다는 물러갔다. 아군은 야에하라에 진을 치고 사나다도 성을 나와 진을 쳐서, 아시가루(足輕, 보병)끼리 교전이 있었다. 양쪽 모두 잔디 흙담을 쌓고 목책을 세운 채, 적의 논에서 벼를 베어 가는 일로 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하마마츠(濱松)에서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 오스가 야스타카(大須賀康高)를 비롯한 5,000여 원군이 왔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지시로 카게카츠가 대군을 이끌고 사나다를 뒤에서 도우러 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장수들은 의논해 진을 거두었다.

마사유키의 둘째 아들 사에몬노스케 노부시게(左衞門佐信仍, 흔히 사나다 유키무라로 알려진 인물)〔이 이름을 어떤 책에서는 노부타카로 읽는다. 어느 쪽이 옳은지 알 수 없다〕가 뒤를 쫓으려 했다. 그러나 적이 크게 되돌아서서 싸울 기색인 것을 마사유키가 보고 노부시게를 말려 쫓지 않았다. 장수들이 돌아간 뒤 마사유키는 크게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다. "도쿠가와 님은 참된 영웅이다. 원군을 받아 성을 치려는 기색을 드러냈기에 나는 그 계략에 빠져 막는 데만 마음을 쓰고, 밤에 기습하거나 새벽에 들이치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 꾀를 써서 불시에 물러간 것은 내 계책으로는 미칠 수 없는 일이다."

그 뒤 도쇼구가 다이코(太閤, 히데요시)와 화친하자, 사나다는 카게카츠의 원군에도 기댈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시나노와 카이의 사람들에게 부탁해 히데요시를 통해 도쿠가와 가문에 다시 복속하겠다는 뜻을 아뢰니, 허락이 내려졌다. 덴쇼 15년(1587) 정월 7일 마사유키는 시나노 후카시(深志)의 오가사와라 우콘다유 사다요시(小笠原右近大夫貞慶, 이본에는 우쿄다유)와 함께 슨푸(駿府)에 와서 도쇼구를 알현했다.

원문
眞田安房守昌幸は、海野小太郞幸氏二十一代の末なり。父海野彈正幸隆信州眞田に居て、眞田氏と稱す。武田家の臣となる。嫡子源太左衞門信綱は長篠にて討死す。二男武藤喜兵衞昌幸と云ふ。長篠の後高坂彈正五ヶ條の諫を申しける。其一條にて、昌幸に兄の家を嗣がせられけり。父の幸隆後一德齋と號す。昌幸信玄の近習にて、十八の歲川中島にて鎗を合せたり。天正十年勝賴諏訪に陣し、四方より敵來りし時、昌幸、吾妻の城に籠られよ、と言ひけれども、長坂長閑其謀を用ひず。勝賴郡內に赴きて死して國亡びぬ。北條氏政兵を出して甲府を攻取らんとする時、昌幸德川家に屬し、依田信蕃と碓氷嶺に陣して北條の粮道を塞ぐ。東照宮北條と和平し給ひ、上野の沼田を以て、甲斐の都留、信州佐久二郡に換へらるべし、と約あり。是より前昌幸沼田の城を攻取りて要害の地とせり。眞田に上田を與へ、沼田をば氏政に渡すべき由仰せ出さる。上田は元より信玄以來眞田が居所なり。昌幸、我德川家に功有りと雖も、僅に上田と沼田を賜はりぬ。賞甚薄しと思ひて辭し申しけるは、沼田は賜り候地に非ず。吾鋒にて取り得たれば、故無くて人に與へん事叶ひ候まじ、と申しけり。豐臣家に屬すべき由を云ひ送りし其折柄、秀吉、東照宮の上京無き事を怒りて此を悅び、密に上杉景勝に、眞田に力を合せよ、と下知せられしかば、千六百の兵を眞田が許に援とす。東照宮、眞田は奸謀有る者なり、と元より憎ませられける上、無禮の答を怒らせ給ひ、大久保七郞右衞門忠世、鳥居彥右衞門元忠、平岩七之介親吉、柴田七九郞康忠を將として、七千の兵を以て上田を攻めさせらる。昌幸、城より一里許隔てたる加賀川を敵渡る時、半途を打つべしと思ひけるに、甲州の浪人板垣修理、假令敵の半途を討つて利有りとも、三遠の物師共なれば、敵の後陣二の見の勝有らん、と云ひければ、昌幸、尤なり、とて城に近き砥石の城に嫡子信之、矢津の砦に矢津但馬を籠め置き、寄手必ず染屋平より寄るべし。弱弱と引受けて不意に突いて出でん、との謀なり。又城外小野山の蔭に鄕民を伏置きけり。寄手進みて町口に押入り、惣郭の內橫小路に柵を喰ひ違ひに結ひて簾を懸け、其蔭に伏兵を置き、鐵炮を打懸くる。昌幸思ふ處に引受け、城門三方より一同に打つて出でたれば、寄手支へ兼ねて崩れしかば討たるゝ者多し。砥石、矢津よりも切つて懸り、鄕民も揉合ひたれば、大久保十四五騎にて踏止り戰ひて加賀川まで引取つたり。鳥居は高き道を退きけるを、砥石の兵喰留めんとて慕ひ來れば、五六町許の間に討たるゝ者數多なり。大久保は鳥居が敗軍を見て忠世唯一騎引返し、弟平介忠孝後彥左衞門黑き物具に銀の揚羽の蝶の指物にて、乘附けて馬より飛トり、鎗を提げて扣へたる處に、敵押懸る中にも眞先なる兵を突伏せたり。忠世が返すを見て、松平七郞右衞門を始め引返し來れり。平介は小高き處に蹈堪へたれば眞田も進み得ず。其間僅十間許に過ぎざれども忠世少しもひるまず。日置五右衞門忠世が陣の前を通らんとす。平介、其こそ敵よ。三つ卷を附けざるぞ、と云ひけるに、日置如何誤りけん、味方ぞと心得て、日置五右衞門なり、と名乘りて通る處を、足立善一郞政定鎗押取り鞍の前輪を突く。五右衞門が從者鎗を取直し、善一郞を突く。平介が前を馳通らんとすれば、平介又突きけれども、從者鎗を揃へて平介に向ふ。其間に五右衞門乘拔けし處を、氣多甚六郞遁さじと追ひさまに股の端を突く。其時五右衞門振顧り、川中島の加勢と思ひて危ふかりし、と言ひて駈拔けたり。忠世、平岩が陣に往きて、敵は疎に追懸來れり。我跡を詰められなば切つて懸り候べし、と言へ共、親吉、敵小勢なれども必定近所に伏兵有るべし、とて進まず。其間に昌平城に引入りけり。此日酒井與九郞殿して敵の首を取りければ、其日の一の功名なり。翌日忠世、康忠、眞田が枝城丸子を攻めんと千曲川を渡るを、眞田見て海野町へ押出し、八重原を一騎打に相働く。忠世、鳥居、平岩に、後を詰めば敵の中を取切り討取るべし、と言へ共同心せず。眞田引取りたり。味方は八重原に陣し、眞田も城を出でて陣し、足輕軍有り。芝土居を築き柵を結ひ、苅田働に日を送る。斯くて濱松より井伊直政、大須賀康高を始として五千餘援兵たり。されども秀吉の下知により、景勝大軍にて眞田の後卷するとの聞え有り。諸將相謀りて陣拂す。昌幸が次男左衞門佐信仍信仍或本にノブタカと訓ず何れが是なるを知らず附け慕はんとす。大返に返して軍すべき物色を昌幸見て、信仍を制して追はざりけり。諸將歸陣の後昌幸大息吐いて、德川殿は誠の英雄なり。加勢を以て城を攻むる色を顯したる故、昌幸其謀に陷り、防ぐにのみ心有りて、夜討朝駈の志夢にも無かりしなり。斯く謀りて不意に引取りたる事、吾計の及ぶべきに非ず、と云ひけり。其後東照宮太閤と和平なりしかば、景勝の加勢の賴みも無く、信州甲州の人々を眞田賴みて、秀吉に申して德川家に歸り屬すべき旨を申せば、御許容あり。天正十五年正月七日、昌幸、信州深志の小笠原右近イ京大夫貞慶と共に駿府に參りて、東照宮に謁し奉る。

원문(일본어) 쪽 e369.p01

도쇼구도 마사유키의 무용을 얕볼 수 없다고 여겨 "맏아들 노부유키를 혼다 타다카츠(本多忠勝)의 사위로 삼겠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마사유키는 "그것은 무언가 잘못 전해진 말이겠지요. 혼다의 딸을 노부유키의 아내로 맞는 일은 조금도 바라지 않습니다" 하고 아뢰었다. 도쇼구가 이 일을 다이코에게 이야기하자, 다이코는 "타다카츠의 딸을 양녀로 삼아 이제는 내 딸이라고 하시오" 하고 꾀를 내 주었다. 도쇼구가 사자를 보내 그렇게 전하자 과연 마사유키가 받아들였다고 한다.

