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츠야마성 본성. 높게 쌓은 석벽 위로 흰 벽과 검은 판자를 두른 망루들이 이어지고, 가운데 뒤편으로 천수가 보인다(Urashimataro 촬영, 퍼블릭 도메인)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1563–1631) — 시즈가타케 칠본창④

Q: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는 누구인가?

A: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아래에서 자라 에도 시대 초기까지 살아남은 무장이다. 1563년 미카와(三河)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미카와 잇코잇키(一向一揆, 정토진종 문도들이 일으킨 봉기)에 가담했다가 고향을 떠나는 바람에 갓난아기 때 오와리(尾張)로 이주했다. 히데요시의 측근(近習)으로 자라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칸조(感状, 전공을 인정하는 문서)를 받았고, 훗날 “시즈가타케 칠본창”(이 전투에서 이름을 떨친 히데요시의 젊은 측근 일곱 명)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1585년 무렵부터는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와 함께 도요토미 수군을 지휘했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두 차례 모두 조선 남해안에서 싸웠다. 세키가하라 전투 뒤 이요(伊予) 20만 석의 영주가 되어 마츠야마성(松山城)과 그 성하 마을을 새로 만들었고, 1627년 아이즈(会津) 40만 석으로 옮겼다가 1631년 에도에서 69세로 죽었다. 영지를 물려받은 아들 아키나리(明成)는 12년 뒤 가로(家老)와의 분쟁 끝에 영지를 모두 막부에 반납했고, 가문은 손자 대에 1만 석으로 줄었으나 명맥은 이어졌다.

한눈에 보는 가토 요시아키

항목내용
이름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오랫동안 시게카츠(茂勝)라는 이름을 썼다
통칭·관직통칭 마고로쿠(孫六). 관직 사마노스케(左馬助, 종5위하. 1585년 10월–1587년 4월 사이부터 문서에 보임)
생몰1563년(에이로쿠 6) – 1631년 9월 12일(간에이 8). 향년 69세(세는 나이)
출신미카와. 갓난아기 때 오와리로 이주
아버지통칭 산노조(三之丞). 이름은 노리아키(教明)로 전하나 『한칸후(藩翰譜)』도 확정하지 못함
칠본창1583년 6월 5일 칸조, 3,000석
수군1586년 아와지 미하라군, 1595년 이요 마사키(松前), 임진왜란 1592년 750명·정유재란 1597년 2,400명 동원
가증1598년 5월 울산·순천 철수 연판에 서명하지 않은 것과 칠천량해전 공으로 3만 7천 석 가증, 합계 10만 석
세키가하라 이후이요 20만 석. 1602–03년 마츠야마성 착공, 1603년 10월 이주
만년1627년 아이즈 와카마츠(若松) 40만 석, 1631년 에도 사쿠라다 저택에서 사망
후계장남 아키나리. 1643년 영지 반납, 손자 아키토모(明友)가 이와미 1만 석
가문의 이후1682년 오미 미나쿠치(水口) 2만 석. 막말까지 존속
묘소교토 히가시야마의 오타니 소뵤(大谷祖廟)라는 기록과 고야산이라는 기록이 엇갈림

가토 요시아키는 이 블로그에서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와키자카 야스하루에 이어 네 번째로 다루는 칠본창이다. 기요마사와 성이 같지만 친척은 아니다. 칠본창 가운데 그만큼 오래 배를 탄 사람은 와키자카 정도이고, 영지는 기요마사·마사노리보다 작았다. 그의 행적은 1차 문서로 따라갈 수 있는 부분이 많다. 미나쿠치 번주가 된 후손이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가문에게 받은 문서를 대대로 보관했기 때문이다.

이 글은 그 문서들을 기준으로 삼았다. 히데요시가 그에게 보낸 칸조와 슈인조(朱印状, 붉은 도장을 찍은 명령 문서), 칠천량해전 직후 감찰관들이 쓴 질책 문서, 조선 측의 장계·『선조실록(宣祖實錄)』·『난중일기(亂中日記)』를 대조하면 에도 시대 편찬물과 일화집의 어느 장면이 덧붙은 것인지 대부분 가려낼 수 있다. 1702년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가 쓴 『한칸후』의 가토 가문 항목에는 문서와 어긋나는 내용이 섞여 있어, 인용할 때마다 문서와 맞춰 보았다. 본문의 『한칸후』 인용 문구를 누르면 한칸후 원문(일본어)의 해당 부분이 새 탭에서 열린다.

1. 미카와 낭인의 아들, 히데요시의 측근이 되다

1-1. 잇코잇키에 가담한 아버지

요시아키의 아버지는 원래 도쿠가와 가문을 섬기던 미카와의 무사였다. 1563년 미카와에서 잇코슈(一向宗) 문도들이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그도 문도 측에 섰고, 이듬해 봉기가 진압되자 미카와를 떠나 오와리로 갔다. 『한칸후』에는 이때 요시아키가 “강보에 싸인 채 고향을 떠났다(襁褓の中に本國を去り)“고 나와 있다. 그 뒤 아버지는 하시바 히데요시를 섬겼고, 요시아키도 자라서 히데요시 밑으로 들어갔다.1 1620년대에 나온 『호안 다이코키(甫庵太閤記)』에도 “아버지 산노조는 미카와 태생이고, 사마노스케는 오와리에서 자랐다(父三丞は三州生國也、左馬助於尾州長)“는 문장이 있다. 미카와에서 태어나 오와리에서 자랐다는 큰 줄기는 두 기록이 같다.1

아버지의 이름은 현대 사전류에 대개 노리아키(教明)로 나오지만, 『한칸후』에도 “산노조 아무개”라고만 되어 있고 이름을 확정하지 못했다는 주가 붙어 있다.2 확실한 것은 두 가지다. 그는 미카와 사람의 아들이었고, 그 아버지는 도쿠가와 가문을 섬기다 잇코잇키 당시 등을 돌린 사람이었다.

1-2. 히데요시의 측근, 마고로쿠

요시아키가 히데요시를 섬기게 된 경로도 사전 수준의 근거만 있다. 『야마카와 일본사소사전(山川 日本史小辞典)』에는 1576년 하리마 공략 무렵 히데요시 휘하에 들어갔다고 나온다. 그가 히데요시 곁을 지키는 측근(近習)이었다는 것은 시즈가타케 직후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전투 직후 오무라 유코(大村由己)가 쓴 『시바타 다이지키(柴田退治記)』에는 이 전투의 일번창(一番槍, 적과 가장 먼저 창을 맞댄 공)이 “모두 측근들(悉近習之輩也)“이었다고 나오고, 그 명단에 “가토 마고로쿠 요시아키(加藤孫六嘉明)“가 들어 있다.3

문서를 통해 그의 이름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확인할 수 있다. 1583년부터 1585년까지 히데요시가 그에게 보낸 문서의 수신인은 모두 “가토 마고로쿠 님(加藤孫六殿)“이고, 도쿄대학 사료편찬소는 이 시기 문서의 주인을 “가토 시게카츠(加藤茂勝)“로 정리한다. 마고로쿠는 어릴 때만 쓰던 아명이 아니라 실제로 공문서에도 쓰인 통칭이었고, 요시아키라는 이름은 꽤 늦게 쓰기 시작했다.3

검은 예복을 입은 히데요시가 어린 산보시를 안고 서 있고, 뒤로 머리띠를 두른 갑옷 차림의 젊은 무사들이 따른다. 위쪽에 인물 이름을 적은 붉은 띠가 붙어 있다.
츠키오카 요시토시, 「무라사키노 다이토쿠지 분향 그림(紫野大徳寺焼香之図)」(1877년경) 오른쪽 장. 오른쪽 위 붉은 띠에 "가토 마고로쿠 요시아키(加藤孫六喜明)"가 보인다(퍼블릭 도메인)

2. 시즈가타케 — 6월 5일의 칸조

1583년 4월 오미 시즈가타케에서 히데요시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의 군세를 무너뜨렸을 때 요시아키는 스물한 살이었다. 전투 경과는 시즈가타케 전투 글에서 자세히 다뤘으니 여기서는 그에게 내려진 문서만 본다.

미나쿠치 가토 가문에 전해진 문서 가운데 덴쇼 11년(1583) 6월 5일자 히데요시 칸조가 있다. 수신인은 “가토 마고로쿠 님”이고 포상은 3,000석이다.

秀吉於眼前合一番鑓、其動無比類、爲其褒美三千石宛行訖、彌向後奉公之依忠勤、可遣領知者也

히데요시의 눈앞에서 일번창을 맞대었으니 그 활약이 비할 데 없다. 그 포상으로 3,000석을 내린다. 앞으로도 봉공하는 충근에 따라 영지를 줄 것이다. — 하시바 히데요시 칸조, 덴쇼 11년(1583) 6월 5일, 「가토 문서(加藤文書)」

같은 날짜, 같은 문구의 칸조가 후쿠시마 마사노리·와키자카 야스하루·히라노 나가야스(平野長泰)·가타기리 카츠모토(片桐且元)·가스야 타케노리(糟屋武則)·사쿠라이 사키치(桜井佐吉), 그리고 전사한 이시카와 카즈미츠(石河一光)의 유족에게도 전해진다. 수신인만 바꾼 정형 문서라서, 요시아키가 시즈가타케에서 구체적으로 누구와 싸웠는지는 이 문서로 알 수 없다.4

칸조 실물이 아닌 기록에는 날짜와 액수가 다르게 나온다. 『시바타 다이지키』에서는 아홉 명이 칸조를 받았고 “어떤 이는 5천 석, 어떤 이는 3천 석”이었으며, 날짜는 덴쇼 11년 7월 1일이다. 『호안 다이코키』에는 일곱 명을 “칠본창이라 부르며” 각각 5,000석을 7월 1일에 주었다고 되어 있다. 『한칸후』의 “7월 1일, 5,000석”은 이 『호안 다이코키』와 날짜·액수가 똑같다. 『한칸후』는 『호안 다이코키』를 따랐을 것이다. 실물 문서로는 날짜가 6월 5일, 액수가 3,000석이다.5 “칠본창”이라는 이름 자체도 동시대 문서에는 없고 1620년대 편찬물에서 처음 보인다. 5,000석이든 3,000석이든 간에 이때 받은 것이 요시아키의 첫 독립 영지였다.

