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야 타케노리(糟屋武則) — 시즈가타케 칠본창⑦
Q: 가스야 타케노리(糟屋武則)는 누구인가?
A: 시즈가타케 칠본창(賤ヶ岳七本槍,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공을 세운 히데요시의 젊은 측근 일곱 명) 가운데 1600년 세키가하라 전역에서 서군에 가담했다가 영지를 잃은 유일한 인물이다. 출신은 하리마(播磨)로 전해지지만 그가 어디서 누구의 아들로 태어났는지는 기록마다 다르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활약한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칸조(感状, 전공을 인정하는 문서)와 3,000석을 받았다. 이후 철포 부대를 이끄는 측근 무사, 오미(近江) 검지 부교(検地奉行, 토지 조사 책임자)와 다이칸(代官, 직할령 관리자)으로 일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조선에서 점령한 땅의 행정을 담당했다. 1595년에는 시즈가타케에서의 옛 공을 명분으로 영지가 늘어 다이묘가 되었다. 그러나 전술했듯 히데요시 사후 1600년 세키가하라 전역에서 서군으로 후시미성(伏見城) 공격에 가담했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에게 영지를 몰수당했다. 그 뒤 빗추(備中)에 다시 영지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지만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한눈에 보는 가스야 타케노리
| 항목 | 내용 |
|---|---|
| 이름 | 통칭 스케에몬(助右衛門), 뒤에 관직명 나이젠노카미(内膳正). 실명은 에도 시대 문헌에 타케노리(武則)·카즈마사(數政)·무네타카(宗孝) 등으로 나옴 |
| 성 표기 | 당대 문서 사본은 賀須屋·加須屋, 에도 시대 편찬물은 糟屋·糟谷 |
| 생몰 | 미상. 1562년생설·1607년 몰년설은 출전이 확인되지 않음 |
| 출신 | 하리마로 전해짐. 아버지와 형제는 기록마다 다름 |
| 시즈가타케 | 1583년 6월 5일 칸조, 3,000석(하리마 가코군 2,000석, 카와치 가와치군 1,000석) |
| 주요 직무 | 1584년 철포대(鉄炮衆) 150 지휘, 1587년 규슈의 성 수비, 1591년 오미 검지 부교, 1592년 조선 출병 |
| 영지 | 1595년 8월 17일 하리마 6,000석 가증(加増, 영지 추가). 문서상 합계 1만 석, 에도 시대 편찬물은 1만 2,000석 |
| 세키가하라 | 서군. 후시미성 공격에 가담, 영지 몰수 |
| 그 뒤 | 1602–1610년 빗추에 가스야 나이젠·하치베에의 영지가 있었다는 지리지 기록 |
| 후손 | 아이즈·돗토리·가가의 번사(藩士, 번의 가신), 막부 하타모토(旗本, 쇼군 직속 가신) 가스야 가문이 저마다 그의 계통을 자처 |
가스야 타케노리는 이 블로그에서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카타기리 카츠모토, 히라노 나가야스에 이어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다루는 시즈가타케 칠본창이다. 앞의 여섯 사람 가운데 다섯은 세키가하라 때 처음부터 도쿠가와 쪽에 섰거나 전투 중에 그쪽으로 돌아섰다. 카타기리는 세키가하라 뒤에도 오사카성에서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 곁을 지켰지만, 1614년 오사카 전투 직전에 성에서 쫓겨나 도쿠가와 쪽으로 넘어갔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처음에는 서군으로 출전했지만 전투 중에 돌아섰다. 세키가하라 때 끝까지 서군에 남아 있다가 영지를 잃은 사람은 일곱 명 중에 타케노리뿐이다. 여담이지만 시즈가타케 칠본창 중에 생몰년이 불확실한 사람도 타케노리 하나다.
그렇다고 해서 타케노리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히데요시가 그에게 보낸 문서가 여러 통 사본으로 전한다. 영지를 잃은 뒤 흩어진 친척과 후손이 아이즈(会津)·돗토리(鳥取) 등지에서 이 문서들을 나눠 간직하고 있었고,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 사이에 각 번이 지리지를 엮으며 그 내용을 옮겨 실었다. 이 글은 그 사본들과 오미 지역사에 실린 검지 문서, 『아사노가 문서(浅野家文書)』의 군 편성표, 그리고 막부가 1812년에 완성한 계보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줄여서 『간세이후(寛政譜)』)를 기준으로 그의 실제 행적을 추적해 본다. 이 시리즈에서 대조해 온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의 『한칸후(藩翰譜)』에는 가스야 가문 항목이 없다. 1600년 개역(改易, 영지 몰수)으로 다이묘 가문이 끊겨 수록 대상에 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 타케노리는 어디서 왔나
1-1. 다섯 갈래의 출신 이야기
타케노리의 출신을 알려 주는 동시대 문서는 없다. 히데요시가 그에게 보낸 문서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이 1583년 시즈가타케의 칸조다. 1583년 이전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에도 시대 이후의 계보·사서·지리지에서 나오는데 기록마다 일치하지도 않는다.
| 출전 | 성립 | 출신 이야기 |
|---|---|---|
| 『소후 모노가타리(祖父物語)』 | 에도 전기 | 아카마츠(赤松) 가문의 가신이었는데, 아카마츠가 죽은 뒤 히데요시가 쓸 만한 자라 하여 500석에 거두었다 |
| 『인바시(因幡誌)』 | 1795 | 돗토리의 가스야 집안은 본래 성이 카지와라(梶原)이고, 1570년 카지와라 이에몬이 “가스야 가문의 일”을 맡는다는 문서를 받았다 |
| 『간세이후』 권747 | 1812 | 사가미(相模) 가스야 가문 타다야스(忠安)의 넷째 아들 |
| 『야시(野史)』 권198 | 1851년경 | 하리마 사람. 시무라(志村) 가문의 고아로 가스야 토모마사(糟屋友政)가 아우로 삼아 길렀다. 벳쇼 나가하루(別所長治)를 따라 미키성(三木城)에 있다가 1578년 구로다 요시타카(黒田孝高)를 통해 히데요시에게 속했다 |
| 『신쇼 다이코키(眞書太閤記)』 | 19세기 중반 | 어머니가 코데라 마사모토(小寺政職)의 누이. 이부형 토모마사는 미키성에 남고 동생만 성을 나왔다 |
재미있는 건 가장 늦게 나온 책에 실린 이야기가 가장 자세하다는 점이다. 형과 동생이 미키성 앞에서 헤어졌다는 장면은 이번에 대조한 자료 가운데 19세기 역사소설 『신쇼 다이코키』에서 가장 먼저 확인된다. 거기서 형은 “이 아이는 가스야를 칭하지만 실은 시무라 가문 사람이니 벳쇼를 위해 죽을 의리가 없다”며 동생을 성 밖으로 내보낸다. 『야시』에는 출전이 「다이코키(太閤記)」로 달려 있지만 오제 호안(小瀬甫庵)의 『다이코키(太閤記)』 22권을 검색해서는 이 이야기를 찾지 못했다.1
20세기에 나온 지역사 책들은 여기에 형의 이름과 직함, 전사 연도와 장소를 추가했다. 형의 이름은 토모마사(朝正), 가코가와성(加古川城) 성주였으며 1579년 미키 전투 중 히라이야마(平井山)에서 전사했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은 1914년 『가코군지(加古郡誌)』, 1953년 『가코가와시지(加古川市誌)』를 거쳐 오늘의 해설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에도 시대 이전 기록은 확인되지 않으며, “어머니가 코데라 마사모토의 누이”라는 이야기도 이번 리서치에서 확인한 범위에서는 『신쇼 다이코키』보다 이른 기록이 없다.2
『간세이후』의 사가미 계보는 이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이 계보는 에도의 하타모토 가스야 가문이 막부에 낸 가보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이 가문은 타케노리의 직계가 아니라 동생 쪽의 자손이다. 『간세이후』의 타케노리 항목에는 하리마도 벳쇼도 나오지 않는다.3
1-2. 하리마 가코군
출신 이야기가 엇갈려도 한 가지는 문서로 확인된다. 1583년 8월 히데요시가 그에게 준 3,000석 가운데 2,000석이 하리마 가코군에 있었다. 가코가와 강 하구 일대다. 같은 날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가 받은 3,000석이 하리마 아카시·오미·카와치 등 네 곳에 흩어져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타케노리의 몫은 한 지역에 몰려 있다. 히데요시는 그를 하리마 가코가와 일대와 연고가 있는 사람으로 본 듯하다.4
1583년 정월 12일에 히데요시가 “가스야 요주로(糟屋與十郎)“에게 가코군 안의 200석을 준 문서도 돗토리의 가스야 집안에 전해졌다. 요주로가 누구인지, 타케노리와 어떤 관계인지는 문서에 나와 있지 않다. 다만 시즈가타케 이전부터 가코군에 가스야라는 성을 쓰는 사람들이 있었고 히데요시가 이들에게 영지를 주고 있었다는 사실은 확인된다.5
2. 시즈가타케의 3,000석
2-1. 똑같은 문장의 칸조
1583년 4월, 히데요시는 오미 북부 야나가세(柳ヶ瀬)에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의 군과 맞붙었다. 그해 6월 5일 그는 타케노리에게 칸조를 보냈다.