원문
東照宮も昌幸が武勇侮り難しと思召して、嫡子信之を本多忠勝が婚にせん、と仰せられしに、昌幸、夫は聞き謬ならん。本多が女を信之が妻にせん事更に望みに候はず、と申す。東照宮此事を太閤に御物語有りしに、忠勝が女を養うて、今は我女なりといはせられよ、と計られじかば、東照宮使を以て、云々なりと仰せ送られしかば、果して昌幸聞受けたりと云ふ。

원문(일본어) 쪽 e369.p02

이리하여 호조 정벌의 일이 일어났다. 덴쇼 16년(1588) 8월, 호조 우지마사의 사자로 호조 우지노리(北條氏規)가 주라쿠(聚樂)에 와서 이렇게 아뢰었다. "우지마사가 상경해야 마땅하지만, 고즈케의 누마타는 덴쇼 10년 도쿠가와 님과 화친할 때 넘겨받기로 한 땅인데 사나다가 제멋대로 굴어 호조 가문이 체면을 잃었습니다. 어서 아와노카미에게 그 땅을 호조에 넘기라고 지시해 주시면 우지마사가 상경할 것입니다." 히데요시는 이를 듣고 "지난날의 일은 자세히 알지 못한다. 호조 가문에서 그 땅의 사정을 잘 아는 자를 상경시켜라" 하며 우지노리를 돌려보냈다.

이듬해 사카베오카 엣추 유세이 뉴도 고세츠(坂部岡越中融成入道江雪)가 오사카(大坂)에 오자, 히데요시는 사정을 듣고 이렇게 명했다. 사나다가 고즈케에 가진 영지 가운데 3분의 2와 누마타 성을 호조에 넘기고, 그 대토(代土)는 도쿠가와 가문에서 사나다에게 주라. 나머지 3분의 1은 나구루미(名胡桃) 성과 함께 사나다가 전처럼 다스리라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사나다 쪽에서 누마타를 무사시(武州) 하치가타(鉢形)의 호조 우지쿠니(北條氏邦)에게 넘겼다. 우지쿠니는 가신 이노마타 노토 노리나오(猪俣能登範直)를 누마타 성의 조다이(城代, 성주 대리)로 삼았다. 그런데 그는 시골 사람이라 이해득실을 가리지 못하고, 나구루미 성을 사나다가 차지한 것에 화가 나 꾀를 써서 성을 빼앗아 버렸다.

마사유키가 다이코에게 호소했다. 다이코는 호조가 누마타를 얻으면 상경하겠다고 약속하고도 미적거리는 데 이미 화가 나 있던 터에 이 일까지 듣자, 우지마사를 정벌하기로 뜻을 굳혔다. 덴쇼 18년(1590) 히데요시는 군사를 내어 오다와라(小田原)로 향했다. 도산도(東山道)의 선봉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가 우스이 고개에 이르고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사카모토(坂本)에 이르자, 나구루미를 빼앗았던 이노마타는 싸우지도 않고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그래서 사나다 노부유키〔뒤의 이즈노카미(伊豆守)〕가 성에 들어갈 수 있었다. 마사유키는 지난 덴쇼 13년(1585) 이래 히데요시의 은고를 입었으므로, 오타니 요시타카(大谷吉隆)를 통해 아뢰어 둘째 아들 노부시게를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보냈다.

그 뒤 이시다(石田)가 군사를 일으켰을 때, 사나다 부자 세 사람은 오슈(奧州)로 향하던 길이었다. 그때 이시다의 사자가 와서 "히데요리 공(秀賴公)을 위해 거병했습니다. 뜻을 같이해 주신다면 시나노에 옛 주군의 땅인 카이를 더해 드리겠습니다. 거짓이 없다는 증표입니다" 하며 기청문(起請文, 신불에 맹세하는 서약서)을 보내왔다. 마사유키는 본래 도쿠가와 가문에 두 마음을 품고 있었으므로 "그렇다면 되돌아가자" 하고 말했다. 노부유키는 "이는 옳지 않습니다. 나이후(內府, 내대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지혜와 용기가 뛰어난 사람입니다. 어찌 쉽게 무너뜨릴 수 있겠습니까.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고 간했으나 마사유키는 듣지 않았다.

원문
斯て北條征伐の事起れり。天正十六年八月北條氏政の使として北條氏規聚樂に參り、氏政上京すべしと雖も、上野の沼田は、天正十年德川殿と和平の時相渡さるべきを、眞田恣なる事を申して北條家志を失ひ候。早く安房守に、彼地を北條に渡すべき旨を示されなば、氏政上京せん、とぞ申しける。秀吉聞き給ひ、往年の事審に知らざる事なり。北條家に土地の事能知る者を上京せしめよ、とて氏規に暇給はりぬ。翌年坂部岡越中融成入道江雪大坂に赴きければ、秀吉事の由を聞き給ひ、眞田が上州の內の所領三分二竝に沼田の城を北條に渡し、其換地には德川家より眞田に與へらるべし。同所三分一名胡桃城とも、眞田已前の如く領すべき由江雪に命ぜられけり。斯くて眞田が方より沼田を武州鉢形の北條氏邦に渡し、氏邦其從士猪俣能登範直を沼田の城代とせしに、田舍人にて得失の辨無く、名胡桃の城を眞田が領せし事を怒り謀つて城を奪ひ取りたり。昌幸太閤に訟へしかば、太閤、北條は沼田を得ば上京すべきと約しながら、遲緩を怒られし上に此事を聞きて、氏政を征伐せんと志決して、天正十八年秀吉師を出して小田原に打向はる。東山道の先陣前田利家確氷嶺に至り、上杉景勝は坂本に至れば、名胡桃を奪ひ取りし猪俣は戰はずして城を捨て逃落ちければ、眞田信之後伊豆守城に入る事を得たり。昌幸は去る天正十三年以來秀吉の恩顧を得しかば、大谷吉隆に申して次男信仍を秀吉の許に人質に出しけり。其後石田兵を起すの時、眞田父子三人は奧州に打向ふ途中に、石田が使來りて、秀賴公の爲に旗を擧げ候。同心せられなば信州に故主君の地甲斐を添へて參らせん。僞無き證に、とて起請文を送りけり。昌幸素より德川家に二心有れば、さらば引返すべし、といふ。信之、是は然るべからず。內府智勇勝れたる人なり。爭か容易く討滅さるべき。思ひも寄ざる事なり、と諫むれども、昌幸聞入れず。

원문(일본어) 쪽 e369.p03

또 다른 설에 따르면, 노부유키가 "혼다와 각별히 가까운 사이이니 이시다 편에 서기는 어렵습니다" 하고 말하자, 아우 노부시게가 "아내의 정에 끌려 아버지께 활을 겨누시겠다는 겁니까" 하고 말했다. 또 노부유키가 "서국(西國) 편에 서신다면 반드시 싸움에 질 것입니다. 그때 아버지와 아우가 위난에 처하면 제가 구해 내어 가문이 망하지 않게 하겠습니다" 하고 말하자, 노부시게는 이렇게 맞섰다. "서국 군이 진다면 아버지도 저도 함께 싸움터의 흙이 될 터인데 어떻게 구해 주시겠다는 겁니까. 지난날 도쿠가와 가문이 군사를 내어 우에다를 쳤을 때 카게카츠가 원군을 보내 주었는데, 그 보답을 어찌 하지 않겠습니까. 그 무렵 히데요시 공이 화친을 주선해 주셔서 우리가 세상에 무명을 떨쳤으니 도요토미 가문의 은혜가 얕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서 이시다와 뜻을 같이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무릇 가문이 망할 때, 사람이 죽을 때가 이르면 깨끗이 목숨을 버리는 것이야말로 용사의 본뜻입니다. 어찌 추하게 목숨을 부지하며 가문이 망하지 않게 하겠다는 말씀을 하십니까." 노부유키가 노하여 "네 말이 무례하다" 하며 당장이라도 베어 버릴 듯하자, 노부시게는 "아니, 아니, 지금 여기서 목이 베이는 것만은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도요토미 가문을 위해 목숨을 버릴 생각입니다" 하고 말했다. 마사유키가 이를 듣고 "형제의 다툼에는 저마다 일리가 있다. 다이코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에 이 일이 일어난 것도 반드시 히데요리 공을 위한 충성은 아니라고 노부유키는 생각하는 것이겠지. 노부시게의 말은 내 생각과 같으니 나와 함께 되돌아가자. 노부유키는 이제부터 뜻대로 하라" 하고 헤어졌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마사유키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즈(會津)에서 우츠노미야(宇都宮)까지는 이레 길이지만 히노오카(日の岡) 샛길로 가면 사흘 길이다. 카게카츠와 계책을 맞추어 앞뒤에서 치는데 이즈노카미가 갑자기 배반해 준다면 도쿠가와 님을 쉽게 쳐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부유키는 "나이후는 용맹과 지략이 백만 명보다 뛰어난 분입니다. 우리 편이 이길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하고는 끝내 군사를 나누어 도쿠가와 쪽으로 왔다. 도쇼구는 노부유키를 불러 "아와노카미의 한쪽 팔을 꺾은 기분이로구나. 싸움에 이기면 반드시 시나노를 내려 주겠다는 훗날의 증표다" 하며 칼에 달린 끈(縧) 끝을 잘라 주었다고 한다.