검은 바탕에 덩굴무늬가 있는 예복을 입고 관을 쓴 무장이 왼쪽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 허리에 칼을 차고 있다.
가토 요시아키 초상화. 미나쿠치 도에이 신사(藤栄神社) 소장(퍼블릭 도메인)

3. 배를 맡은 장수 — 오사카성 석재에서 오다와라까지

3-1. 오가키성 수비와 석재 운반

시즈가타케 이듬해인 1584년, 히데요시가 이에야스·오다 노부카츠(織田信雄)와 코마키·나가쿠테에서 대치할 때 요시아키는 미노 오가키성(大垣城)을 지켰다.6

그가 배를 운용한 기록이 처음 나오는 것은 1585년 10월 23일자 히데요시의 슈인조다. 셋츠의 아마가사키·니시노미야 부근에서 “그대 영지 안의 배를 있는 대로 끌고(其方知行分、船有次第召連)” 열흘 안에 오사카성 공사에 쓸 잡석을 실어 보내라는 내용이다. 수신인은 아직 “가토 마고로쿠”였다. 이 시점에 그는 이미 셋츠 해안에 영지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6

1586년 11월 2일에는 오사카만 입구의 섬 아와지에서 미하라군(三原郡)의 영지를 받았다. 흔히 1만 5천 석이라고 하지만 사료편찬소가 정리한 기록에는 석고가 없고, 거성으로 꼽히는 시즈키성(志知城)도 효고현 자료에는 “가토 요시아키인가”라고 물음표가 붙어 있다.7 앞선 1585년에 아와지 스모토에 들어간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이웃이 된 것이다. 히데요시가 왜 그를 계속 해안 쪽에 배치했는지 설명하는 문서는 없다. 그저 셋츠 해안에 영지가 있었고, 다음에는 아와지에 영지를 받았으며, 이듬해부터는 구키·와키자카와 한 묶음으로 움직이는 수군 장수가 되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규슈시코쿠혼슈태평양오가키성1584 수비아마가사키·니시노미야1585 오사카성 석재 운반이와야1594 가증아와지 미하라군1586 영지이요 마사키1595 영지분고1586 오토모 구원미야우치·히라사성1587 금제·공격시미즈항1590 도착시모다성1590 공격영지작전·임무 지점
1584–1595년 요시아키의 영지와 작전 지점. 현대 해안선 위에 위치만 표시했다(Natural Earth 데이터로 제작)

3-2. 규슈·오다와라, 그리고 이요 마사키

1586년 11월 20일 히데요시는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와키자카 야스하루·가토 요시아키에게 병력 1만 5천을 주어 규슈 방면으로 보내 시마즈 가문에 밀리던 오토모 가문을 구원하게 했다(『킷카와가문서(吉川家文書)』).

이듬해 1587년 봄 히데요시가 직접 규슈로 내려왔을 때에도 그는 규슈에서 싸우고 있었다. 4월 27일에는 사츠마의 미야우치에 “병선 군세의 난폭·방화를 금한다”는 포고문(禁制)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구키·와키자카와 공동으로 냈는데, 여기에는 서명이 “가토 사마노스케(加藤左馬助)“로 돼 있다. 공문서에서 사마노스케라는 관직명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사료다. 다음 날 네 사람은 수군을 이끌고 센다이가와 연안의 히라사성(平佐城)을 공격했고, 성을 지키던 카츠라 타다아키(桂忠昉)는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의 명령에 따라 성을 내주었다.8

1590년 오다와라 정벌 때도 그는 와키자카·구키·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와 함께 수군으로 동쪽 바다를 건넜다. 2월 27일 스루가 시미즈항에 도착했고 4월 1일 이즈 시모다성을 공격해 항복시켰다.9 1595년 7월에는 이요 마사키(松前)로 옮겨 6만 석대의 영주가 되었고, 같은 지역의 도요토미 직할지 관리도 맡았다.10

이 10년에 대한 『한칸후』의 내용은 문서와 조금 다르다. 맞지 않는 곳을 아래 표로 모았다.

『한칸후』의 내용문서로 확인되는 것판정
1585년 히데요시의 간파쿠 취임 때 종5위하 사마노스케 서임1585년 10월 문서 수신인은 아직 “마고로쿠”, 1587년 4월 문서에서 “사마노스케”1585년 7월 서임은 확인되지 않음
1585년 가을 이요 마사키성 6만 2,900석1586년 아와지 미하라군, 1595년 7월 이요 마사키연도가 10년 빠르고 아와지 시기가 빠짐
1586년 헤츠기가와 전투에서 와키자카와 둘이 물러서지 않아 히데요시가 감탄사료편찬소 정리와 참전 장수 목록에 요시아키·와키자카가 없음『한칸후』에만 있음
1587년 사츠마 공격은 요시아키·와키자카·구키 세 사람포고문 연명과 공격은 고니시를 더한 네 사람대체로 맞음
초록 비늘 갑옷에 붉은 하카마를 입은 무장이 성벽 앞에서 창을 쥐고 왼쪽을 돌아보고 있다. 투구 위로 붉고 흰 장식이 높이 솟아 있고, 위쪽에 약력이 빽빽하게 적혀 있다.
우타가와 요시이쿠, 『태평기 영웅전(太平記英勇伝)』 「가토 사마노스케 요시아키」(막말). 약력에 아버지를 "가토 히로아키"로 적었다(도쿄도립도서관 소장, 퍼블릭 도메인)

4. 조선의 바다 — 1592년과 1597년

4-1. 1592년 — 수송 담당에서 안골포까지

1592년 3월 13일자 히데요시 슈인조에 따르면 요시아키가 처음 맡은 임무는 수송이었다. 히토츠야나기 나오모리(一柳直盛)와 함께 이키(壱岐)에 머물며 히젠 나고야(名護屋, 출병 기지)와 이키 사이를 오가는 병력 수송을 감독하라는 명령이다. 4월 19일 슈인조에서 비로소 와키자카·구키와 함께 비젠의 경호선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때 동원 병력은 와키자카 1,500, 구키 1,500, 요시아키 750명이었다.11

동해쓰시마부산한산도히젠 나고야출병 기지이키1592 수송 감독안골포1592 패퇴웅천1593 웅포칠천량1597 기습남원성1597 함락무안1597 도달남해1597 겨울 주둔울산 왜성1598 구원작전·임무 지점
1592–1598년 요시아키가 거친 지점. 경로는 확인되지 않아 위치만 표시했다(Natural Earth 데이터로 제작)

7월 한산도해전 현장에 요시아키는 없었다. 와키자카 가문의 기록인 『와키자카카덴키(脇坂家伝記)』에는 “구키와 가토 두 사람이 배를 정비하느라 늦어지는 사이 야스하루 혼자 7월 7일 가라시마(거제) 쪽으로 배를 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와키자카가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사람이 달려갔지만 당해 내지 못하고 안골포로 물러났고, 조선 수군이 쫓아와 해가 질 때까지 포구 안에서 싸웠다. “여기서도 아군이 졌고 구키의 배 돛대가 부러졌다.” 「코라이센센키(高麗船戦記)」에는 같은 싸움이 구키를 높여 부르는 말투로 나와 있다. “오스미노카미 님(구키)과 가토 사마노스케 님 두 분”이 안골포에 들어가 있다가 9일 진시(辰刻)부터 공격을 받았다. 일본 측은 키슈쿠(鬼宿)라는 배와 “사마의 큰 배”를 앞에 세우고 작은 배들은 그 안쪽에 두었다. 구키가 탄 니혼마루(日本丸)의 망루에는 석화시(石火矢)가 하나도 맞지 않았고, 구키의 배에서 대포를 마구 쏘자 조선 수군은 섬 쪽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키슈쿠에도 죽거나 다친 이가 많아 그날 밤 부산포로 돌아갔다. 이순신은 장계에서 7월 10일 안골포 선창에 왜 대선 21척, 중선 15척, 소선 6척이 있었고 그중 3층 누각선 1척과 2층 대선 2척이 포구 밖에 떠 있었다고 보고했다.12 일본 측 날짜는 하루 이른 9일이다.

『한칸후』에는 이해에 요시아키가 와키자카·구키와 함께 “경상우병사 원균을 깨뜨리고 웅천에 이르렀다”는 문장이 있다. 그러나 이 시점에 원균은 경상우수사였고, 개전 초 그가 이 세 장수에게 패했다는 다른 기록은 조선 측에도 일본 측에도 없다. 요시아키의 첫 해전은 안골포에서의 패퇴였다.

4-2. 1593년 웅포 — “적선을 빼앗았다”

1593년 2월부터 3월 초까지 이순신 함대는 웅천의 일본군 진지를 여러 차례 공격했다. 이 무렵 웅천을 지킨 장수는 와키자카였고 요시아키와 구키도 그 일대에 있었다. 『한칸후』에는 “2월 21일 다시 크게 싸웠고, 요시아키가 나아가 싸워 직접 적선을 빼앗았다”고 되어 있다.

조선 측 기록에 의하면 2월 22일에 조선 배가 일본군에게 나포되었다고 한다. 이순신의 장계에 따르면 발포와 가리포의 통선 두 척이 승세를 타고 앞다투어 돌진했다가 돌아나오는 길에 서로 부딪쳐 뒤집혔다. 그날 『난중일기』에는 “발포 2호선과 가리포 2호선이 명령도 없이 돌입하다 얕고 좁은 곳에 걸려 적에게 올라타임을 당했다(爲賊所乘). 분하고 원통해 쓸개가 찢어지는 듯했다”고 적혀 있다.13 『난중일기』에 따르면 21일은 바람이 거세 교전이 없었다.

날짜가 하루 어긋나지만 『한칸후』의 “적선 탈취”는 이 22일 사건을 일본 쪽에서 본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배에 오른 사람이 요시아키 본인이나 그 부하였다는 동시대 증거는 없다. 요시아키는 1593년 말에서 1594년 초 사이에 구키와 함께 귀국했고, 1594년 2월 20일 “조선에서 분골쇄신한” 공으로 아와지 이와야(岩屋) 땅을 더 받았다.14

4-3. 1597년 칠천량 — 공을 다툰 기록

정유재란이 시작된 1597년, 요시아키는 2,400명을 이끌고 다시 바다를 건넜다. 7월 15일 밤 일본 수군은 거제도 칠천량에 정박한 원균의 조선 수군을 기습했다. 히데요시가 8월 9일 요시아키에게 보낸 슈인조에는 “지난 15일 밤 움직여 번선(番船, 조선 경비선) 160여 척을 쳐서 빼앗고 조선인 수천 명을 베었다”는 문장이 있고, 조선 측 선전관 김식은 “15일 밤 2경에 왜선 대여섯 척이 불시에 기습해 전선 4척이 불탔고, 닭이 울 무렵 셀 수 없는 왜선이 서너 겹으로 에워쌌다”고 보고했다(『선조실록』 7월 22일). 『난중일기』에는 “16일 새벽 수군이 크게 패했다”고 적혀 있다. 양쪽 1차 기록의 날짜가 일치한다.15 『한칸후』의 날짜도 7월 15일이다. 다만 와키자카 가문의 비문과 『와키자카카덴키』에는 7월 7일로 적혀 있는데 이는 출항한 날짜와 혼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해전 뒤 요시아키는 군율을 어기고 동료 장수와 부교들을 험담했다는 이유로 감찰관들의 연서장에서 지탄받았고, 이 일은 후대 일화가 아니라 당시 문서로 남아 있다. 7월 19일 히데요시가 보낸 감찰관(軍目付) 여섯 명이 고니시 유키나가·토도 타카토라(藤堂高虎)·와키자카 야스하루 앞으로 연서장을 보냈다.

