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사에몬다유 마사노리(福島左衞門大夫正則)는 세키가하라(關ヶ原) 전투의 공으로 오와리(尾張)의 키요스(淸洲)에서 옮겨 아키(安藝)·빈고(備後)를 받았다. 그런데 성품이 거칠고 정사를 돌보는 일이 서툴렀을 뿐 아니라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였고, 또 도쇼구(東照宮,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무례한 일이 많았으므로, 겐나(元和) 5년(1619) 다이토쿠인도노(台德院殿,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교토에 올라왔을 때 영지를 빼앗겼다.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영지를 몰수당한 경위
에도 시대 중기 오카야마번의 유학자 유아사 조잔(湯浅常山)이 센고쿠~에도 초 무장들의 일화를 모은 『조잔키단(常山紀談)』(1739년 자서)의 한국어 번역이다. 후대에 전해진 이야기를 모은 책이라 역사적 사실과 다른 대목이 있다.
마사노리는 혼다 코즈케노스케 마사즈미(本多上野介正純)를 통해 히로시마(廣島) 성의 해자를 준설하겠다는 뜻을 아뢰었다. 마사즈미는 상부에 아뢰어 두겠다고 답했으나, 교토에 상경하는 일로 바빴던 탓에 그만 그 일을 아뢰지 못했다. 그러다 다이토쿠인도노가 히로시마 성을 고쳐 쌓은 일을 듣고 노하자, 마사즈미는 그제야 놀라 마사노리의 서한을 내놓았다. 그러나 증문(證文, 증거가 되는 문서)을 늦게 냈다 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원문
다이토쿠인도노는 니조(二條) 성에서 도이 오이노카미 토시카츠(土井大炊頭利勝)와 토도 이즈미노카미 타카토라(藤堂和泉守高虎)를 불러 이 일을 말하고 의논해 정했다.
이타쿠라 이가노카미 카츠시게(板倉伊賀守勝重)가 "이 일은 이이 카몬노카미 나오타카(井伊掃部頭直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하여 나오타카를 불렀다. 나오타카가 어전에 나아가 "후쿠시마 사에몬다유의 영지를 몰수하실 일로 부르셨습니까?" 하고 아뢰자, 다이토쿠인도노는 "그 일이다. 누구를 사자로 삼으면 좋겠느냐?" 하고 물었다. 나오타카는 이렇게 아뢰었다. "교토에서 사자를 보내시면, 에도(江戶)에 남아 있는 자들이 '우리가 이만한 일도 분별하지 못한단 말인가' 하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에도에 있는 자에게 명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는 마사노리를 교토로 불러 죄목을 말씀하시고 해명할 것이 있는지 물으시거나, 영지에 틀어박혀 생각해 보라고 명하셔도 좋겠습니다. 일에 따라서는 제가 나아가 쳐부수겠습니다." 이즈미노카미가 "젊은 카몬노카미다운 말이오. 다만 후쿠시마도 만만치 않은 자이고 용맹한 자가 많으니, 골목 싸움(小路軍, 성 아래 마을 골목에서 벌어지는 싸움)이 되면 어찌 될는지" 하고 말했다. 나오타카가 "이즈미노카미께서는 어디서 골목 싸움을 해 보셨소? 내 집안에는 무공 있는 늙은 무사가 많소. 옛 싸움 이야기를 들어 보았지만,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氏眞) 밑에서 하마마츠(濱松) 성주 이이 하야토(井伊隼人)를 우지자네의 성 아래로 불러들여 죽였을 때 골목 싸움이 되어 몹시 어려웠다는 이야기 하나를 들었을 뿐이오" 하고 말하니, 이즈미노카미는 할 말이 없었다. 다이토쿠인도노는 "쓸데없는 골목 싸움 논의로구나" 하고 일단 물러났다가, 이노우에 카즈에노카미(井上主計頭)를 시켜 다시 나오타카를 불러 말했다. "내가 생각한 바도 네 말과 같다. 사람들이 저마다 말하여 하나로 모이지 않는다. 카몬(나오타카)의 생각을 따르겠다. 그런데 누구를 사자로 삼을까?" 나오타카가 "이런 사자로는 구제 산시로(久世三四郞)와 사카베 산주로(坂部三十郞) 두 사람이 좋을 것으로 압니다" 하고 아뢰자, "이것도 내 생각과 맞는다" 하여 두 사람이 사자가 되었다. 이리하여 사카이 우타노카미 타다요(酒井雅樂頭忠世)가 오타 젠다유(太田善太夫)를 가까이 불러 말했다. "후쿠시마 사에몬다유의 영지를 몰수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후쿠시마는 만만치 않은 자다.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걱정이다." 오타는 "아니오,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하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사카이가 "또 늘 하던 대로 경솔한 말이로구나. 나는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자, 오타는 이렇게 말했다. "이루지 못할 일을 벌일 후쿠시마가 아닙니다. 해야 할 바를 모르는 자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후쿠시마는 도리에 어긋나고 어질지 못한 사내이지만, 승부의 이치를 잘 아는 사내이니 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을 것입니다." 과연 마사노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명을 받들었다.
