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且元, 1556–1615) — 시즈가타케 칠본창⑤
Q: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且元)는 누구인가?
A: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밑에서 자라 도요토미 가문의 살림을 마지막까지 맡았던 무장이다. 1556년 오미(近江)에서 아사이(浅井) 가문 가신의 아들로 태어났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칸조(感状, 전공을 인정하는 문서)와 영지 3,000석을 받았고 훗날 “시즈가타케 칠본창”으로 불렸다. 그 뒤로는 전장보다는 행정 쪽에서의 활약이 더 많이 확인된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에는 아들 히데요리(秀頼)의 측근이 되어 오사카성의 재정과 외교를 도맡았고 동시에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에게서 야마토(大和) 타츠타(竜田) 영지를 받아 기나이(畿内) 행정도 맡았다. 1614년 그의 감독하에 재건한 사찰 호코지(方広寺)의 대불전에 설치한 종의 명문이 문제가 되자 슨푸(駿府)로 가서 해명하려 했지만 이에야스를 만나지 못했다. 오사카로 돌아와 가문을 지킬 방안을 내놓았다가 도리어 내통자로 몰려 성을 떠났고, 결국은 도쿠가와 진영에 서서 오사카 전투를 치렀다. 1615년 5월 28일, 히데요리가 죽은 지 20일 만에 교토에서 병으로 죽었다.
한눈에 보는 카타기리 카츠모토
| 항목 | 내용 |
|---|---|
| 이름 |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且元). 처음 이름은 나오모리(直盛), 카츠모토는 뒤에 쓴 이름 |
| 통칭·관직 | 통칭 스케사쿠(助作). 관직 히가시이치노카미(東市正, 종5위하. 1585년 10월 6일), 줄여서 이치노카미(市正) |
| 생몰 | 1556년(코지 2) – 1615년 5월 28일(게이초 20). 향년 60세 |
| 출신 | 오미. 아버지 카타기리 나오사다(片桐直貞)는 아사이 나가마사(浅井長政)의 가신 |
| 칠본창 | 1583년 6월 5일 칸조, 3,000석 |
| 도요토미 정권 | 조선 출병 때 창원성 재번, 1595년 가증으로 1만 석 |
| 히데요리 측근 | 1598년 8월 히데요리 측근 네 명 중 한 사람. 세키가하라 이후 코이데 히데마사(小出秀政)와 함께 오사카성의 실무 책임자 |
| 도쿠가와 쪽 영지 | 1601년 야마토 헤구리군(平群郡) 가증, 타츠타 2만 8천 석 |
| 호코지 종명 사건 | 1614년 8–9월 슨푸에 머물렀으나 이에야스를 만나지 못함. 10월 1일 오사카성 퇴거 |
| 죽음 | 1615년 5월 28일 교토에서 병사. 6월 4일 다이토쿠지(大徳寺)에서 장례 |
| 가문의 이후 | 아들 타카토시(孝利)는 4만 석을 이었으나 손자 대에 1만 석, 증손 대에 3,000석 하타모토로 줄어듦. 동생 사다타카(貞隆)의 코이즈미번(小泉藩)은 메이지까지 존속 |
카타기리 카츠모토는 이 블로그에서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에 이어 다섯 번째로 다루는 칠본창이다. 그런데 카츠모토는 조금 결이 다르다. 먼저 소개한 네 사람이 무장으로 이름을 남겼다면, 카츠모토가 남긴 것은 사찰의 동찰(棟札, 건물 상량 때 공사 내력을 적어 다는 나무판)과 장부, 그리고 오사카와 슨푸를 오간 편지다. 다른 칠본창 대부분이 독립 다이묘가 되어 각자의 영지로 떠날 때 카츠모토는 히데요리 곁에 남아 도요토미 가문의 집안일을 맡았다. 그래서 그의 행적을 따라가면 히데요시가 죽은 1598년부터 오사카성이 무너진 1615년까지 도요토미 가문이 어떻게 굴러가다 멈췄는지 내부 사정을 알 수 있다.
그만큼 그에 대한 후대 사람들의 평가도 엇갈린다. 에도 시대 초기에는 주가인 도요토미를 배신한 사람으로 그려졌지만 중기의 역사소설에서는 전쟁을 막으려 한 충신이 되었고, 메이지 시대의 연극에서는 딜레마 속에서 고뇌하는 충신으로, 1950년대 연구서에서는 “진짜 배신자”로 그려졌다. 이 글은 이에야스 측근의 일기 『슨푸키(駿府記)』, 이에야스의 외교 승려 콘치인 스덴(金地院崇伝)의 일기 『혼코코쿠시 닛키(本光国師日記)』, 『도다이키(当代記)』, 그리고 히데요시와 히데요리가 그에게 보낸 문서를 기준으로 삼았다. 1702년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가 쓴 『한칸후(藩翰譜)』의 카타기리 가문 항목도 문서와 하나하나 맞춰 보았다. 『한칸후』에는 그가 처음 썼던 이름인 나오모리로 나온다. 본문의 『한칸후』 인용 문구를 누르면 한칸후 원문(일본어)의 해당 부분이 새 탭에서 열린다.
1. 아사이 가신의 아들, 시즈가타케의 스케사쿠
1-1. 오미의 카타기리 가문
카츠모토의 집안은 오미 북부의 무사 가문이다. 『한칸후』에는 시나노(信濃) 이나군(伊那郡)의 카타기리(片切) 가문 후손이 열일곱 살에 오미로 옮겨 왔고 그 증손인 카타기리 나오사다가 아사이 나가마사를 섬겼다고 나와 있다. 나오사다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다. 장남이 카츠모토, 차남이 사다타카다. 아사이 가문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멸망하기 직전인 1573년, 나가마사가 나오사다에게 칸조를 내렸다는 기록도 같은 곳에 덧붙어 있다.1
생년 1556년은 사망 기록의 나이(60세)에서 거꾸로 계산한 값이다. 막부가 편찬한 계보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에도 같은 해가 나온다. 출생지가 오미 아사이군 스가타니(須賀谷, 지금의 나가하마시)라는 해설이 많지만, 사전과 계보 어디에도 그 마을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오미 출신”까지가 확인되는 범위다.1
아사이 가문이 망한 뒤 오미 북부를 차지한 사람이 하시바 히데요시였다. 카츠모토가 언제 그 밑으로 들어갔는지 정확한 해는 알 수 없으나, 카츠모토 평전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且元)』(2001)를 쓴 소네 유지는 아사이 멸망 뒤 나가하마에 들어온 히데요시에게 발탁되었다고 정리한다. 1580년 9월 히데요시가 카츠모토의 동생인 사다타카에게 하리마(播磨)의 땅 150석을 주었다는 문서가 남아 있으니, 카타기리 형제는 늦어도 1580년에는 이미 히데요시의 가신이었다고 볼 수 있다.2
1-2. 시즈가타케의 칸조, 3,000석
1583년 4월, 히데요시는 오미 북부 야나가세(柳ヶ瀬)에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와 맞붙었다. 이 전투의 경과는 시즈가타케 전투 글에서 자세히 다뤘다. 그해 6월 5일, 히데요시는 “카타기리 스케사쿠”에게 칸조를 보냈다. 문서에는 그가 히데요시의 눈앞에서 이치반야리(一番鑓, 가장 먼저 적과 창을 맞댄 공)를 세웠고 “그 활약이 비할 데 없으므로 포상으로 3,000석을 준다”고 적혀 있다. 같은 날, 같은 문구, 같은 3,000석의 칸조가 히라노 나가야스(平野長泰)와 가스야 타케노리(糟屋武則)에게도 나갔다. 수신인만 바꾼 정형 문서여서 이 문서만으로는 카츠모토가 전장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다.3
『한칸후』에는 이때 받은 땅이 5,000석으로 되어 있다. 같은 책에는 그가 “이름을 떨친 일곱 명 가운데 하나(高名七人が其中にて)“였고 그 상으로 1583년 7월 1일 처음 영지를 받았다고 나와 있다. 그런데 전투 반년 뒤에 나온 『시바타 다이지키(柴田退治記)』에는 같은 칸조가 7월 1일 날짜로 실려 있고 석고 자리에 “혹은 5천 석, 혹은 3천 석”이라는 작은 주석이 붙어 있다. 『한칸후』의 저자 하쿠세키가 『시바타 다이지키』의 날짜와 주석의 앞쪽 숫자를 그대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카타기리 가문에 전하는 칸조 사본에는 3,000석으로 적혀 있다.4
이 전투 전까지 칠본창으로 꼽히는 젊은 무사들의 녹봉은 150석에서 200석 정도였다는 이야기가 여러 일화집에 나온다. 3,000석은 열다섯 배가 넘는 상이었다.5
1-3. 아홉 명 가운데 한 명