今度番船へ動に付而、加藤左馬助、御法度之御朱印之旨相背、右兩人相定書物之旨をも相違、却而兩三人、又は奉行衆までも惡口被申候義無是非候

이번 번선 공격에 관해 가토 사마노스케가 법도를 정한 슈인조의 취지를 어기고, 앞서 두 사람이 정한 서약의 취지와도 어긋났으며, 도리어 세 분과 부교(奉行)들에게까지 험담을 한 일은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 감찰관 연서장, 게이초 2년(1597) 7월 19일, 「토도 백작가 문서(藤堂伯爵家文書)」

나흘 뒤인 7월 23일, 후쿠하라까지 합류해 일곱 명으로 늘어난 감찰관은 토도 타카토라에게 “지난 15일 밤 가라시마에서 번선을 쳐서 빼앗은 일은 귀하가 일번(一番)입니다. 숨길 것 없는 사실이니 전하 앞에서도 자세히 아뢰겠습니다”라고 써 보냈다.16 앞서 인용한 연서장 속의 “법도를 정한 슈인조”에서 정한 법도가 무엇인지는 이 문서에서 나오지 않아 알 수 없다. 다만 이듬해 히데요시가 그의 공을 “아군 배를 떠나 들어가” 적선을 빼앗은 것으로 표현한 것과 견주어 보면, 정해진 순서를 어기고 앞질러 나간 일(抜け駆け)이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요시아키는 진형을 무시하고 먼저 치고 나갔기 때문에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감찰관들의 지탄을 받았고, 더군다나 그 과정에서 동료 장수와 부교들을 험담하기까지 했다. 결국 일번 공은 토도에게 돌아갔다. 이 질책 문서는 토도 가문에 전해졌는데, 1930년 마츠야마의 향토사 단체가 요시아키를 기리려고 펴낸 『가토 요시아키 공(加藤嘉明公)』에도 그대로 실려 있다.

여기서 반전이 있는데 감찰관들의 지탄에도 불구하고 히데요시는 8월 9일 요시아키 앞으로 발행한 슈인조에서 그의 공을 “비할 데 없다(無比類)“고 칭찬했고, 이듬해 5월 3일 10만 석 가증 슈인조에서는 “조선 가라시마에서 수백 척 속으로 아군 배를 떠나 들어가 적선 여럿을 빼앗은” 공을 가증 사유로 명시했다. 감찰관들이 규칙 위반으로 본 행동을 히데요시는 무공으로 쳤다.

재미있는 건 가문 기록마다 전투 장면에서는 자기 쪽 공을 앞세운다는 점이다. 『와키자카카덴키』에는 토도와 가토가 함께 쾌속선을 타고 앞질러 나갔고, 와키자카가 쫓아가 새벽에 가토의 배와 나란히 서서 앞다투어 배를 빼앗았다고 나와 있다. 토도 가문 기록에는 토도 가신이 첫 배와 두 번째 배를 잡았다고만 나오고 가토는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일번 다툼에서는 한 발짝 비켜나 있던 휴가의 이토 가문 기록에는 “첫 번째로 가토 사마노스케가 적선 한 척을 빼앗았다”고 되어 있고, 자기 주군 스케타카는 그다음으로 적었다.17 이쯤 되면 가토 요시아키에게 판정승을 주어도 좋을 것 같다.

장수들이 공을 따지는 자리에서 토도 타카토라가 칼을 쥐고 일어섰고, 가토 요시아키는 태연하게 기둥에 기대서 있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이 일 이후로 두 사람이 절교했다는 이야기는 17–18세기 『사이교쿠와(碎玉話)』, 『부쇼칸조키(武将感状記)』 같은 일화집에 처음 나왔다. 그런데 『사이교쿠와』에서는 칼을 쥔 쪽이 토도인데, 하야시 라잔(林羅山)의 『히데요시후(秀吉譜)』에서는 요시아키가 “수군의 승리는 모두 내 공”이라며 칼을 쥔다. 에도 후기의 『하이겐사이 분슈(佩弦斎文集)』에는 두 이야기가 정반대라 어느 쪽이 맞는지 판단할 수 없다는 글이 실려 있다.18 이후로 두 사람이 평생 말을 섞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근거는 없다.

4-4. 남원, 무안, 그리고 울산

칠천량 한 달 뒤 수군 장수들은 육지로 올라 남원성 공격에 가담했다. 히데요시의 9월 13일 슈인조에는 8월 13일 포위, 15일 밤 함락, 요시아키 부대가 수급 55를 베어 코를 보냈다고 되어 있다. 『한칸후』에는 수급의 숫자가 51, 가토 요시아키 가문의 기록에는 “거의 1,000”으로 나온다. 그해 10월 충청도 병마절도사 이시언이 붙잡은 일본군 포로는 “수로로 온 장수 가등좌마조(加藤左馬助)“를 남원 공격에 나선 장수로 진술했다. 『선조실록』에서 요시아키가 이름으로 나오는 곳은 이 한 군데다.19

9월 명량해전에 요시아키가 참전했다는 설명이 한국어 자료에 보이지만, 토도 가문 기록의 명량 장면에는 토도·구루시마 미치후사·모리 타카마사만 나오고 요시아키는 없다.20 그 뒤 행적은 조선인의 기록으로도 확인된다. 포로로 끌려간 강항은 일본에서 써 보낸 「적중봉소(賊中封疏)」의 왜장 명단에 “가토 사마노스케는 배로 무안에 이르렀다”고 적었고, 역시 포로로 끌려간 정희득도 『해상록(海上錄)』에 “하등좌마조(賀藤佐馬助) 배로 무안에 이르고, 남해에 진을 쳤다”고 남겼다. 명량 이후 서해 쪽으로 올라간 일본 수군 장수들 가운데 그도 있었고, 겨울에는 남해에 성을 쌓고 머물렀다고 볼 수 있다.21

1597년 말 명·조선 연합군이 울산 왜성을 포위하자 수군 장수들도 구원에 나섰다. 『한칸후』에는 이듬해 정월 6일 구원군이 적을 깨뜨렸고 이날 요시아키 부대가 1,535급을 베었다고 나와 있지만, 이 숫자는 가토 요시아키 가문의 기록에서만 보인다. 『와키자카카덴키』에서는 4일 총공격으로 적을 쫓았고, 정월 17일 히데요시 슈인조에는 “구원군이 나가자 적이 물러났다”는 말만 있다.22

5. 서명하지 않은 연판, 그리고 세키가하라

5-1. 순천·울산을 버리자는 연판

울산 구원전이 끝난 1598년 정월, 조선에 있던 장수들은 전선을 축소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동쪽 끝의 울산과 서쪽 끝의 순천을 버리고 그 사이 거점만 지키자는 내용이었다. 1월 26일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하치스카 이에마사 등 13명의 장수가 연명으로 이 안을 올렸고, 히데요시는 3월에 이 연판을 물리쳤다.23

요시아키는 당시 이 연판에 서명하지 않았다. 1598년 5월 3일자 히데요시 슈인조(에히메현 역사문화박물관 소장)에 그 사실이 이렇게 나와 있다.

殊今度順天蔚山兩城可引入旨、各雖令連判、不及加判、神妙之至御感不斜候、依之…三万七千石爲御加增被下之、本領六万三千石、都合拾万石之內、壹万石者可爲無役

특히 이번에 순천·울산 두 성을 거두어들이자며 모두가 연판했는데도 그대는 서명하지 않았으니 기특하기 그지없어 크게 감탄하셨다. 이에 3만 7천 석을 가증해, 본령 6만 3천 석과 합친 10만 석 가운데 1만 석은 군역을 면제한다. — 히데요시 슈인조, 게이초 3년(1598) 5월 3일, 에히메현 역사문화박물관 소장

같은 날 부교 네 명이 보낸 첨장(添状, 슈인조에 덧붙여 보내는 서장)도 같은 내용이고, 슈인조에는 “다이묘 가운데 겁쟁이가 있으면 그 영지를 몰수해 그대에게 한 지역을 더 주겠다”는 문장까지 있다.24 칠천량에서 감찰관들에게 질책받은 지 1년도 안 되어 그는 바로 그 해전에서 세운 공과 함께 철수에 반대한 것을 인정받아 10만 석을 받았다.

『한칸후』에는 이 장면이 극적으로 그려져 있다. 30여 명의 다이묘가 모두 서명하는데 요시아키 혼자 거부했고, 모리 카츠노부(毛利勝信) 등이 여러 번 권하자 “여러분 의견에 따르지 않은 죄로 목이 베인다 해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잘라 말했다는 것이다.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연명한 장수는 13명이고, 『한칸후』의 같은 문단에서도 오타 카즈요시·모리 타카마사와 감찰관들, 울산성의 가토 기요마사는 서명하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23 목이 베인다 해도 후회하지 않겠다는 얘기는 『한칸후』에만 나오지만, 여기에 서명하지 않은 덕분에 히데요시에게 10만 석을 받은 것은 1차 문서로 확인되는 사실이다.