원문
又一說に、本多と親しみ厚く候へば、石田に與し難き由を信之申せしかば、弟の信仍女房の好に引かれ、父に弓引く樣や候、と申す。又信之、西國に與せられなんに必ず軍敗れ候べし。其時父と弟との危難に逼らんを助けて、家の亡びざる樣にせん、と言ひければ、信仍、西國の軍敗れなば、父も又信仍も同じく戰場の土とならんに、何として助けさせ給ふべき。德川家先年兵を出し上田を攻めし時、景勝加勢候ひし其報禮などか無かるべき。其比秀吉公和平を取行ひ給ひ、武名を世に擧げしかば、豐臣家の恩淺しと言ふべからず。唯疾く石田に同心有りて然るべし。凡家の亡ぶべき時、人の死すべき時至らば、潔く身を失ひ候こそ勇士の本意なるべけれ。何條穢く命生きて、家の亡びざる樣にせんと云ふ事や候、と爭ひければ、信之怒つて、汝が詞不禮なり、とて旣に切つて捨つべく見えしかば、信仍、否々只今爰にて首を刎ねられ候事は許されよ。信仍は豐臣家の爲に身を失ひ申さん志なり、といへば、昌幸聞きて、兄弟の爭各其理有り。太閤世を過させられし後此事の起れるも、必ず秀賴公の爲にする忠に非ずと信之は思へるならん。信仍が言ふ處吾思ふ所なれば、我と共に引返すべし。信之は是より心任にせよ、とて別れしといへり。又一說、昌幸云ひけるは、會津より宇都宮に至りて七日路なれ共、日の岡の徑より三日の行程なり。景勝と謀を合せ前後より攻めたらんに、伊豆守俄に裏切するならば、德川殿を容易く討取るべし、と言ひけれ共、信之、內府は勇略百萬の人にも超えたり。味方利有らん事存じも寄ず、とて遂に兵を引分けて參りければ、東照宮、信之を召して、安房守が片手を折りつる心地するよ。軍に勝ちたらば必ず信州を賜はるべき後の證ぞ、とて御刀の縧の端を斷ちて賜はりけるといへり。

원문(일본어) 쪽 e369.p04

또 사나다 형제가 다툰 곳은 사노(佐野)의 덴묘(天妙, 이본에는 天玄)라고 한다. 이누부시(犬伏)라는 곳이라고도 한다.

원문
又眞田兄弟の爭の處は、佐野の天妙イ玄といふ。又犬伏といふ所なりとも言へり。

원문(일본어) 쪽 e369.p05

마사유키가 "되돌아가는 길에 누마타 성에서 노부유키의 아내를 만나 보겠다" 하고 말하자, 노부유키의 정실은 듣자마자 "이미 부자가 원수가 되어 갈라서셨으니 아버님이시라 해도 성에 모셔 들여 뵙는 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하며 혼마루(本丸) 문을 굳게 닫아 지키게 하고 손수 갑옷을 꺼냈다. 시녀들도 모두 칼을 곁에 두었다. 그러고는 "마구간에 회색 털 말(葦毛)이 있을 것이다. 부엌 흙바닥에 매어 두어라" 하고 지시했다. 마사유키는 이를 듣고 "내 잘못이다. 모두 잘 들어라. 과연 세상이 일본 제일이라 부르는 혼다 나카츠카사(本多中務)의 딸이로구나. 무사의 아내란 마땅히 이래야 한다. 이 부인이 있는 한 사나다 가문은 위태롭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했다고 한다. 마사유키는 그곳에서 스가와(須河)로 가서 다카마고에(高間越)를 넘어 우에다로 돌아갔다.

다이토쿠인도노(台德院殿,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기소(木曾) 길로 올라올 때 사자를 보내 "스스로 화를 부르는 일이다. 항복하라" 하고 전했다. 마사유키는 "히데요리를 위해 성을 지키고 있습니다. 공격해 오신다면 화살 한 대라도 쏘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답했다. 다시 사자를 보내 "이시다, 고니시(小西) 등이 제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려고 이런 일을 꾸몄다. 도요토미 가문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모두 등을 돌린 것을 보면 알 것이다. 그래도 항복하지 않는다면 노부유키에게 할복을 시키고 그 뒤에 성을 쳐부수겠다" 하고 전해 오자, 마사유키는 이렇게 답했다. "다이코의 은혜를 깊이 입은 사람들이 등을 돌린 것은 그 사람들의 마음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 자식인 노부유키가 아비와 갈라선 것만 보아도 아실 것입니다. 노부유키에게 할복을 시키시겠다고요. 부모가 자식을 아끼는 마음은 누구나 같지만, 노부유키(이본에는 이즈노카미)가 아비와 함께 성에 있었다면 같은 베개를 베고 전사했을 것입니다. 노부유키를 살려 달라고 청할 일은 아닙니다." 그러자 "그렇다면 공격하라" 하며 진을 앞으로 옮겼다.

그날 군사들은 농가에 몰려 들어가 묵었는데,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康政)가 "사나다가 오늘 밤 틀림없이 야습할 것이다" 하며 척후를 내보내고 화톳불을 빈틈없이 피우게 했다. 과연 노부시게가 야습하려고 채비했으나, 야스마사의 대비 때문에 야습하지 못했다. 날이 밝아 9월 6일, 군사를 몰아 성으로 다가갔다.

아사미 도베에(淺見藤兵衞)가 홀로 해자 가까이 나아갔는데, 쏟아지는 조총에 붉은 바탕에 가로줄 열두 개를 그린 사시모노가 찢어졌다. 그 자신도 바짝 무릎을 꿇고 엎드려 아군이 뒤따르기를 기다렸다. 오구리 지에몬(小栗治右衞門)이 큰 소리로 "아사미, 공을 세우겠다고 깊이 들어가 실수하지 마라" 하고 외치는 것을 듣자, 아사미는 일어서며 "너에게 앞을 내줄 성싶으냐" 하고 성문에 달라붙었다. 그때 성문이 열리며 적이 치고 나왔다. 아사미와 오구리가 '잘 걸렸다' 하고 창을 맞대는데, 좌우의 데베이(出屏, 밖으로 내쌓은 담)에서 쏘아 대는 조총이 비 오듯 했다. 아사미의 종자인 도라와카(虎若)라는 아이는 굳센 자여서, 칼을 뽑아 창끝 아래로 파고들어 적의 다리를 후려쳤다. 아사미도 큰 상처를 입고 쓰러지자 도라와카가 다리를 붙잡아 끌고 돌아가려는데, 아사미가 "오구리도 구해라" 하고 말했다. 도라와카는 "주인님의 생사가 걸린 때를 위해 온 것입니다. 남을 어찌하겠습니까" 하며 아사미를 들쳐 업고 물러났다. 아사미가 "사시모노를 맞아 떨어뜨린 것 같다. 가져오지 않으면 살 보람이 없다" 하고 말하자, 도라와카는 "달아나다가 사시모노를 떨어뜨렸다면 수치지만, 창을 맞대다가 떨어뜨린 것은 수치가 아닙니다" 하며 개의치 않고 돌아왔다.

성 쪽 군사 야마모토 세이에몬(山本淸右衞門)과 요다 효부(依田兵部)가 둑 위로 올라오는 것을 보고, 공격군 서른 기쯤이 말을 나란히 하고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어 일제히 말에서 내려 나아갔다. 사이토 사다유(齋藤左大夫), 야마모토, 요다가 앞으로 쑥 나서서 이름을 대는 것을 보자마자 미코가미 텐젠(御子神典膳)과 츠지 타로스케(辻太郞介)가 맞받아 뒤엉켜 싸웠다. 미코가미는 비할 데 없이 날랜 몸놀림으로 창을 치켜들고 둑 안으로 훌쩍 뛰어들었다. 아사쿠라 도주로(朝倉藤十郞), 나카야마 스케로쿠(中山助六), 도다 한페이(戶田半平), 시즈타 이치자에몬(鎭田市左衞門), 오타 진시로(太田甚四郞), 사이토 규자에몬(齋藤久左衞門)이 다투어 덤벼 창을 맞댔다. 요다는 붉게 칠한 갑옷 차림으로 싸우다가 깊은 상처를 입고 쓰러졌는데, 미코가미와 츠지가 요다를 한 칼씩 베었다. 야마모토도 창이 부러지고 큰 상처를 입은 채 요다의 시신을 어깨에 메고 물러났다. 공격군이 바짝 쫓자 성 쪽 군사가 치고 나왔는데, 나카야마가 창을 맞대고 오타가 활에 연거푸 살을 메겨 쏘아 대니 적을 성문 안으로 몰아넣었다.