원문
6월에 후쿠시마가 영지를 빼앗긴다는 소식이 히로시마에 전해지자, 후쿠시마 탄바(福島丹波)는 무사들을 모두 불러 모아 "주군이 맡겨 두신 성이니 쿠보(公方, 쇼군)의 명이라 해도 내주기 어렵다. 아니면 빈고노카미(備後守, 마사노리의 아들 타다카츠) 님을 위해서라면 내주어야 할까?" 하고 의논했다. 고즈키 분에몬(上月文右衞門)이 나서서 "남들은 어떻든, 나는 혼마루(本丸, 성의 중심 구역)를 맡은 이상 목숨이 있는 한 남에게 내주지 않겠소" 하고 잘라 말했다. 탄바는 납득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무라카미 히코에몬(村上彥右衞門)이 듣고 "후쿠시마와 고즈키 두 사람의 생각 가운데 뜻을 같이하는 쪽에 각자 따로 서명(判形)을 하시오" 하며 두 통을 써서 내밀었다. 탄바의 조카인 사카이 슈젠(酒井主膳)이라는 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마타 토노모(鎌田主殿)를 불러 "어떻게 생각하오? 탄바는 내 백부이지만 고즈키의 말이 옳소" 하자, 토노모도 고즈키를 따라 서명했고, 모두 이를 따랐다. 그때 고즈키가 "모두가 이러하니 탄바 님의 가족을 혼마루에 들이시겠소?" 하자 탄바는 곧 가족을 혼마루에 들였다. 그러자 저마다 앞다투어 가족을 성 안에 들였다. 성을 넘겨받으려고 여러 장수가 나서자, 탄바는 요시무라 마타에몬(吉村又右衞門)과 미즈노 지로에몬(水野治郞右衞門) 두 사람을 사자로 보내 이렇게 전했다. "사에몬다유의 영지가 몰수되었으니 명은 삼가 받들겠습니다. 그러나 주군이 맡겨 두신 성을 증거로 삼을 서한도 없이 내준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여길지 마음이 쓰입니다. 다음으로, 영지에 들어오시면 시골의 젊은 놈들이 무례를 저지를까 염려됩니다. 영지를 피해 주십시오." 그러자 성을 넘겨받으러 온 쪽에서 "그렇다면 사에몬다유는 멀리 있으니, 후시미(伏見)에 있는 빈고노카미의 서한을 증거로 삼으면 어떻겠느냐?" 하고 말을 전해 왔다. 탄바 쪽이 "부자 사이인 것은 말할 나위 없지만, 빈고노카미의 영지도 성도 아닙니다. 빈고노카미의 말은 쓸 것이 못 됩니다" 하던 참에 마사노리의 서한이 왔으므로, 성의 오테(大手, 성의 정면)에서 서한을 받았다. 그런데 히로시마에는 후나이리(船入, 배를 대는 곳)가 두 군데 있었다. "사람이 많고 어수선하여 무사들의 가족이 물러날 때 다툼이 생길까 염려됩니다" 하여, 한쪽은 사람을 막고 다른 한쪽 입구로 물러나게 했다. 성 안의 무사들은 예복을 입고 문 왼쪽에 늘어서 있었고, 성을 넘겨받는 사자 안도 쓰시마노카미 시게노부(安藤對馬守重信)는 성문 오른쪽을 따라 성에 들어갔다.
