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즈가타케 합전도 병풍의 한 폭. 흰 벽의 진성 두 곳과 붉고 흰 깃발 사이로 창을 맞댄 무사들이 그려져 있다(작자 미상, 에도 시대, 나가하마성 역사박물관 소장, 퍼블릭 도메인)

시즈가타케 전투(1583) — 열 달의 대립, 이틀의 결전, 그리고 일곱 명이 된 아홉 명

Q: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는 어떤 전쟁인가?

A: 덴쇼 11년(1583) 4월 오미(近江, 현 시가현) 북부 요고호(余呉湖) 일대에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훗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가 맞붙은 전투다.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뒤 가신단의 두 실력자가 열 달 가까이 대립한 끝에 벌어졌다. 4월 20일 카츠이에 쪽 사쿠마 모리마사(佐久間盛政)가 오이와야마(大岩山)의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清秀)를 공격해서 죽였지만, 히데요시가 미노(美濃) 오가키에서 하루 만에 돌아와 4월 21일 야나가세(柳ヶ瀬)에서 시바타 군을 무너뜨렸다. 카츠이에는 본거지인 에치젠 기타노쇼성(北ノ庄城)으로 물러났다가 4월 24일 아내 오이치(お市)와 함께 최후를 맞았다. 이 승리로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 안에서 맞설 상대가 없어졌고, 오사카에 새 성을 쌓기 시작했다. 이 전투에서 활약한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 히데요시의 일곱 사무라이는 후대에 “시즈가타케 칠본창(七本槍)“이라는 별칭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한눈에 보는 시즈가타케 전투

항목내용
명칭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 일본에서는 시즈가타케 합전(合戦)이라고도 한다
기간덴쇼 11년(1583) 4월 20일 오이와야마 공방, 21일 야나가세 합전, 24일 기타노쇼 낙성. 대립 자체는 1582년 6월 키요스회의부터 이어졌다
주 무대오미 북부(요고호, 시즈가타케, 오이와야마, 야나가세, 기노모토), 에치젠 후추(府中)·기타노쇼
하시바 측하시바 히데요시, 하시바 히데나가(羽柴秀長), 호리 히데마사(堀秀政),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 나카가와 키요히데,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 등. 노부카츠(織田信雄)는 후방에서 오다 노부타카(織田信孝)를 압박했다
시바타 측시바타 카츠이에, 사쿠마 모리마사, 시바타 카츠마사(柴田勝政),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 부자, 후와 카츠미츠(不破勝光), 가나모리 나가치카(金森長近) 등. 오다 노부타카와 다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가 호응했다
병력출전이 확인되는 가장 이른 수치는 시바타 군 “6만여 기”(승자 측 기록)이고, 연구자는 과장으로 본다. 양군 병력의 합의된 수치는 없다
대표 전투오이와야마 공방(4.20), 야나가세 합전(4.21), 기타노쇼성 공방(4.23–24)
주요 전사·최후나카가와 키요히데(4.20), 시바타 카츠이에와 오이치(4.24). 사쿠마 모리마사와 시바타 카츠토시(柴田勝敏)는 생포 뒤 처형, 오다 노부타카는 자결
결과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의 실권을 장악했다. 에치젠·가가·노토의 영지가 재편되고 오사카 축성이 시작됐다

이 블로그는 마에다 도시이에는 시즈가타케에서 카츠이에를 배신했나에서 4월 21일의 이탈 문제 하나를 자세히 다뤘고,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글에서는 칠본창을 인물별로 이야기했다. 그다음 해의 전쟁은 코마키·나가쿠테 전투로 정리했다. 이번에는 그 사이에 있는 사건 전체를 시간순으로 따라가려 한다.

시즈가타케 전투의 승패는 4월 20일과 21일 이틀 사이에 갈렸다. 그런데 사쿠마 모리마사의 명령 위반, 히데요시의 52킬로미터 귀환, 시즈가타케 칠본창처럼 이 이틀간의 사건은 대부분 에도 시대에 와서 굳어진 서사로 전해진다. 이 글에서는 시즈가타케 전투 이전의 열 달과 이후의 반년까지 함께 다루고, 각 이야기가 어느 문헌에서 처음 나오는지를 가능한 한 원문으로 확인했다. 중심 사료는 오무라 유코(大村由己)가 1583년 11월에 쓴 『시바타 다이지키(柴田退治記)』다. 히데요시의 어용 문필가가 쓴 승자의 기록이라 히데요시 측에 유리한 편향이 있지만 사건과 가장 가까운 때에 작성됐기 때문이다.