今度三七殿依謀叛、濃州大柿令居陣候之処、柴田修理亮至柳瀬表罷出候条、為可及一戦、一騎懸馳向之処ニ、心懸深付而、早懸著、秀吉於眼前合一番鑓、其働無比類候、為其褒美三千石宛行訖、弥向後奉公之依忠勤、可遣領知者也
이번에 산시치(오다 노부타카)가 모반하여 미노(美濃) 오가키(大垣)에 진을 치고 있던 차에 시바타 슈리노스케가 야나가세로 나왔으므로, 한판 싸우려고 단기로 달려갔다. 그대는 마음가짐이 깊어 재빨리 달려와 히데요시의 눈앞에서 이치반야리(一番鑓, 가장 먼저 적과 창을 맞댄 공)를 세웠다. 그 활약이 비할 데 없으므로 포상으로 3,000석을 준다. 앞으로도 충실히 봉공하면 영지를 더 줄 것이다.
수신인은 “가스야 스케에몬노조(賀須屋助右衛門尉)“다. 이 문장은 카타기리·히라노·가토 요시아키 앞 칸조와 수신인만 다르고 나머지는 같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문서만으로는 타케노리가 전장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6
이 칸조는 두 갈래의 사본이 남아 있다. 하나는 에도 막부 기록어용소(記録御用所)가 하타모토 가스야 가문에서 제출받아 베낀 것이다. 여기에는 “가스야 스케에몬 카즈마사가 받았고 같은 스케에몬 요시노부가 제출했다”는 주기가 붙어 있다. 다른 하나는 아이즈번 무사 가스야 사콘(加須屋左近) 집안이 소장하던 17통 가운데 하나로, 1809년 『신펜 아이즈 후도키(新編会津風土記)』에 그 내용이 실렸다. 아이즈본에는 수신인이 “스케자에몬노조(助左衛門尉)“로 되어 있다. 같은 집안 문서 가운데 다른 통들은 모두 “스케에몬”이니 전사 과정의 착오로 보인다. 원본이 지금 어디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6
두 달 뒤인 8월 1일, 히데요시는 3,000석의 소재를 정한 지행장을 보냈다. “하리마 가코군 안 2,000석, 카와치 가와치군 안 1,000석, 합계 3,000석을 목록을 따로 붙여 주니 영대로 다스려라.”4
2-2. 전장에서 무엇을 했나
전투 반년 뒤 히데요시 곁의 문인 오무라 유코(大村由己)가 쓴 『시바타 다이지키(柴田退治記)』에는 야나가세에서 가장 먼저 창을 맞댄 아홉 명의 이름과 함께 이들이 “모두 측근 무리(悉近習之輩)“라는 말이 나온다. 타케노리는 그 일곱 번째에 있다. 그에 관한 동시대 기록은 여기까지다.7
그가 누구와 싸웠는지는 에도 시대 기록에만 나온다.
| 출전 | 성립 | 타케노리의 행동 |
|---|---|---|
| 『시바타 다이지키』 | 1583 | 이름만 |
| 오제 호안 『다이코키』 권6 | 1625년경 | ”뒤질세라 달려든” 일곱 명 가운데 이름만 |
| 다케나카 시게카도(竹中重門) 『호칸(豊鑑)』 | 1631 | ”앞서 나아가 적을 무너뜨리고 이름을 올린” 일곱 명 가운데 이름만 |
| 『시즈가타케 갓센키(賤嶽合戦記)』 | 에도 시대, 연대 미상 | 사쿠라이 사키치(桜井左吉)가 야도야 시치자에몬과 싸우다 다치자 타케노리가 와서 야도야를 베었다 |
| 조신지(浄信寺) 소장 각서 | 에도 시대, 연대 미상 | 하이고 고자에몬이 지키던 시미즈다니 입구를 타케노리가 앞장서 찔러 무너뜨렸다 |
시바타 쪽 무사 야도야 시치자에몬(宿屋七左衛門)을 베었다는 이야기와 시바타 쪽 장수 하이고 고자에몬(拝郷五左衛門)의 진을 무너뜨렸다는 이야기는 둘 다 언제 쓰였는지 모르는 기록에 나온다. 조신지 각서는 본문에 “칠본창”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어 이 호칭이 굳은 뒤에 쓰인 후대의 문서로 봐야 한다. 이 글 맨 위의 그림에서 사쿠라이 사키치가 타케노리와 같은 화면에 그려진 것은 이 야도야 이야기가 1800년 무렵 이미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8
시즈가타케 이전 그의 녹봉도 기록마다 다르다. 『세이쇼키(清正記)』에는 300석, 『소후 모노가타리』에는 500석으로 나와 있고 『야시』에는 시즈가타케 포상이 5,000석으로 되어 있다. 문서로 확인되는 것은 포상 3,000석뿐이다.9
3. 철포대와 성 수비 (1584–1588)
3-1. 코마키의 철포대 150
시즈가타케 이듬해인 1584년, 히데요시는 오와리 코마키·나가쿠테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오다 노부카츠(織田信雄) 연합군과 대치했다. 이때 히데요시 본진의 편성표 두 장이 『아사노가 문서』에 남아 있다. 하나는 우마마와리(馬廻, 주군 곁을 지키는 직속 무사) 명단에 “가스야 스케에몬노조”를 올렸고 다른 하나는 철포대 칸에 “가스야 스케에몬노조 150”을 적었다. 바로 옆 칸이 가토 토라노스케(기요마사)와 가토 마고로쿠(요시아키)로, 이들도 각각 150이다. 시즈가타케의 측근 무사들이 1년 만에 저마다 철포 부대를 맡는 지휘관이 되었다.10
같은 해 7월 5일로 보이는 히데요시의 편지는 타케노리와 가토 기요마사 두 사람 앞으로 왔다. “다키가와 부자가 지난 3일 쿠스(楠)까지 군세를 이끌고 물러났다는 보고가 왔다. 움직일 날짜는 다시 알리겠다. 며칠 안에 오가키까지 갈 테니 그 성의 수비(城番)를 단단히 하라.” 연도는 문서에 없지만 다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가 가니에성을 내주고 이세로 물러난 1584년 7월과 내용이 들어맞는다. 두 사람은 이 무렵 미노 방면의 어느 성을 함께 지키고 있었다.11
3-2. 규슈의 배다리
1587년 히데요시의 규슈 원정 때 타케노리의 이름은 “가스야 나이젠노카미(加須屋内膳正)“로 바뀌어 있다. 1584년 7월로 보이는 문서까지는 “스케에몬”, 1587년 5월 문서부터는 “나이젠노카미”로 불리니 그 사이에 이 관직명을 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서임 시기는 알 수 없다. 시즈가타케 다음 날 일곱 명이 한꺼번에 관직을 받았다는 『세이쇼키』 같은 책에 나오는 이야기는 1584년 문서의 호칭과 어긋난다.12
5월 15일,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가 머리를 깎고 항복한 직후 히데요시는 타케노리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이렇게 일을 마쳤으니 곧 개선할 것이다. 그래도 그 성의 경비는 더욱 신경 써 단단히 하라. 마을 백성들이 성안을 드나드는 것은 일절 금한다. 인근에 법도를 엄히 세우고 어지러운 짓이 있으면 처벌하라. 앞서 명한 길과 다리에 관한 일은 더욱 공들여 하라.” 타케노리는 정복지의 성에 남아 치안과 도로를 맡은 재번(在番, 성에 머물러 지킴) 책임자였다. 이 문서에는 하카타에 성을 쌓고 조선(문서에는 「고려국(高麗國)」)에 군세를 보내 정벌할 구상까지 나와 있다. 조선 출병을 계획한 이른 시점의 증거로 자주 거론되는 문서다.13