5-2. 히데요시 사후

1598년 8월 히데요시가 사망했고, 요시아키가 정확히 언제 조선에서 귀국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5월 3일자의 부교 첨장에 “귀국하면 먼저 이쪽으로 오라”는 말이 적혀 있으니 그때까지는 조선에 있었다고 봐야겠다. 노량해전에 그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한칸후』에는 히데요시 사후 오사카 부교들과 이에야스가 대립해 후시미·오사카가 소란스러울 때, 요시아키가 이에야스를 찾아가 “세상이 어쩐지 소란스럽지만 저는 별일 없으리라 보고, 남겨 두었던 무사 50기 가운데 20기를 오늘 아침 이요로 돌려보냈습니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1599년 초의 장면으로 보이고 출전은 『한칸후』 하나다. 그해 윤3월 무장들이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를 몰아붙인 사건(7장 습격 사건)에 요시아키를 포함시키는 사료도 있지만, 사건 직후인 윤3월 5일 이에야스가 쓴 서장의 일곱 명 명단에는 요시아키의 이름이 없다.25

5-3. 기후성과 세키가하라

1600년 요시아키는 이에야스의 아이즈 정벌에 처음부터 따라갔고, 이시다 미츠나리가 거병하자 아이즈 정벌에 참전했던 다른 도요토미계 다이묘들과 함께 이에야스 측에 서기로 하고 동군에 합류했다. 선봉 장수들은 서군과 마주한 오와리의 키요스성에 모여 있었지만, 이에야스는 멀리 동쪽의 본거지인 에도에 머문 채 움직이지 않았다. 8월 13일 이에야스는 장수들의 사정을 알아보려고 무라코시 시게스케(村越茂助)를 키요스로 보냈고, 이를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와 요시아키 앞으로 알린 서장이 남아 있다.26

여기서 무라코시 시게스케가 키요스성에 당도한 시점에서 논쟁이 되는 장면이 있다. 키요스성에 모인 선봉 장수들이 이에야스의 본진은 언제 출진하냐고 묻자 무라코시가 “아직 그런 얘기는 듣지 못했다”고 답했고, 이에 한 장수가 “우리 처자가 모두 오사카에 있으니 먼저 한판 싸워 보이지 않으면 나이후(內府, 이에야스)께서 오시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며 기후성 공격을 결정했다는 이야기다. 서군이 장악한 오사카에 처자를 인질로 둔 장수들이 언제 마음을 바꿀지 모르니 이에야스로서는 믿고 나설 수 없다, 그러니 먼저 싸워서 각오를 보여 주자는 뜻이다. 다만 이에야스가 실제로 이런 이유로 출진을 미뤘는지는 당시 문서로 확인되지 않는다.

설명이 길었는데 논쟁이 되는 것은 여기서 이렇게 외친 “한 장수”가 누구냐는 것이다. 에도 시대 기록과 대중서에 따르면 이렇게 외친 장수는 후쿠시마 마사노리다. 하지만 『한칸후』에는 요시아키로 나오고, “세상에서 후쿠시마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며 이에야스가 이 일을 기뻐해 보낸 서신이 지금도 가토 가문에 있다는 근거까지 붙어 있다. 또한 19세기 막부가 편찬한 『도쿠가와짓키(徳川実紀)』에도 요시아키로 나온다.26

가토 가문에 남은 8월 23일자 이에야스 서장 “무라코시 시게스케 편으로 하나하나 말씀하신 바를 들었다, 기쁘다”는 같은 날 같은 문구로 구로다 나가마사·아사노 요시나가 등 열 명 가까운 장수에게 함께 발급되었다. 키요스의 장수들이 함께 보낸 답장에 대한 회신이어서 문제의 발언을 요시아키가 했는지는 증명하지 못하나, 반대로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했는지도 증명하지 못한다. 이 발언을 누가 했는지 1차 사료로 따진 연구는 확인되지 않는다.26

기후성은 8월 23일 함락되었다. 9월 5일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요시아키에게 기후·오가키 방면의 공을 “참으로 비할 데 없다”고 치하하는 서장을 보냈다. 9월 15일 세키가하라 본전에서 그가 구로다·호소카와 등과 함께 이시다 미츠나리 부대와 싸웠다는 설명이 있으나 이는 메이지 시대 참모본부가 그린 포진도를 따른 것일 뿐이고, 시라미네 준은 이 포진도의 근거 자체를 의문시한다. 본전에서 그의 위치를 보여 주는 1차 사료는 없다.27

세키가하라 전투 승리 후 요시아키는 이요에서 10만 석을 더 받아 20만 석이 되었다. 가증 문서는 확인되지 않지만, 그해 12월 이요의 이웃 영주가 된 토도 타카토라와 이요 영지를 나눈 각서가 남아 있어 20만 석 규모를 뒷받침한다.28 칠천량해전에서 공을 다투고, 평생 말을 안 했다는 설도 있는 두 사람이 이번에는 이요에서 영지의 경계를 맞댄 이웃이 된 것이다.

6. 이요 20만 석 — 마츠야마성과 에도 근무

6-1. 가츠야마를 고르다

20만 석 다이묘에게 마사키성은 좁았다. 세토내해(瀬戸内海)의 거친 바다인 이요나다(伊予灘)에 바로 붙어 있어 풍파가 거셌고 성 아래 터도 작았다. 요시아키는 도고 평야 한가운데 홀로 솟은 해발 132m의 가츠야마(勝山)를 새 거성 자리로 골랐다. 마츠야마성 공식 사이트와 『에히메현사(愛媛県史)』에 따르면 1601년 축성 허가가 났고 1602년 정월 공사를 시작했으며, 1603년 10월 요시아키가 마사키에서 가신과 상인을 이끌고 이주해 이곳을 “마츠야마”로 이름 붙였다. 후쿠다 지즈루는 가토 가문 연보를 근거로 착공을 1603년으로 본다.29

축성은 요시아키 혼자서 한 일이 아니었다. 가신 아다치 시게노부(足立重信)가 공사 감독을 맡았다. 그는 축성에 앞서 이요가와(伊予川)의 물길을 고쳤고, 유야마가와(湯山川, 지금의 이시테가와)를 남서쪽으로 돌려 이요가와와 만나게 했다. 성 아래 땅이 홍수에 잠기지 않게 해서 마을이 들어설 자리를 만든 공사였다. 이요가와는 지금도 그의 이름을 따 시게노부가와(重信川)라고 부른다. 안타깝게도 시게노부는 성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1625년 세상을 떠났고, 유언대로 성이 보이는 언덕에 묻혔다.30

6-2. 25년을 짓고도 완성하지 못한 성

마츠야마성의 공사는 요시아키가 아이즈로 떠난 1627년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공식 사이트에는 “축성 공사가 약 4반세기 이어졌으나 성곽이 미완성인 채로 요시아키는 아이즈로 옮겼다”고 나와 있고, 뒤를 이어 마츠야마 영주가 된 가모 타다치카(蒲生忠知)가 니노마루를 완성했다. 『에히메현사』에는 아이즈로 옮겨 갈 무렵 거의 완성되었다고 나와 있다. 『에히메현사』에 따르면 요시아키 때의 천수는 5층이었고, 공식 사이트에 따르면 1642년 마츠다이라 가문이 3층으로 고쳤다. 그 천수는 1784년 벼락으로 불탔고 지금 천수는 1854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31 가츠야마 위에 성을 두고 그 아래에 마을을 앉힌 배치는 그가 정했다.

낮은 언덕 위 석벽에 흰 벽의 망루와 천수가 이어진 성을 들판 건너에서 찍은 채색 엽서. 아래쪽에 영문으로 The Matsuyama Castle이라 적혀 있고 손글씨 메모가 있다.
1906년경의 마츠야마성 채색 엽서(퍼블릭 도메인)

6-3. 에도에 남겨진 다이묘

『한칸후』에 따르면 세키가하라 이후 요시아키는 늘 에도에 머물며 쇼군 곁에서 근무했다. 1614년 오사카 겨울의 진 당시 막부는 그를 에도에 남겼다. 동시대 기록 『도다이키(当代記)』에는 “후쿠시마 사에몬노다유·구로다 치쿠젠노카미·가토 사마노스케, 이 세 사람은 에도에 남겨졌다”고만 나와 있다. 도요토미 가문의 은혜를 입은 다이묘라 의심받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당시 기록에는 없고, 1925년 도쿠토미 소호가 “주의 인물로서 에도에 억류되었을 것이다”라고 추측한 것이 확인되는 최초의 기록이다. 말하자면 비교적 최근에 나온 해석인 셈이다. 오사카 겨울의 진에는 아들 아키나리가 군세를 이끌고 나갔고, 이듬해 오사카 여름의 진에는 요시아키도 히데타다의 본진에 따라갔다.32

1622년 9월 15일 에도성 니시노마루에서 세자 이에미츠가 처음 갑옷을 입는 의식이 열렸을 때, 갑옷을 입혀 주는 역을 요시아키가 맡았다. 『한칸후』와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에 모두 이 일이 나오고, 『한칸후』에는 “세상에 드문 영예”였다는 평까지 붙어 있다. 『한칸후』에는 요시아키가 거듭 사양하다 “자자손손 두 마음을 품지 않겠다”는 키쇼몬(起請文, 신불에 맹세하는 서약문)을 써 바치고 면해 달라고 했으나 끝내 허락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옛사람이 말했다”는 단서와 함께 실려 있다. 사양과 키쇼몬은 18세기 일화집에도 비슷하게 나오지만 동시대 문서로는 확인되지 않는다.33

7. 아이즈 40만 석과 죽음

7-1. 1627년 아이즈로

1627년 정월 아이즈 와카마츠 영주 가모 타다사토(蒲生忠郷)가 후사 없이 25세로 죽었다. 막부는 가모 가문의 아이즈 영지를 거두고, 동생 타다치카에게 요시아키의 이요 마츠야마 20만 석을 주었다. 요시아키는 2월 10일 아이즈 와카마츠 40만 석으로 옮겼다. 두 사람이 영지를 맞바꾼 것이다. 3월에는 아들 아키토시(明利)에게 미하루 3만 석, 사위 마츠시타 시게츠나(松下重綱)에게 니혼마츠 5만 석이 주어졌고, 두 영지 모두 요시아키의 지휘 아래 두어졌다. 『한칸후』에는 여기에 요시아키가 맡아 관리하던 2만 석까지 더해 “50만 석”이라고 나오지만, 영지 목록에 적힌 실제 석고는 43만 5천여 석이다.34 시게츠나는 니혼마츠에 들어간 지 반년 만인 그해 10월에 죽었고, 이듬해 아키토시가 니혼마츠로, 시게츠나의 아들 나가츠나가 미하루로 자리를 바꾸었다.