『시바타 다이지키』가 이치반야리로 꼽은 사람은 아홉 명이다. 지금의 칠본창 일곱 말고도 하시바 히데나가(羽柴秀長)의 측근 사쿠라이 사키치(桜井佐吉), 가장 먼저 뛰어들었다가 전사한 이시카와 효스케(石河兵助)까지 두 사람이 더 있다. 『소후 모노가타리(祖父物語)』 같은 에도 초기 기록에서는 카타기리 대신 도다 사부로시로(戸田三郎四郎)라는 인물이 일곱 명 안에 들어가 있기도 하다. 다른 시즈가타케 관련 글에서 여러 차례 언급했듯 칠본창이라는 이름과 일곱 명의 명단이 굳어진 것은 후대의 일이다.5
동시대 문서에서 이 무렵의 카츠모토를 엿볼 수 있는 자료가 하나 더 있다. 이듬해 1584년 4월,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중에 히데요시가 어느 성의 수비 책임자에게 보낸 편지다. “스케사쿠와 카헤에(加兵衛)는 젊은이들이니 마음을 써서 단단히 일러 두라(助作、加兵へ若ものニ候之間、ふんを被入、堅被申置).” 카헤에는 동생 사다타카의 통칭이다. 형제가 같은 성에 함께 배치되어 있었고 히데요시는 스물아홉 살의 카츠모토를 아직 잘 챙겨 줘야 할 젊은이로 보고 있었다.6
2. 도요토미 정권의 실무 관료
2-1. 히가시이치노카미 나오모리
1585년 7월 히데요시가 간파쿠(関白)가 되자 측근들이 줄지어 관위를 받았다. 카츠모토가 종5위하 히가시이치노카미에 오른 것은 그해 10월 6일이다. 이날 조정이 발급한 임명 문서 두 통이 카타기리 가문에 전해지는데, 수신인이 “도요토미노 나오모리(豐臣直盛)“로 되어 있다. 성은 카타기리 그대로이고, 조정 문서에 쓰는 본성(本姓)으로 히데요시에게서 받은 도요토미를 쓴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이치노카미”로 불렸다. 막부 계보에는 서임이 1583년 7월 1일로 되어 있고 일본어 백과사전에는 1585년설과 1586년설이 섞여 있다. 이 글은 날짜가 찍힌 임명 문서 쪽을 따른다.7
이 무렵부터 그의 이름은 전투와 관련된 기록보다는 행정 문서에 더 많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1587년 9월, 그는 “카타기리 이치노카미 나오모리”라는 서명으로 단바(丹波)의 한 마을과 하리마의 절 사이에 생긴 경계 분쟁을 판정했다. 양측의 서약서를 받은 뒤 경계선을 정하고 “앞으로 어긋남이 없도록 하라”고 적은 문서다.8
2-2. 창원성의 카츠모토
한동안 전투가 뜸했던 카츠모토지만 임진왜란 당시에는 그도 조선에 건너갔다. 1592년 11월 10일 히데요시가 “카타기리 이치노카미”에게 보낸 슈인조(朱印状, 붉은 도장을 찍은 명령 문서)가 그 증거다. 히데요시는 그가 창원성(昌原城)에 재번(在番, 성에 머물러 지킴)하고 있는 것을 승인했다. 다만 이듬해 봄 자신이 직접 바다를 건너 의병을 소탕할 때까지는 성을 굳게 지키며 병량을 비축할 뿐 멀리 나가 싸우는 일은 일절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부산에서 한양으로 이어지는 길의 연락 통로를 지키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9
카타기리 가문에는 그해 9월 22일 히데요시가 “16인 조시슈(上使衆, 히데요시가 보낸 감독관들)” 앞으로 보낸 슈인조도 전한다. 점령지에서 거둔 수확의 절반은 사람들을 먹이는 데 쓰고, 나머지 절반은 병량고에 넣으라는 지시다. 카츠모토는 이 16인의 한 사람으로 점령지의 병참과 징수를 감독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투 지휘관보다는 보급선을 관리하는 감독관에 가까운 역할이다.9
1595년 8월 17일, 히데요시는 카츠모토에게 5,800석을 더 주어 영지를 1만 석으로 올려줬다. 가증 명목은 “지난날 시즈가타케에서 몸을 아끼지 않고 애쓴 일을 떠올리시어”였다. 12년 전의 전공을 다시 끄집어낸 셈이다. 이때 영지는 하리마와 이세(伊勢)에 흩어져 있었다. 『한칸후』에는 그가 셋츠 이바라키(茨木)에 1만 2천 석을 받았다고 나오지만, 카타기리 형제가 이바라키를 거점으로 삼은 것은 세키가하라 이후의 일이다.10
히데요시가 죽은 뒤 카츠모토가 오사카성의 중심에 서게 된 데에는 경계 분쟁을 판정하고 점령지의 성과 병량을 관리해 온 경력이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11
3. 히데요리 곁으로 — ‘히데요시의 유언’ 이야기와 실제
3-1. 머리맡에 불린 두 사람
카츠모토 하면 사람들이 가장 흔히 떠올리는 장면이 있다. 히데요시가 임종 때 코이데 히데마사와 카타기리 카츠모토를 머리맡에 불러 어린 히데요리를 맡겼고 두 사람은 그 유언을 받든 후견인(傅役, 모리야쿠)이 되었다고 한다. 『한칸후』의 코이데 가문 항목에도 히데요시가 두 사람을 “히데요리의 후견인으로 삼았다(秀賴の御傳になさる)“고 하고, 임종 자리에서 “우리 집안의 천하는 내가 하루라도 살아 있는 동안뿐”이라고 말한 뒤, 내가 죽으면 이에야스를 잘 따라 히데요리가 미움받지 않게 하라고 당부했다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런데 하쿠세키는 이 이야기를 본문에 넣지 않고 주석으로 돌렸다. 그 이유도 직접 밝혔다. 이런 천하의 대사를 “당시 세력이 무겁지 않던 저 두 사람에게만 당부했을 리 없다(當時其勢重からぬ彼二人にのみ仰せ置るべからず)“고 했다. 이 책은 의심스러운 일은 빼고 적으므로 대략만 주석에 남긴다는 말도 덧붙였다. 역사학자 후쿠다 지즈루는 이 이야기의 출처가 역사소설 『호나이키(豊内記)』라는 점을 밝히고 『한칸후』를 근거로 두 사람이 히데요시의 유명(遺命)으로 후견인이 되었다고 보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라고 판정했다.12
3-2. 히데요리 측근 네 명
유언 장면은 근거가 없지만, 카츠모토가 히데요시 생전에 히데요리 곁에 배치된 것은 문서로 확인된다. 히데요시가 죽기 닷새 전인 1598년 8월 13일, 네 사람이 오부교(五奉行) 앞으로 서약서를 냈다. 히데요리 곁에서 봉공할 사람들을 정해 둔 취지를 잘 알고 있으며, 당번 이외의 사람이 히데요리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시중드는 사람들의 풍기를 단속하며 독살을 경계하겠다는 내용이다. 서명한 네 명 가운데 카츠모토를 뺀 세 명은 모두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의 친족이었다. 코이데 히데마사는 이 명단에 없다.13
이듬해 윤3월, 미츠나리가 실각한 직후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오사카)성 근무로는 코이데·카타기리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나이후(内府, 이에야스) 편입니다.” 미츠나리 쪽 사람들 사이에 끼어 히데요리 곁에 들어갔던 카츠모토는 1년도 안 되어 이에야스 쪽 사람으로 분류되고 있었다.14
코이데와 카타기리가 짝을 이뤄 오사카성 살림을 맡는 체제가 실제로 굴러가기 시작한 것은 세키가하라 전투 뒤인 1600년 12월부터다. 오사카성의 내정과 관련해 두 사람의 이름이 들어간 연서 장부와 서장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도 이때부터다. 세키가하라 뒤에야 작동한 이 체제를 마치 히데요시가 부탁해서 시작된 것처럼 포장한 것이 이 유언 이야기다.12
3-3. 세키가하라와 타츠타 2만 8천 석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때 카츠모토가 무엇을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서군의 오츠성(大津城) 공격에 가신을 보냈다는 설이 있지만 원 사료를 확인할 수 없고, 오츠성 공격에 가담한 것이 확인되는 쪽은 코이데 가문의 군세다. 막부 계보에는 카츠모토 형제가 이에야스에게 사자를 보내 서군의 거병은 히데요리가 모르는 일이라고 해명하고 아들 우네메(采女)를 인질로 후시미에 보냈다고 나와 있다. 자기 가문을 돋보이게 하는 계보의 성격을 감안해야 하지만, 이듬해의 처우는 이 이야기와 어긋나지 않는다.15
1601년 정월 28일, 이에야스는 카츠모토에게 야마토 헤구리군 안의 1만 8천여 석을 더해 주고 하리마·이세에 흩어져 있던 기존 영지도 헤구리군 안으로 옮겨 주었다. 거처는 타츠타였다. 합계 2만 8천 석, 이것이 타츠타번의 시작이다.15 이때부터 카츠모토는 두 가지 신분을 함께 지녔다. 오사카성에서는 히데요리를 섬기는 가로였고, 영지로 보면 이에야스에게서 땅을 받은 다이묘였다.