원문
昌幸は、引返して沼田の城にて信之が妻に對面せん、と云ひけるに、信之の北の方聞きも敢ず、旣に父子仇となりて引分れ給ひしかば、父にて御座し候とも、城に入奉りてま見え申さん事思ひも寄らず、とて本丸の門を固めさせ自ら物具取出し、女房共皆刀を側に置きたり。厩に葦毛の馬有るべし。厨の土間に繋げ、とぞ下知せられける。昌幸聞きて、吾過なり。人々能く聞き候へ。日本一と世に云へる本多中務が女なりけるよ。弓取の妻は斯くこそ有るべけれ。此婦人有らんには眞田が家危からじ、と言ひけるとぞ。昌幸夫より須河に至り、高間越に懸りて上田に返りけり。台德院殿木曾より登らせ給ふ時、御使を以て、禍を招かイ阿るゝにてこそあれ。降參せよ、と仰せ有りしに、昌幸聞きて、秀賴の爲に城を守り候。攻められば一矢仕らん、と答へしかば、又御使にて、石田、小西等己が威權を恣にせんが爲に斯る企に及べり。豐臣家の恩を蒙りし人々皆背きたるを以て知るべし。猶降參無くば信之に腹切らせ、其後城を攻破るべし、と仰せ送らせられしに、昌幸聞きて、太閤恩深き人々の背き候は、此人々心の同じからざる故なり。旣に子にて候信之、父と相違ひたるにて知召さるべし。信之に腹切らせられんとや。親の子を愛するは誰も同じ事に候へども、信之イ伊豆守父と共に城に有らば、同じ枕に討死すべし。信之を助くべきに非ず、と答へ申せしかばさらば攻めよ、とて陣を寄せらる。其日は百姓の家に込入りたりしに、榊原康政、眞田今夜必ず夜討すべし、とて物見を出し、篝火を透間無く焚かせたり。果して信仍夜討せんと支度したりけれども、康政の設によりて夜討はせざりけり。斯くて明れば九月六日押寄せ給ふ。淺見藤兵衞只一人隍際に進みける處に、打懸くる鐵炮に朱に十二引の差物打裂れ、其身も犇と折敷き伏して味方の續くを待つ。小栗治右衞門大音あげ、淺見功名せうとて深入し不覺なせそ、と呼はるを聞き、淺見立上り、汝に先をさせんや、と言うて門に附く處に、門を開きて討つて出で、淺見、小栗、得たりと鎗を合するに、左右の出屏より打出す鐵炮雨の降るが如し。淺見が從者虎若と言ふ童剛の者にて、刀を抽き鎗の穗先を潛入りて敵の足を薙拂ふ。淺見も痛手を負ひ倒れしを、虎若足を取つて引提げ持歸りけるに、淺見、小栗をも助けよ、と云ふ。虎若聞きて、主人の先途の爲にこそ來りたれ。他人を何にかせん、と云うて搔負うて引退く。淺見、差物を叩き落されたりと覺ゆ。取りて來らずば生甲斐無し、といふ。虎若、逃ぐるとて指物を落さば恥なり。鎗を合せて落したるは恥に非ず、と言ひて念なく歸りけり。城兵山本淸右衞門、依田兵部堤の上に上るを見て、寄手三十騎許馬を並べて喚いて駈寄せ、犇々と馬より下りて進み行く。齋藤左大夫、山本、依田、前につと出で名乘りけるを見ると均しく、御子神典膳、辻太郞介渡し合ひ入亂れて鬪ふ。御子神は類無き早業にて、鎗を翳し堤の中にひらりと飛入る。朝倉藤十郞、中山助六、戶田半平、鎭田市左衞門、太田甚四郞、齋藤久左衞門競ひ懸りて鎗を合す。依田朱塗の物具にて戰ひけるが、深手負ひて倒れしを、御子神、辻、依田を一刀づつ切つたりけり。山本も鎗を打折り、痛手負ひながら依田が屍を肩に懸けて引退く。寄手追詰むれば城兵切つて懸るを、中山鎗を合せ、太田弓にて指詰め引詰め射たりしかば、門に追込みたり。

원문(일본어) 쪽 e369.p06

오타는 뒤에 젠다유(善大夫)라 했다. 어느 날 한 무사가 오타를 찾아와 "저는 사나다 가문의 로닌입니다. 우에다 싸움 때 당신과 맞섰던 자입니다. 그때 맞은 화살을 가지고 왔습니다" 하고 말했다. 오타는 "이런 일은 반드시 곁에서 들어 줄 확실한 사람이 있어 증인으로 삼아야 한다" 하며 곧바로 들이지 않았다. 가까운 곳에 사는 사사세 사다유(笹瀨左大夫)라는 무공 있는 사람을 불러 놓고서 그 사나다의 무사를 만났다. 그 사람이 "우에다에서 맞붙었지요" 하고 말하자, 젠다유는 미심쩍어하며 "맨 먼저 나온 자는 수염이 많은 덩치 큰 사내였다" 하고 말했다. 그 무사는 "잘도 보셨습니다. 그는 사나다 아라에몬(眞田荒右衞門)이라는 자입니다" 하고 답했다. "그다음은 살찐 사내였다" 하자 "그는 아무개 사추(佐仲)라는 자입니다. 자, 그다음입니다" 하고 말했다. "아니, 아니, 그다음은 이러이러한 사내였다" 하자 "그는 무쿄쿠(無極)라는 자입니다. 참으로 똑똑히 보셨습니다" 하고는 "자, 그다음이 저입니다" 하고 말했다. 오타가 "과연 그랬다" 하자 "그때 이 화살에 맞았습니다" 하며 화살을 꺼냈다. 그는 호소노 곤노스케(細野權之介, 이본에는 가쿠노스케)라는 자였다. 그 뒤 젠다유가 아뢰어 호소노를 오와리(尾張)의 구미즈케(組附, 조에 딸린 무사)로 삼았다고 한다.

원문
太田後善大夫といふ。或時士一人太田が許に來りて、吾は眞田家の浪人にて候。上田の軍の時相手に成りたる者なり。其時射られし矢を携へ來れり、と云ひしかば、太田、斯る事は必ず側に聞く人の慥なる有りて證にすべし、とて呼入れず。近き邊に笹瀨左大夫とて武功の有りし人を呼寄せて、彼眞田が士に對面す。其人申しけるは、上田にて出合ひたりと。善大夫怪みて、一番に出たるは、髭の多く有りし大男なりき、と言へば、彼の士、能く見屆けられし。それは眞田荒右衞門と申す者なり、と答ふ。其次の男は太りたる男、といふ。夫は何の佐仲と申す者なり。さて其次なり、といふ。否々夫は云々の男なりき、と言へば、夫は無極と申す者なり。偖て分明に見定められし、と言ふ。偖て其次我なり、と言へば、太田、如何にも然なりき、と言へば、其時此の矢にて射られき、とて矢を取出す。彼の者は細野權イ格之介といふ者なり。其後善大夫申して、細野を尾張の組附にしたりとかや。

원문(일본어) 쪽 e369.p07

그러나 성에서 조총을 쏘아 대는 것이 싸락눈 흩날리듯 하여 공격군의 선진은 땅에 바짝 무릎을 꿇고 말았다.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가 지시하여 성을 공격하지 않았다. 마사유키와 노부시게가 가운데 부대로 나오자 마키노 우마노조 야스나리(牧野右馬允康成)와 같은 집안의 신지로 타다나리(新次郞忠成)가 달려 나갔다. 양쪽 사이가 2초(町)쯤 되었을 텐데, 사나다 부자를 비롯한 84명이 손북을 치며 「다카사고(高砂)」 우타이(謠, 노가쿠의 노래)를 불렀다. 사카키바라가 "괘씸한 놈들이로군" 하자마자 맨 앞에 서서 말을 몰고 나갔다. 그 군사 2,000쯤이 뒤를 끊으려 하고 와타나베 한조(渡邊半藏)도 조총을 쏘며 나아가자, 마츠자와 고에몬(松澤五右衞門)이 "적이 우리를 따라 성안까지 밀고 들어올까 걱정됩니다. 어서 성으로 들어가시지요" 하고 간했다. 그래서 사나다는 「다카사고」를 다 부르지 않은 채 물러나 들어갔다. 야스마사와 야스나리가 잇달아 밀고 들어가려 하자 마사노부가 "가볍게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려 되돌아왔다.

도다, 츠지 등 일곱 사람을 세상에서는 우에다의 시치혼야리(七本鎗, 일곱 창잡이)라 부른다. 도다는 은빛 해골 사시모노를, 츠지는 흰 시항(四半, 네모난 깃발)에 「辻(츠지)」 자를 먹으로 쓴 사시모노를 꽂았다. 노부시게는 화살에 편지(箭文)를 매어 쏘아 보내 두 사람의 무용을 칭찬했다. 이 나카야마는 대단한 말 다루기의 명수였다고 한다.

원문
されども鐵炮を打出す事霰の飛ぶが如く、寄手の先陣地に犇と跪きてけり。本多正信下知して城をば責めず。昌幸と信仍は中の手に出づるを、牧野右馬允康成、同新次郞忠成馳せ向ふ。其間二町許も有らんに、眞田父子八十四人の手鼓を打つて高砂の謠をうたふ。榊原、憎き奴かな、といふ儘に眞先に馬を乘出す。其兵二千許後を取切らんとすれば、渡邊半藏も鐵炮を打ち懸けて進みしかば、松澤五右衞門、敵の附入心許なく候。疾く城に入らばや、と諫めて、眞田高砂の謠を終らずして引入りけり。康政、康成押續いて寄せけるを、正信、輕々しう攻めん事然るべからず、と制しければ引返す。戶田、辻等の七人を上田の七本鎗と世に申すなり。戶田は銀の髑髏の指物、辻は白き四半に辻といふ字を墨にて書きたり。信仍箭文を射させ、二人の武勇を稱しけり。此中山は極めたる馭法の上手なりとかや。

원문(일본어) 쪽 e369.p08

훗날 요다에게 누가 먼저 칼을 댔는지 다툼이 있었다. 츠지는 "요다는 붉게 칠한 볼가리개(頰當)를 하고 있었다" 하고, 미코가미는 "요다는 붉게 칠한 투구를 썼고 볼가리개는 없었다" 했다. 마키노 우마노조가 종자를 말 장수(馬工郞)로 꾸며 우에다로 보내, 이리저리 애쓴 끝에 야마모토를 만나 그때의 일을 묻게 했다. 야마모토는 "그런 다툼이 있을 법하다. 누구든 볼가리개를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첫 칼이다. 요다는 볼가리개를 하지 않았다. 다급한 창싸움 자리였으니 피에 물든 얼굴을 붉게 칠한 볼가리개로 본 것이겠지" 하고 말했다. 종자가 이를 듣고 돌아와 마키노에게 전하니, 미코가미가 첫 칼로 정해졌다.