원문
안도는 성문에 들어갈 때 늘어선 사람들에게 "사에몬 님의 일은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소" 하고 말을 건넸다. 그때 모두 절을 했는데, 한 사람만은 차센가미(茶筅髮, 상투를 차선 모양으로 묶은 머리)를 하고 시카미(しかみ, 얼굴을 새긴 장식)의 슈모쿠즈에(撞木杖, 손잡이가 T자 모양인 지팡이)를 짚은 채, 쓰시마노카미의 말을 듣고 옆을 보고서 절을 했다. 야마자키 카이노카미(山崎甲斐守)가 이를 보고 예사 사람이 아님을 알아 이름을 물으니, 나가오 테와(長尾出羽, 이본에는 나가야)라고 답했다. 야마자키는 물러간 뒤 사자를 보내 "가족을 부양해 드리겠소. 또 다른 지방으로 가기까지 내게 몸을 의탁해 지내시오" 하고 전하게 했다. 테와는 "카이노카미 님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습니다" 하며 고맙다는 뜻을 전했다. 얼마 뒤 모리 미마사카노카미 타다마사(森美作守忠政)가 예를 두텁게 갖추어 부르자 모리 가문을 섬겼다고 한다.
원문
탄바와 분에몬은 은밀히 짜고서, 처음부터 농성하자고 말했다가 따르는 사람이 없으면 달리 할 방도가 없으므로 의견을 둘로 갈라 무사들의 마음을 시험한 것이라고 그 무렵 사람들이 말했다. 그 뒤 성을 지키기로 정했을 때 탄바는 고즈키에게 "나와 분에몬이 배를 가르면 그 밖에 따로 할 일은 없다" 하고 말했다던가.
원문
사에몬다유가 죄를 입었다는 말을 듣고 하직을 청한 무사가 서른 명가량 있었는데, 이들은 하자마쿠구리(狹間潛)라고 불렸다.[역주: 하자마(狹間)는 성벽에 낸 활·철포 구멍, 쿠구리(潛)는 빠져나간다는 뜻이다. 성을 지키지 않고 구멍으로 빠져나간 자들이라는 말이다.] 가족을 혼마루에 들인 이들은 모로고모리(諸籠)라 이름 붙이고, 가족을 성 밖으로 내보내고 제 몸만 성을 지키겠다고 한 이들은 카타고모리(片籠)라 했다.[역주: 고모리(籠)는 성에 들어앉아 지킨다는 뜻이다. 모로(諸)는 가족과 함께 모두, 카타(片)는 한쪽만이라는 뜻이다.] 뒷날 교토 미미즈카(耳塚)에 팻말을 세우고 세 부류로 나누어 이름을 써서 세상 사람들에게 보였으므로, 하자마쿠구리 무리는 굶어 죽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고즈키는 녹이 5천 석인 사무라이다이쇼(士大將, 한 부대를 이끄는 무사 대장)였다. 마사노리는 고즈키의 뜻에 감동하여 칭찬하며 서한을 주었다. "이번에 나는 오아즈케(御預, 다른 다이묘에게 몸을 맡기는 처분)가 되었소. 이 때문에 성을 베개 삼아 죽으려 한다는 그대의 속마음을 헤아리오. 그러나 내게 생각이 있으니 서둘러 성을 내주도록 하시오. 그대의 뜻이 얕지 않으니 분에 넘치게 고맙소." 하고 썼다고 한다. 오사키 겐바 나가유키(大崎玄蕃長行, 이본에는 나가히사)도 후쿠시마 가문의 사무라이다이쇼였다. 그때 오사키는 빈고의 토모(鞆) 성에 있었다. 아키타 시모사(秋田下總)도 함께 토모에 있었는데, 오사키를 히로시마로 보내고 자기 혼자 토모를 지키다 전사하여 이름을 떨치려고 생각했던 것인지, 오사키에게 "에도에서 성을 넘겨받을 사자가 곧 도착할 것이오. 서둘러 히로시마로 가서 농성하는 것이 좋겠소" 하고 말했다. 오사키는 듣고 "주군의 명 없이 성을 나가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소" 하고 말했다. 아키타는 성 안을 돌며 방어전 채비에 여념이 없었는데, 오사키는 기둥에 기대어 졸기만 했다. 사람들이 오사키를 헐뜯자 오사키는 비웃으며 "아키타는 저리도 대단하게 방어전 채비를 하는 모양이다. 나는 마음에 정해 둔 일이 있어 만사가 한가하다" 하고 말했다. 그 까닭을 물으니 오사키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성을 지켜 일본 전국을 적으로 돌린들 만에 하나라도 이길 수 있겠소? 