4. 오사카 소부교 — 두 주인 사이의 15년
4-1. “지금 오사카의 소부교”
1607년 무렵, 이에야스의 아들 요시토시(義利, 훗날의 요시나오)가 오와리 키요스(清須)에 들어갔을 때 히데요리가 축하 사절을 보냈다. 『도다이키』에는 그 사절이 “카타기리 이치노카미(지금 오사카의 소부교(惣奉行)이다)“로 소개되어 있다. 같은 책의 다른 곳에는 “오사카에서 지금 권세가 있는 사람(出頭人)“이라는 주석도 붙어 있다. 1604년 코이데 히데마사가 죽은 뒤로 카츠모토는 사실상 혼자 오사카성 살림을 책임졌다.16
역사학자 구로다 모토키는 히데요리 모자가 카츠모토에게 보낸 편지들을 분석해 그의 위치를 이렇게 정리한다. 그는 가신 가운데 두 번째로 큰 영지를 가졌고 동생 사다타카와 함께 오사카성의 성문 번소 일곱 곳 가운데 여섯 곳을 관할했으며, 도요토미 가문의 재정과 외교를 도맡았다. 히데요리의 어머니 요도도노(淀殿, 차차)의 아버지가 아사이 나가마사이고 카츠모토의 아버지가 그 가신이었다는 인연도 있었다.17
카츠모토가 죽은 뒤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가 유족에게 보낸 조문 편지에는 도쿠가와 쪽 중신이 본 그의 모습이 남아 있다. “이치노카미님은 기나이 다섯 지방의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사방의 용무까지 처리하셨다(五畿內之儀ハ不及申、四方迄之御用をも御調).” 도요토미의 오사카와 도쿠가와의 에도·슨푸를 잇는 일은 거의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해마다 슨푸에 가서 이에야스에게 인사했다는 기록이 『슨푸키』에 이어진다.16
4-2. 도쿠가와의 쿠니부교
그는 도쿠가와 정권의 일도 맡았다. 역사학자 다카기 쇼사쿠는 게이초 연간 도쿠가와 정권이 서국에 둔 쿠니부교(国奉行, 한 지방의 행정을 맡긴 관리) 제도를 논하면서, 카츠모토를 셋츠·카와치(河内)·이즈미(和泉)를 맡은 쿠니부교의 예로 들었다. 소네 유지의 평전은 그를 히데요리의 가로이면서 도쿠가와 쪽 쿠니부교를 겸한 인물로 그린다. 쿠니부교는 당시의 정식 직명이 아니라 연구자들이 붙인 이름이다. 다만 카츠모토가 기나이에서 도쿠가와 쪽 다이칸(代官, 직할령 관리)들과 함께 행정 문서에 이름을 올린 것은 사실이다.18
4-3. 줄지어 다시 세운 사찰과 신사
1600년대 오사카성이 가장 큰돈을 쓴 사업은 사찰과 신사의 재건이었다. 히데요리 명의로 다시 세운 곳이 100곳 가까이 되는데 그 공사의 동찰과 문서에 카츠모토의 이름이 거듭 나온다. 개별 문서로 그의 관여가 확인되는 곳만 꼽아도 이렇다.19
| 대상 | 연도 | 카츠모토의 관여 | 근거 |
|---|---|---|---|
| 시텐노지(四天王寺) | 1600–01 | 코이데 히데마사와 연서로 사찰 규정 발급 | 문서 |
| 카타노 신사(片埜神社) 본전 | 1602 | 부교로 재건 감독. 본전은 국가 중요문화재 | 히라카타시 자료 |
| 니노미야 신사(二ノ宮神社) | 1603 | 카츠모토의 화압이 있는 동찰 현존 | 동찰 |
| 다마노오야 신사(玉祖神社) | 1603 | 코이데 히데마사와 연서한 기증장 | 문서 |
| 곤고지(金剛寺) | 1605–06 | 동찰과 난간 기둥 장식(擬宝珠)에 “카타기리 히가시이치노카미 카츠모토 받듦”, 절 기록에 “카타기리 이치노카미 소부교” | 동찰·명문 |
| 기타노 덴만구(北野天満宮) 본전 | 1607 | 후신부교(普請奉行, 공사 책임자) | 덴만구 공식 자료 |
| 호코지 대불전과 범종 | 1609–14 | 범종 명문에 부교로 “카타기리 히가시이치노카미 도요토미노 카츠모토” | 범종 현존, 『슨푸키』 |
이 공사들은 히데요리의 이름으로 기나이 곳곳에 도요토미 가문의 위신을 세우는 사업이었다. 돈과 목재와 장인을 모아 공사를 끝내는 실무는 카츠모토가 맡았다. 마지막 사업인 호코지 대불전은 히데요시가 세웠다가 1596년 지진으로 무너진 대불을 다시 세우는 공사였다.
4-4. 1만 석을 받기까지
1613년의 일화를 보면 카츠모토가 두 주인 사이에서 얼마나 조심스럽게 움직였는지 알 수 있다. 히데요리가 1만 석을 더 주려 하자 그는 “간토(에도의 도쿠가와 막부)의 뜻을 꺼려 굳게 사양했다(關東の御旨を憚りて固く辭す)“고 『한칸후』에 나와 있다. 그해 9월 슨푸에 갔을 때 이에야스가 “우다이진(右大臣, 히데요리)의 가은을 사양하지 말고 받으라”고 하자 비로소 받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동시대 기록에도 거의 동일하게 등장한다. 1613년 9월 3일 자 『슨푸키』에는 그가 슨푸에 도착해 이에야스 앞에 나왔고, “히데요리 공이 내린 가증 지행 1만 석을 간토를 꺼려 받지 않고 있었는데 오늘 받았다”고 적혀 있다. 『한칸후』에는 이 가증의 내막이 이에야스의 지시였다는 소문도 덧붙어 있는데, 이것도 이듬해 이에야스 쪽이 카츠모토에게 “그대의 지행은 오고쇼(大御所, 은퇴한 쇼군 이에야스)가 분부하여 히데요리가 내준 것”이라고 말한 사실과 맞아떨어진다.20 이 무렵 카츠모토는 히데요리가 주는 땅조차 이에야스의 허락 없이는 받지 못하는 처지였다.
5. 호코지 종 명문 사건 — 만나지 못한 이에야스
5-1. 문제가 된 것은 ‘휘’였다
1614년 여름, 호코지 대불전은 완성을 앞두고 있었다. 8월 초에 대불 개안 공양과 대불전 낙성 공양을 치를 예정이었다. 그해 5월 카츠모토는 슨푸에서 이에야스를 만나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 그가 나라(奈良) 도다이지(東大寺) 대불의 종 명문 사본을 이에야스에게 보이자 이에야스는 그런 식으로 하면 좋겠다고 했다.21
7월 21일, 이에야스가 화를 냈다. 이날 『슨푸키』에는 이에야스가 “대불 종명에 간토(關東)에 불길한 말이 있고, 상량일도 길일이 아니다”라며 노했다고 적혀 있다. 7월 26일 혼다 마사즈미(本多正純)와 이에야스의 정치 고문 노릇을 하던 승려 콘치인 스덴(金地院崇伝)은 연서로 교토의 이타쿠라 카츠시게(板倉勝重)와 카츠모토에게 상량·개안·공양을 모두 미루라고 통보했다.21
종에 새겨진 명문에는 “국가안강(國家安康)“과 “군신풍락(君臣豐樂)“이라는 구절이 있었다. 앞의 구절은 이에야스(家康)의 이름 두 글자를 갈라 놓았고, 뒤의 구절은 도요토미(豊臣)를 군주로 즐긴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었다. 이것이 이에야스를 저주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오늘날의 통설이다. 그러나 8월 6일 마사즈미와 스덴이 카츠모토에게 보낸 편지가 문제 삼은 것은 조금 다르다. 앞서 도다이지 대불의 종명대로 하라고 했는데 사정을 모르는 사람에게 맡겨 쓸데없는 말을 길게 늘어놓았고, “특히 (오고쇼의) 휘(諱) 따위를 써넣어(殊に御諱なと書入)” 법도에 어긋난다고 했다. 휘는 윗사람의 실제 이름 글자다. 동찰에 목수 우두머리의 이름이 빠진 것도 문제 삼았다. 살아 있는 윗사람의 이름 글자를 함부로 쓰는 것은 그 자체로 결례였다.22
이에야스가 내린 처분도 종을 부수라는 것이 아니었다. 8월 22일 스덴이 이타쿠라에게 보낸 편지에는 “종은 명문을 갈아 없애라는 은밀한 뜻(內意)“라고 나와 있다. 같은 편지에는 이에야스가 “이치노카미에게 잘못은 없을 것이다. 문구의 잘잘못을 이치노카미가 몰랐던 것도 당연하다”고 말했다는 내용도 있다. 문구를 쓴 사람은 도후쿠지(東福寺)의 승려 분에이 세이칸(文英清韓)이었다. 다만 8월 6일 스덴이 이타쿠라에게 따로 보낸 편지에는 종에 새길 문구를 미리 이에야스에게 보이지 않은 것은 이치노카미의 불찰이라는 말도 들어 있다.23
5-2. 마리코에서 슨푸까지, 4주
카츠모토는 해명하러 슨푸로 떠났다. 8월 17일 슨푸 직전의 마리코(丸子)에 도착했지만 슨푸 시내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곳 세이간지(誓願寺)에 머물렀다. 이틀 뒤인 19일 저녁 혼다 마사즈미의 주선으로 슨푸에 들어갔고 이튿날 마사즈미와 스덴이 그의 숙소로 와서 이에야스의 뜻을 전했다. 『슨푸키』에는 이 자리에서 종명과 동찰이 앞서 말한 것과 다르고 오사카 쪽이 낭인을 많이 거두고 있는 것이 의심스럽다며 힐문했다고 나와 있다.24
그리고 그는 기다렸다. 8월 22일 스덴은 “대면은 아직 분부가 없다”고 썼고 9월 6일에도 “이치노카미가 슨푸에 있으나 아직 대면 이야기도 없다”고 썼다. 그사이 8월 29일, 요도도노의 유모이자 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의 어머니인 오쿠라쿄노츠보네(大蔵卿局)가 오사카에서 따로 슨푸에 왔다. 그녀는 이에야스를 만났다. 9월 12일 두 사람이 슨푸를 떠날 때 『슨푸키』에는 “오늘 아침 카타기리 이치노카미가 상경했다. 이번에는 알현이 없었다(今度無御目見)“고 적혔고, 스덴은 이틀 뒤 편지에 “오쿠라쿄 님은 대면하셨고, 이치노카미 님은 대면 없이 올라가셨다(大藏卿殿は御對面候。市殿は無御對面被罷上候)“고 썼다. 카츠모토는 마리코 도착부터 4주 가까이 슨푸 근처에 있었지만 이에야스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넉 달 전 5월의 방문과는 전혀 다른 대우였다.24