원문
後に依田を太刀附けし一二の論あり。辻は、依田朱塗の頰當せし、といふ。御子神は、依田朱塗の冑著て頰當は無し、といふ。牧野右馬允從者を馬工郞にして上田に遣し、樣々にして山本に會ひ、其時の事を問ふ。山本が曰く、此論有るべき事なり。誰人にもせよ頰當を掛けずと言ふ人初太刀なり。依田は頰當掛けざりき。急しき場の鎗下なれば、血に染みたるを朱塗の頰當と見たるなるべし、と云ひしを聞きて歸り、牧野に語りしかば、御子神一の太刀にきはまりけり。

원문(일본어) 쪽 e369.p09

"이대로 힘으로 밀어붙이면 사람이 많이 죽고 다칠 것이다. 서둘러 미노(美濃)로 가시는 편이 낫다" 하는 평의가 있었다. 모리 우콘다유 타다마사(森右近大夫忠政)를 우에다의 오사에(押, 견제 부대)로 남겨 두고 다이토쿠인도노는 포위를 풀었다. 사카키바라가 후군을 맡자, 사나다가 멀리서 보고 "사카키바라의 모양새가 나를 얕보고 있다. 뒤쫓아 가서 막아서고 한바탕 싸우자" 하고 말했다. 그러자 사나다 밑에 있던, 지략이 대단한 늙은 법사 무사가 "야스마사만 한 자에게 어찌 대비가 없겠습니까. 옛 병법에 '돌아가는 군사는 쫓지 말라(歸師勿逐)'는 말이 있습니다" 하고 말려 쫓지 않았다. 도쇼구는 "사카키바라는 틀림없이 적과 맞붙을 기세를 보이며 물러날 자다" 하고 말했는데, 뒤에 그를 불러 물었다. 사카키바라는 "대장께서는 성에서 먼 산 쪽으로 붙어 물러나십시오 하고 아뢰어 두고, 저는 성 아래를 곧장 지나며 후군을 맡았습니다" 하고 아뢰었다. 도쇼구는 "네가 틀림없이 그렇게 했으리라 여겼는데 과연 어긋나지 않았구나" 하고 말했다.

이시다의 군이 패하자 사나다 부자를 처형하려 했는데, 노부유키가 "이번에 아버지와 갈라서서 이쪽으로 온 것은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설령 큰 영지를 내려 주신다 해도 무엇에 쓰겠습니까. 부디 시나노를 두 사람의 목숨과 바꾸고 싶습니다" 하고 아뢰었다.

원문
斯くて力攻にせられば人死傷せん。早く美濃に赴かせ給ふに如じ、と評定有り。森右近大夫忠政を上田の押とし、台德院殿圍を解かせ給ふ。榊原殿せしに、眞田遙に見て、榊原が有樣吾を侮れり。追駈けて食止め一軍せん、と云ひけるに、眞田が許に年老たる法師武者の謀由々しき有りけるが、康政程の者爭で其謀無かるべき。古の兵法に、歸師勿㆑逐といふ事の候、とて止めて追はざりけり。東照宮、榊原は必ず懸り引にすべき者なり、と仰せられしが、後に召して御尋有り。榊原承り、御大將は城に遠き山に懸りて引き給へ、と申して、臣は城下を眞直に殿仕りたり、と申せしかば、東照宮、汝必ず然らんと思ひしに、果して違はざりけり、とぞ仰せられける。石田が軍敗れしかば眞田父子を誅せられん處に、信之、此度父と引分れて參り候は、父を助けん爲に候。假令大國を賜ひ候とも何にか仕らん。あはれ信州を以て二人の命に換へ申し度き旨を申されけり。

원문(일본어) 쪽 e369.p10

노부유키는 이이 나오마사와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를 통해 "아버지를 살려 주십시오" 하고 청했다. 도쇼구는 이를 듣고 허락했다고 하여 다이토쿠인도노에게 아뢰었는데, 다이토쿠인도노는 "노부유키가 아버지를 살리겠다는 것은 도리에 맞다. 그러나 아와노카미에게 길이 막혀 세키가하라(關ヶ原) 싸움에 늦었다. 반드시 아와노카미를 처형해야 한다" 하며 허락할 기색이 없었다. 이즈노카미는 이를 전해 듣고 다시 두 사람을 통해 이렇게 아뢰었다. "분부의 뜻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리될 줄 알고 아버지께 간했으나 들어주지 않으셨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와노카미를 처형하시기 전에 먼저 이렇게 아뢰는 이즈노카미에게 할복을 명해 주십시오. 적의 자식이니 그리 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세상 사람들도 여길 것입니다. 부디 아버지가 살아 계신 동안에 이즈노카미를 처형해 주십시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야스마사가 "알겠소. 보슈(房州, 아와노카미)를 사면하는 일은 이 야스마사가 아뢰어 잘 되게 하겠소. 옛날의 요시토모(義朝)와는 크게 다른 즈슈(豆州, 이즈노카미)로구려" 하고는 그 뜻을 아뢰었다. 도쇼구와 다이토쿠인도노도 이를 받아들여 사나다 부자는 사면되었다고 한다.[역주: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는 호겐(保元)의 난(1156) 때 적편에 선 아버지 다메요시(爲義)를 처형했다. 아버지보다 먼저 죽겠다는 노부유키를 그와 대비한 말이다.]

원문
信之、井伊直政、榊原康政に就きて、父を助け給はり候へ、と申す。東照宮聞召し、許容有りし、と仰せられければ、台德院殿に申すに、信之父を助けんと言ふは理なり。されども安房守に遮られて關ヶ原の軍に後れたり。必ず安房守を誅すべし、とて御許されの色無かりしかば、伊豆守是を承り、又兩人に就きて、仰の趣申すべき詞無し。斯く有らんと存じ父を諫めしかども、用ひざれば力に及び候はず。只一つ志す所の候。安房守を誅せられんより先に、先づ斯く申す伊豆守に切腹を仰せ出され候へかし。御敵の子なれば左有るべきと世の人も存ずべし。必ず父在世の中に伊豆守を誅せられよ、と云ひも終らぬに、康政、心得て候。房州御赦免の事は康政が申上げて事能くせん。昔の義朝には大に異る豆州かな、と言ひて其旨を申せしかば、東照宮、台德院殿も聞召し入れられて、眞田父子許されしといへり。

원문(일본어) 쪽 e369.p11

노부유키는 시나노에서 12만 석의 땅을 받았고, 마사유키와 노부시게는 사면을 받아 성을 나와 기슈(紀州) 고야(高野) 기슭의 구도야마(九度山)에 은거했다. 노부시게는 늘 아버지와 병법을 논하며 천하의 형세를 헤아렸다. 마사유키는 예순일곱 살에 구도야마에서 죽었다.

그 뒤 오사카의 난이 일어나자 히데요리가 노부시게를 불렀다. 이 무렵 세상이 어수선했는데, 기슈는 아사노 나가아키라(淺野長晟)의 영지였으므로 나가아키라는 하시모토야마(橋本山)의 백성들에게 "사나다가 오사카로 갈 일이 있을 것이다. 막아라" 하고 지시했고, 백성들은 경계를 엄하게 했다. 노부시게는 하시모토야마의 백성 수백 명을 구도야마로 불러 임시 거처를 여럿 마련하고 술자리를 벌여 대접했다. 술을 잘 마시든 못 마시든 가리지 않고 권하니 모두 취해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그사이 백성들이 타고 온 말에 갖가지 짐을 싣고 백 명쯤이 길을 떠나 기이가와(紀伊川)를 건너, 하시모토야마에서 기노메(木のめ) 길로 접어들어 오사카로 갔다. 길가 마을의 백성은 모두 구도야마에 가 있었다. 남은 여자와 아이들은 노부시게 일행이 창과 나기나타(眉尖刀)의 칼집을 벗기고 조총에 화승을 끼워, 막는 자가 있으면 당장 베어 버릴 기세인 것을 보고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구도야마에서 취해 쓰러졌던 자들이 날이 밝아 보니 사나다가 없었다. "어찌 된 일이냐" 하고 물으니 "어제 이러이러한 모습으로 가와치(河內) 길로 갔다" 하고 대답했다. 속았다고 분해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노부시게는 오사카에 이르러 홀로 오노 슈리 하루나가(大野修理治長)의 집으로 갔다. 노부시게는 이 무렵 머리를 깎고 덴신 겟소(傳心月叟)라 칭하고 있었다. 오노의 무사는 노부시게인 줄 모르고 "어디서 온 수험자(修驗者, 산악 수행승)요?" 하고 물었다. 노부시게가 "오미네(大峯)에서 왔습니다" 하자, 마침 슈리가 자리에 없다며 번소(番所, 경비 초소) 곁으로 불러들여 두었다.

원문
信之に信濃十二萬石の地を賜り、昌幸、信仍は御赦を蒙り、城を出でて紀州高野の麓九度山に引籠る。信仍常に父と兵法を談じて、天下の時勢を計りけり。昌幸は六十七歲にて九度山に死す。其後大坂の亂起りしに、秀賴、信仍を招かれけり。此比世の中騷がしかりければ、紀州は淺野長晟の領地なれば、橋本山の百姓に、眞田大坂に行く事有らん。押止めよ、と下知せられしかば、用心嚴うしたりけり。信仍橋本山の百姓數百人を九度山に招き、假家數多設けて酒宴してもてなし、上戶下戶を言はず强ひたりし程に、醉伏して前後も知らず。其時百姓の乘り來りし馬に色色の物取附け、百人許打立ちて紀伊川を涉り、橋本山より木のめ路に懸り、大坂にぞ行きたりける。道々にて百姓は皆九度山に行きぬ。殘りし女童共信仍が鎗眉尖刀の鞘を脫し、鐵炮に火繩を挾み、もし押止むる者有らば忽ち討殺すべき體を見て詮方無し。九度山に醉伏したる者共、夜明けて見れば眞田は無し。如何に、と問へば、昨日云々の有樣にて河內路に赴きたり、と言ふ。欺かれしと悔めど力及ばず。信仍大坂に至り、只一人大野修理治長が家に行く。信仍其比薙髮して傳心月叟と言ひけり。大野が士信仍とは知らず。何國の修驗者ぞ、と問ふ。信仍、大峯より參り候、といへば、折節修理は居合せず、とて番所の側に呼入れ置きぬ。

원문(일본어) 쪽 e369.p12

젊은 무사들이 칼 이야기를 하다가 노부시게를 향해 "당신 칼을 보여 주시오" 하고 말했다. 노부시게가 "야마부시(山伏)의 개 쫓는 칼(犬威)일 뿐입니다" 하며 내놓아서 뽑아 보니, 마음으로도 말로도 미칠 수 없을 만큼 훌륭했다. "그럼 와키자시(脇差)를 보자" 하고 보니 그것도 마찬가지였으므로, 놀라서 슴베(中子)를 보니 와키자시는 사다무네(貞宗), 칼은 마사무네(正宗)였다.[역주: 마사무네와 사다무네는 가마쿠라 시대 말의 이름난 도공으로, 그 칼은 최고의 명검으로 꼽힌다.] 사람들은 서로 수상히 여겼다. 그 뒤 노부시게가 그 젊은 무사들을 만나 "칼 보는 눈은 좀 늘었소?" 하고 농을 하자 모두 얼굴을 붉혔다고 한다.