6월 2일 묘시(새벽 6시 무렵)에는 타케노리와 카타기리 카츠모토 두 사람 앞으로 급한 편지가 왔다. “어제 초하루 구마모토에 도착했다. 4일이나 5일에 그 성으로 옮겨 하카타로 갈 것이다. 치쿠고강은 물이 깊을 테니 어떻게든 배다리를 놓아라. 배다리가 안 되면 여울을 밟아 인부들까지 쉽게 건너게 할 방도를 세워 두라.” 히데요시 본대가 강을 건널 길을 만드는 일이 두 칠본창에게 맡겨졌다.13
연도가 적히지 않은 3월 4일 자 슈인조(朱印状, 붉은 도장을 찍은 명령서)도 있다. “가코가와 도선 건. 인근의 배를 있는 대로 불러 모아 군세가 막힘없이 건너게 하라.” 규슈로 가는 대군이 하리마 가코가와를 건너던 1587년 3월의 문서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자기 영지가 있는 강의 나루를 맡은 셈이다. 이 문서는 돗토리번의 가스야 종가가 대대로 간직했다.14
이듬해 1588년 4월, 고요제이(後陽成) 천황이 히데요시의 주라쿠다이(聚楽第)에 행차했을 때 오무라 유코가 남긴 행렬 기록에도 “가스야 나이젠노카미”가 간파쿠(関白, 천황을 대신해 정무를 보는 최고 관직) 히데요시보다 앞서 말을 타고 나아가는 무사들 사이에 있다.15
4. 도요토미 정권의 실무
4-1. 오미 검지 부교 열 명
1591년 윤정월, 히데요시는 오미 일대의 검지(토지 조사)를 명했다. 오미 사카타군의 우에사카(上坂) 가문에 전하는 각서에는 이때의 검지 부교 열 명 가운데 마시타 나가모리(増田長盛), 나츠카 마사이에(長束正家) 등과 함께 “가스야 나이젠”이 들어 있다.16
이 열 명이 실제로 일한 흔적이 남아 있다. 같은 해 4월 13일, 오미 아사이군의 아오나·요카이치 마을과 나카노 마을이 용수를 두고 다툰 사건에 이들이 판결을 내렸다.
去年從八日市村相立候井溝、新儀之由候間、彼井溝之儀者、重而も相立候ハヽ、可爲曲事候、大川筋先規之所ヘ、井口を明、用水可相通候也
작년 요카이치 마을이 새로 판 수로는 전에 없던 시설이니, 다시 만들면 처벌한다. 큰 내의 예전 자리에 취수구를 내어 물을 대라.
문서 끝에 열 명이 차례로 이름을 줄여 쓰고 화압(花押, 서명 대신 쓰는 도안)을 했다. 다섯 번째가 “가 나이젠(賀内膳, 성 賀須屋의 첫 글자와 관직명 나이젠노카미를 줄인 것)“이다. 같은 날 나츠카·마시타의 가신이 이 판결을 마을에 전하며 “검지 담당자들께서 양쪽에 판결을 내리셨다”고 했다. 타케노리는 검지만 한 것이 아니라 검지 중에 생긴 마을 사이의 분쟁까지 재판한 부교단의 한 사람이었다.16
4-2. 사카타군 직할령의 전 다이칸
1592년 2월 조선 출병을 앞두고 히데요시는 오미의 간논지(観音寺)에 사카타군 등지의 쌀 수만 석을 오츠로 옮기게 했다. 이 일을 정리한 『시가현사(滋賀縣史)』에 따르면 각 군의 담당 다이칸(代官, 직할령 관리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사카타군은 “전 다이칸 가스야 나이젠, 지금은 에키안(益庵)“이었다. 타케노리는 그 전에 오미 사카타군의 도요토미 직할령을 관리하다가 이 무렵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다만 간논지 문서의 원문은 직접 확인하지 못했다.17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다다 노부히사(多田暢久)의 2017년 글을 근거로 하리마 미키군 직할령 1만 석의 다이칸, 야마토 우다의 검지 부교·다이칸 경력도 소개되어 있다. 우다의 고신지(悟真寺)를 1595년 타케노리가 다시 세웠다는 전승도 있다. 하지만 이 경력과 전승의 근거가 되는 원서와 1차 문서는 확인하지 못했다.18
4-3. 대불전 본존
히데요시가 교토 히가시야마에 세운 호코지(方広寺) 대불전 공사에서도 타케노리는 일을 맡았다. 9월 23일 자 슈인조는 이렇다. “대불전 본존 일을 게을리하지 않고 시키고 있다는 것을 들으셨다. 더욱 정성을 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4–5일 안에 상경하실 것이니 그리 알라.” 오제 호안의 『다이코키』에도 대불 불상 공사를 도운 사람으로 카타기리 카츠모토, 후루타 시게카츠(古田重勝) 등과 함께 타케노리의 이름이 있다. 히데요시의 문서와 후대의 기록이 서로 맞는다.19
5. 조선과 1만 석 (1592–1598)
5-1. 점령지의 “정무 일체”
1592년 3월 조선 출병 편성표에는 “가스야 나이젠노카미 200명”이 있다. 단순히 편성표에만 적혀 있던 것이 아니고 그는 실제로 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갔다. 그해 9월 22일 히데요시는 조선에 있던 타케노리, 오타 카즈요시(太田一吉), 신조 나오사다(新庄直定) 세 사람에게 슈인조를 보냈다.
然者手前之當物成、半分人數割仕、侍以下至る迄不殘可支配候、半分儀者爲兵粮慥藏ニ可納置之候、彌其元政道萬端無由斷可申付候
그러니 그곳에서 거둔 수확은 절반을 인원수대로 나눠 무사부터 아랫사람까지 모두에게 지급하고, 절반은 군량으로 창고에 확실히 넣어 두라. 그곳의 정무 일체를 소홀히 하지 말라.
같은 편지에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전라도 쪽으로 옮겨 가는 바람에 그곳이 비었으니 기후 재상(오다 히데노부)의 병력을 보내겠다는 내용도 있다. 1924년 일본 참모본부가 엮은 『니혼센시 초센에키(日本戦史 朝鮮役)』에는 세 사람이 이해 7월 중순 고바야카와 부대의 담당 지역인 금산(金山, 오늘날 김천 일대)에 합류했다고 나와 있다. 타케노리는 점령지에서 곡식을 거두고 나누는 행정 실무를 맡았다.20
이듬해 1593년 3월 10일 진주성 공격을 앞둔 편성표에는 “가스야 나이젠노카미 120명”이 올라 있다. 4월 29일에는 다시 카타기리 카츠모토와 함께 쌀 수송과 강을 오갈 작은 배의 준비를 지시받았다. 규슈에서 협력하여 배다리를 놓던 두 사람이 조선에서도 보급을 함께 맡았다.21
5-2. 1595년 8월 17일, 1만 석인가 1만 2,000석인가
1595년 8월 17일, 히데요시는 시즈가타케의 옛 공을 이유로 칠본창 몇 사람에게 한꺼번에 영지를 더 주었다. 히라노 나가야스와 카타기리 카츠모토도 같은 날 가증을 받았다. 타케노리 앞으로 보낸 슈인조는 아이즈의 가스야 사콘 집안에 전해져 내려왔다.