이에야스의 뜻은 9월 7일 마사즈미와 스덴을 통해 전달되었다. 『슨푸키』에 따르면 내용은 두 가지였다. 그대의 지행은 오고쇼가 분부하여 히데요리가 내준 것이니 소홀히 여기면 불의(不義)다. 그리고 히데요리가 도쿠가와 부자를 저주한다는 소문이 있으니 쇼군(히데타다)의 속이 어떻겠느냐. 스덴의 편지에는 이 자리에 오쿠라쿄노츠보네도 함께 불러 “한자리에서” 전했다고 나오고, 요구 사항은 “오사카에 돌아가 모두 상의해서 앞으로 에도와 히데요리 사이에 의심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었다고 썼다. 구체적인 조건은 없었다.25
5-3. 카츠모토가 내놓은 세 가지 안
9월 18일 오사카에 돌아온 카츠모토는 히데요리와 요도도노에게 세 가지 안을 아뢰었다. 히데요리가 에도에 와서 살든지, 요도도노가 에도에 가서 살든지, 그렇지 않으면 오사카성을 내놓고 다른 곳으로 영지를 옮기든지. 일본의 백과사전과 대중서에서는 이 셋을 흔히 도쿠가와 쪽이 내민 최후통첩으로 소개한다. 그러나 동시대 기록에는 이것이 카츠모토 자신의 안으로 나온다. 9월 25일 슨푸에 도착한 카츠모토의 편지에는 “장래 쇼군가와 불화하면 어찌하겠는가, 그러니 히데요리가 에도에 있든지, 어머님이 에도에 있든지, 그렇지 않으면 오사카성을 물러나 쿠니가에(國替, 영지를 옮김)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御國替可然之旨申)“고 쓰여 있다. 이 때문에 히데요리 모자가 불쾌해했고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귀띔을 받아 출사를 멈추었다는 내용이 이어진다.26
카타기리 가문 쪽 기록 『카타기리케 히키(片桐家秘記)』도 같은 방향이다. 마사즈미와 스덴은 “이치노카미가 알아서 판단해 처리하라. 오고쇼 쪽에서 무엇을 바란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했고 카츠모토는 고민 끝에 히데요리가 천하제일의 성에 있는 것을 이에야스가 염려하는 것이라고 보고 “이 세 조목 외에는 방도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이에야스가 원하는 답을 스스로 짐작해 꺼냈다.26
『한칸후』에는 이 일이 조금 다르게 나온다. 카츠모토가 슨푸에서 하나하나 해명하고 “깊이 꾀하고 멀리 헤아려 세 가지 계책을 바쳤다(深く謀り遠く慮りて三の策を獻る)“고 하고, “오고쇼가 크게 기뻐했다(大御所大に悅はせ給ひ)“고 되어 있다. 세 가지 안이 카츠모토의 발안이라는 점은 동시대 기록과 같지만, 그는 이에야스를 만나지 못했으므로 이에야스 앞에 바쳤을 수는 없다.27
| 버전 | 내용 | 출전과 성립 | 판단 |
|---|---|---|---|
| 카츠모토의 제안 | 카츠모토 편지 “쿠니가에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 『슨푸키』, 1614년 9월 25일 | 동시대 기록 |
| 이에야스 쪽은 조건 없음 | ”오사카에서 상의해 의심이 없도록 하라” | 『혼코코쿠시 닛키』, 1614년 9월 8·14일 | 동시대 기록 |
| 카츠모토가 스스로 판단 | ”이 세 조목 외에 방도가 없다” | 『카타기리케 히키』, 1710년 이전 | 가문 쪽 기록 |
| 혼다 마사노부가 제시 | 마사노부가 자기 생각이라며 꺼낸 것을 카츠모토가 이에야스의 뜻으로 받아들임 | 『호나이키』, 17세기 중엽 | 역사소설 |
| 이에야스에게 바침 | ”세 가지 계책을 바치니 오고쇼가 크게 기뻐했다” | 『한칸후』, 1702년 | 대면 여부와 맞지 않음 |
5-4. 갈라놓은 두 사절?
이 사건에는 이야기가 하나 더 붙어 있다. 이에야스가 오쿠라쿄노츠보네에게는 웃는 얼굴로 아무 요구도 하지 않고, 카츠모토에게만 가혹한 조건을 들려 보내 두 사절의 보고가 엇갈리게 만들었다고 한다. 오사카 쪽이 카츠모토를 의심하게 된 것은 이에야스의 이간책 때문이라는 해석으로, 역사학자 와타나베 다이몬(渡邊大門) 등이 이렇게 본다.
하지만 동시대 기록에서는 이 이간책에 대한 이야기를 찾을 수 없다. 앞에서 보았듯 9월 7일 이에야스의 뜻은 두 사람에게 한자리에서 전해졌고, 내용에 조건은 없었다. 오쿠라쿄노츠보네가 귀로에서 카츠모토의 안을 듣고 먼저 오사카로 돌아가 그것을 이에야스의 뜻이라고 거짓 보고했다는 이야기는 『카타기리케 히키』에만 나온다. 이에야스가 오쿠라쿄노츠보네 일행을 곧바로 만나 다정하게 대했다는 장면은 역사소설 『호나이키』와 그것을 부풀린 『나니와 센키(難波戦記)』에서 커진다. 구사카리 다카히로는 2021년 논문에서 두 사절이 같은 내용을 들었고 분단 공작은 없었다는 견해를 냈다.28
확인되는 것만 추리면, 카츠모토는 이에야스를 만나지 못했고 무엇을 해야 할지 구체적인 지시도 받지 못한 채 돌아왔다. 이에야스의 불만을 풀 방법은 카츠모토 스스로가 찾아야 했다. 그가 찾은 답은 도요토미 가문이 다른 다이묘처럼 도쿠가와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었고, 이는 도요토미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안이었다.
6. 오사카성을 떠나다
6-1. 암살 모의와 농성
세 가지 안을 아뢴 뒤 카츠모토는 오사카성으로의 출사를 끊었다. 오사카성 안에서 그를 죽이자는 논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날짜와 가담자는 기록마다 조금씩 다르다. 『카타기리케 히키』에는 9월 22일 밤 오노 하루나가·키무라 시게나리(木村重成) 등이 모여 결정했고, 이튿날 아침 오사카성에 머물던 오다 노부카츠(織田信雄)가 사람을 보내 카츠모토에게 알렸다고 나와 있다. 『슨푸키』에 실린 이타쿠라 카츠시게의 보고에는 25일, 『도다이키』에는 27일로 되어 있다. 같은 『카타기리케 히키』에 따르면 계획은 요도도노가 만나겠다며 혼마루(本丸)로 불러 복도에서 죽이는 것이었다.29
카츠모토는 동생 사다타카와 함께 오사카성 산노마루(三の丸)의 저택에 틀어박혔다. 오노 하루나가와 오다 우라쿠(織田有楽) 부자가 군사를 몰고 왔으나 형제가 함께 버티자 손을 쓰지 못했다. 『카타기리케 히키』에 따르면 카츠모토는 농성을 하면서도 성 쪽으로는 화살 하나, 총 한 발도 쏘지 말라고 명했다. 결국 히데요리 직속의 일곱 부대장이 중재에 나서 양쪽이 군사를 물렸고, 카타기리 형제가 성을 나가기로 했다. 카츠모토는 자기가 맡았던 성문 다섯 곳과 동생이 맡았던 쿄바시구치(京橋口)의 경비를 넘기고 창고의 쌀과 금은을 인계한 다음 장부를 정산한 뒤에 떠났다.29
6-2. 1614년 10월 1일
10월 1일 새벽, 카츠모토 형제는 오사카성을 나섰다. 『카타기리케 히키』에 따르면 카츠모토는 하오리만 걸치고 가마에 탔고 그 뒤를 형제의 처자와 가솔 가운데 노약자들이 따랐다. 사다타카와 수행원들은 갑옷을 입고 칼을 뽑아 들고 화승에 불을 붙인 채 걸었다. 오노 하루나가와 오다 우라쿠의 아들을 인질로 데려가다가 카와치에서 돌려보냈고 해 질 녘 셋츠 이바라키에 도착했다. 성 안에서 이 행렬을 지켜본 사람의 회고 『야마구치 큐안바나시(山口休庵咄)』에는 카츠모토가 흰 고소데 차림으로 가마의 양쪽 문을 열어 둔 채 타마츠쿠리구치(玉造口) 문을 나섰고, 사다타카는 문밖에서 성을 향해 세 번 엎드려 절했으며 형제의 인원이 잡병까지 3,000–4,000명쯤 된다고들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30
같은 10월 1일, 슨푸의 이에야스는 오사카 출진을 결정했다. 『슨푸키』에 따르면 이타쿠라 카츠시게가 보낸 파발, 곧 오사카에서 카츠모토를 죽이려는 모의가 있었고 카츠모토가 저택에 틀어박혔다는 보고가 이날 도착하자 이에야스는 크게 노해 오미·이세·미노·오와리·미카와·토토미에 출진을 알렸다. 이에야스의 출진을 부른 것은 카츠모토의 퇴거 소식이 아니라 그 전의 암살 모의 보고였다. 이에야스 쪽 논리는 9월 7일의 전언에 이미 들어 있었다. 자신이 정해 준 지행을 받는 사람을 죽이려 한 것은 곧 도쿠가와에 대한 적대라는 것이다.31
10월 7일, 카츠모토 형제의 사자가 슨푸에 도착해 이바라키로 물러났다고 보고했다. 이에야스는 형제 각각에게 직접 화압(花押)을 한 편지를 보냈다. “이번에 간사한 무리가 여러 가지로 말을 지어낸 탓에 이바라키까지 물러났다니 기특하게 여긴다(被思召神妙).”32 『한칸후』에 이에야스가 형제에게 서장을 보내 카츠모토의 계책이 헛되이 된 것을 탄식했다고 나오는 것도 이 편지와 맞는다.