1. 혼노지 이후 열 달 — 대립의 구도

1-1. 키요스회의와 극적 대립 장면의 출전

1582년 6월 2일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와 장남 노부타다가 함께 죽었다. 6월 13일 야마자키에서 아케치 미츠히데를 꺾은 히데요시는 6월 27일 오와리 키요스성에 모인 노부나가의 중신들과 후계 문제를 정했다. 참석자는 시바타 카츠이에, 하시바 히데요시, 니와 나가히데, 이케다 츠네오키 네 명이었다. 이 네 명과 같은 격이었던 중신 다키가와 카즈마스는 간토에서 패전한 직후라 오지 못했고,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카츠와 노부타카도 이 자리에는 없었다. 결론은 노부타다의 아들 산포시(三法師)를 후계로 세우고, 노부카츠와 노부타카가 후견을 맡으며 네 중신이 보좌한다는 것이었다.

널리 알려진 바로는 카츠이에가 노부타카를 후계자로 밀었으나, 히데요시가 이 자리에 세 살짜리 산포시를 품에 안고 나와 중신들을 굴복시켰다는 것이다. 이 장면의 출전은 『가와스미 다이코키(川角太閤記)』다. 1621년에서 1625년 사이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책으로, 히데요시가 죽은 지 20여 년 뒤의 책이다. 시바 히로유키(柴裕之)는 2018년 연구서 『키요스 회의(清須会議)』에서 이 대립 구도를 후대의 창작으로 본다. 노부나가가 이미 1575년에 노부타다에게 가독을 넘겼으므로 노부타다가 사망한 이후의 가독을 산포시가 계승하는 것은 키요스회의 전에 이미 정해진 노선이었고, 회의에서 실제로 다툰 것은 어린 산포시를 대신할 후견 역인 나다이(名代)를 누가 맡느냐였다고 그는 해석한다.1 이 후견 역은 뒤에서 다시 나온다.

동시대 기록은 짧다. 나라(奈良) 고후쿠지의 승려가 쓴 『다몬인 닛키(多聞院日記)』에 “대체로 하시바(히데요시)가 바라는 대로 되었다”는 취지의 한 줄이 있다고 여러 해설에 인용돼 있다. 원문의 날짜와 어순은 직접 대조하지 못해 취지만 옮긴다.2 영지 배분은 히데요시 쪽이 크게 늘었다. 히데요시는 하리마에 더해 야마시로와 가와치를 영지로 받게 되었고, 히데카츠(秀勝) 앞으로 탄바를 받게 되었다. 히데카츠는 노부나가의 아들 오츠기마루(於次丸)로, 히데요시가 양자로 들인 사람이다. 탄바는 노부나가의 아들 명의로 히데요시 쪽에 들어온 셈이다. 일본어 위키백과의 요약에 따르면 카츠이에는 에치젠에 오미 북부 3군과 나가하마성을 받았다.3

1-2. 10월, 장례와 서장

회의가 끝나고 석 달 사이에 두 사람의 관계는 의례와 영지 문제로 갈라졌다. 먼저 산포시의 거처다. 아즈치성이 복구될 때까지 산포시를 기후의 노부타카가 맡기로 했는데 노부타카가 돌려보내지 않았다. 『시바타 다이지키』 첫머리에는 노부타카가 시바타·다키가와와 의논해 “어린 주군을 히데요시에게 넘기면 그 한 사람이 천하를 헤아려 마음대로 권위를 휘두를 것이 눈앞에 보인다”며 넘기지 않았다고 나와 있다.4 히데요시는 이를 키요스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에 대한 위반으로 몰았다. 다음은 장례다. 10월 15일 교토 다이토쿠지에서 노부나가의 장례가 열렸고,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아들이자 자신의 양자인 히데카츠를 상주로 세워 이를 주도했다. 이 장례에 노부카츠·노부타카 형제와 카츠이에는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 부분도 원문은 확인하지 못한 2차 요약이다.3