爲加增於播摩國六千石目錄別紙在之、本知四千石合一萬石令扶助畢、全可領知、今般御加增之儀者、先年於江北志津嶽及一戰刻、碎手粉骨候儀被思食、爲其御感如此也
가증으로 하리마에서 6,000석(목록은 별지)을 주어, 본래 영지 4,000석과 합쳐 1만 석을 준다. 온전히 다스려라. 이번 가증은 지난날 고호쿠 시즈가타케에서 싸울 때 몸을 아끼지 않은 일을 생각하시어 그 치하로 하신 것이다.
문서에 따르면 그는 이날 1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카타기리도 같은 날 4,200석에 5,800석을 더해 딱 1만 석이 되었으니, 두 사람 모두 1만 석에 맞춘 가증이다. 1583년에 3,000석이던 영지가 1595년 직전에는 4,000석이 된 것인데, 늘어난 1,000석에 대한 문서는 찾지 못했다.22
그런데 에도 시대 편찬물에는 그가 1만 2,000석으로 나온다. 에도 초기의 『도다이키(当代記)』에 실린 다이묘 석고 목록, 1814년에 개역·단절된 다이묘 가문을 모은 『하이제츠로쿠(廃絶録)』, 『간세이후』가 그렇다. 오늘의 일본어 위키백과에도 『도요토미 정권의 정체(豊臣政権の正体)』를 인용해 “6,000석 가증으로 1만 2,000석”이라고 나와 있다. 1595년 이후에 2,000석이 더해졌을 수도 있지만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문서는 찾지 못했다. 오제 호안은 『다이코키』에 타케노리의 영지 규모를 “3만 석”으로 적었다. “히라노(나가야스)만 영지가 적었다”는 이야기도 『다이코키』의 같은 부분에서 처음 나온다. 1595년 가증장에 적힌 1만 석대로라면 히라노와의 차이가 이만큼 두드러지지 않았을 것이다.23
5-3. 히데요시 곁의 측근
1595년 전후에도 타케노리의 이름은 히데요시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 속에서 계속 나온다. 1595년 7월 간파쿠 도요토미 히데츠구(豊臣秀次)가 실각했을 때 그를 일단 “가스야 나이젠의 저택”으로 가게 했다는 이야기가 『가와스미 다이코키(川角太閤記)』에 있다(오제 호안의 『다이코키』에는 다른 사람의 저택으로 나온다). 1598년 정월 4일 울산성에 있던 아사노 요시나가(浅野幸長)가 보낸 편지의 수신인 37명 가운데에도 “가스야 나이젠”이 있다. 수신인은 히데요시 곁의 측근들로 보인다. 같은 명단에 히라노 나가야스의 이름도 있다.24
1598년 8월 히데요시가 죽은 뒤 나눠 준 유품 목록에서 그가 금 10매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오제 호안의 『다이코키』에 나온다.24
6. 서군의 칠본창 (1598–1600)
히데요시가 죽은 직후인 1598년 11월에 타케노리는 이에야스에게 친교의 서약서를 내려 한 적이 있다. 이에야스의 측근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가 그에게 보낸 기청문(起請文, 신불에 맹세하는 서약서)에 그 이야기가 나온다. 이를 보면 타케노리가 처음부터 이에야스 측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2년 뒤 그는 서군에 섰다.25
6-1. 후시미성 공격과 세키가하라 당일
1600년 7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등이 이에야스 토벌을 내걸고 군사를 일으키자 서군은 먼저 도쿠가와 가신 도리이 모토타다(鳥居元忠)가 지키던 후시미성을 쳤다. 『간세이후』의 가스야 항목은 “1600년 이시다 미츠나리에게 가담해 후시미성을 공격했다”는 문장으로 끝난다. 『간세이후』에는 그 뒤 영지를 잃은 일에 대한 기록도, 사망에 대한 기록도 없다.26
세키가하라 전투 당일에 그가 어디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713년에 나온 『세키가하라 군키 다이세이(関原軍記大成)』에는 후시미 공격군의 요리아이슈(寄合衆, 소규모 장수들을 묶은 부대), 오가키에 모인 서군 장수들, 그리고 전투 당일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진 오른쪽에 그의 이름이 있다. 라이 산요(頼山陽)의 『니혼가이시(日本外史)』(1827)에도 우키타 진 오른쪽에 타케노리를 둔 비슷한 배치가 나온다. 그러나 미츠나리가 1600년 8월 5일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에게 보낸 편지에 붙인 서군 배치표에는 그의 이름이 없다. 『가코가와시지』에는 그가 전투에 나가지 않고 오사카에 머물렀다고 나와 있다고 한다. 동원 병력이 360명이었다는 숫자도 출전을 찾지 못했다.27
6-2. 왜 서군에 섰나
| 이름 | 1600년의 행보 | 결과 |
|---|---|---|
| 가토 기요마사 | 동군(규슈에서 서군 측 공격) | 히고 대부분, 약 52만 석 |
| 후쿠시마 마사노리 | 동군 선봉 | 아키·빈고 49만 8,000석 |
| 가토 요시아키 | 동군 | 이요 20만 석 |
| 와키자카 야스하루 | 서군으로 출전했다가 전투 중 동군으로 | 영지 유지 |
| 히라노 나가야스 | 동군 | 5,000석 유지 |
| 카타기리 카츠모토 | 불분명(막부 계보는 이에야스에게 인질을 보냈다고 함) | 1601년 이에야스에게서 2만 8,000석으로 가증 |
| 가스야 타케노리 | 서군, 후시미성 공격 | 영지 몰수 |
왜 그가 서군에 섰는지 설명하는 사료는 없다. 그의 영지가 있던 하리마 일대는 서군이 장악한 오사카와 가까웠다. 또한 그는 히데요시 생전 내내 후시미·오사카의 측근 집단에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후대의 우리가 보는 정황일 뿐 그가 서군에 가담한 이유에 대해 직접 한 말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28
1673년 유학자이자 군사학자인 야마가 소코(山鹿素行)는 『부케지키(武家事紀)』에서 칠본창을 두 무리로 나눴다. “저마다 성과 영지를 받은” 사람들과, “가라앉아 겨우 5,000석, 3,000석을 다스린” 히라노·카타기리·가스야다. 타케노리에 대해서는 “그대로 죽었고 뒤를 이은 자는 낭인이 되었다”는 말뿐이다. 이 대목에서 드러나는 것은 적은 녹봉과 후계자의 몰락이고, 세키가하라 가담이나 개역의 경위는 나오지 않는다.29
7. 개역 뒤, 흩어진 문서
7-1. 개역과 빗추의 영지
세키가하라 뒤 타케노리의 1만 2,000석(편찬물 기준)은 몰수되었다. 『하이제츠로쿠』의 “1600년 몰수” 부분에는 “1만 2,000석, 하리마 가코가와, 가스야 나이젠노카미 무네타카(宗孝)“라는 항목이 있다. 그 아래에는 “1602년 다시 등용되었으나 뒤에 가문이 끊겼다”는 주기가 붙어 있다. 몰수 날짜나 영지를 넘겨받은 사람은 적혀 있지 않다. 그런데 이 책 자체가 워낙에 오류가 많다는 평을 받는지라 이것만으로는 믿기 어렵다.30
하지만 이 “1602년”은 출처가 다른 빗추 쪽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빗추의 지리지 두 종에는 가스야 가문의 영지가 1602년부터 시작된다고 나온다. 1737년에 빗추 각 군의 성과 마을 내력을 정리한 『빗추후시(備中府志)』에는 빗추 카와카미군의 한 마을이 이렇게 나온다.
慶長七年より賀須屋内膳正、同八兵衛尉源安長、同十五年安長逝去。内膳正は太閤御代七本鑓の其一人也。慶長十六年より御料
1602년부터 가스야 나이젠노카미와 같은 집안 하치베에노조 미나모토노 야스나가(의 영지). 1610년 야스나가가 세상을 떠났다. 나이젠노카미는 타이코(太閤, 히데요시) 시대 칠본창의 한 사람이다. 1611년부터 막부 직할령.