6-3. 도쿠가와 진영의 카츠모토
이에야스가 교토 니조성(二条城)에 들어온 10월 23일, 카츠모토는 아들 타카토시와 함께 그를 알현했다. 『한칸후』에는 그가 처음에는 “이제 무슨 면목으로 다시 뵙겠느냐(今何の面目あつてか再び見參には入り候ふべき)“며 사양했고 혼다 마사즈미가 이번 거병은 그대의 죄가 아니라는 서약서를 보내고서야 왔다고 나와 있다. 마사즈미가 형제에게 서약서를 준 것은 막부 쪽 기록으로도 확인된다.32
겨울의 진에서 카츠모토가 처음 치른 싸움은 패전이었다. 10월 13일 오사카 쪽 군세가 사카이(堺)를 치자 그는 200여 명을 보내 구원하게 했지만 가로 타라오 한자에몬(多羅尾半左衛門) 등이 전사하고 아마가사키로 물러났다. 그 뒤 토도 타카토라(藤堂高虎)와 함께 오사카성 포위의 선봉을 맡았다. 이에야스에게 불려 가 오사카성을 어떻게 공격할지 작전을 마련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카츠모토는 이에야스에게 오사카 부근의 지도를 바쳤다. 성의 구조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12월 중순에는 성 안에서 그의 진영으로 무게 650몬메(약 2.4kg)의 쇠 탄환이 날아들었고 12월 17일 이에야스는 기침병을 앓는 그에게 의사를 보냈다.33
6-4. 요도도노의 거처를 겨눈 대포?
카츠모토를 배신자로 그리는 이야기에는 그가 요도도노의 거처를 알려 주어 도쿠가와군이 그곳을 조준해 대포를 쏘게 했고, 그 결과 그 포탄에 시녀들이 죽었다는 장면이 빠지지 않는데, NHK 대하드라마 「사나다마루(真田丸)」(2016)에도 이 장면이 나온다. 이 이야기는 1620년대에 나온 오제 호안의 『다이코키(太閤記)』에서 처음 보인다. “생모가 계신 곳을 잘 알아 큰 대포를 쏘아 넣어 성을 괴롭힌 것이 남달랐다.” 비젠지마(備前島)에서 그가 안내해 대포 수백 정을 쏘았고 시녀 7–8명이 죽었다는 구체적인 장면은 역사소설 『나니와 센키』의 것이다. 18세기의 수필 『시오지리(塩尻)』에는 히데요리가 신사에 참배하는 시각을 노려 높은 누각을 쏘게 했다는 이야기에 “아, 가증스럽다”는 탄식까지 붙어 있다.34
하지만 이에야스 쪽의 기록에는 이 장면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남아 있지 않다. 『슨푸키』와 도쿄대학 사료편찬소의 『시료소란(史料綜覧)』에는 12월 16일 이에야스가 포술에 능한 자들을 골라 성을 포격하게 했다고만 나오고, 카츠모토의 이름을 언급하는 부분은 없다. 동생 사다타카의 부대가 비젠지마 방면에 있었던 것, 그리고 카츠모토가 성의 지리를 아는 사람으로 공격 계획에 불려 간 것은 동시대 기록으로 확인된다. 다만 그가 요도도노의 거처를 겨누게 했다는 부분은 편찬물과 역사소설에만 있다.34
강화가 맺어진 뒤 카츠모토와 사다타카는 근신하겠다고 청했지만 이에야스가 허락하지 않았다. 1615년 4월 2일 카츠모토는 슨푸로 이주했고 이에야스에게 인사했다. 오사카성이 함락된 이튿날인 5월 8일 아침, 『슨푸키』에는 카츠모토의 사자가 이에야스에게 와서 “히데요리와 생모, 오노 슈리(하루나가)·하야미 카이노카미를 비롯한 정예들이 니노마루의 오비쿠루와에 틀어박혀 있다”고 보고한 것으로 나온다. 그날 히데요리와 요도도노는 성 안에서 자결했다.35
7. 히데요리보다 스무 날 뒤 — 죽음, 평가, 가문
7-1. 교토 산조의 빌린 저택에서
카츠모토는 1615년 5월 28일 60세로 죽었다. 오사카성이 함락되고 히데요리가 자결한 지 20일 뒤다. 이날 교토의 신관 신류인 본슌(神龍院梵舜)은 일기 『본슌 닛키(梵舜日記)』에 “카타기리 이치노카미가 뜻밖의 병으로 교토에서 사망했고 다이토쿠지에 장사 지낸다고 한다”고 썼고 6월 4일에는 다이토쿠지에서 장례가 있었다고 적었다. 『슨푸키』에도 그날 “카타기리 이치노카미 카츠모토 병사, 나이 60”이라는 기록이 있다.36
그의 마지막 한 달은 『야마모토 닛키(山本日記)』에 가장 자세하게 남아 있다. 작년 여름부터 몸이 좋지 않았지만 양쪽을 다 마음에 두어야 했기에 잠시도 쉬지 못하고 뛰어다녔고 5월 8일 히데요리가 죽자 맥이 풀려 쇠약해졌다. 야마토의 영지까지 겨우 돌아왔으나 병이 깊어져 교토로 올라갔는데 니조성 곁의 자기 저택은 남에게 빌려준 상태여서 산조(三条)의 비어 있던 저택을 빌려 지내다 죽었다고 한다.36
그런데 막부 계보에는 그가 슨푸에서 죽었다고 되어 있고 『한칸후』의 기록도 흐름상 슨푸에서 사망한 것으로 해석된다.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의 편자는 이것이 『슨푸키』의 “슨푸에서 알려 왔다”는 문구를 슨푸에서 죽었다는 뜻으로 잘못 읽은 데서 시작된 오류라고 판단했다. 또한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는 근세의 어떤 기록에서도 찾을 수 없으며, 동시대 기록에는 모두 병사로 나온다.36
그가 죽은 날짜를 찬문 끝에 적은 초상화가 다이토쿠지 경내의 작은 절 교쿠린인(玉林院)에 전한다. 찬을 쓴 사람은 교쿠린인을 연 승려 소인(宗印)이고, 날짜는 “게이초 20년 을묘 중하(仲夏) 28일”이다. 3장에 실은 초상화는 이 그림을 1914년에 모사한 것이다.37
7-2. “30일을 넘기지 못하고”
그의 죽음은 곧바로 소문이 되었다. 그가 죽고 보름이 채 안 된 6월 10일, 사츠마 시마즈 가문 쪽의 한 편지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히데요리 님이 돌아가신 뒤 30일도 지나지 않아 이런 일이 생긴 것은 기이한 일이라고들 합니다.” 같은 편지에는 동생 사다타카와 카츠모토의 아들, 부인까지 잇달아 병사했다는 소식도 들어 있는데, 실제로 사다타카는 1627년까지, 아들 타카토시는 1638년까지 살았다. 소문은 그만큼 빠르기는 했으나 부정확했다.38
90년 가까이 지나 하쿠세키는 이 세평을 이렇게 정리했다. 세상 사람들은 그가 주군을 배반한 탓에 곧 천벌을 받아 “30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三十日を越えずして死しぬ)“고 한다. 그러고는 자기 생각을 붙였다. 내 생각에는 그가 어떤 심정으로 죽었겠는가, “가엾은 일이었다(あはれなりし事なり)”. 『야마모토 닛키』의 필자도 “홀로 근년 고생했으나 무엇 하나 보람 없이 물거품이 되었다”고 썼다. 그가 죽은 직후부터 배반의 응보라는 말과 가엾다는 말이 함께 돌았다.38
7-3. 배신자와 충신 사이
그 뒤 카츠모토의 평가는 몇 번이나 뒤집혔다.39
| 시기 | 자료 | 카츠모토의 모습 |
|---|---|---|
| 1615 | 혼다 마사노부의 조문 편지 | 기나이와 사방의 용무를 처리한 유능한 실무자 |
| 1620년대 | 오제 호안 『다이코키』 | “역심”을 품고 생모의 거처에 대포를 쏘아 넣어 “이름을 더럽혔다” |
| 1660년대 | 역사소설 『나니와 센키』 | 전쟁을 막으려 애쓴 충신 |
| 1702 | 『한칸후』 | 동서를 화해시키려 한 사람, 천벌설에는 거리를 둠 |
| 18세기 후반 | 간자와 도코 『오키나구사(翁草)』 | “충신을 닮은 적신(賊臣)”, 큰 은혜를 입은 주군에게 활을 당긴 자 |
| 1812 | 막부 계보 『간세이초슈쇼카후』 | 세키가하라 때부터 도쿠가와에 절의를 지킨 공로자 |
| 1904 | 쓰보우치 쇼요의 희곡 『키리 히토하(桐一葉)』 초연 | 무너지는 오사카성을 홀로 떠받치다 쫓겨나는 충신 |
| 1913 | 쓰지 젠노스케의 강연 「카타기리 카츠모토론(片桐且元論)」 | 대단한 인물은 아니지만 전해지는 것처럼 나쁜 인물도 아닌 사람 |
| 1958 | 구와타 다다치카 『요도기미(淀君)』 | 히데요리 모자의 은신처를 알린 “진짜 배신자” |
| 2001 | 소네 유지 『카타기리 카츠모토』 | 충·불충의 틀을 벗어난 사무 관료 |
| 2017 | 구로다 모토키 『하시바가의 붕괴(羽柴家崩壊)』 | 도요토미 가문의 재정·외교를 도맡은 가로. 그를 내친 것이 가문 붕괴의 결정타 |
충신이냐 배신자냐 이분법적인 사고로는 이 사람에 대해 잘 파악할 수 없다. 카츠모토는 히데요리의 가로이면서 이에야스에게 영지를 받는 다이묘였고, 도쿠가와 정권의 기나이 지역 행정을 맡은 관리이기도 했다. 세 자리를 한 사람이 겸했으니 오사카와 슨푸 사이의 긴장 상황은 모두 그를 거쳐 갔다. 1614년 가을 이에야스가 만나 주지 않자 그는 도요토미 가문이 살아남을 길을 스스로 찾아냈지만, 도요토미 측에서는 그것을 굴복이라 생각했다. 구로다 모토키는 정치 능력을 갖춘 가신이 없으면 다이묘 가문은 존속하기 어렵다며, 카츠모토가 떠난 뒤 오사카성에는 그의 역할을 대신할 사람이 없었다고 본다.17
7-4. 카타기리 가문의 이후
카츠모토가 죽은 뒤 아들 타카토시가 대를 이었다. 막부 기록으로는 야마시로·야마토·카와치·이즈미의 4만 석이다. 하쿠세키는 “나오모리가 남긴 영지는 3만 2천 석일 것(直盛が遺領は三万二千石なるべし)“이라며 4만 석이라는 기록을 의심했지만, 『도쿠가와짓키(徳川実紀)』 1638년 11월 10일 자에는 “남긴 영지 4만 석 가운데 1만 석”을 동생에게 잇게 했다고 나와 있다. 타카토시는 그해 8월 1일 38세로 후사 없이 죽었고 동생 타메모토(為元)는 4만 석 가운데 1만 석만 받아 타츠타 영주가 되었다. 1655년 할아버지와 같은 통칭을 쓰던 타메모토의 아들 스케사쿠가 죽자, 그 동생이 뒤를 이었지만 “소령의 태반이 깎였다(所領の地大半を減ぜられぬ)”. 3,000석의 하타모토(旗本, 쇼군 직속 가신)로 내려앉으면서 타츠타번은 끝났다.40