아까운 사람들을 헛되이 죽게 하는 것도 어떨지. 나 혼자 오테 밖으로 나가 '조다이(城代, 성주를 대신해 성을 맡은 자) 오사키 겐바라는 자요. 내가 배를 가른 뒤에 성을 넘겨받으시오. 성 사람들은 남김없이 살려 주시오' 하고 말해, 여러분의 목숨과 바꿀 것이오. 무슨 채비가 필요하겠소." 그러던 참에 마사노리의 증서가 와서 탈 없이 성을 내주었으므로, 오사키는 무라카미 히코에몬, 마나베 고로에몬(眞鍋五郞右衞門)과 함께 키이(紀伊) 가문을 섬겼다. 오사키는 젊을 때 기무라 히타치노스케 모로하루(木村常陸介師春)[역주: 이름 師春의 독음 「모로하루」는 근거 없음.]를 섬기다가 뒤에 마사노리를 섬겼다. 오니 겐바(鬼玄蕃)라고 불린 자였다. 세키가하라 때 마사노리는 오와리(尾州)의 키요스 성에 오사키를 두었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가 오가키(大垣) 성에 들어가 사자를 보내 "후쿠시마 가문은 타이코(太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은혜를 두텁게 입은 분이니 이번에 둘도 없는 우리 편입니다. 키요스를 비워 주시오. 군사를 들이겠소" 하고 꾀었다. 츠다 빗추 시게모토(津田備中繁元)는 그럴듯하다고 여겨 따르려 했으나, 나가유키는 "이 나가유키의 몸은 어찌 되든, 주군의 명 없이 다른 지방의 군사를 성에 들이는 일은 생각도 할 수 없소. 억지로 군사를 보낸다면 한판 싸우겠소" 하고 눈을 부릅뜨고 사자를 꾸짖어 돌려보냈다. 이리하여 오사키는 문마다 굳게 지키고 총안(狹間)마다 사람을 배치한 뒤 이 사실을 오야마(小山)에 알렸고, 마사노리는 기뻐했다. 도쇼구가 마사노리에게 "키요스의 수비에는 누가 있느냐?" 하고 묻자, 마사노리가 "오사키 겐바를 남겨 두었습니다" 하고 아뢰던 참에 그 소식이 전해졌다. 도쇼구는 이를 듣고 "오사키는 세상에 이름난 자다. 그럴 만하다" 하고 말했고, 그 뒤에도 "키요스를 적에게 빼앗기지 않은 것은 오사키의 공이다" 하고 여러 번 말했다고 한다. 키슈(紀州)에서 안도 타테와키(安藤帶刀)가 오사키·무라카미·마나베를 만나 무공을 물었더니, 마나베는 열네 살 때부터 싸움에 나가 여러 차례 세운 공명을 이야기했고, 무라카미도 열네 살 때의 타케노코(竹子)[역주: 독음 「타케노코」는 근거 없음.] 전투부터 뉴가와(壬生川)[역주: 독음 「뉴가와」는 근거 없음.]에서 앞장서 쳐들어간 일 등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오사키는 "나는 기무라 밑에서 적은 녹을 받다가 사무라이다이쇼가 되었고, 또 후쿠시마 가문에서도 무사들을 지휘했으니 그리 둔하지만은 않습니다" 하고 말해, 타테와키가 크게 감탄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유배되었다는 소식이 케이슈(藝州, 아키)에 전해지자 중신들이 후쿠시마 탄바의 처소에 모여 성을 내줄지 말지를 논의했다. 무라카미 히코에몬 미치키요(村上彥右衞門通淸)는 "주군께서 유배되셨다 해도 살아 계시는 한 주군의 서명을 보고 영지를 넘겨야 하오. 서명이 오지 않으면 이 성을 베개 삼아 전사하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소. 다만 혼마루는 고즈키 분에몬이 맡고 있으니 고즈키와 의논하는 것이 마땅하오" 하고 말했다. 고즈키는 듣고 "주군의 서명을 보지 않고서 어찌 혼마루를 내주겠소" 하고 말했다. 빈고의 미요시(三次)에는 오제키 이와미(尾關石見), 빗추(備中) 경계의 토조(東條)에는 나가오 하야토 카즈카츠(長尾隼人一勝), 빈고의 미하라(三原)에는 오사키 겐바 나가유키가 있었는데, 이와미와 하야토를 거두어들여 히로시마·미하라 두 성을 지켰으며, 저마다 인질을 성에 들이고 덴슈(天守)에 불쏘시개를 쌓고 오테와 카라메테(搦手, 성의 뒤쪽)의 맡을 곳을 정했다. 