야스나가, 곧 하치베에는 아이즈 쪽 가전에 타케노리의 아들로 나오는 인물이다. 다만 이 관계는 다른 기록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19세기 중엽에 빗추의 마을 내력을 군별로 다시 모은 『빗추시(備中誌)』에도 오다군의 마을들에 대해 “1602년 가스야 나이젠의 영지로, 게이시(家司, 영지 사무를 맡은 가신)는 가스야 분에몬, 다이칸은 오타 겐베에. 1610년 가스야 하치베에가 죽어 직할령이 되었다”고 나와 있다. 두 지리지는 1602년에 영지가 시작되고 1610년 하치베에가 죽었다는 데서 일치한다. 『빗추시』에는 게이시와 다이칸의 이름까지 나온다.31 다만 빗추의 두 지리지는 사건 100년 이상 뒤의 기록이고, 뒤의 『빗추시』가 앞의 『빗추후시』를 참고했을 수도 있다. 1602년에 다시 등용된 “나이젠”이 타케노리 본인인지도 확정할 수 없다. 나이젠은 개인 이름이 아니라 관직명이라, 아들 등 집안의 다른 사람도 같은 이름으로 불렸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하이제츠로쿠』에 나오는 “나이젠노카미 무네타카”는 타케노리의 다른 실명이라는 설과 그의 아들이라는 설이 함께 있다.
아이즈의 가스야 사콘 집안에는 이런 편지도 전한다.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 이에야스의 아들이자 2대 쇼군)가 “가스야 하치베에”가 보낸 연말 선물에 답한 짧은 편지다. 연도는 없지만 하치베에가 히데타다와 선물을 주고받는 사이였음을 보여 준다. 다만 개역 전후 어느 때의 교류인지는 알 수 없다.32
7-2. 언제 어디서 죽었나
그가 언제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인터넷의 인물 소개에 흔히 보이는 1607년설은 출전이 없고, 일본어 위키백과도 이 연도를 출전 요구 표시 끝에 「불명(不明)」으로 고쳤다. 에도 시대와 근대 기록에 남은 사망 이야기는 넷이다.
| 이야기 | 출전 | 성립 |
|---|---|---|
| 분로쿠 연간(1592–1596) 후시미에서 독살당했다 | 『하리마카가미(播磨鑑)』에 인용된 출처 불명의 다른 사본 | 1762 |
| 오사카의 히데요리 편으로, 또는 “동국에서” 전사했다 | 『조호 반요 리오세츠(増補播陽里翁説)』 | 18세기 |
| 1601년 가을에 죽었다 | 가스야 마사카쓰(糟谷正勝) 『하리마 가스야 가문의 계보(播磨糟谷家の系譜)』 | 1993 |
| 1623년 8월 14일에 죽었다 | 『가코가와시지』에 인용된 쇼묘지의 절 기록 | 근대 |
독살설은 일단 분로쿠 연간이라는 시기부터가 맞지 않는다. 타케노리의 이름은 분로쿠 연간이 끝난 뒤인 1598년의 아사노 요시나가 편지와 이이 나오마사 기청문에도 나오므로, 독살당했다고 나온 시기 이후에도 살아 있었다. 하리마의 옛이야기를 마을 노인들에게서 듣고 모은 책인 『조호 반요 리오세츠』의 이야기는 한 항목 안에서 오사카 편 전사와 동국 전사를 함께 적어 앞뒤가 맞지 않는다. 1601년설은 1993년에 나온 가문 계보 연구에 나오지만 일본어 위키백과에 인용된 것만 확인했을 뿐 원서와 그 근거가 된 사료는 확인하지 못했다. 1623년은 쇼묘지 기록에서 무네타카의 몰년으로 나오는 날짜를 타케노리에게 잘못 적은 것으로 보인다. 1673년 『부케지키』의 “그대로 죽었다”는 말은 따질 거리가 없지만, 그만큼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는다. 결국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어느 기록도 믿을 만한 답을 주지 못한다.33
가코가와의 쇼묘지에는 에도 시대에 가스야 나이젠의 위패가 있었다. 에도 시대 책마다 법명이 “징니치 소코 다이젠조몬(澄日宗光大禅定門)”, “쇼니치 소코 다이젠조몬(證日宗光大禅定門)” 등으로 조금씩 다르게 나온다. 『조호 반요 리오세츠』에는 위패에 속명(俗名, 법명이 아닌 살아 있을 때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다고 나와 있다. 어느 책에도 위패의 주인은 “나이젠”으로만 나와서, 타케노리인지 무네타카인지 알 수 없다. 같은 책에는 이 “나이젠”에 대한 원망 섞인 기억도 남아 있다. 나이젠이 다스리던 시절 쇼묘지의 사찰 영지(寺領)가 줄었다는 것, 그리고 그가 가코가와의 토마리 명신(泊明神)이라는 신사의 영지를 인정한 슈인조와 옛 기록을 관리자처럼 맡아 두었는데, 그가 죽으면서 문서를 잃어버려 신사 영지가 6석 남짓으로 줄었다는 것이다.34
7-3. 흩어진 집안과 문서
다이묘 가스야 가문은 끊겼지만 그의 일족은 여러 곳으로 흩어져 무사로 살아남았다. 에도 시대에 그의 계통을 자처한 집안은 적어도 네 곳이다.
| 가문 | 타케노리와의 관계 | 전한 문서와 유물 |
|---|---|---|
| 아이즈번 가스야 사콘 가문 | 동생 스케베에의 아들 타케나리의 계통. 타케나리는 궁술로 이름난 무사 | 시즈가타케 칸조, 1583년 3,000석 지행장, 1595년 가증장, 이이 나오마사 기청문, 히데타다의 편지 등 17통. 시즈가타케에서 썼다는 창 「쿠니스케(國助)」 |
| 돗토리번 가스야 가문(糟谷) | 아들 분에몬의 계통. 스스로 종가라 함 | 히데요시가 시즈가타케 현장에서 포상으로 주었다는 두건, 가코가와 도선 슈인조, 나이젠과 분에몬의 편지 |
| 가가번 가스야 주자에몬 가문 | 히데요시의 가신 요시다 스케자에몬의 아들이 “칠본창의 한 사람이라는 가스야 나이젠”의 양자가 됨. 1607년 마에다 토시나가에게 출사 | 확인된 문서·유물 없음(막부 말기까지 대를 이음) |
| 막부 하타모토 가스야 가문 | 동생의 자손 | 시즈가타케 칸조(사본을 막부에 제출) |
아이즈 쪽 가전에 따르면 타케노리가 죽은 뒤 아들 하치베에가 어려서 삼촌인 스케베에가 집안을 돌보았다. 하치베에마저 후사 없이 죽자 스케베에는 같은 가스야 성을 쓰는 카몬(掃部, 관직명에서 딴 통칭)이라는 사람과 상속을 다투다 슨푸의 효조쇼(評定所, 막부의 재판 기관)에 소송을 냈다. 그러나 담당이던 오쿠보 타다치카(大久保忠隣)가 실각해 판결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오쿠보의 실각은 1614년이다. 가전대로라면 가문의 문서가 직계가 아닌 조카 집안에 남은 것은 이 때문이다.35