카타기리라는 이름을 에도 시대 내내 다이묘로 지킨 것은 카츠모토의 동생 쪽 가문이었다. 1614년 형과 함께 오사카성을 나왔던 사다타카는 그 뒤 야마토 코이즈미에 영지를 받았고 그의 코이즈미번은 1871년 폐번까지 이어졌다. 사다타카의 아들 사다마사(貞昌)는 1605년 이바라키에서 태어났다. 큰아버지가 오사카성의 살림을 맡고 있던 때다. 그는 1665년 에도성에서 쇼군 이에츠나(家綱)와 로주(老中, 막부의 최고 정무직)들 앞에서 차를 냈고 쇼군의 다도 사범이 되었다. 오늘날 세키슈류(石州流)라 불리는 다도 유파를 연 카타기리 세키슈(片桐石州)다.41
출처
1차·준1차 사료 (쪽 이미지 또는 활자 번각본으로 확인한 것)
- 히데요시 칸조(1583년 6월 5일), 히데요시 서장(1584년 4월 12일), 구선안(1585년 10월 6일), 『시바타 다이지키(柴田退治記)』, 『소후 모노가타리(祖父物語)』, 『겐몬가키(見聞書)』, 『가네미쿄키(兼見卿記)』: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4·7·8·13·21책(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 도쿄대학 사료편찬소 데이터베이스)
- 『고지루이엔(古事類苑)』 병사부 수록 『시바타 다이지키(柴田退治記)』
- 히데요시 슈인조(1592년 9월 22일·11월 10일, 1595년 8월 17일): 『시세키슈란(史籍集覧)』 수록 카타기리 슈젠노카미 가문 소장 문서 사본
- 카타기리 나오모리 서장(1587년 9월 21일), 사다타카 앞 영지 문서(1580년 9월 19일): 『효고현사(兵庫県史)』, 가타야마(2018) 재인용
- 「게이초 3년 서지 전서(慶長三年誓紙前書)」(1598년 8월 13일), 모리 테루모토 서장(1599년): 후쿠다(2023) 번각·재인용
- 『슨푸키(駿府記)』, 『도다이키(当代記)』: 『시세키잣산(史籍雑纂)』 2(국서간행회, 1911)
- 『혼코코쿠시 닛키(本光国師日記)』: 『대일본불교전서(大日本仏教全書)』 139(1922)
- 『카타기리케 히키(片桐家秘記)』: 『시세키슈란(史籍集覧)』 16책 별기 219
- 『오사카 고진 야마구치 큐안바나시(大坂御陣山口休庵咄)』: 도쿠토미 소호, 『킨세이 니혼 코쿠민시(近世日本国民史)』(1925) 인용분
- 『본슌 닛키(梵舜日記)』, 『야마모토 닛키(山本日記)』, 『삿판큐키(薩藩旧記)』 수록 서신, 혼다 마사노부 서장(『후초요로쿠(譜牒餘録)』),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 『다이코키(太閤記)』, 『오키나구사(翁草)』, 『시오지리(塩尻)』, 『슨가시료(駿河志料)』, 교쿠린인 소장 화상 사진판, 다마노오야 신사 문서, 곤고지 동찰: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2편 1·20책
- 『시료소란(史料綜覧)』 권14·15(도쿄대학 사료편찬소, 1954)
- 『도쿠가와짓키(徳川実紀)』 「다이유인도노 고짓키(大猷院殿御実紀)」 권39
- 『한칸후(藩翰譜)』(아라이 하쿠세키, 1702) 권10상 코이데 항목, 권10하 오다·카타기리 항목: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소장 1896년 활자본 저본 이미지와 대조
- 「카타기리 문서(片桐文書)」 구선안 두 통(1585년 10월 6일):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21책
- 모리 테루모토 서장(1599년): 「아사 모리가 문서(厚狭毛利家文書)」, 『야마구치현사(山口県史)』 사료편 중세3, 후쿠다(2023) 재인용
- 『삿판큐키(薩藩旧記)』 후집 권32 「이에히사 공 어보(家久公御譜)」 6월 10일 자 서신: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2편 20책 수록분
- 「카타기리 카츠모토 화상(片桐且元畫像)」(교쿠린인 소장):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2편 20책 수록 사진판
- 오제 호안(小瀬甫庵), 『다이코키(太閤記)』(1620년대):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2편 20책 수록분
- 『오사카 고진 오보에가키(大坂御陣覚書)』: 『시료소란(史料綜覧)』 권15의 출전 표기로만 확인
현대 연구자·학술 논문 (신뢰도 A–B)
- 소네 유지(曽根勇二),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且元)』(吉川弘文館 人物叢書, 2001): 서지와 출판사 소개문, 가타야마(2018)의 인용으로 확인
- 소네 유지, 「카타기리 카츠모토와 오쿠보 나가야스 계열의 다이칸에 대하여(片桐且元と大久保長安系の代官について)」, 『일본역사(日本歴史)』 507(1990): 서지만 확인
- 구로다 모토키(黒田基樹), 『하시바가의 붕괴: 차차와 카타기리 카츠모토의 고뇌(羽柴家崩壊 茶々と片桐且元の懊悩)』(平凡社, 2017): 저자가 다시 엮은 글(프레지던트 온라인, 2023)로 논지 확인
- 후쿠다 지즈루(福田千鶴), 「코이데 히데마사에 관한 기초적 연구(小出秀政に関する基礎的研究)」, 『규슈문화사연구소 기요(九州文化史研究所紀要)』 66(2023)
- 다카하시 게이이치(高橋圭一), 「역사소설 속의 카타기리 카츠모토(実録の中の片桐且元)」, 『오사카오타니대학 기요(大阪大谷大学紀要)』 42(2008)
- 다카하시 게이이치, 「카타기리 카츠모토와 대포(片桐且元と大筒)」, 『에도문학(江戸文学)』 31(2004): 서지만 확인
- 구사카리 다카히로(草刈貴裕), 「호코지 대불 종명 사건을 둘러싼 카타기리 카츠모토와 오쿠라쿄노츠보네의 동향에 대하여(方広寺大仏鐘銘事件をめぐる片桐且元と大蔵卿局の動向について)」, 『16세기사논총(十六世紀史論叢)』 15(2021): 서지만 확인
- 다카기 쇼사쿠(高木昭作), 「막번 초기의 쿠니부교제에 대하여(幕藩初期の国奉行制について)」, 『역사학연구(歴史学研究)』 431(1976)
- 가타야마 마사히코(片山正彦), 「와다데라에 남은 ‘카타기리 기증장’(和田寺にのこる『片桐寄進状』)」, 『고베토키와대학 기요(神戸常盤大学紀要)』 11(2018)
- 구와타 다다치카(桑田忠親), 『요도기미(淀君)』(1958), 쓰지 젠노스케(辻善之助)의 1913년 강연: 다카하시(2008)를 거쳐서만 확인
- 무라카와 고헤이(村川浩平), 「하시바 씨 하사와 도요토미 성 하사(羽柴氏下賜と豊臣姓下賜)」, 『고마자와 사학(駒澤史学)』 49(1996): 고마자와대학 리포지토리 PDF
- 고치 마사요시(河内将芳)의 호코지 종명 연구: 일본어 위키백과 「호코지 종명 사건(方広寺鐘銘事件)」의 소개로만 확인
공식·표준 참고자료 (신뢰도 B)
- 히라카타시 홍보 자료 「그 사람 카타기리 카츠모토(あの人 片桐且元)」, 기타노 덴만구 공식 사이트, 고베대학 미술사논집 「시텐노지의 게이초 재건에 대하여(四天王寺の慶長再建について)」
- 진제이초 교육위원회, 『특별사적 카타기리 카츠모토 진터·키무라 시게타카 진터(特別史跡片桐且元陣跡・木村重隆陣跡)』 조사 보고서(1993·1995): 서지만 확인
- 『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 『세계대백과사전(世界大百科事典)』, 『야마카와 일본사소사전(山川 日本史小辞典)』, 『일본인명대사전(日本人名大辞典)』(코토뱅크). 「코이즈미번(小泉藩)」·「카타기리 세키슈(片桐石州)」 항목 포함
후대 편찬물·역사소설·문학 (내용 확인 경로를 함께 적음)
- 『호나이키(豊内記)』(17세기 중엽), 『나니와 센키(難波戦記)』(1660년대): 후쿠다(2023)·다카하시(2008)를 거쳐 확인
- 『셋센짓로쿠(摂戦実録)』: 하야시 라잔의 “국가안강” 저주 단정 이야기의 출전으로 사전류에 소개됨, 원문 미확인
- 쓰보우치 쇼요(坪内逍遥), 『키리 히토하(桐一葉)』(1904 초연): 다카하시(2008)를 거쳐 확인
- 『오츠성 공방 전투 요도(大津城攻防戦闘要図)』·『치쿠시 고문서(筑紫古文書)』: 일본어 위키백과의 각주로만 확인, 원문 미확인
전문 사이트·대중 매체 (신뢰도 C–E)
- 와타나베 다이몬(渡邊大門), 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 기고(2023)
- NHK 대하드라마 「사나다마루(真田丸)」(2016) 제46회 「포탄(砲弾)」: 武将ジャパン 방송 리뷰(2016년 11월 21일)로 장면 확인
- 일본어 위키백과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且元)」·「호코지 종명 사건(方広寺鐘銘事件)」·「오쿠라쿄노츠보네(大蔵卿局)」 항목: 출처 추적용으로만 사용
확인하지 못한 것
- 소네 유지의 평전과 구로다 모토키의 단행본은 본문을 열람하지 못했다. 두 책의 구체적인 논증과 히데요리 모자 서장 7통의 내용은 2차 소개로만 확인했다.