그렇다고 이 시점에 이미 히데요시와 카츠이에 두 사람의 사이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보기는 어렵다. 10월 6일 카츠이에가 호리 히데마사에게 보낸 서장(『난코잣로쿠(南行雑録)』 수록으로 소개됨)에는 히데요시와 합의한 일을 어길 뜻이 없다는 취지의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와타나베 다이몬(渡邊大門)은 이 서장을 근거로 10월 초까지는 관계가 완전히 깨지지 않았다고 본다.5 그런데 10월 16일 카츠이에가 히데요시의 야마자키 독자 축성을 비판하는 각서를 보내고, 10월 18일 히데요시가 노부타카에게 산포시 미반환과 장례 불참을 책망하는 서장을 보냈다고 하는데,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갈등이 시작된 게 아닌가 싶다. 다만 이 두 건은 원문을 찾지는 못했고 2차 요약으로만 확인했다.5

1-3. 11월의 화의 사절

이 겨울의 이야기는 『시바타 다이지키』 서두에 나온다. 카츠이에는 양자 카츠토요(勝豊)와 의논해 화평을 위해 마에다 도시이에, 후와 카츠미츠, 가나모리 나가치카를 교토에 올려보냈다. 이유는 “에치젠은 초겨울부터 늦봄까지 눈이 깊어 군량을 나르기 어렵고 지금 전쟁을 일으키면 인마가 지치고 백성이 힘들어져 영내가 텅 비게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히데요시는 이 교섭을 멈추게 하고 12월 초 나가하마로 출진했다.4

“눈 때문에 카츠이에가 움직이지 못했다”는 통설과 “화의는 시간을 벌려는 수작이었다”는 해석이 같은 문장에 함께 들어 있다. 다만 이 책을 쓴 사람은 앞서 말했듯 하시바 쪽이 고용한 작가다. 카츠이에 쪽의 사정을 히데요시 쪽이 적은 것이므로, 시간벌기 수작이라는 평가 역시 히데요시 쪽의 관점일 수 있다. 눈이 실제로 길을 막았다는 데는 따로 단편적인 증거가 있다. 향토 사이트에 따르면 오미 북부 쇼묘지(称名寺)에 전하는 12월 20일자 마스타 나가모리(益田長盛) 서장에 “눈이 깊어 통로가 일절 없다고 하니 그대로일 것”이라는 구절이 있다.6

여기까지 확인되는 사실만 추리면, 카츠이에가 겨울을 앞두고 눈에 막힐 처지에 놓인 사이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장례를 주도하고 산포시 문제로 노부타카를 몰아세웠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주도권은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2. 겨울과 봄 — 나가하마, 기후, 이세

2-1. 12월, 두 개의 성이 싸우지 않고 열렸다

히데요시는 화의를 받지 않았고, 산포시를 넘기지 않은 노부타카의 합의 위반을 명분으로 12월 초 나가하마에 출진했다.4 나가하마성에는 카츠이에의 양자 시바타 카츠토요가 있었다. 『시바타 다이지키』에 따르면 카츠토요는 병으로 몸을 가누지 못했고 눈이 깊어 에치젠의 원군도 오지 못했다. 카츠토요는 먼 에치젠의 원군을 기다려 봤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싸우지 않고 항복했다. 같은 책에는 카츠토요의 속사정도 한 줄 들어 있다. 그는 원래 다른 성씨의 사람으로 카츠이에의 양자가 됐는데, 영내에서 사쿠마 모리마사가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7 항복 날짜는 자료마다 12월 2일과 9일로 갈리므로 “12월 초”로만 적어 둔다.8

히데요시는 병력 3만여 기를 이끌고 눈 덮인 길을 지나 오다 노부타카가 있는 기후로 향했다. 히데요시의 대군에 버티지 못한 노부타카는 산포시를 내놓고 노모와 딸을 인질로 보내는 조건으로 화의를 청했고, 히데요시는 포위를 풀었다. 노부타카의 항복일은 12월 20일로 소개된다.8 그 뒤 히데요시는 야마자키에서 해를 넘기고 1월에 히메지를 오갔으며, 1월 초 며칠 사이에 여러 다이묘가 줄지어 인사하러 왔다고 한다. 윤1월 초에는 아즈치에 갔다. 『시바타 다이지키』에 따르면 산포시가 어려서 숙부 노부카츠를 후견 역(名代)으로 삼고 산포시를 아즈치로 모셨다.7 1-1에서 키요스회의의 실제 쟁점이었다고 소개한 후견 역 문제가 이 겨울 사이에 노부카츠로 정리된 셈이다.