그래서 타케노리의 생애를 알려 주는 문서는 대부분 이 흩어진 집안들 덕분에 남았다. 시즈가타케의 칸조와 3,000석의 소재, 규슈의 성에서 받은 지시, 1만 석의 가증장, 이이 나오마사의 기청문은 아이즈의 조카 집안이, 가코가와의 나루를 맡긴 슈인조는 돗토리의 종가가, 대불전 공사 문서는 돗토리의 다른 가스야 집안이 에도 후기에 저마다 간직하고 있었다. 18세기 말부터 각 번이 지리지를 엮으면서 그 내용을 옮겨 적었다. 그 활자본이 지금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에 남아 있다.36
출처
동시대 문서와 그 사본·번각 (쪽 이미지 또는 활자 번각본으로 확인한 것)
- 히데요시 칸조(1583년 6월 5일):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4책 597–598쪽 〔기록어용소본(記録御用所本)〕(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 도쿄대학 사료편찬소 쪽 이미지)
- 가스야 사콘 소장 17통(加須屋左近所蔵十七通, 칸조·지행장·가증장·이이 나오마사 기청문·히데타다 서장 등): 『신펜 아이즈 후도키(新編会津風土記)』(1809) 권3 수록, 1901년 활판본, 『다이니혼 치시 다이케이(大日本地誌大系)』 30(1933)
- 돗토리 가스야 집안 소장 히데요시 문서(가코가와 도선 슈인조, 대불전 슈인조 등): 『인바시(因幡誌)』(1795) 잡기지부(雑記之部) 수록, 인파쿠 총서(因伯叢書) 활자본 쪽 이미지
- 『아사노가 문서(浅野家文書)』: 『다이니혼코몬조(大日本古文書)』 이에와케 2(1906)
- 「이카이 문서(猪飼文書)」: 『히가시아사이군지(東淺井郡志)』 권4(1927). 「우에사카 기록(上坂記錄)」: 『사카타군지(坂田郡志)』 중권(1913)
- 간논지 문서(大原観音寺文書): 『시가현사(滋賀縣史)』 3권(1928)의 요약
- 다치바나 문서(立花文書): 참모본부 편, 『니혼센시 초센에키(日本戦史 朝鮮役)』 문서편(1924)
- 이시다 미츠나리 서군 배치표(1600년 8월 5일): 참모본부 편, 『니혼센시 세키가하라에키 몬조호덴(日本戦史 関原役 文書補伝)』(1911)
- 『시바타 다이지키(柴田退治記)』(1583), 『주라쿠 교코키(聚楽行幸記)』(1588): 『군쇼루이주(群書類従)』 활자본
에도 시대 편찬물 (군기·계보·지리지·역사소설)
- 『호칸(豊鑑)』(1631): 『군쇼루이주(群書類従)』 활자본
- 『소후 모노가타리(祖父物語)』, 『세이쇼키(清正記)』, 『시즈가타케 갓센키(賤嶽合戦記)』, 조신지 문서(浄信寺文書):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4책
-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약칭 『간세이후(寛政譜)』) 권747 가스야 가문: 國民圖書 1923년 활자본 제4집 1030쪽
- 『주가이 케이이덴(中外經緯傳)』, 『하이제츠로쿠(廃絶録)』: 『시세키슈란(史籍集覧)』 11
- 『도다이키(当代記)』: 『시세키잣산(史籍雜纂)』 2(1912)
- 오제 호안(小瀬甫庵), 『다이코키(太閤記)』: 쇼호 3년(1646)판 쪽 이미지
- 『가와스미 다이코키(川角太閤記)』: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
- 야마가 소코(山鹿素行), 『부케지키(武家事紀)』(1673): 1918년 활자본
- 『세키가하라 군키 다이세이(関原軍記大成)』(1713): 1916년 활자본. 라이 산요(頼山陽), 『니혼가이시(日本外史)』(1827)
- 『신펜 아이즈 후도키(新編会津風土記)』(1809) 권2 고기도(古器図), 『인바시(因幡誌)』(1795), 『호키시(伯耆志)』 권7: 위 활자본
- 『빗추후시(備中府志)』(1737): 『기비 군쇼슈세이(吉備群書集成)』 5·『빈고 소쇼(備後叢書)』 11. 『빗추시(備中誌)』: 1904년 활자본
- 『야시(野史)』 권198(1851년경), 『신쇼 다이코키(眞書太閤記)』(19세기 역사소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
- 『하리마 메이쇼 준란 즈에(播磨名所巡覧図会)』(1804), 『조호 반요 리오세츠(増補播陽里翁説)』(『반요 만포 치에부쿠로(播陽万宝智恵袋)』 수록, 1918년 교정본), 『하리마카가미(播磨鑑)』(『엔센시 슈세이(沿線誌集成)』 1927년 재인용)
현대 연구·사료집 (신뢰도 A–B)
- 『시료소란(史料綜覧)』 권12
- 『고지루이엔(古事類苑)』 종교부(오제 호안 『다이코키(太閤記)』 「대불전의 일(大佛殿之事)」 인용)
공식·표준 참고자료 (신뢰도 B)
- 오나미 가즈야(大浪和弥), 「가토 기요마사의 실상(加藤清正の実像)」, 『구마모토 시정 소식(熊本市政だより)』(구마모토시)
- 『효고현 향토 인물지(兵庫県郷土人物誌)』 제1집(1942, 『가코군지(加古郡誌)』 등을 근거로 듦), 『가가 향토 사휘(加能郷土辞彙)』(1942), 『와카마츠시사(若松市史)』 하권(1942, 「아이즈카이 회보(會津會會報)」 제1호 인용)
- 『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 「하이제츠로쿠(廃絶録)」(코토뱅크)
전문 사이트·대중 매체 (신뢰도 C–E)
- 일본어 위키백과 「가스야 타케노리(糟屋武則)」·「가코가와성(加古川城)」 항목과 그 각주가 인용한 『가코가와시지(加古川市誌)』(1953), 가스야 마사카쓰(糟谷正勝) 『하리마 가스야 가문의 계보(播磨糟谷家の系譜)』(1993), 『번사대사전(藩史大事典)』 5권, 다다 노부히사(多田暢久) 「시즈가타케 칠본창의 가코가와 성주 가스야 타케노리(賤ヶ岳七本槍の加古川城主・加須屋武則)」(『이에야스와 하리마의 번주(家康と播磨の藩主)』, 2017), 야마모토 히로후미(山本博文)·소네 유지(曽根勇二)·호리 신(堀新) 편 『도요토미 정권의 정체(豊臣政権の正体)』(2014): 출처 추적용으로만 사용
- 위키미디어 커먼즈: 우타가와 토요쿠니(1대) 칠본창 연작(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오치아이 요시이쿠 「태평기영용전(太平記英勇伝)」 58(도쿄도립도서관), 『쇼코쿠 코조노즈(諸国古城之図)』 미키성, 쇼묘지 산문(Maechan0360, CC BY-SA 4.0)
확인하지 못한 것
- 생년과 몰년, 죽은 장소.
- 1583년 칸조와 1595년 가증장 원본의 소재.
- 1595년 가증 뒤 1만 2,000석이 되었는지(문서는 1만 석).
- 1583년 3,000석과 1595년 본지 4,000석 사이에 늘어난 1,000석의 시기와 문서.
- 하리마 미키군·야마토 우다의 다이칸·검지 경력(다다 노부히사 2017년 글의 원문).
- 1598년 이이 나오마사 기청문의 정확한 문의와 원본.
- 세키가하라 본전 참전 여부와 동원 병력.
- 1602년에 빗추에서 영지를 받은 사람이 타케노리 본인인지 아들인지, 그 영지의 규모.
- 『가코가와시지(加古川市誌)』(1953)와 쇼묘지 절 기록의 원문.