- 카츠모토가 히데요시에게 출사한 해, 히데요시 시대의 대불전·후시미성·검지 관련 직무, 세키가하라 때의 구체적 행동.
- 카타기리 형제의 이바라키성 성주가 형인지 동생인지, 언제부터인지.
- 1611년 니조성 회견에서 카츠모토가 요도도노를 설득했다는 이야기의 동시대 근거(『도다이키(当代記)』에는 오다 우라쿠의 파견만 나온다).
- 타츠타번 소멸 뒤 3,000석 하타모토 계통이 언제 끊겼는지.
Foot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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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칸후(藩翰譜)』(아라이 하쿠세키, 1702) 권10하 카타기리 항목 첫 단락(f146.p001). 계보와 아사이 나가마사 칸조는 이 단락의 할주. 생년은 같은 단락의 몰년 기사 “六十歲”와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 권360 카타기리 항목의 “弘治二年近江國に生る”로 계산했다. 스가타니 출생은 일본어 위키백과에 출전 없이 나올 뿐 코토뱅크 수록 사전류와 계보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 ↩2
-
소네 유지(曽根勇二),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且元)』(吉川弘文館 人物叢書, 2001) 1–4쪽의 정리를 가타야마 마사히코(片山正彦), 「와다데라에 남은 ‘카타기리 기증장’(和田寺にのこる『片桐寄進状』)」, 『고베토키와대학 기요(神戸常盤大学紀要)』 11(2018)에서 재인용. 사다타카의 1580년 9월 19일 하리마 신토군 150석 문서는 『효고현사(兵庫県史)』 사료편 근세1, 같은 논문 재인용. ↩
-
히데요시 칸조, 1583년 6월 5일 “카타기리 스케사쿠” 앞. 카타기리 가문 전래 문서 사본(片桐家御内書御朱印等寫),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4책 수록(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 쪽 이미지). 같은 문면이 『시세키슈란(史籍集覧)』 수록 카타기리 슈젠노카미 가문 소장 문서에도 있다. 히라노 나가야스·가스야 타케노리 앞 칸조도 같은 책 수록.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도 6월 5일·3,000석. ↩
-
『한칸후(藩翰譜)』 f146.p001. 『시바타 다이지키(柴田退治記)』(오무라 유코, 1583년 11월 성립)의 칸조 문면과 할주 “或五千石/或三千石”은 『고지루이엔(古事類苑)』 병사부 수록분의 쪽 이미지로 확인했다. 『한칸후』가 『시바타 다이지키』를 옮겼다는 판단은 날짜와 석고가 일치하는 데서 나온 추정이다. ↩
-
『시바타 다이지키(柴田退治記)』, 『소후 모노가타리(祖父物語)』(에도 초기), 『겐몬가키(見聞書)』: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4책 수록분. 녹봉 150–200석은 『소후 모노가타리』·『겐몬가키』. 칠본창 명단의 변천은 이 블로그의 시즈가타케 전투 글 참조. ↩ ↩2
-
히데요시 서장, 1584년 4월 12일(수신인 결락),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7책(도쿄대학 사료편찬소 데이터베이스). 편자는 “스케사쿠”와 “카헤에”를 카타기리 나오모리·사다타카로 비정했다. ↩
-
구선안(口宣案) 두 통, 1585년 10월 6일, 「카타기리 문서(片桐文書)」,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21책. 같은 날 『가네미쿄키(兼見卿記)』에 “이날 제다이부에 임명된 이가 20여 명”.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의 1583년 7월 1일 서임은 이 문서와 맞지 않는다. 히데요시가 도요토미 성을 만든 시기는 1585년 9월설(무라카와 고헤이(村川浩平), 「하시바 씨 하사와 도요토미 성 하사(羽柴氏下賜と豊臣姓下賜)」, 『고마자와 사학(駒澤史学)』 49, 1996)과 1586년설(사전류)로 갈리고, 가신에게 도요토미 성을 내린 확인 가능한 가장 이른 사례는 1586년이다(같은 논문). 1585년 날짜에 도요토미 성이 적힌 이 문서가 언제 작성되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
-
카타기리 나오모리 서장, 1587년 9월 21일, 『효고현사(兵庫県史)』 사료편 중세2 448호, 가타야마(2018) 재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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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요시 슈인조, (1592년) 11월 10일 “카타기리 이치노카미” 앞, 9월 22일 “16인 조시슈” 앞: 『시세키슈란(史籍集覧)』 수록 카타기리 슈젠노카미 가문 소장 문서 사본(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 16인 조시슈으로서의 직무는 이 문서가 카타기리 가문에 전해진 데서 나온 추론이다. 사가현 나고야성 터에 「카타기리 카츠모토 진터(片桐且元陣跡)」가 특별사적으로 남아 있다(진제이초 교육위원회 조사 보고서, 1993·1995). ↩ ↩2
-
히데요시 슈인조, 1595년 8월 17일 “카타기리 히가시이치노카미” 앞, 『시세키슈란(史籍集覧)』 수록 문서 사본(쪽 이미지). 본지 “4,200석”은 활자본 교주에 따른 보충이며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의 “本領四千二百石”과 일치한다. 영지 소재는 『간세이초슈쇼카후』 1601년 기사의 “播磨伊勢兩國の領地”. 『한칸후(藩翰譜)』의 “攝津の茨木一万二千石”은 f146.p001 할주. ↩
-
1584년 야마시로 검지 부교와 가모 신사 연락을 맡은 “카타기리 카헤에”는 동생 사다타카다(『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8·13책 수록 문서). 사전류가 카츠모토의 이력으로 드는 히데요시 시대 대불전 작사 부교·후시미성 공사·검지는 『야마카와 일본사소사전(山川 日本史小辞典)』·『일본인명대사전(日本人名大辞典)』(코토뱅크)의 서술로만 확인했고 개별 문서는 찾지 못했다. ↩
-
『한칸후(藩翰譜)』 권10상 코이데 항목(f134.p004)의 주석. 후쿠다 지즈루(福田千鶴), 「코이데 히데마사에 관한 기초적 연구(小出秀政に関する基礎的研究)」, 『규슈문화사연구소 기요(九州文化史研究所紀要)』 66(2023) 37–38쪽(출처 『호나이키(豊内記)』와 판정), 41·43–44쪽(1600년 12월 이후 코이데·카타기리 연서 문서와 결론). ↩ ↩2
-
「게이초 3년 서지 전서(慶長三年誓紙前書)」, 1598년 8월 13일, 도쿄대학 사료편찬소 사본, 후쿠다(2023) 35–37쪽 번각. ↩
-
모리 테루모토 서장(1599년 윤3월 무렵), 「아사 모리가 문서(厚狭毛利家文書)」, 『야마구치현사(山口県史)』 사료편 중세3, 후쿠다(2023) 40쪽 재인용. “코이데”를 히데마사의 아들 요시마사로 보는 설도 있다(같은 논문 주46). ↩
-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 카타기리 항목(『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2편 20책 1615년 5월 28일 조 수록분). 오츠성 가신 파견설은 일본어 위키백과가 『오츠성 공방 전투 요도(大津城攻防戦闘要図)』·『치쿠시 고문서(筑紫古文書)』를 각주로 들지만 원문을 확인하지 못했다. 코이데 군세의 오츠성 공격은 후쿠다(2023) 41쪽. ↩ ↩2
-
『도다이키(当代記)』 권4·5, 『시세키잣산(史籍雑纂)』 2. 코이데 히데마사의 사망은 『한칸후(藩翰譜)』 f134.p004 “慶長九年に至て六十五歲にして卒す”. 혼다 마사노부 서장, 1615년 6월 1일, 카타기리 사다타카·타카토시 앞, 『후초요로쿠(譜牒餘録)』 57(『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2편 20책 580–581쪽, 쪽 이미지). 해마다의 슨푸 인사는 『슨푸키(駿府記)』 1612년 8월 15일, 1614년 5월 3일·20일 등(『시세키잣산』 2). ↩ ↩2
-
구로다 모토키(黒田基樹), 『하시바가의 붕괴: 차차와 카타기리 카츠모토의 고뇌(羽柴家崩壊 茶々と片桐且元の懊悩)』(平凡社, 2017). 본문은 열람하지 못했고, 저자가 이 책을 재편집해 실은 프레지던트 온라인 기사(2023)로 논지를 확인했다. ↩ ↩2
-
다카기 쇼사쿠(高木昭作), 「막번 초기의 쿠니부교제에 대하여(幕藩初期の国奉行制について)」, 『역사학연구(歴史学研究)』 431(1976). 소네 유지,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且元)』(2001)는 요시카와코분칸 출판사 소개문으로, 「카타기리 카츠모토와 오쿠보 나가야스 계열의 다이칸에 대하여(片桐且元と大久保長安系の代官について)」, 『일본역사(日本歴史)』 507(1990)은 서지로만 확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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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텐노지: 고베대학 미술사논집 「시텐노지의 게이초 재건에 대하여(四天王寺の慶長再建について)」. 카타노 신사·니노미야 신사: 히라카타시 홍보 자료 「그 사람 카타기리 카츠모토(あの人 片桐且元)」. 다마노오야 신사 기증장, 곤고지 동찰·명문: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2편 1·20책 보유. 기타노 덴만구: 기타노 덴만구 공식 사이트. 호코지 범종 명문: 『슨푸키(駿府記)』 1614년 8월 5일 조 수록 명문. 100곳 가까운 재건 건수는 위 고베대학 논문의 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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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칸후(藩翰譜)』 f146.p001. 『슨푸키(駿府記)』 1613년 9월 3일 조(『시세키잣산(史籍雑纂)』 2, 245쪽, 쪽 이미지), 1614년 9월 7일 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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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슨푸키(駿府記)』 1614년 5월 3일·20일, 7월 21일 조. 혼다 마사즈미·콘치인 스덴 연서장, 7월 26일, 『혼코코쿠시 닛키(本光国師日記)』 수록(『대일본불교전서(大日本仏教全書)』 139, 쪽 이미지). 나라 대불 종명 사본 건은 아래 8월 6일 서장. ↩ ↩2
-