아이즈는 무츠·데와를 누르는 요충이었고, 동쪽 센다이에는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가 있었다. 『도쿠가와짓키』에는 이런 곳은 도쿠가와 일문이나 후다이(譜代, 대대로 도쿠가와 가문을 섬긴 가신) 숙장이 아니면 둘 수 없는데 외양(外様,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 출신이 아닌 다이묘)인 요시아키가 맡게 되었다며, 그 까닭으로 “세상에 전하는 바로는”이라는 단서를 붙인 장면이 실려 있다. 후임을 정하는 회의에서 토도 타카토라가 나서 “가토 사마노스케만 한 자가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도요토미 가문을 섬긴 시즈가타케 칠본창이고, 세키가하라에서 우리 집안에 뜻을 보냈으며 오사카 때도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매우 고지식한 자입니다”라고 추천했다는 것이다. 이어서 두 사람이 조선에서 공을 다툰 뒤 얼굴을 마주쳐도 한마디도 하지 않는 사이였는데 사사로운 분을 누르고 추천한 타카토라의 도량에 모두 감탄했다는 말이 붙는다.35

이 추천담의 출전으로 확인되는 것은 『도쿠가와짓키』의 “세상에 전하는” 단락, 1818년 토도 가문이 조상을 기려 펴낸 가문 기록, 1869년 『메이쇼겐코로쿠(名将言行録)』다. 토도 가문 기록에는 쇼군 이에미츠가 타카토라에게 물었고, 그날 요시아키가 찾아와 사례하며 두 사람이 화해했다고 나와 있다. 1942년 『와카마츠시사(若松市史)』에서는 물은 사람이 전 쇼군 히데타다이고, 타카토라 자신이 먼저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늙었다며 사양하고 요시아키를 밀었다고 되어 있다. 추천받은 쇼군부터 출전마다 다르고 동시대 문서는 없다.35

『도쿠가와짓키』의 같은 단락에는 요시아키가 처음에 사양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전장을 함께 누비던 가와무라 곤시치 같은 이들이 이제 다 죽어 쓸 만한 자가 없으니, 그저 마츠야마에서 늙은 몸을 쉬게 해 달라”고 하자 쇼군이 “네 아들 아키나리가 아비만 못하리라고는 보지 않는다”며 받으라고 했다는 것이다.35 이 역시 전승이다. 이때 요시아키는 65세였다.

7-2. 아이즈에서의 4년

아이즈 시대의 행정 실적은 대부분 1930년 『가토 요시아키 공』과 1942년 『와카마츠시사』 같은 근대 편찬물을 근거로 한다. 시라카와 가도를 고쳤고, 영내 옻나무를 조사해 그루마다 옻을 거두었으며, 가루이자와 은광에서 매달 은 40관을 냈고, 아이즈 도기와 칠기를 장려했다는 목록이 있다. 동시대 문서로는 확인되지 않는다.36

1631년 9월 12일 요시아키는 에도 사쿠라다 저택에서 병으로 죽었다. 69세였다. 같은 해 장남 아키나리가 40만 석을 이었다. 『가토 요시아키 공』에 따르면 아자부 젠푸쿠지(善福寺)에서 화장해 유골을 교토 히가시야마의 오타니 소뵤에 묻었다. 히가시혼간지가 관리하는 정토진종의 묘소다. 『와카마츠시사』에는 고야산에 모셨다고 되어 있어 엇갈린다.37

맑은 하늘 아래 흰 벽에 회색 기와를 얹은 다섯 층 천수가 소나무 숲 위로 솟아 있다.
아이즈 와카마츠성(츠루가성) 천수. 1965년 재건(2007년 촬영, 퍼블릭 도메인)

8. 일화 속의 요시아키

8-1. 열 장의 접시

요시아키의 인품을 말할 때 흔히 꺼내는 일화가 둘 있다. 하나는 “열 장의 접시”다. 18세기 초에 죽은 사나다 조요(真田増誉)의 일화집 『메이료코한(明良洪範)』 권11에 처음 나오는 이야기다. 요시아키가 명나라 성화 연간에 만든 작은 접시 10장을 아꼈는데, 손님 접대 때 고쇼 하나가 그중 1장을 깨뜨리고 자숙하려 하자 불러내 남은 9장을 모두 깨뜨렸다. 그리고 “9장이 남아 있는 한 ‘한 장은 누가 실수로 깼다’는 말과 함께 네 실수가 언제까지고 입에 오르내릴 것이다. 아무리 귀한 그릇이라도 가신과 바꿀 수 없다. 가신은 내 팔다리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접시를 깬 당사자가 늙어서 들려준 이야기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38

이 이야기는 전해지면서 조금씩 디테일이 바뀌었다. 『메이료코한』의 접시는 중국에서 들어온 “무시쿠이 난킹(虫喰南京)“인데, 1907년 미나쿠치에서 펴낸 향토지에서는 “조선 출병 때 가져온 청자 접시”가 되었고, 요시아키가 하루 동안 말없이 있다가 다음 날 정원 돌에 던져 깨뜨리는 장면이 더해졌다. 지금 일본어 자료에서 흔히 보이는 “남만(南蛮) 접시”는 원문의 “남경(南京)“을 잘못 옮긴 것이다.38

8-2. 칠천량의 소년

다른 하나는 『조잔키단(常山紀談)』 권10에 실린 짧은 이야기다. 외손자가 젊었을 때 외할아버지에게 무공을 물었더니 “이제 늙어서 지난 일은 다 잊었다”고만 했다. 가라시마(칠천량) 해전을 묻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十五六歳なる小姓の船に乗移る時、矢に中り海に落ちて死したりき。不便の至りなり

열대여섯 살 고쇼(小姓, 주군 곁에서 시중드는 소년 가신)가 배를 옮겨 타다가 화살에 맞아 바다에 떨어져 죽었다. 가엾기 그지없다. — 『조잔키단』 권10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39 이것도 18세기 일화집의 전승이다. 칠천량은 그가 감찰관들과 다투면서까지 자기 공을 주장한 싸움이었고, 그는 그 공으로 10만 석 다이묘가 되었다. 젊어서는 공을 다투던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는 무공을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이고, 『조잔키단』이 이 일화를 실은 의도도 거기에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다만 편찬자의 생각을 짐작한 것일 뿐 요시아키 본인의 마음을 보여 주는 기록은 아니다.

9. 아이즈 소동과 미나쿠치의 가토 가문

9-1. 호리 몬도, 아이즈를 떠나다

요시아키가 죽고 8년 뒤 아이즈에서 가로 호리 몬도(堀主水)가 일족과 함께 영지를 떠났다. 『한칸후』에 따르면 발단은 몬도의 하인과 다른 가신의 하인이 벌인 다툼이었다. 아키나리가 몬도 쪽이 잘못했다고 판정하자 몬도가 다시 따졌고, 아키나리는 몬도를 내치고 직책을 몰수했다. 이에 반감을 가진 몬도는 동생 둘과 가신·처자 300여 명을 이끌고 새벽에 와카마츠성을 나와, 나카노라는 곳에서 철포를 쏘고 구라카네가와의 다리를 불태운 뒤 떠났다. 통설은 이를 1639년 4월로 보는데, 막부 일기를 옮긴 사본에는 “4년 전 인년(寅年)“이라고 되어 있어 1638년일 가능성도 있다.40

이후 몬도는 가마쿠라와 고야산, 기이 도쿠가와 가문의 영지를 떠돌았다. 아키나리는 “제 영지와 바꿔서라도” 몬도를 잡게 해 달라고 막부에 청했고, 몬도는 1641년 3월 오메츠케(大目付, 다이묘 감찰관) 이노우에 마사시게(井上政重)에게 아키나리를 고발하는 서장을 냈다. 막부 일기를 바탕으로 한 『도쿠가와짓키』에 따르면 효조쇼(評定所, 막부의 최고 재판 기관)가 3월 15일 몬도를 심문했고, 21일 “몬도가 호소한 바가 모두 근거 없다”며 형제 셋을 아키나리에게 내주었다. 25일 쇼군 이에미츠는 후다이 다이묘들을 배석시킨 자리에서 아키나리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汝が父左馬助嘉明は。神祖台徳院殿二世の間忠勤少からず。汝に於ては未だ當代にさせる勤勞あるにもあらざれど

네 아비 사마노스케 요시아키는 이에야스·히데타다 2대에 걸쳐 충근이 적지 않았다. 너는 아직 당대에 이렇다 할 공로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 『도쿠가와짓키』 간에이 18년(1641) 3월 25일

몬도 형제는 에도 시바의 가토 가문 별저에서 처형되었다.41 가신이 주군을 고발한 소송에서 막부는 주군의 편을 들었고, 그 자리에서 쇼군은 아키나리보다 죽은 아버지의 공을 먼저 꺼냈다.

9-2. 1643년의 반납

2년 뒤인 1643년 5월, 아키나리는 아이즈 영지(『도쿠가와짓키』 기준 42만 석)를 모두 막부에 반납했다. 막부 일기에는 “평소 병으로 큰 번의 다스림을 감당할 수 없어 아이즈 영지를 바치겠다고 거듭 청원했다”고 되어 있다. 공식적인 사유는 병이었으나 『한칸후』의 설명은 다르다. 영지와 바꿔도 좋으니 몬도를 넘겨 달라고 청원해 원하는 대로 넘겨받아 처형한 이상 그대로 있을 수 없었고, 그래서 병을 핑계로 영지를 바치고 세상을 버렸다는 것이다.42 동생 아키토시는 1641년에 이미 죽었는데, 막부는 “그 정황이 좋지 않다”며 니혼마츠의 영지 3만 석도 거두었다.

몬도의 고발 내용, 처형 방식, 반납의 진짜 이유는 지금도 정리되지 않았다. 아키나리가 탐욕스러운 영주였다는 이야기는 에도 시대 후기 이후의 편찬물에서, 그를 재평가한 글은 20세기 지역사에서 나왔다. 간에이 대기근(1640–43)과 재정난이 원인이었다는 설명이 일본어 위키백과 등에 보이지만 이를 논증한 연구는 확인되지 않는다.43 『한칸후』의 평가는 짧다. “아키나리는 아버지를 닮지 않아 세상 사람들이 비웃는 정치를 했다.”

9-3. “아버지 사마노스케의 봉공”

막부 일기의 반납 허가 문장에는 뒷부분이 있다.