Foot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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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시(野史)』 권198 무신열전 가스야 타케노리 항 “糟屋武則、播磨人也、字助右衛門、実志村氏孤、糟屋友政養為弟、属別所長治、居三木城、天正六年、憑黒田孝高、隷羽柴秀吉”. 『신쇼 다이코키(眞書太閤記)』 제5편 권4 「가스야 형제 이별의 일(糟屋兄弟別情の事)」 “糟屋と名乗れども糟屋の系に非らず、実は志村の助右衛門尉なり、更に別所の由緒なければ其難に死すべき恩義もなし”. 같은 책 “母の兄小寺藤兵衛尉の許へ呼取り置きけるが又志村何某の許へ嫁入して助右衛門尉をバ設け”(일본 국립국회도서관 1884년판 OCR, 쪽 이미지 49쪽). 『소후 모노가타리(祖父物語)』 “内膳ハ摂州赤松カモノナリシカ、赤松死去ノ後、ヨキ事ノ有者ナリトテ、五百石ニテ抱ヘ玉ヒシナリ”(『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4책 608쪽. 사본에 따라 “播州赤松”). 『인바시(因幡誌)』 잡기지부에 실린 에이로쿠 13년(1570) 1월 23일 아키라 카게타카(秋良景隆)의 문서 “糟屋家之義申付畢”와 편자 주기 “加須屋ハ播州ノ士ニテ本名梶原ナリ”. 오제 호안 『다이코키(太閤記)』는 쇼호 3년판 22권을 OCR로 검색했으나 해당 이야기를 찾지 못했다. OCR 오인식 가능성은 남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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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고현 향토 인물지(兵庫県郷土人物誌)』 제1집(1942) 가코군 항 “加古川城主糟屋朝正の異父弟なり…御着城主小寺藤兵衛政職の縁を以て福井庄を領し別所北構居を守る”(근거로 『가코군지(加古郡誌)』 등을 듦). 토모마사(朝正)의 히라이야마 전사는 일본어 위키백과 「가코가와성(加古川城)」 항목이 『가코가와시지(加古川市誌)』(1953)를 인용한 것으로, 원서는 확인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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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세이후(寛政譜)』 권747 가스야 가문(藤原氏良方流). 타다야스(忠安)의 아들로 “數政 或武則 助右衛門 内膳正”을 넷째에 놓았다. 하타모토 가스야 가문은 같은 권에서 동생(相喜)의 아들(政忠)이 토토미에서 이에야스를 섬긴 데서 시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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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요시 지행장(1583년 8월 1일, 가스야 스케에몬 앞) “播州賀古郡内弐千石、河州河内郡内千石、都合三千石事、目録別紙相副令扶助畢、永代全可領知之状如件”: 『신펜 아이즈 후도키(新編会津風土記)』 권3,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4책 845쪽. 같은 날 가토 요시아키 앞 지행장은 하리마 아카시·오미·카와치 등에 걸쳐 있다(같은 책).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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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바시(因幡誌)』 잡기지부(인파쿠 총서 하권 925–926쪽). 히데요시 판물 “加古郡内生越平左衛門分二百石之事令扶助畢、全可領知状如件 天正十一正月十二日 筑前守秀吉 糟屋與十郎殿”. 이 활자본은 수신인을 날짜와 서명 뒤에 적었다(같은 묶음의 다른 문서와 대조). 편자는 이 묶음 12통이 돗토리의 가스야 벤조(加須屋辨藏) 집안 소장이라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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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4책 597–598쪽 〔기록어용소본〕, 전래 주기 “糟屋助右衛門数正拝受、同助右衛門義信書上”, 수신인 “賀須屋助右衛門尉殿”. 『신펜 아이즈 후도키(新編会津風土記)』 권3 「가스야 사콘 소장 17통(加須屋左近所蔵十七通)」의 같은 문서는 수신인이 “賀須屋助左衛門尉殿”. 같은 집안의 1583년 8월 1일 지행장, 7월 5일 서장은 “助右衛門”.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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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무라 유코 『시바타 다이지키(柴田退治記)』 “今度柳瀬表秀吉所切崩之一番鑓者、悉近習之輩也”(『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4책 598–599쪽, 『군쇼루이주(群書類従)』 수록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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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가타케 갓센키(賤嶽合戦記)』 “宿屋七左衛門尉鳥打坂の南に踏留りしを、桜井左吉突懸りしかど、宿屋と渡し合せしばらく戦ひ、桜井薄手負ける所、糟屋内膳助来て宿屋を討取ける”(『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4책 167쪽). 조신지 문서 「오미 이카군 시즈가타케 합전의 유래(江州伊香郡賤ヶ嶽合戦之由来之事)」 “清水谷口を五左衛門尉もちかためられ候を、糟屋内膳先懸にて突崩し申候”(같은 책 158쪽). 『호칸(豊鑑)』은 1631년, 오제 호안 『다이코키(太閤記)』 권6은 1625년경 성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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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쇼키(清正記)』 “糟屋助右衛門三百石”, 『소후 모노가타리(祖父物語)』 “五百石ニテ抱ヘ”(『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4책 604–608쪽). 『야시(野史)』 권198 “秀吉賞賜食邑五千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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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노가 문서(浅野家文書)』 2호 「다이코사마 오소나에노즈(大閤樣御備之圖)」 우마마와리 “賀須屋助右衛門尉”, 3호 「히데요시코 코마키진 오소나에노즈(秀吉公小牧陣御備之圖)」 철포대 “かすや助右衛門尉殿 百五十”(1906년 활자본 28·3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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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요시(치쿠젠노카미) 서장 7월 5일, 가스야 스케에몬·가토 토라노스케 앞 “去三日に楠まて人数召連被退、其注進候、就は動之日限何も重而可申越候、何篇此間時分に大柿まて可相越候、然者其城番等を堅可被申付候”: 『신펜 아이즈 후도키(新編会津風土記)』 권3. 연도는 문서에 없고, 다키가와 카즈마스의 퇴각 시기에 맞춰 1584년으로 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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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4년(추정) 7월 5일 서장의 수신인은 “賀須屋助右衛門”, 1587년 5월 15일 슈인조는 “加須屋内膳正”. 『세이쇼키(清正記)』 등에 나오는 “시즈가타케 다음 날 관직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4책 수록본으로 확인했다. 서임 연도를 1586년으로 보는 설은 출전을 찾지 못했다. 같은 시기 “토라노스케”로 불린 가토 기요마사도 1차 사료에서 “主計頭”가 처음 보이는 것은 1586년 정월 6일 히데요시의 지행장이고, 그 전까지 수신인은 “虎介”였다. 1585년 서임설은 2차 서술에 많다(오나미 가즈야(大浪和弥), 「가토 기요마사의 실상(加藤清正の実像)」, 『구마모토 시정 소식(熊本市政だよ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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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요시 슈인조(1587년 5월 15일, 가스야 나이젠노카미 앞)와 같은 해 6월 2일 슈인조(가스야 나이젠노카미·카타기리 이치노카미 앞): 『신펜 아이즈 후도키(新編会津風土記)』 권3. 『시료소란(史料綜覧)』 권12 덴쇼 15년 5월 15일·6월 2일 조도 이 두 문서를 강문(綱文)으로 세웠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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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요시 슈인조 “賀古川渡船事、近邊舟共有次第召寄、軍勢無滯可越事候、不可由斷候也 三月四日 加須屋內膳正殿”: 『호키시(伯耆志)』 권7 돗토리번 가스야(糟谷) 가문 항(인파쿠 총서 1916년 활자본 1026–1027쪽). 연도는 문서에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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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무라 유코 『주라쿠 교코키(聚楽行幸記)』(1588), 『군쇼루이주(群書類従)』 수록본. 오제 호안 『다이코키(太閤記)』 권11에도 같은 행렬 명단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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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사카 기록(上坂記錄)」 “大閤樣御代天正十九年閏正月十三日御檢地被仰付候、御檢地奉行 增田右衛門尉殿・長束大藏殿…糟屋内膳殿…〆十人”(『사카타군지(坂田郡志)』 중권). 도요토미 부교 사이쿄조(裁許状, 판결문)(1591년 4월 13일) 연서 “長大藏・宮長次・吉清右・八久兵・賀内膳・片主膳・早主馬・牧兵太・小縫殿・増右”(『히가시아사이군지(東淺井郡志)』 권4 188쪽 「이카이 문서(猪飼文書)」). 같은 날 시행장의 “御撿地衆より双方へ被成御成敗候”도 같은 곳.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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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현사(滋賀縣史)』 3권(1928) “坂田は前代官糟屋内膳今は益庵”. 