원문
若き士共刀劍の物語するとて信仍に向ひ、汝が刀見せられよ、と言へば、山伏の犬威に候、とて出すを抽きて見れば、心も詞も及ばれず。さらば脇差を見ん、とて是を見るに、是も同じ事なれば、驚いて中子を見るに、脇差は貞宗刀は正宗なり。人々怪み合へり。其後信仍彼若き士に逢ひて、刀の目利は上りたるや、と戲れしに、皆赤面せしとぞ。

원문(일본어) 쪽 e369.p13

슈리는 돌아와 노부시게를 보고 크게 기뻐하며 "잘도 빨리 와 주셨소" 하고 예를 갖추어 서원(書院)으로 맞아들여 대접했다. 히데요리는 하야미 카이노카미 토키유키(速水甲斐守時之)를 사자로 삼아 황금 200매를 내리고 "군병의 일은 곧 지시가 있을 것이다" 하고 전했다. 이윽고 동서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자 도쇼구는 어떻게든 노부시게를 항복시키려고 숙부 오키노카미 노부타다(隱岐守信尹)를 시켜 이 뜻을 전하게 했다. 시나노에서 1만 석을 내리겠다는 것이었다. 노부시게가 응하지 않자, 다시 시나노 한 지방을 통째로 내리겠다고 했다. 노부시게는 노하여 "의리는 사람의 도리입니다. 히데요리에게 두 마음을 품는 일은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다시 이런 사자 노릇을 하신다면 저도 생각이 있습니다" 하고 꾸짖어 노부타다를 돌려보냈다.

원문
修理歸りて信仍を見て大に悅び、疾くも參られ候よ、と禮儀正しくして書院に招き入れもてなしぬ。秀賴、速水甲斐守時之を使として黃金二百枚賜はり、軍兵の事は軈て下知有るべし、となり。旣に東西の軍起るに及びて、東照宮、如何にもして信仍を降參させばや、とて、叔父隱岐守信尹を以て此旨仰せられ、信州にて一萬石賜はり候ひなんとなり。信仍同心せざれば、又信州一國賜るべし、と仰せ出されけり。信仍怒つて、義は人の道なり。秀賴に二心有らん事存じも寄らず候。重ねて斯る使をせられなば存ずる旨有り、と罵りて信尹を追返しけり。

원문(일본어) 쪽 e369.p14

어떤 설에는 노부시게가 노부타다를 향해 "천하에 천하를 더해 준다 해도 히데요리를 등지는 불의는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하고, 땀이 난다며 웃통을 벗어 시동(小姓)에게 닦게 하고는 "머지않아 이 목을 간토(關東)의 료고쇼(兩御所, 이에야스와 히데타다) 앞에 내놓게 되겠지요" 하며 웃고 있었다고 한다.

○ 모토사다(元禎)가 생각하건대,[역주: 모토사다는 이 책의 편자 유아사 조잔(湯淺常山)의 이름이다.] 마사유키는 도쿠가와 가문에 복종한 뒤 세키가하라의 난에 이르기까지 등을 돌린 것이 두 번이나 된다. 이것을 의리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도쇼구께서 너그럽고 어지셨기에 거듭된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이다. 노부시게가 그 너그러움에 무엇으로 보답했는지 알 수 없다. 도요토미 가문은 사나다가 여러 대 섬긴 주군이 아니다. 만약 주군을 등지지 않는 의리를 논한다면, 다케다 가문이 망한 뒤 세상을 버리고 산속에 숨었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사나다가 내세우는 의리가 도리에 맞는다고는 할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이 사나다를 칭송하는 것이 지나치다. 그래서 어리석은 의견이나마 적어 둔다.

원문
或說に、信尹に向つて、天下に天下を添へて賜るとも、秀賴に背きて不義は仕らじ。汗の出づるとて肌を脫ぎ小姓に拭はせて、軈て首を關東の兩御所の前に出すべき、とて打笑ひ居たりとなり。○元禎按ずるに、昌幸德川家に服從し奉りて後、關ヶ原の亂に及んで背きたる事二度に及べり。此義と言ふべからざるにや。東照宮寬仁に御座しませし故に再犯の罪を宥めさせ給へり。信仍其寬仁に何を以て報い候や心得られず。豐臣家は眞田數世の君に非ず。若君に不㆑背の義を論ぜば、武田家亡びて後、世を捨てて山中に隱れずば如何にか有るべき。眞田が論ずる處の義道に叶へるとは言ふべからず。世の人眞田を以て賞稱する事甚し。故に愚論を述ぶるに及べり。

원문(일본어) 쪽 e369.p15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 노부시게는 데마루(出丸, 본성 밖에 내어 쌓은 성곽)를 맡아 막았는데, 대군이 공격해 올 때에도 수비가 굳건했다. 화친이 이루어지자 노부시게는 에치젠(越前)의 타다나오(忠直)를 섬기던 하라 하야토 사다타네(原隼人貞胤)와 옛 정분이 있어 그를 불러 대접했다.〔하라는 본래 다케다 가문의 무사였다〕 술잔이 여러 차례 돈 뒤 노부시게는 북을 치며 아들 다이스케(大介)에게 춤을 추게 하고 흥겨워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틀림없이 전사하리라 여겼는데 뜻밖에 살아남아 다시 만나는구려. 그러나 결국은 다시 싸우게 될 것이오. 영락하여 구도야마에 숨어 살던 몸이 한 방면을 맡은 대장이 되었으니 도요토미 가문의 은혜는 무엇에도 비길 수 없소. 저기 보이는 사슴뿔 다테모노(立物, 투구 장식)를 단 투구는 사나다 가문에 전해 온 것이라 하여 아버지 아와노카미가 물려준 것이오. 다음 싸움에는 반드시 쓸 것이니 잘 보아 두시오. 또 목숨은 아깝지 않으나 다이스케가 아무런 추억도 없이 헛되이 싸움터의 흙이 되는 것은 가엾소." 사다타네도 눈물을 흘리며 "싸움에 나서는 자 가운데 누가 살아 돌아오려 생각하겠습니까" 하고 답했다. 노부시게는 시라카와라게(白河原毛, 흰빛이 도는 담황색 털빛)의 말에 로쿠렌센(六連錢, 엽전 여섯 닢을 늘어놓은 사나다 가문의 문장)을 금으로 박은 안장을 얹게 하고, 뜰에서 몰아 돌며 하라에게 보여 주었다. 그러고는 "성은 허물어졌으니 텐노지구치(天王寺口)로 달려 나가 이리저리 내달리며 지휘해 마음껏 싸워 볼까 하오. 그래서 이 말이 귀하다오" 하고 말하고, 또 술을 나누어 취한 뒤 헤어졌다.

과연 화친이 깨지자 겐나(元和) 원년(1615) 5월 오사카에서 군사 평의가 열렸다. 고토(後藤)는 야마토구치(大和口)의 선봉으로 히라노(平野)에 진을 쳤다. 5월 6일 밤, 노부시게는 모리 부젠노카미 카츠나가(毛利豐前守勝永)와 둘이서 고토의 진에 가서 "날이 밝으면 고쿠부(國分) 산을 넘어 3만 군병을 한 덩어리로 묶어 간토의 하타모토(旗本, 대장 직속 본진)로 곧장 쳐들어갑시다. 군신(軍神)이시여 굽어보소서. 료고쇼의 목을 베든지, 우리 세 사람의 목이 수급 확인(實撿)에 바쳐지든지, 둘 중 하나요" 하며 마지막 잔을 나누었다. 고토는 6일 한밤에 나가 도묘지구치(道明寺口)에서 전사했다.