2-2. 이세에서 다키가와 카즈마스를 상대하다

카츠이에에게 호응한 사람이 이세의 다키가와 카즈마스였다.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1583년 정월 초하루에 카즈마스가 거병해 이세의 성들을 조략했다고 나오는데, 이 날짜의 1차 근거는 찾지 못했다. 히데요시는 병력을 세 갈래로 나눠 이세로 들어갔다. 『시바타 다이지키』가 전하는 배치로는 히데나가와 츠츠이 준케이 등이 도키타라 고개, 미요시 손시치로(훗날의 하시바 히데츠구)와 나카무라 카즈우지 등이 다른 길, 히데요시 자신이 안라쿠 고개 쪽 길을 맡았다. 카즈마스는 요지마다 보루를 쌓아 두었다. 히데요시는 카즈마스 쪽 장수가 지키는 미네성을 에워싸고, 가메야마성의 사지 신스케(佐治新助)를 항복시켜 목숨을 살려 주고 나가시마로 보냈다.7 출병 시점은 1월 하순, 2월 10일, 2월 12일 등으로 자료마다 달라 단정할 수 없다.8

이세에서 시간을 쓰는 동안 오미 북부에서는 시바타 군이 움직였다. 일본어 위키백과 등에는 2월 28일경 카츠이에가 마에다 토시나가를 선봉으로 출진시키고, 3월 12일경 카츠이에 자신이 야나가세에 진을 쳤다고 되어 있다. 선발대는 마에다 도시이에 본인이 아니라 아들 토시나가였다.8 히데요시는 3월 19일 기노모토에 진을 쳤다고 한다. 『시바타 다이지키』에 따르면 히데요시가 시바타 군이 오미 쪽으로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진을 아즈치로 옮겼고, 다음 날 아침 카츠이에 쪽이 덴진야마성 부근에 쳐들어와 마을마다 불을 지르고 야나가세로 물러났다.7 그사이 두 진영은 첩보전도 벌였다. 향토 사이트가 인용한 바로는 3월 13일자 이시다 미츠나리 서장에 “야나가세에 붙여 둔 자가 돌아와” 보고했다는 구절이 있다.6

카츠이에는 외부 세력에도 손을 뻗었다.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카츠이에는 쇼군직에서 쫓겨난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통해 모리 테루모토에게 출병을 요청했고, 요시아키가 4월 5일 테루모토에게 카츠이에의 선발대가 오미에 들어왔다고 알리며 즉시 출병하라고 재촉했다. 하지만 4월 20일 모리 쪽 킷카와 모토하루와 고바야카와 타카카게는 어느 쪽이 이길지 알 수 없다고 판단해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이 내용은 오쿠노 다카히로(奥野高広)의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1990)를 인용한 위키백과 요약이며, 서장 원문은 대조하지 못했다.8

3. 두 군의 진 — 병력 수치와 진성

3-1. 병력은 누구의 숫자인가

이 전투를 소개하는 글에는 으레 “히데요시 5만 대 카츠이에 3만”이라는 숫자가 붙는다. 이 숫자의 출전은 확인하지 못했다. 양군의 병력 규모에 대한 가장 이른 시기에 나온 기록은 역시 『시바타 다이지키』다. 4월 20일 오이와야마 공격 뒤 카츠이에가 “요고(余語)산 봉우리가 서북쪽으로 에치젠·엣추·노토·가가 4개 지방으로 이어진 곳에 인원 6만 기 이상을 나란히 세웠다”고 나와 있고, 4월 21일 히데요시가 맞선 적진은 “5–6만 기”로 되어 있다. 반면 12월 기후 출병 때의 히데요시군은 “3만여 기”이고, 4월 21일의 히데요시 쪽은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처럼 나온다(6-2). 승자 측 기록답게 적은 많게, 아군은 적게 그렸다.9

와타나베 다이몬은 이 6만을 과장으로 본다. 군역을 영지 100석당 4명으로 계산하면 6만 명을 동원하는 데 약 150만 석이 필요하다는 계산을 근거로 들며, 실제 규모는 1만 전후가 합리적이라고 추정한다. 다만 이 계산은 연구자 개인의 추정이다.10 일본어 위키백과 정보란에는 히데요시 5만–7만, 시바타 3만으로 나와 있는데, 이 수치에도 본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이세·미노 방면 병력이 섞였을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 그렇기에 시즈가타케 전투에 참가한 양측의 병력 규모는 확정하지 않고 넘어간다.