然といへども父左馬助御奉公をも仕候に付て、名家相續のためと被思召、式部少輔嫡男內藏助へ石見國に於て一萬石被下

그러나 아버지 사마노스케가 봉공했으므로 가명을 잇게 하려고, 시키부쇼유(아키나리)의 적남 구라노스케에게 이와미에서 1만 석을 내린다. — 막부 일기, 간에이 20년(1643) 5월 3일(『와카마츠시사』 상 수록)

아키나리의 아들 아키토모(明友)가 이와미 안노군 야마다(山田)에 1만 석을 받았고(요시나가 번), 아키나리는 그 영지에서 요양하다 1661년 70세로 죽었다. 『한칸후』에도 “쇼군가가 요시아키의 집안이 끊어질 것을 가엾게 여겨” 아키토모를 불러냈다고 나와 있다.42

해자 위에 놓인 낡은 나무 다리. 다리 건너편 석벽 위로 흰 벽의 망루와 성문이 보이고 단풍 든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다.
미나쿠치성 터의 해자와 다리. 가토 가문은 1682년부터 이곳을 거성으로 삼았다(2022년 촬영, CC0)

아키토모는 1682년 오미 미나쿠치로 옮겨 2만 석이 되었다. 아들 아키히데(明英) 때인 1695년 시모츠케 미부로 잠시 옮겼다가 1712년 요시노리(嘉矩) 때 미나쿠치로 돌아왔고, 가토 가문은 1871년 폐번까지 미나쿠치 번주로 남았다. 아키토모는 1672년 가문의 가보를 엮었고, 미나쿠치 가토 가문은 히데요시와 이에야스의 문서를 포함한 가문 문서 1만 3천여 점을 대대로 보관했다. 이 글에서 인용한 칸조와 슈인조 상당수가 이 가문에 전해진 것이다. 1829년 미나쿠치에는 요시아키를 모신 사당이 세워졌는데, 지금의 도에이 신사(藤栄神社)가 그것이다.44

출처

1차·준1차 사료 (쪽 이미지 또는 활자 번각본으로 확인한 것)

  • 하시바 히데요시 칸조(1583년 6월 5일), 히데요시 서장·슈인조(1584년 11월 17일, 1585년 10월 23일): 「가토 문서(加藤文書)」·「오미 미나쿠치 가토 가문 문서(近江水口加藤家文書)」,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4·10·22책(도쿄대학 사료편찬소 데이터베이스 쪽 이미지)
  • 『시바타 다이지키(柴田退治記)』(오무라 유코, 1583, 『히데요시지키(秀吉事記)』 수록), 『호안 다이코키(甫庵太閤記)』(1620년대):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4책 수록분. 『가와스미 다이코키(川角太閤記)』는 시즈가타케 글을 거쳐서만 언급
  • 『시료소란(史料綜覧)』·「사료고본(史料稿本)」(도쿄대학 사료편찬소): 아와지 수여, 분고 구원(『킷카와가문서(吉川家文書)』), 사츠마 금제(『삿판큐키 고슈(薩藩旧記後集)』), 히라사성, 오다와라, 이요 마사키
  • 히데요시 슈인조(1592년 3월 13일·4월 19일, 1597년 8월 9일·9월 13일, 1598년 정월 17일·5월 3일), 감찰관 연서장(1597년 7월 19일·23일, 「토도 백작가 문서(藤堂伯爵家文書)」), 부교 첨장(1598년 5월 3일), 요시아키 서장(윤3월 8일), 히데타다 서장(1600년 9월 5일), 이요 영지 분할 각서(1600년 12월): 이요사담회 편 『가토 요시아키 공(加藤嘉明公)』(1930) 수록 번각,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 쪽 이미지
  • 『한칸후(藩翰譜)』(아라이 하쿠세키, 1702) 권7하 가토 항목: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소장 1896년 활자본 저본 이미지와 대조
  • 『와키자카카덴키(脇坂家伝記)』·토도 가문 각서(『토도케 오보에가키(藤堂家覚書)』): 『카이테이 시세키슈란(改定史籍集覧)』 15책
  • 참모본부 편 『니혼센시 초센에키(日本戦史 朝鮮役)』 문서·보전(1924)에 수록된 발췌: 「구키 요시타카 안골포의 전공(九鬼嘉隆安骨浦ノ戰功)」, 『토도카후(藤堂家譜)』, 『세이칸이쿤로쿠(征韓偉勲録)』, 『세이칸로쿠(征韓録)』, 『조선진기(朝鮮陣記)』
  • 이이다 타다히코(飯田忠彦), 『야시(野史)』 권184(1851년 성립, 1882년 간본)가 인용한 『사이교쿠와(碎玉話)』·『히데요시후(秀吉譜)』, 『하이겐사이 분슈(佩弦斎文集)』 권10: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
  • 『게이초넨주 보쿠사이키(慶長年中卜斎記)』: 일본어 위키백과 「7장 습격 사건(七将襲撃事件)」을 거쳐서만 확인
  • 이순신 장계(「견내량파왜병장(見乃梁破倭兵狀)」, 「토적장(討賊狀)」, 「등문피로인소고왜정장(登聞被擄人所告倭情狀)」)와 『난중일기(亂中日記)』: 한국고전종합DB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 『선조실록(宣祖實錄)』 30년 7월 22일·10월 3일: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강항 「적중봉소(賊中封疏)」(『수은집(睡隱集)』), 정희득 『해상록(海上錄)』 「풍토기(風土記)」: 한국고전종합DB
  • 윤병석(尹炳奭), 「『해상록』 해제」(한국고전번역원, 1974):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재게시본, https://m.cafe.daum.net/jangdalsoo/kPux/60
  • 『도다이키(当代記)』: 『시세키잣산(史籍雑纂)』 2
  • 『도쿠가와짓키(徳川実紀)』 「다이유인도노 고짓키(大猷院殿御実紀)」 권9·18·46·53, 「도쇼구 고짓키(東照宮御実紀)」: 국사대계판(1904) 쪽 이미지
  • 『메이료코한(明良洪範)』 권11(국서간행회, 1912), 『조잔키단(常山紀談)』 권10(1912), 『메이쇼겐코로쿠(名将言行録)』 권31·37, 『부쇼칸조키(武将感状記)』(1716), 오츠키 반케이(大槻磐渓) 『긴코시단(近古史談)』(1864):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
  •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 『가토가 연보(加藤家年譜)』: 후쿠다 지즈루(2018)의 행동표를 거쳐서만 확인

현대 연구자·학술 논문 (신뢰도 A–B)

  • 야마우치 하루토모(山内治朋), 「가토 요시아키 발급문서의 기초적 연구(加藤嘉明発給文書の基礎的研究)」, 『에히메현 역사문화박물관 연구기요(研究紀要)』 27(2022): 서지 확인
  • 야마우치 하루토모, 「아다치 시게노부 문서와 가토 요시아키의 시대(足立重信文書と加藤嘉明の時代)」, 『지방사연구(地方史研究)』 75-1(2025): 서지 확인
  • 무라이 유키(村井祐樹) 편, 『오미 미나쿠치 가토 자작가 문서 도요토미 정권편(近江水口加藤子爵家文書 豊臣政権編)』(도쿄대학 사료편찬소, 2021): 서지 확인
  • 후쿠다 지즈루(福田千鶴), 「사료 소개: 다케다 문고 전래 가토 요시아키 앞 서장(史料紹介 竹田文庫伝来加藤嘉明宛書状)」, 『규슈문화사연구소 기요(九州文化史研究所紀要)』 61(2018)
  • 후쿠다 지즈루, 『어가소동(御家騒動)』(中公新書, 2005): 출판사 소개로만 확인
  • 시라미네 준(白峰旬), 『신해석 세키가하라 합전의 진실(新解釈 関ヶ原合戦の真実)』(宮帯出版社, 2014), 「도요토미 7장 습격 사건(豊臣七将襲撃事件)」 관련 논문(『사학논총(史学論叢)』 48, 2018): 2차 소개를 거쳐 확인
  • 도쿠토미 소호(徳富蘇峰), 『킨세이 니혼 코쿠민시(近世日本国民史)』(1925)
  • 니시야마 츠바사(西山翼), 「규슈 공략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토 요시아키의 동향(九州攻めにおける脇坂安治・加藤嘉明の動向)」, 『역사연구(歴史研究)』 725(2024): 서지만 확인
  • 다니구치 가쓰히로(谷口克広), 『오다 노부나가 가신 인명사전(織田信長家臣人名辞典)』 제2판(2010): 일본어 위키백과를 거쳐서만 확인
  • 『히데요시노 초센케이랴쿠(秀吉の朝鮮経略)』(1939): 진립표 인용분만 확인, 저자는 확인하지 못함

공식·표준 참고자료 (신뢰도 B)

  • 『에히메현사 근세 상(愛媛県史 近世上)』(1986) 「가토 요시아키 시대(加藤嘉明時代)」, 『와카마츠시사(若松市史)』 상(1942), 이요사담회 편 『가토 요시아키 공(加藤嘉明公)』(1930)과 그 연보가 인용한 『가토 요시아키 사적 조사서(加藤嘉明事績調査書)』, 『아이치현사요(愛知県史要)』(1931)
  • 마츠야마성 공식 사이트 「역사와 인물(歴史と人物)」, 에히메현 교육위원회 「아다치 시게노부의 묘(足立重信の墓)」 해설, 에히메현 역사문화박물관 「에히메의 역사문화 모노가타리(えひめの歴史文化モノ語り)」, 문화유산 온라인(文化遺産オンライン)
  • 도쿠가와 임정사연구소 「도쿠가와 이에야스 문서 총목록(徳川家康文書総目録)」(2020)
  • 시가현 신사청 신사 데이터베이스 「도에이 신사(藤栄神社)」, 고카시 자료
  • 『야마카와 일본사소사전(山川 日本史小辞典)』, 『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 『브리태니커 소항목사전(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코토뱅크)

전문 사이트·대중 매체 (신뢰도 C–E)

  • 일본어 위키백과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가토 노리아키(加藤教明)」·「시즈가타케 칠본창(賤ヶ岳の七本槍)」·「울산성 전투(蔚山城の戦い)」·「7장 습격 사건(七将襲撃事件)」·「아이즈 소동(会津騒動)」·「가토 아키나리(加藤明成)」·「헤츠기가와 전투(戸次川の戦い)」·「명량해전(鳴梁海戦)」 항목
  • 와타나베 다이몬(渡邊大門), 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 기고
  • 1907년 시가현 고카군 향토지 『카후카 이호로쿠(鹿深遺芳録)』, 1818년 토도 가문 현창서 『잇슈로쿠(聿脩録)』(『국역 잇슈로쿠(國譯聿脩録)』, 1930):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

확인하지 못한 것

  • 요시아키를 단독으로 다룬 학술 평전은 찾지 못했다. 1차 문서 연구는 야마우치 하루토모의 논문과 2021년 사료집이 중심이지만 이번 리서치에서는 본문을 열람하지 못하고 『가토 요시아키 공』(1930)의 번각과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로 문서를 확인했다.
  • 아와지 영지의 석고, 시즈키성 거성 여부, 종5위하 사마노스케 서임 연월.
  • 1598년 정월 연판에 서명한 13명의 정확한 명단과 문서 소재.
  • 요시아키의 조선 귀국 날짜, 1600년 이요 가증 문서.
  • 마츠야마성 착공 연도(1602년 통설과 1603년설).
  • 묘소(오타니 소뵤와 고야산), 법명 표기, 아들들의 출생 순서(『한칸후(藩翰譜)』는 아키토시를 둘째, 『도쿠가와짓키(徳川実紀)』는 셋째로 적는다).
  • 호리 몬도 출분 연도(1638년과 1639년), 고발 조항 수, 처형 방식, 아이즈 반납의 실제 원인.
  • 마츠야마 로프웨이 승강장 옆 요시아키 기마상의 건립 연도와 기증 단체는 출처마다 엇갈려 본문에 쓰지 않았다.
  • 한국어로 요시아키를 주제로 다룬 논문(KCI)과 단행본은 찾지 못했다. 에도 초기 일본 책들이 칠천량해전을 어떻게 그렸는지 다룬 김준배의 논문 「일본 조선군기물(朝鮮軍記物)에 그려진 칠천량 해전」(『일본언어문화』 36, 2016)이 있으나 본문은 확인하지 못했다.