간논지 문서(大原観音寺文書)를 요약한 것으로, 원 문서의 문면은 확인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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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가스야 타케노리(糟屋武則)」가 다다 노부히사(多田暢久), 「시즈가타케 칠본창의 가코가와 성주 가스야 타케노리」(『이에야스와 하리마의 번주(家康と播磨の藩主)』, 2017) 33–34쪽과 『번사대사전(藩史大事典)』 5권을 인용한 것. 고신지 재건 전승도 같은 항목에 있다. 원서는 확인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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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바시(因幡誌)』 잡기지부. “大佛殿本尊之儀無由斷申付候趣被聞食候、彌可入精事肝要候、四五日中可爲御上洛之條可成其意候也 九月廿三日 秀吉公御朱印 加須屋内膳守との”. 연도가 없다. 오제 호안 『다이코키(太閤記)』 「대불전의 일(大佛殿之事)」의 불상 담당자 명단(『고지루이엔(古事類苑)』 종교부 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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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이 케이이덴(中外經緯傳)』(『시세키슈란(史籍集覧)』 11) “かすや内膳正 二百人”. 히데요시 슈인조(1592년 9월 22일, 가스야 나이젠노카미·오타 코겐고·신조 신자부로 앞): 『니혼센시 초센에키(日本戦史 朝鮮役)』 문서 62호(다치바나 문서). 금산 합류는 같은 책 본편 16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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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요시 슈인조(1593년 3월 10일) 진주성 포위 편성 “加須屋内膳正 一百廿人”: 『아사노가 문서(浅野家文書)』 263호. 4월 29일 슈인조(카타기리 이치노카미·가스야 나이젠노카미 앞): 『주가이 케이이덴(中外經緯傳)』. 연도는 『니혼센시 초센에키(日本戦史 朝鮮役)』의 비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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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요시 슈인조(분로쿠 4년 8월 17일, 가스야 나이젠노카미 앞): 『신펜 아이즈 후도키(新編会津風土記)』 권3(『다이니혼 치시 다이케이(大日本地誌大系)』 30, 43쪽). 연도 “文祿四”는 편자의 주기다. 카타기리의 같은 날 가증은 이 블로그의 카타기리 카츠모토 글, 히라노는 히라노 나가야스 글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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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다이키(当代記)』 권2 말미 석고 목록 “一萬二千石 加須屋内膳”, 『하이제츠로쿠(廃絶録)』 “一萬二千石 播州かこ川 糟屋内膳正宗孝”, 『간세이후(寛政譜)』 “其後一萬二千石を領す”. 오제 호안 『다이코키(太閤記)』 권6 “糟屋助右衛門尉後号内膳正、領三万石、平野権平後号遠江守…領五千石、其心猛くして、秀吉卿に背く事度々有しなり、因之領知少しとか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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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스미 다이코키(川角太閤記)』 권4 “直に糟屋内膳屋形へ關白殿を被入置”. 아사노 요시나가 서장(1598년 정월 4일) 수신인 “賀須谷内膳殿”(『아사노가 문서(浅野家文書)』 399쪽). 오제 호안 『다이코키(太閤記)』 권21 유품 목록 “糟屋内膳正” 금자 10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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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펜 아이즈 후도키(新編会津風土記)』 권3. “一、内府へ御入魂之御起請文可被成候間承候、左樣成儀一切無用之由かたく被申候間…慶長三年十一月廿日 井伊侍從 直得(花押 血色アリ) 賀須屋内膳殿 參”. 활자본에 “(二字不詳)“로 표시된 곳이 있다. 이 문서를 다룬 연구는 찾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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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세이후(寛政譜)』 권747 “慶長五年石田三成に與して伏見城をせむ”. 항목은 이 문장으로 끝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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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가하라 군키 다이세이(関原軍記大成)』 권10(후시미 공격군 요리아이슈 “糟谷内膳正”), 권14(오가키 집결), 권24(본전 “其右の方に、有馬修理大夫・河尻肥前守…粕屋内膳正…一面に陣を取る”). 『니혼가이시(日本外史)』 권21 “有馬・河尻・糟谷内膳正・石河・布施・玉置氏陣其右”. 미츠나리 서장 별지 배치표(1600년 8월 5일)는 『니혼센시 세키가하라에키 몬조호덴(日本戦史 関原役 文書補伝)』 수록본을 OCR로 검색했다. 『가코가와시지(加古川市誌)』의 오사카 체재설과 360명은 일본어 위키백과에 인용된 것을 재인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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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인물의 1600년 이후 석고는 이 블로그의 칠본창 시리즈 각 글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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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가 소코 『부케지키(武家事紀)』 권14 “其後七本鎗ノ輩、各城ヲ領シ國ヲ賜フ、平野長泰・片桐且元・糟屋三人ハ沈淪シテワツカ五千石三千石ヲ領ス、糟屋ツイニ卒去シテ嗣續浪々ス”(1918년 활자본 상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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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제츠로쿠(廃絶録)』 「게이초 5년 제가 몰수부(慶長五年諸家沒収之部)」 “一萬二千石 播州かこ川 糟屋内膳正宗孝 慶長七年めし出され後に斷絶す”(『시세키슈란(史籍集覧)』 11). 이 책은 1813–1814년에 초고가 완성되었다. 『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 「하이제츠로쿠(廃絶録)」 항목은 이 책에 오류가 많다고 평했다. 『세키가하라 군키 다이세이(関原軍記大成)』 권43의 몰수자 명단에도 “糟谷内膳正”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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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추후시(備中府志)』 권1 카와카미군 쿠니요시성(國吉城) 항, 『빗추시(備中誌)』 오다군 “同七年糟谷內膳領にて家司は糟谷文右衛門代官は太田源兵衛同十五年糟谷八兵衛尉卒去に依て御料と成”. 『빗추후시(備中府志)』는 1735년 서문, 1737년 간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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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펜 아이즈 후도키(新編会津風土記)』 권3 “爲歲暮祝儀小袖一重到來喜悅之至候、猶大久保加賀守可申候、謹言 十二月十九日 秀忠(花押) 加須屋八兵衛殿”. 연도는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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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마카가미(播磨鑑)』 “一本に曰く…文祿年中山城國伏見の里にて毒害せらる”(『엔센시 슈세이(沿線誌集成)』 제1집 1927년 재인용). 『조호 반요 리오세츠(増補播陽里翁説)』 “加古川の城主糟屋内膳は大阪秀頼方、大阪落城以前に討死す…東國にて討死す”. 1601년설과 1623년설은 일본어 위키백과가 가스야 마사카쓰(1993)와 『가코가와시지(加古川市誌)』를 인용한 것으로 원서는 확인하지 못했다. 1607년설은 같은 항목에서 출전이 없어 삭제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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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마 메이쇼 준란 즈에』(1804) “加古川称名寺に今も位牌あり、澄日宗光大禅定門”(첫 글자는 證으로도 읽힌다), 『조호 반요 리오세츠(増補播陽里翁説)』 “同所稱名寺も古へは寺領多く有之候處、右内膳時代に減じ申候。内膳の位牌此寺に在り、但し俗名は顯はし難き由にて無之”, 같은 책의 토마리 명신 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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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카마츠시사(若松市史)』 하권(1942) 인물편이 인용한 「아이즈카이 회보(會津會會報)」 제1호 “助兵衞は內膳正糟屋武則の弟なり。武則死す。子八兵衞幼きを以て助兵衞之を輔翼す。八兵衞も亦遂に死し、嗣子なきを以て同姓掃部と爭ひ遂に駿河の評定所に訴ふ”(가문 전승). 『호키시(伯耆志)』 권7 “同姓本府に二家、會津に一家あり、宗家は當家なりと云へり”. 『가가 향토 사휘(加能郷土辞彙)』 “加須屋十左衞門…實は豐臣秀吉の臣吉田助左衞門の子で、賤ノ岳七本鎗の一人と言はれた加須屋内膳の養子となつたもの…慶長十二年來つて前田利長に仕へ”. 『신펜 아이즈 후도키(新編会津風土記)』 권2 “家士加須屋左近所藏 先祖助右衛門鎗…銘國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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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펜 아이즈 후도키(新編会津風土記)』는 1809년, 『인바시(因幡誌)』는 1795년, 『호키시(伯耆志)』는 막부 말기에 완성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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