3-2. 진성이 늘어선 호수

양군은 요고호 주변 능선에 진성(陣城)을 쌓고 대치했다. 『시바타 다이지키』에 나오는 히데요시 쪽 배치를 보면, 덴진야마는 적을 막기에 좋은 땅이 아니라 7–8정(町) 물러나 도기야마(堂木山)에 보루를 쌓고 카츠토요의 병력(이가노카미 병력)을 뒀다. 사네야마에는 호리 히데마사, 시즈가타케 곶의 오이와야마에는 나카가와 키요히데, 그 능선을 따라 5–6정 떨어진 곳에는 다카야마 우콘이 진을 쳤다. 타가미야마에는 하시바 히데나가가 있었고 시즈가타케 정상에도 히데나가가 병력을 두었다. 하치스카, 이코마, 미코다, 아카마츠, 코데라, 아카시, 히토츠야나기 등은 기노모토에 응원군으로 자리 잡았고, 해진·츠루가 방면은 니와 나가히데가 막았다. 호소카와 타다오키(당시 이름은 나가오카)는 탄고로 돌아가 선박을 모아 바다 쪽에서 호쿠리쿠 병력을 막는 임무를 맡았다. 이 무렵 카츠토요는 병이 깊어져 교토에서 세상을 떠났다. 임종에 그는 히데요시가 에치젠을 평정해 자기 소망을 이뤄 주면 그것이 저승의 위로가 될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고, 히데요시가 눈물을 누르며 금은을 보내 장례를 치렀다는 이야기도 같은 책에 나온다. 승자가 쓴 미담이므로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그 뒤 카츠토요의 병력에는 시바타 쪽의 조략 소문이 돌아 기무라 하야토노스케가 교체 투입됐다고 한다. 이 책에는 시바타 쪽 배치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11

시즈가타케에서 내려다본 요고호. 호수 너머로 눈 덮인 산줄기가 이어진다.
시즈가타케에서 본 요고호와 북쪽 산줄기(2009). 사진: Alpsdake, CC0.

시바타 쪽 본진은 우치나카오야마(內中尾山)의 겐바오성이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에치젠으로 넘어가는 도로를 장악해 후방과 연결하는 요지다. 이 성터는 1999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됐고, 각 쿠루와(曲輪, 성의 구획)의 구분과 마구치(馬出, 성문 앞 방어 구조) 등 구조의 완성도가 높아 오다·도요토미 계 산성 가운데 최고 수준으로 평가된다. 다만 “겐바오성”이라는 이름은 당시 사료에 나오지 않는다. 카츠이에 본진에서 사쿠마 모리마사의 진인 교이치야마(行市山)까지 길을 닦았고 그 능선길을 지역에서 “겐바가오(玄蕃ヶ尾)“라고 불렀다는 전승이 성 이름의 유래라고 한다.12 지형으로 이 전투가 실제로 어떻게 진행됐는지 추론하는 연구로는 사카이 나오토(坂井尚登)가 『역사군상(歴史群像)』 2022년 8월호에서 “산악 기동전”이라는 틀을 제시한 것이 서지로 확인되지만, 본문의 내용은 온라인으로 읽을 수 없었다.12

양군은 3월 중순부터 거의 한 달 동안 큰 충돌 없이 보루만 늘렸다. 진이 자리를 잡자 히데요시는 츠츠이 준케이와 몇몇 장수를 귀국시키고 자신은 나가하마로 물러났다(『시바타 다이지키』). 노부타카가 다시 움직이기 전까지 전선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11