모리가 후지이데라(藤井寺)로 진을 옮겼을 때는 이미 고토의 군이 무너졌고, 간토의 군병 20~30만쯤이 홍수가 넘쳐 오듯 밀려왔다. 사나다를 기다렸으나 아직 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사나다는 형 이즈노카미와 짜고 배반하려는 것이다" 하고 욕하던 차에, 스미요시 가도(住吉海道)에서 붉은 깃발을 세우고 말발굽 먼지를 일으키며 오는 무리가 보였다. 금빛 하에토리(蠅取, 파리채 모양) 우마지루시(馬印, 대장의 위치를 알리는 표지)였으니 사나다였다. 모리의 진도 기운이 났다. 노부시게가 콘다(譽田) 쪽으로 나아가자 사람들이 "그럼 역시 두 마음이로구나" 하고 수상히 여겼는데, 노부시게는 둑 위로 올라가 조총을 앞세우고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의 선봉 가타쿠라 고주로(片倉小十郞)를 향해 쳐들어갔다. 노부시게가 맨 앞에서 싸우자 가타쿠라의 진이 패해 달아났다. 달아나는 적을 쫓아 많이 베었다. 가타쿠라는 금빛 종(鐘) 사시모노를 꽂고 사이(麾, 지휘채)를 잡아 다시 밀어붙였다. 마사무네 본진의 기마 조총대도 나아왔다. 오슈는 말이 많기로 이름난 곳이라, 좋은 말을 골라 젊은 무사를 태우고 말 위에서 조총을 잇달아 쏘게 하여 적이 움츠러든 틈에 말머리를 나란히 해 단숨에 짓밟아 흩뜨리고 몰아내는 전법이었다.

아직 양쪽 사이가 멀었으므로 노부시게가 "자, 지쳤을 테니 숨을 돌리고 투구를 벗어라" 하고 지시하니 모두 투구를 벗고 쉬었다. 적이 차츰 가까워지자 노부시게가 "자, 투구를 써라" 하고 말하기가 무섭게 투구 끈을 매고 창끝을 나란히 하여 적을 향했다. 마사무네의 조총대는 키(箕) 모양으로 벌려 다가오며 비 오듯 쏘아 댔다. 노부시게는 진을 둥글게 짜고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자리다. 한 발짝도 물러서지 마라, 모두들" 하고 지시했다. 병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저마다 염불을 외며 힘을 합쳐 버티는데, 노부시게가 큰 소리로 "한 치도 물러서지 마라. 여기서 죽어라" 하고 외치며 창을 잡고 덤벼드니, 병사들이 일제히 일어나 함성을 지르며 창을 찔러 넣었다. 마사무네의 군병은 크게 패해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사나다의 텐노지구치 싸움이라 하여, 대군의 기마 조총대를 이긴 모습을 전하며 칭송했다.

노부시게는 병사들을 단단히 정돈해 조용히 모리의 진으로 왔다. 올해 열여섯 살인 다이스케는 맞붙어 싸워 벤 목을 안장의 시오데(四方手, 끈을 매는 고리)에 매달고, 상처를 입었는데도 흐르는 피를 닦지도 않고 달려왔다. 모리가 이를 보고 "참으로 아버지의 아들이로다" 하고 감탄했다. 노부시게는 모리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때가 늦어 고토가 전사하는 바람에 계책이 헛되이 되었으나, 이것도 도요토미 가문의 운이 다한 탓이오" 하고 말했다. 모리는 "오늘 대적을 이기신 무용은 옛 명장보다도 낫소" 하고 말했다. 그러던 차에 히데요리의 기호로(黃母衣, 노란 호로를 멘 전령 무사) 츠카이반(使番, 전령)이 말을 타고 와서 "어서 성안으로 물러나시오" 하고 지시했다. 그러나 노부시게는 여전히 붉은 깃발을 세우고 한 번 더 싸우려고 투구 끈을 고쳐 매니, 기세가 유난히 엄해 보였다.

미즈노 휴가노카미 카츠나리(水野日向守勝成)가 이를 보고 "자, 싸웁시다" 하고 마사무네에게 권했으나 마사무네는 응할 기색이 없었다. 에치고 쇼쇼 타다테루(越後少將忠輝)가 이곳으로 진을 옮겨 와 있었는데, 그도 사나다의 진을 치려고 투구를 썼다. 마사무네의 사무라이다이쇼(士大將, 한 부대를 이끄는 무사 대장) 가타쿠라 고주로가 타다테루 앞에 와서 "해가 저물어 가니 싸움은 위태롭습니다" 하고 말하자, 혈기 왕성한 무사들이 "자, 덤벼들어 쳐 잡자. 약한 적을 남겨 둘 수는 없다" 하고 말했다. 가타쿠라는 "그건 잘못 생각한 것이오. 일본 전체를 적으로 삼아 싸우는 오사카의 무리를 약한 적이라 할 수 있겠소. 내 조의 무사 서른 명 가운데 스물아홉 명이 전사했소. 이것을 보시오" 하며 자루까지 피에 물들고 휘어진 칼을 보여 주었다. 에치고의 사무라이다이쇼 하나이 몬도(花井主水)도 이쿠사부교(軍奉行, 전투를 감독하는 직) 다마무시 츠시마(玉虫對馬)에게 "어찌해야 하겠소" 하고 물었다. 다마무시는 "적은 2진(二の身)으로 이기려고 노리고 있습니다. 덤벼들어 싸워 봐야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하며 머뭇거렸다.

원문
大坂冬の陣に出丸に有りて防ぎけるが、大敵の責めし時守固かりけり。和平に及びて、信仍、越前忠直に仕へし原隼人貞胤は、古りし好有りて招きもてなしけり。原はもと武田家の士也酒盃數獻の後、信仍鼓を打ち子の大介に舞はせて興じけるが、信仍云ひけるは、吾必ず討死せん。思ひの外に存命へて再會する事よ。されど遂には軍に及ぶべし。落ぶれて九度山に隱れ居しが、一方の大將となりて候豐臣家の恩譬へん樣無し。彼に見ゆる鹿の角の立物の冑は眞田家に傳へたる物とて、父安房守讓り與へて候。重ねての軍には必ずきんずる物なれば見置きて賜り候へ。又命は惜からねども大介が思ひ出もなく、空しく戰場の土とならんは不便に候、と語りければ、貞胤も淚を流し、軍に臨む者誰か生きて歸らんと思ふべき、と答へしに、信仍白河原毛なる馬に六連錢を金もてすりたる鞍置かせ、庭にて乘り廻し原に見せて、城は壞たれたれば、天王寺口に駈出でて馳廻り、下知して思ふ程軍せばやと存ずれば、此馬の可愛く候、と語りて、又酌醉ひて別れけり。果して和平敗れしかば、元和元年五月大坂にて軍評定有り。後藤は大和口の先陣にて平野に陣しぬ。五月六日の夜、信仍、毛利豐前守勝永と二人打連れて後藤が陣に行き、明けなば國分の山を踰え、三萬の軍兵を一陣にして關東の旗本に一文字に駈入り、軍神も照覽候へ。兩御所の首を取るか三人の首を實撿に供ふるか。二の中よ、とて最期の盃せり。後藤は六日の夜半に打出で道明寺口にて討死しけり。毛利は藤井寺に陣を進めし處、早後藤が軍破れ、關東の軍兵二三十萬も有らん、洪水の溢れ來るが如し。眞田を待てども未來らず。眞田は兄の伊豆守と同心して裏切するよ、と人々罵りける所に、住吉海道より赤旗押立て馬煙蹈み立てて來るを見れば、金の蠅取の馬印にて眞田なれば、毛利が陣も勇み合へり。信仍、譽田の方に進めば、偖は愈二心よ、と人々怪む所に、信仍堤の上に上り鐵炮を進めて、伊達政宗の先陣片倉小十郞に向ひて討て懸る。信仍眞先に進みて鬪ひしが片倉が陣敗北す。逃ぐるを追うて敵數多討取りたり。片倉金の鐘の差物にて麾を取り盛り返す。政宗の旗本の騎馬の鐵炮も進み來る。奧州は聞ゆる馬多き所なれば、良い馬を撰びて若き士に乘せ、馬上より鐵炮をつるべ立てさせ、敵ひるむ所を馬の首を揃へて忽ち乘破り、駈亂して追崩す軍略なり。未だ其間相去る事遠かりしかば、信仍、いざ疲れたるに、息をつけ冑を脫げ、と下知しければ、皆冑を脫いで休み居たり。敵稍近附きしかば、信仍、さらば冑を著よ、と言ふ程こそあれ、冑の緒をしめ鎗の穗先を揃へて敵に向ふ。政宗の鐵炮箕手なりに成りて懸り來り、雨の降る如く打懸けたり。信仍眞丸に成りて、とても遁れぬ所よ。一足も引くな者共、と下知し、ひた〱と跪きて聲々に念佛を唱へ、力を合せて堪へたるに、信仍大音上げ、一寸も引くな爰に死ねや、と下知して鎗を取つて懸れば、士卒一同に立上り喚いて鎗を打入れたれば、政宗の軍兵大に破れ、一支も無く崩れけり。此を世に眞田が天王寺口の軍とて、大軍の騎馬鐵炮に打勝つたる有樣を傳へて稱しけり。信仍士卒を立固め靜々と毛利が陣に來る。大介今年十六歲、組討して取つたる首を鞍の四方手に附け、手負ひたるが、流るゝ血をも拭はず馳來るを毛利見て、天晴父の子なり、と感じけり。信仍毛利が手を取り淚を落し、時刻遲く後藤が討死せし故、謀空しく成りぬるも、豐臣家の運盡きぬる所なり、といへば、毛利、今日大敵に打勝たれし武勇の有樣、古の名將にも優りたり、とぞ云ひける。斯る所に秀賴の黃母衣の使番乘來り、疾く城中に引籠り候へ、と下知せられしに、信仍は猶赤旗押立て、今一軍せんと冑の緒をしめ直し、勇氣殊に嚴しく見えたりけり。水野日向守勝成此を見て、いざ軍せん、とて政宗に勸めらるゝに、同心の色無し。越後少將忠輝此處に陣を進められしが、此も眞田が陣に懸らんと冑を著給ふ。政宗の士大將片倉小十郞忠輝の前に來り、日暮に近く軍危からん、と言へば、早雄の士共、いざ懸りて討捕らん。弱敵を剩すまじ、といふに、片倉、夫は僻事にて候。日本國を敵にして軍する大坂の者共を弱敵と言ふべきや。片倉が組の士三十人の中二十九人は討死したり。是見られよ、とて欛まで血に染みたる刀の曲りたるを見せてけり。越後の士大將花井主水も、如何すべき、と軍奉行玉虫對馬に問ふ。玉虫、敵は二の身の勝を心掛候。懸りて軍に利候まじ、と言ひてためらひけり。