Footnotes

  1. 『한칸후(藩翰譜)』 권7하 가토 항목(f091.p001,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780523 저본 0048L–0049R). 『호안 다이코키(甫庵太閤記)』 권6은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4책 p.600 수록분으로 확인했다. ↩ ↩2

  2. 『한칸후(藩翰譜)』 원문은 “미카와의 주민 산노조 아무개(三之亟某)“이고, 주에는 어떤 책에 히로아키(廣明)라고 나오지만 계보에 보이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토모아키(朝明)를 아버지로 보는 사전과 할아버지로 보는 사전이 갈리고, 출생지를 미카와 하즈군(幡豆郡) 나가라(永良)로 특정하는 것은 근대 지방지와 사전부터다. 브리태니커 소항목사전·『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코토뱅크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일본어 위키백과 「가토 노리아키(加藤教明)」(다니구치 가쓰히로 『오다 노부나가 가신 인명사전(織田信長家臣人名辞典)』 제2판을 출전으로 듦), 『아이치현사요(愛知県史要)』(1931)의 출생지 표기. 원 사전은 열람하지 못했다. ↩

  3. 『야마카와 일본사소사전(山川 日本史小辞典)』(코토뱅크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이 사전에는 그보다 앞서 하시바 히데카츠(羽柴秀勝)를 섬겼다고도 나오지만 어느 히데카츠인지 밝히지 않았다. 히데요시의 친아들 이시마츠마루 히데카츠는 1576년에 어려서 죽었고, 양자 오츠기마루 히데카츠(오다 노부나가의 4남)는 1568년생이라 어느 쪽이든 나이와 시점이 맞지 않는다. 같은 코토뱅크의 『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에는 처음부터 히데요시를 섬겼다고 나와 있다. 『시바타 다이지키(柴田退治記)』의 측근 명단은 『히데요시지키(秀吉事記)』 수록분,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4책 p.599. 이름 표기는 도쿄대학 사료편찬소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綱文(1584년 서장 수신인 “加藤茂勝嘉明”, 1593–1600년 문서 “加藤茂勝(嘉明)“)에 따랐다. ↩ ↩2

  4. 「가토 문서(加藤文書)」 하시바 히데요시 칸조, 덴쇼 11년 6월 5일,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4책 pp.595–596. 같은 날짜의 다른 칸조는 같은 책 pp.594–598(浅野家旧記·脇坂文書·平野文書·片桐家御内書御朱印等写·古文書·松下長智氏所蔵文書·宇留嶋文書). ↩

  5. 『히데요시지키(秀吉事記)』 수록 『시바타 다이지키(柴田退治記)』, 『호안 다이코키(甫庵太閤記)』 권6,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4책 pp.599–601. “칠본창” 명칭이 『호안 다이코키(甫庵太閤記)』와 『가와스미 다이코키(川角太閤記)』 가운데 어느 쪽에서 먼저 나왔는지는 시즈가타케 전투 글 7장 참조. ↩

  6. 「오미 미나쿠치 가토 가문 문서(近江水口加藤家文書)」 히데요시 서장(덴쇼 12년 11월 17일),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10책 pp.180–181. 「오미 미나쿠치 가토 자작가 문서(近江水口加藤子爵家文書)」 히데요시 슈인조(덴쇼 13년 10월 23일), 같은 책 11편 22책 p.55. ↩ ↩2

  7. 『시료소란(史料綜覧)』 덴쇼 14년 11월 2일(11-912 p.142). 1만 5천 석은 일본어 위키백과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에 출전 없이 나온다. 시즈키성은 효고현 교육위원회 「아와지섬의 성 지도(淡路島のお城マップ)」의 “城主:加藤嘉明か” 표기(검색 결과로만 확인). ↩

  8. 「사료고본(史料稿本)」 덴쇼 14년 11월 20일(『킷카와가문서(吉川家文書)』), 덴쇼 15년 4월 28일(『삿판큐키 고슈(薩藩旧記後集)』 금제 4월 27일). 헤츠기가와 참전 장수는 『시료소란(史料綜覧)』 덴쇼 14년 12월 13일과 일본어 위키백과 「헤츠기가와 전투(戸次川の戦い)」를 대조했다. 히라사성 공격에서 수군의 움직임은 니시야마 츠바사(西山翼), 「규슈 공략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토 요시아키의 동향(九州攻めにおける脇坂安治・加藤嘉明の動向)」, 『역사연구(歴史研究)』 725(2024)가 다뤘으나 본문은 열람하지 못했다. ↩

  9. 『시료소란(史料綜覧)』 덴쇼 18년 2월 27일·4월 1일(11-912 pp.270, 278). ↩

  10. 『시료소란(史料綜覧)』 분로쿠 4년 7월 21일(11-913 p.94), 『야마카와 일본사소사전(山川 日本史小辞典)』 “1595年(文禄4)伊予国松前6万石”. 서임 시기 판단은 6·8의 수신인·서명 표기를 근거로 한 이 글의 판단이다. ↩

  11. 「가토 문서(加藤文書)」 히데요시 슈인조(덴쇼 20년 3월 13일·4월 19일), 『가토 요시아키 공(加藤嘉明公)』(1930) 수록. 동원 병력은 『히데요시노 초센케이랴쿠(秀吉の朝鮮経略)』(1939)이 인용한 분로쿠 원년 진립표와 『가토 요시아키 공(加藤嘉明公)』 연표가 일치한다. ↩

  12. 『와키자카카덴키(脇坂家伝記)』(『카이테이 시세키슈란(改定史籍集覧)』 15책), 「코라이센센키(高麗船戦記)」(『니혼센시 초센에키(日本戦史 朝鮮役)』 보전 제39 「구키 요시타카 안골포의 전공(九鬼嘉隆安骨浦ノ戰功)」 수록,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936356, 173쪽 쪽 이미지. 이 문서가 구키 가문의 기록인지는 알 수 없다. 섬 쪽으로 물러난 쪽은 원문 “手負死人數多出來候て其儘島々へ引退候”에 주어가 없으나, 뒤이은 “鬼宿船にも手負死人數多候間”의 “も(~에도)“로 보아 조선 수군으로 읽었다), 이순신 「견내량파왜병장(見乃梁破倭兵狀)」(『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권2). ↩

  13. 이순신 「토적장(討賊狀)」(『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권3), 『난중일기(亂中日記)』 계사년 2월 21·22일. 『한칸후(藩翰譜)』의 “2월 21일 적선 탈취”를 22일 사건과 연결하는 것은 이 글의 추론이다. ↩

  14. 『와키자카카덴키(脇坂家伝記)』, 「가토 문서(加藤文書)」 정월 28일 슈인조(연도는 가보가 분로쿠 3년으로 비정), 『시료소란(史料綜覧)』 분로쿠 3년 2월 20일(11-913 p.50). ↩

  15. 「가토 문서(加藤文書)」 히데요시 슈인조(게이초 2년 8월 9일), 『가토 요시아키 공(加藤嘉明公)』 수록. 『선조실록(宣祖實錄)』 30년 7월 22일 선전관 김식 보고. 『난중일기(亂中日記)』 정유년 7월 18일. ↩

  16. 「토도 백작가 문서(藤堂伯爵家文書)」 감찰관 연서장(게이초 2년 7월 19일, 7월 23일), 『가토 요시아키 공(加藤嘉明公)』 원본 55–56쪽 수록. 7월 19일 문서의 서명자는 하야카와·오타·가키미·다케나카·구마가이·모리 여섯 명이고, 7월 23일 문서에는 후쿠하라가 더해져 일곱 명이다. “앞서 두 사람”이 누구인지는 문면만으로 특정되지 않는다. ↩

  17. 『와키자카카덴키(脇坂家伝記)』, 토도 가문 각서, 『니혼센시 초센에키(日本戦史 朝鮮役)』 보전 제115에 발췌된 『토도카후(藤堂家譜)』와 『세이칸이쿤로쿠(征韓偉勲録)』(이토 가문). 이 밖에 시마즈 가문의 『세이칸로쿠(征韓録)』, 소 가문의 『조선진기(朝鮮陣記)』도 가토를 배를 빼앗은 장수에 넣는다. ↩

  18. 이이다 타다히코(飯田忠彦), 『야시(野史)』 권184가 인용한 『사이교쿠와(碎玉話)』와 『히데요시후(秀吉譜)』, 『하이겐사이 분슈(佩弦斎文集)』 권10(두 설을 대조), 『부쇼칸조키(武将感状記)』(1716). 『와카마츠시사(若松市史)』와 『가토 요시아키 공(加藤嘉明公)』 연표의 “이후 불화” 서술도 같은 계열이다. ↩

  19. 「가토 문서(加藤文書)」 히데요시 슈인조(게이초 2년 9월 13일), 『가토 요시아키 공(加藤嘉明公)』 원본 58쪽. 『한칸후(藩翰譜)』 f091.p002. 『선조실록(宣祖實錄)』 30년 10월 3일 복전감개(福田勘介) 공초. 공초의 병력 “각 1만”은 과장이다. ↩