혼다 마사즈미·콘치인 스덴 서장, 1614년 8월 6일, 카츠모토 앞, 『혼코코쿠시 닛키(本光国師日記)』 수록(쪽 이미지). 통설의 예로 『세계대백과사전(世界大百科事典)』 「종명 사건(鐘銘事件)」(코토뱅크)에는 이에야스가 ‘이에야스를 동강 내는 것’이라며 트집을 잡았다고 나온다. 하야시 라잔(林羅山)이 ‘국가안강’을 저주로 단정했다는 이야기는 『셋센짓로쿠(摂戦実録)』 등 후대 편찬물에서 나오며 원문을 확인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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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치인 스덴 서장, 1614년 8월 22일, 이타쿠라 카츠시게 앞, 같은 날 8월 6일 스덴의 이타쿠라 앞 내증 서장, 『혼코코쿠시 닛키(本光国師日記)』 수록(쪽 이미지). 고치 마사요시(河内将芳)가 이 “명문을 갈아 없애라”는 은밀한 뜻에 주목했다는 것은 일본어 위키백과 「호코지 종명 사건(方広寺鐘銘事件)」의 소개로만 확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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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코코쿠시 닛키(本光国師日記)』 8월 19·22일, 9월 6·14일 수록 서장(쪽 이미지). 『슨푸키(駿府記)』 8월 18·19·20·29일, 9월 12일 조(쪽 이미지). 마리코 세이간지에 머문 것은 『카타기리케 히키(片桐家秘記)』와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 『도다이키(当代記)』 9월 11일 조 할주에도 “이치노카미가 슨푸에서 출사하지 못했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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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슨푸키(駿府記)』 9월 7일 조(쪽 이미지). 『혼코코쿠시 닛키(本光国師日記)』 9월 8일 스덴의 카타기리 사다타카 앞 서장, 9월 14일 서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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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슨푸키(駿府記)』 9월 25일 조(쪽 이미지). 『카타기리케 히키(片桐家秘記)』, 『시세키슈란(史籍集覧)』 16책 별기 219(1710년 사본이 있었다는 것만 확인되며 성립 시기는 알 수 없다). 『시료소란(史料綜覧)』 권14 9월 18일 강문도 “카츠모토가 세 가지 방책을 말해 도쿠가와 가문과 화평을 지키기를 권했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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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칸후(藩翰譜)』 f146.p001(저본 쪽 이미지 대조). 『한칸후』는 이 일을 “19년 여름”이라 했으나 음력 7–9월은 가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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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간책 해석의 예로 와타나베 다이몬(渡邊大門)의 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 기고(2023)는 카츠모토 미대면을 이에야스의 심리 작전으로 본다. 다카하시 게이이치(高橋圭一), 「역사소설 속의 카타기리 카츠모토(実録の中の片桐且元)」, 『오사카오타니대학 기요(大阪大谷大学紀要)』 42(2008) 1–21쪽(『호나이키(豊内記)』·『나니와 센키(難波戦記)』의 서술 비교). 구사카리 다카히로(草刈貴裕), 「호코지 대불 종명 사건을 둘러싼 카타기리 카츠모토와 오쿠라쿄노츠보네의 동향에 대하여(方広寺大仏鐘銘事件をめぐる片桐且元と大蔵卿局の動向について)」, 『16세기사논총(十六世紀史論叢)』 15(2021): 서지는 CiNii로 확인했고 논지는 일본어 위키백과 「오쿠라쿄노츠보네(大蔵卿局)」의 소개로만 확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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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기리케 히키(片桐家秘記)』. 『슨푸키(駿府記)』 10월 1일 조에 실린 이타쿠라 카츠시게 서장. 『도다이키(当代記)』 9월 27일 조. 오다 노부카츠의 밀고는 『한칸후(藩翰譜)』 권10하 오다 항목(f144.p003)에도 있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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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기리케 히키(片桐家秘記)』 10월 1일 조목. 『도다이키(当代記)』 10월 1일 조 “인질을 잡고 이바라키로 물러났다”. 『오사카 고진 야마구치 큐안바나시(大坂御陣山口休庵咄)』, 도쿠토미 소호(徳富蘇峰), 『킨세이 니혼 코쿠민시(近世日本国民史)』(1925) 인용분(쪽 이미지). 인원 “三四千”은 “그렇다고들 했다(有之樣に申候)“는 전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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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슨푸키(駿府記)』 10월 1일 조. 『시료소란(史料綜覧)』 권15 10월 1일 강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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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슨푸키(駿府記)』 10월 7일 조(쪽 이미지). 『한칸후(藩翰譜)』 f146.p001. 혼다 마사즈미의 서약서와 10월 23일 니조성 알현은 『시료소란(史料綜覧)』 권15 강문(출전 『혼코코쿠시 닛키(本光国師日記)』·『후초요로쿠(譜牒餘録)』·『슨푸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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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슨푸키(駿府記)』 10월 16일 조(사카이), 12월 16일 무렵·17일 조. 포위 선봉·공격 작전 지시·지도 헌상은 『시료소란(史料綜覧)』 권15 강문(출전 『슨푸키』·『혼코코쿠시 닛키(本光国師日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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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제 호안(小瀬甫庵), 『다이코키(太閤記)』(1620년대), 『시오지리(塩尻)』(아마노 사다카게, 18세기 전반):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2편 20책 수록분. 『나니와 센키(難波戦記)』의 비젠지마 장면은 다카하시(2008) 14쪽의 요약. 『시료소란(史料綜覧)』 권15 12월 16일 강문. 이 일화만 다룬 연구로 다카하시 게이이치, 「카타기리 카츠모토와 대포(片桐且元と大筒)」, 『에도문학(江戸文学)』 31(2004)이 있으나 본문은 열람하지 못했다. 「사나다마루」 제46회 「포탄(砲弾)」(2016년 11월 20일 방송)의 해당 장면은 방송 리뷰(武将ジャパン)로 확인했고 NHK 공식 자료로는 확인하지 못했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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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뒤 근신 청원은 『시료소란(史料綜覧)』 권15(출전 『후초요로쿠(譜牒餘録)』·『오사카 고진 오보에가키(大坂御陣覚書)』). 『슨푸키(駿府記)』 1615년 4월 2일, 5월 8일 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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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슌 닛키(梵舜日記)』 1615년 5월 28일·6월 4일 조, 『슨푸키(駿府記)』 5월 28일 조와 편자 안어, 『야마모토 닛키(山本日記)』,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 모두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2편 20책 573–574쪽(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 쪽 이미지). ↩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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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기리 카츠모토 화상(片桐且元畫像)」, 교쿠린인 소장,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2편 20책 수록 사진판(쪽 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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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판큐키(薩藩旧記)』 후집 권32 「이에히사 공 어보(家久公御譜)」 중 6월 10일 자 서신,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2편 20책 수록. 『한칸후(藩翰譜)』 f146.p002. 『야마모토 닛키(山本日記)』.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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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코키(太閤記)』, 『오키나구사(翁草)』,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는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2편 20책 수록분. 『나니와 센키(難波戦記)』의 충신상, 쓰지 젠노스케(辻善之助)의 1913년 강연, 구와타 다다치카(桑田忠親)의 『요도기미(淀君)』(吉川弘文館 人物叢書, 1958) 평가, 쓰보우치 쇼요(坪内逍遥)의 『키리 히토하(桐一葉)』는 다카하시(2008)를 거쳐 확인했다. 소네(2001)는 출판사 소개문, 구로다(2017)는 주17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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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짓키(徳川実紀)』 「다이유인도노 고짓키(大猷院殿御実紀)」 권39, 1638년 11월 10일 조(쪽 이미지). 이 조에는 타카토시가 카츠모토의 양자이고 실은 일족 카타기리 나오시게의 아들이라는 이설도 실려 있으나, 『한칸후(藩翰譜)』와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의 자녀 목록에는 친자로 나온다. 『한칸후』 f146.p003–p005. 4만 석은 『간세이초슈쇼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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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칸후(藩翰譜)』 f146.p006. 코이즈미번과 카타기리 세키슈는 코토뱅크 「코이즈미번(小泉藩)」·「카타기리 세키슈(片桐石州)」(『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세계대백과사전(世界大百科事典)』·『일본인명대사전(日本人名大辞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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