안도 쓰시마노카미와 나가이 우콘다유(永井右近大夫)가 주고쿠(中國)·사이고쿠(西國)의 군병을 이끌고 빗추의 카사오카(笠岡)에 진을 쳤다. 탄바는 요시무라 마타에몬과 오하시 모에몬(大橋茂右衞門)을 사자로 하여 "주군의 서명을 보지 않고 성을 내주는 것은 난처합니다" 하고 다케나카 우네메(竹中采女)에게 전했다. 조시(上使, 막부가 보낸 사자)가 듣고 "서장을 가져오게 하겠다" 하고 답한 뒤 카사오카에 머물러 있던 참에 마사노리의 서장이 왔다. 탄바를 비롯한 이들이 이를 보고 성을 내주기로 정했다. 카사오카에서 오노미치(尾道)까지는 8리인데, 처음에는 육로로 정해졌던 것을 안도가 배로 가겠다고 했다.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가 듣고 "조시는 배로 빨리 가고 전체 군사는 육로로 늦을 것이오. 조시보다 늦는다면 우리는 사내 체면을 버리게 되오. 부디 육로로 가시오" 하고 권했지만 안도는 듣지 않았다. 배 일은 하치스카 아와노카미(蜂須賀阿波守)와 의논했다. 가토도 배를 마련해 두고 "하다못해 내 배에 타시오" 하고 권해, 조시는 이 배를 타고 오노미치에 이르렀고 군사는 육로로 돌아서 갔다. 오사키 겐바는 사자를 보내 "주군의 서장이 히로시마에 온 이상 미하라도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하라로 서장이 오지 않고서는 성을 내주기 어렵습니다" 하고 다케나카에게 전했다. 안도는 듣고 이렇게 잘라 말했다. "앞뒤 생각할 것 없이 곧장 성으로 말을 몰아 들어가자. 조시가 전사할 때는 바로 지금이다. 성문 앞에서 조시가 전사한다면 뒤따르는 자가 없을 리 없다. 지금껏 카사오카에 머물렀는데 또 여기서 날을 보낼 수는 없다." 가토가 "지당하오" 하며 아들 시키부쇼유(式部少輔)의 선봉을 막 내보내려던 참에, 미하라 성에도 이미 마사노리의 서장이 왔으므로 겐바는 탈 없이 성을 내주었다. 성에 들어가 보니 무사와 아시가루(足輕, 보병)의 이름을 써 붙여 총안마다 배치해 두었고, 성 구석구석까지 청소하고 객실(座敷)에는 솥에 물을 끓이고 차를 갈아 두게 했다. 이튿날 히로시마에 이르자 탄바가 "오늘 내드려야 하지만 성 안 청소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랫사람들의 짐도 다 치우지 못했습니다. 내일까지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하고 말했다. 나가이가 듣고 말했다. "내가 전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소. 어떤 성이 화평이 되어 내주게 되었을 때 '아랫사람들의 짐을 다 치우지 못했으니 하루 이틀 기다려 주시오' 하자, '짐은 표찰을 붙여 오테와 카라메테 저마다 맡은 쪽으로 내보내시오. 적당한 값에 사들이겠소' 하고 성을 넘겨받았소. 그런데 그 이튿날 공격군의 대장이 급사했소. 성 쪽의 말대로 했더라면 성을 도로 차지하는 변고가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니, 위태로운 일이었다고 전해 오오." 그러고는 "그저 한시라도 빨리 넘겨받겠다" 하며 오테로 나아가 성 그림지도(繪圖)를 펼치고, 성 안의 모노누시(物主, 각 구역을 맡은 책임자)들을 불러 모아 번소(番所)와 요세구치(寄口, 성으로 드는 어귀)를 다 넘겨받은 뒤, 성에 들어가 파발꾼을 보내 이 일을 아뢰었다고 한다. 옛사람의 말에 "성을 넘겨받고 내줄 때는 서로 증거를 받아 두고, 바로 지금 일이 벌어진 것처럼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성주가 진퇴에 궁한 처지이니 삼가야 한다"고 했다.
원문
번역: historyfol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