원문(일본어) 쪽 e369.p16

타다테루 쪽에서는 오사카 군을 칠지 평의가 결정되지 않았다. 시노세 사다유(篠瀨左大夫)가 "아시가루로 맞받아 상대하며 막아 세워야 합니다. 싸우게 하십시오" 하고 권했다. 다마무시가 "얼마 안 되는 아시가루로 어떻게 적의 대군을 막아 세운단 말이오" 하자, 시노세는 "근거 없는 말은 하지 않소. 여섯 자 거구라도 발바닥에 무언가 찔리면(踏ぬき) 걸음이 더뎌지는 법이오. 인원이 적다고 따라붙지 못할 까닭이 있겠소" 하고 말했다. 다마무시는 "지리도 모르는 곳에서 해까지 저물었소. 지나가다 벌이는 싸움은 위험한 것이오" 하며 말렸다. 오노 노토노카미(小野能登守)는 "호간도노(判官殿,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미쿠사야마(三草山)를 넘어 벌인 싸움은 낯선 땅에서의 밤싸움이 아니었소?" 하고 말했다. 미나가와 로호(皆川老甫), 오노 노토노카미, 하나이 몬도, 시노세 사다유는 치고 나가자고 했으나, 다마무시 츠시마와 하야시 헤이노조(林平之丞)가 말려 논의가 결정되지 않는 사이에 오사카 쪽은 조용히 물러갔다고도 한다.

원문
忠輝、大坂を突くべきやと評定決せず。篠瀨左大夫、足輕をかけあひしらひて食止むべし。軍をさせられよ、と勸む。玉虫、僅なる足輕を以て如何にして敵の大軍を食止むべき、といへば、篠瀨、踏の無き事は申さじ。六尺の大男も、足の裏に踏ぬきすれば行步暇取るものなり。人數少しとてつけられぬ事や有る、といふ。王虫、地の利知らぬ所にて日も暮れたり。行懸の合戰は危き物なり、と押止む。小野能登守は、判官殿三草山を越えての合戰は、知らぬ國の夜軍ならずや、といふ。皆川老甫、小野能登守、花井主水、篠瀨左大夫は、駈らん、と云へども、玉虫對馬、林平之丞は押留めて論決せざりし中に、大坂方靜々と引取りしとも言へり。

원문(일본어) 쪽 e369.p17

사나다의 진에서는 저마다 부채를 들어 손짓하며 "어째서 싸우지 않으시오" 하고 소리소리 외쳤다. 그래도 덤벼들지 않자 노부시게는 조용히 군사를 거두며 "간토 무사가 백만이 있어도 사내는 하나도 없구나" 하고 큰 소리로 욕하고 물러갔다. 도쇼구는 하야시 도슌(林道春, 하야시 라잔)을 시켜 다마무시에게 『오자(吳子)』에서 여섯 나라의 기풍을 논한 장을 읽어 들려주게 하고는 다마무시를 내쫓았다.[역주: 『오자』 요적(料敵) 편은 전국시대 여섯 나라 군대의 기질과 그 약점을 논한 장이다.] 이 다마무시는 카이의 다케다 가문에서 노련한 무사였기에 이쿠사부교가 되었는데, 무슨 까닭인지 이때는 겁을 먹고 머뭇거렸다.

이튿날 7일의 싸움에 노부시게는 군사를 냈는데, 히데요리가 직접 출진하도록 권하려고 아들 다이스케를 성으로 돌려보냈다. 다이스케는 "올해 열여섯이 되도록 한시도 곁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이제 전사할 때가 되어 달아났다고 남들이 말한다면 분합니다. 지난해 어머님과 헤어진 뒤 받은 편지에서도 '살아서 다시 만나기를 바라지만, 싸움터에서는 반드시 아버지와 같은 베개를 베고 전사하라. 무엇보다 이름을 아껴라' 하고 이르셨습니다" 하고 말했다. 노부시게는 "성안으로 돌아가라는 것도 히데요리 공을 위해서다. 우리 부자가 어차피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 곧 저승에서 만날 터인데 잠깐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것이야말로 분한 일이다. 어서 성으로 가거라" 하며 매달린 손을 떼어 냈다. 다이스케는 아쉬운 듯 아버지를 바라보며 "그럼 저승에서" 하고 돌아갔다. 노부시게는 다이스케를 배웅하며 떨어지는 눈물을 누르고 "저 아이가 어제 콘다에서 큰 상처를 입었는데도 약한 기색이 보이지 않으니, 마지막에 남들에게 비웃음을 사지는 않겠지. 마음이 놓인다" 하고 말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오사카 군이 패하자 노부시게도 전사했다. 그 목은 에치젠 타다나오의 무사 니시오 니자에몬(西尾仁左衞門)이 거두었으나 누구의 목인지 알지 못했다. 사나다 노부타다가 말을 타고 지나가다 이를 보고 "그 투구는 낯이 익다. 사나다 사에몬노스케일 것이다. 입을 벌려 보아라. 앞니 두 개가 빠져 있을 것이다" 하고 말했는데, 노부타다의 말 그대로였다. 그제야 사에몬노스케임을 알게 되었다. 그 투구는 노부시게가 하라에게 이야기하며 보여 준 것이었다. 사람들은 "무사 된 몸은 기억해 둘 말을 미리 남겨 두어야 하는 법이다" 하고 서로 말했다.

다이스케는 성안에 들어가 히데요리를 따라 아시다 구루와(蘆田曲輪)의 망루(矢倉)에 들어가 있었다. 아버지의 소식을 묻다가 전사했다는 말을 듣고는 그 뒤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정표로 준 수정 염주를 목에 걸고 히데요리의 자결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하야미 카이노카미가 다이스케에게 "맞붙어 싸우며 늠름한 무용을 보이고 큰 상처를 입으셨다고 들었소. 화친이 되면 주군께서도 성을 나오시게 될 것이오. 사람을 딸려 사나다 가와치노카미 노부요시(眞田河內守信吉)에게 보내 드리겠소" 하고 말했으나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공격군이 망루를 에워쌌을 때 하야미가 문 앞에 나와 다이스케의 모습을 이야기하며 "무용의 핏줄이란 무서운 것이로다" 하고 말했다고 한다. 끝내 다이스케도 망루 안에서 죽어, 부자가 함께 도요토미 가문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원문
眞田が陣には手々に扇を擧げて招き、何とて軍し給はぬぞ、と聲々に呼はりけり。猶懸らざりしかば信仍靜に兵を收め、關東武者百萬も有れ、男子は一人も無し、と大音に罵りて引取りければ、東照宮、玉虫に、林道春に吳子が六國の風を說きたる章を讀ましめられ、玉虫を逐出されけり。此玉虫は、甲斐の武田家にて物師なる故軍奉行たりしに、如何なる故ならん後れたりき。明る七日の軍に信仍兵を出せしが、秀賴の出馬を勸めんため子の大介を城に返しけり。大介、今年十六に及ぶまで片時も側を離れ候はず。只今討死の際に逃げたりと人のいはんも口惜しく候。去年母上に別れ奉りし後文の便に、存命へて相見えんは願はしけれ共、合戰の場にて必ず父上と同じ枕に討死せよ。苟にも名こそ惜しけれと誡められし、と言ひければ、信仍、城中へ歸れと言ふも秀賴公の御爲なり。父子ともとても遁るべきや。軈て冥途に逢ふべきを、暫の別れを惜むこそ口惜しけれ。疾城に參れ、とて取附きたる手を引放せば、大介名殘惜げに父を見て、さらば冥途にてこそ、とて引返す。信仍、大介を見送りて落つる淚をおさへ、昨日譽田にて痛手負ひしが、弱る體の見えざるは、よも最後に人に笑はれじ。心安し、と言ひけるとかや。斯くて大坂の軍敗れしかば信仍討死しけるを、首をば越前忠直の士西尾仁左衞門取つたりしに、誰とも知らず。眞田信尹馬に乘りて打通り、此を見て、其冑は見知りたるぞ。眞田左衞門佐なるべし。口を開いて見よ。向齒二枚闕けて有るべき、と言ひしに、信尹が詞の如し。偖こそ左衞門佐とは知りてけれ。彼冑は原に物語して見せたるなり。弓箭取る身は思ひ出の詞兼て云ひ置べき事にこそ、と言合へり。大介は城中に入り、秀賴に從ひて蘆田曲輪の矢倉に籠りて父の事を尋ねけるに、討死せしと聞きて夫より物も言はず。母の形見に賜はりける水晶の珠數を首に懸け、秀賴の自害を待居しかば、速水甲斐守大介に向ひて、組討の武勇逞しき振舞して、痛手負はれしと聞ゆ。和平にて君も城を出させ給ふべし。眞田河內守信吉の方へ人を添へて送るべし、と言へ共些とも動かず。寄手矢倉を取卷きし時、速水戶口に立出でて大介が有樣を語り、武勇の血脈恐しき者なり、と云ひしとなり。終に大介も矢倉の中に死して、父子同じく豐臣家の爲に亡びたり。

원문(일본어) 쪽 e369.p18

번역: historyfol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