  20. 토도 가문 각서(『카이테이 시세키슈란(改定史籍集覧)』 15책)의 명량 장면. 일본어 위키백과 「명량해전(鳴梁海戦)」은 지휘관란에만 요시아키를 올렸고 근거를 밝히지 않았다. 와키자카 야스하루 글 3장의 명량 참전 서술은 한국어 위키백과에 따른 것이다. ↩

  21. 강항 「적중봉소(賊中封疏)」(『수은집(睡隱集)』), 정희득 『해상록(海上錄)』 「풍토기(風土記)」, 『와키자카카덴키(脇坂家伝記)』(“수군 장수들이 모두 남해로 돌아와 11월 중순부터 요해를 쌓았다”). 『해상록』의 “賀藤佐馬助(舟至務安 鎭南海)“는 윤병석(尹炳奭)의 1974년 해제 「『해상록』 해제」를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2022)가 재게시한 글에서 확인했고, 한국고전종합DB 원문은 직접 열람하지 못했다. 賀藤佐馬助를 가토 요시아키로 보는 것은 통칭이 左馬助(원문 표기는 佐馬助)라는 점과 수군 장수였다는 점에 따른 비정이다. ↩

  22. 『한칸후(藩翰譜)』 f091.p002, 『와키자카카덴키(脇坂家伝記)』, 「가토 문서(加藤文書)」 히데요시 슈인조(정월 17일, 연도는 편자가 게이초 3년으로 추정). ↩

  23. 1월 26일 연명과 3월 각하는 일본어 위키백과 「울산성 전투(蔚山城の戦い)」(해당 단락 각주 없음)에 따랐고 원문 문서는 확인하지 못했다. 『한칸후(藩翰譜)』 f091.p002(저본 0050L과 대조). ↩ ↩2

  24. 히데요시 슈인조(게이초 3년 5월 3일, 에히메현 역사문화박물관 소장, 문화유산 온라인 등재)와 같은 날 부교 4명 첨장, 『가토 요시아키 공(加藤嘉明公)』 원본 62–63쪽 번각. 슈인조 사본은 본령을 6만 3천 석, 첨장은 6만 2천 석으로 적어 1천 석 차이가 있다. 에히메현 역사문화박물관 「에히메의 역사문화 모노가타리(えひめの歴史文化モノ語り)」 제8회(2017)·제132회(2022) 해설 참조. ↩

  25. 『한칸후(藩翰譜)』 f091.p002. 7장 명단은 일본어 위키백과 「7장 습격 사건(七将襲撃事件)」(시라미네 준, 『사학논총(史学論叢)』 48, 2018 인용)과 『도쿠가와짓키(徳川実紀)』·『게이초넨주 보쿠사이키(慶長年中卜斎記)』의 명단 차이를 대조했다. 윤3월 8일자 요시아키 서장(『가토 요시아키 공(加藤嘉明公)』 64쪽 수록 「마츠야마 아마노 츠루주로 소장 문서(松山天野鶴十郎氏所蔵文書)」)에는 “어제 7일 후시미에 도착했다”는 문장이 있어 사건 초기에 후시미에 없었을 가능성도 있으나, 이 서장의 연도는 편찬자의 추정이다. ↩

  26. 도쿠가와 임정사연구소 「도쿠가와 이에야스 문서 총목록(徳川家康文書総目録)」 No.3039(8월 13일), No.3103–3112(8월 23일). 『한칸후(藩翰譜)』 f091.p002(저본 0051R–0051L과 대조), 『도쿠가와짓키(徳川実紀)』 「도쇼구 고짓키(東照宮御実紀)」. 이 발언의 화자를 1차 사료로 따진 연구는 이번 리서치에서는 찾지 못했다. ↩ ↩2 ↩3

  27. 히데타다 서장(1600년 9월 5일), 『가토 요시아키 공(加藤嘉明公)』 65쪽 번각. 포진도 문제는 시라미네 준 『신해석 세키가하라 합전의 진실(新解釈 関ヶ原合戦の真実)』(2014)과 와타나베 다이몬의 Yahoo!ニュース 기고를 참조했다. ↩

  28. 1600년 12월 2일 토도 타카토라와의 이요 영지 분할 각서(슈소군 사에키 미네지로 소장 문서), 『가토 요시아키 공(加藤嘉明公)』 65쪽 번각. 『한칸후(藩翰譜)』 f091.p002 “十万石を給り、本領合て二十万石”. 후쿠다 지즈루(2018). ↩

  29. 마츠야마성 공식 사이트 「역사와 인물(歴史と人物)」, 『에히메현사 근세 상(愛媛県史 近世上)』 「가토 요시아키 시대(加藤嘉明時代)」, 후쿠다 지즈루(2018)의 행동표(『가토가 연보(加藤家年譜)』를 근거로 1603년 10월 이주). ↩

  30. 에히메현 교육위원회 지정 사적 「아다치 시게노부의 묘(足立重信の墓)」 해설, 『에히메현사 근세 상(愛媛県史 近世上)』. 유야마가와 공사 시기는 『에히메현사(愛媛県史)』가 게이초 5–6년 무렵으로 추정한다. ↩

  31. 마츠야마성 공식 사이트 「역사와 인물(歴史と人物)」, 『에히메현사 근세 상(愛媛県史 近世上)』. ↩

  32. 『도다이키(当代記)』 게이초 19년 10월(『시세키잣산(史籍雑纂)』 2), 도쿠토미 소호 『킨세이 니혼 코쿠민시(近世日本国民史)』(1925), 『한칸후(藩翰譜)』 f091.p002. ↩

  33. 『한칸후(藩翰譜)』 f091.p002,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후쿠다 지즈루 2018의 행동표 경유), 『부쇼칸조키(武将感状記)』. 『한칸후(藩翰譜)』는 요시아키를 불러 명한 사람을 “대상국가(大相國家)“로 적었는데, 같은 단락에서 이 호칭은 이에야스를 가리키고 이에야스는 1616년에 죽었으므로 1622년 일과 시점이 맞지 않는다. ↩

  34. 『도쿠가와짓키(徳川実紀)』 「다이유인도노 고짓키(大猷院殿御実紀)」 권9 간에이 4년 2월 10일·3월 14일, 『한칸후(藩翰譜)』 f091.p003. 영지 목록 “陸奥國四拾參万五千五百八拾四石三斗貳升七合”은 『가토 요시아키 공(加藤嘉明公)』이 「가토 문서(加藤文書)」로 수록한 것이고 원본은 확인하지 못했다. 마츠시타 시게츠나의 사망은 일본어 위키백과 「마츠시타 시게츠나(松下重綱)」(『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 출전). ↩

  35. 『도쿠가와짓키(徳川実紀)』 권9 간에이 4년 2월 10일 “世に伝ふるところは” 단락(국사대계판 pp.108–109, 단락 끝 출전 표기 「校合雑記。貞享書上。」가 단락 전체에 걸리는지는 판정할 수 없다). 토도 가문 기록은 『국역 잇슈로쿠(國譯聿脩録)』(1930) p.125, 『메이쇼겐코로쿠(名将言行録)』 권37, 『와카마츠시사(若松市史)』 상 pp.68–69. 『조잔키단(常山紀談)』(1912년판)에는 이 일화가 없다. ↩ ↩2 ↩3

  36. 『가토 요시아키 공(加藤嘉明公)』 연보(『가토 요시아키 사적 조사서(加藤嘉明事績調査書)』 출전), 『와카마츠시사(若松市史)』 상. ↩

  37. 『도쿠가와짓키(徳川実紀)』 권18 간에이 8년 9월 12일, 『한칸후(藩翰譜)』 f091.p003, 『가토 요시아키 공(加藤嘉明公)』 p.10, 『와카마츠시사(若松市史)』 상 p.69. ↩

  38. 『메이료코한(明良洪範)』 권11(국서간행회, 1912, p.141). 저자 사나다 조요는 1707년 사망. 후대 변형은 오츠키 반케이(大槻磐渓)의 『긴코시단(近古史談)』(1864), 『메이쇼겐코로쿠(名将言行録)』 권31, 『카후카 이호로쿠(鹿深遺芳録)』(1907) p.48, 『가토 요시아키 공(加藤嘉明公)』의 일화편을 대조했다. ↩ ↩2

  39. 『조잔키단(常山紀談)』 권10 「가토 요시아키 누케가케 고묘의 일(加藤嘉明抜懸高名の事)」 말미(1912년판 p.326). ↩

  40. 『한칸후(藩翰譜)』 f091.p004, 『와카마츠시사(若松市史)』 상 pp.69–74. 막부 일기 간에이 18년 3월 15일 “四年以前寅年彼在所逐電”은 『카후카 이호로쿠(鹿深遺芳録)』 pp.188–192가 옮긴 사본으로만 확인했다. ↩

  41. 『도쿠가와짓키(徳川実紀)』 「다이유인도노 고짓키(大猷院殿御実紀)」 권46 간에이 18년 3월 15·21·25일(출전 표기 「日記」, 국사대계판 pp.612–613), 『한칸후(藩翰譜)』 f091.p004. ↩

  42. 『도쿠가와짓키(徳川実紀)』 권53 간에이 20년 5월 2일(국사대계판 pp.702–703), 막부 일기 5월 3일(『와카마츠시사(若松市史)』 상 pp.73–74 인용), 『한칸후(藩翰譜)』 f091.p004·p005. ↩ ↩2

  43. 고발 조항 수는 『와카마츠시사(若松市史)』(7개조)와 일본어 위키백과 「가토 아키나리(加藤明成)」(21개조)가 다르다. 아키나리 재평가는 『와카마츠시사(若松市史)』와 『카후카 이호로쿠(鹿深遺芳録)』. 기근 원인설은 일본어 위키백과 「가토 아키나리(加藤明成)」에 출전 없이 나온다. 후쿠다 지즈루 『어가소동(御家騒動)』은 가중 소동 때문에 개역되었다는 통념이 18세기 이후 굳어졌다고 보지만, 이 사건을 어떻게 다루는지는 본문을 확인하지 못했다. ↩

  44. 『한칸후(藩翰譜)』 f091.p005, 『가토 요시아키 공(加藤嘉明公)』 연보, 일본어 위키백과 「가토 아키토모(加藤明友)」·「미나쿠치 번(水口藩)」, 고카시 자료(2022), 시가현 신사청 「도에이 신사(藤栄神社)」(분세이 12년 4월 권청, 메이지 4년 9월 개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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