4. 4월 20일 오이와야마 — 사쿠마 모리마사의 하루

4-1. 노부타카의 재거병과 히데요시의 오가키행

교착을 깬 것은 기후의 노부타카였다. 『시바타 다이지키』에 따르면 노부타카는 히데요시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형 노부카츠와도 다툼이 있어 다시 모반했으며, 카츠이에·다키가와와 힘을 합쳐 천하를 뒤엎기로 의논했다. 다시 거병한 시점은 4월 16일 전후로 전해진다. 12월 화의 때 인질로 보낸 노부타카의 생모는 이 재거병 때문에 책형(磔刑)을 당했다고 『기타바타케 모노가타리(北畠物語)』에 나온다고 하는데, 일본어 위키백과를 거친 2차 인용이라 날짜와 장소는 확인하지 못했다.8 노부타카군에 대응하기 위해 히데요시는 4월 17일 나가하마에서 미노 오가키성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장맛비가 그치지 않아 고도가와(郷土川)가 불어 병력이 건널 수 없었고, 그래서 오가키에 “대엿새 머물렀다”는 것도 『시바타 다이지키』에 나와 있다.13

그러나 이렇게 되면 날짜가 조금 어긋난다. 4월 17일에 도착해 20일에 떠났다면 오가키에 머문 날은 나흘 남짓이다. 와타나베 다이몬은 히데요시의 오가키 도착을 16일로 본다.14 16일 도착이면 대엿새라는 말과 맞지만, 어느 쪽이 맞는지는 확정하지 못했다. 히데요시 4월 18일자 서장이 야마지 마사쿠니(山路正国)의 배반을 뒷받침한다는 점도 와타나베가 소개하지만 서장 원문은 확인하지 못했다.

4-2. 안내자가 된 배반자

야마지 쇼겐(山路将監, 마사쿠니)은 히데요시에게 항복한 카츠토요 쪽 요리키(与力, 주군 아래 배속된 무사)로 에치젠과의 경계인 덴진야마에 데지로(出城, 본성 밖에 두는 보조 성)를 쌓던 사람이다. 『시바타 다이지키』에 따르면 그는 배반이 들통나 처자를 내팽개치고 대낮에 시바타 진영으로 도망쳤다. 4월 20일 공격 부분에는 “그 배반자 야마지 쇼겐이 안내자가 되어 적의 움직임과 진 배치를 샅샅이 알아냈다”는 구절이 있다.13 이에 따르면 오이와야마 기습에는 히데요시 진영의 내부를 아는 사람이 길잡이로 붙었던 셈이다. 이 책에 따르면 공격하기로 결정한 사람도 카츠이에 본인이다. 카츠이에는 노부타카의 거병으로 천하를 잡을 수 있게 됐고 지난겨울 노부타카를 돕지 못한 것이 원통하니 이번에는 반드시 일전을 벌이겠다며, 히데요시가 미노로 간 틈에 먼저 이쪽을 쳐부수자고 판단했다. 모리마사가 오이와야마로 향하는 동안 시바타 부자는 도기야마와 사네야마 쪽으로 다가가 견제했다.13 적어도 이 책에서 오이와야마 공격은 모리마사 혼자 벌인 일이 아니다.

4-3. 4월 20일 새벽, 나카가와 키요히데의 죽음

『시바타 다이지키』에는 4월 20일의 공격이 짧게 나온다. “덴쇼 11년 4월 20일, 사쿠마 겐바노스케(盛政)를 대장으로 요고 호수를 지나 시즈가타케에 대비를 두고 나카가와 세베에 키요히데가 진을 친 곶으로 쳐들어갔다.” 나카가와 키요히데는 이전에도 여러 번 무공에서 실수가 없던 사람으로 소개된다. 그는 “일천여 기로 보루를 나와 돌격해” 한때 이겼으나 적이 다수여서 마침내 전사했다.13 최후가 자결이었는지 전투 중 전사였는지는 이 책에 나오지 않는다.

합전도 병풍의 한 폭. 언덕 사이에서 말 탄 무사와 보병들이 창을 맞대고 있고, 위쪽에 진성이 보인다.
시즈가타케 합전도 병풍의 다른 한 폭. 작자 미상, 에도 시대, 나가하마성 역사박물관 소장, 퍼블릭 도메인.

공격 날짜는 4월 20일이 다수설이다. 『시바타 다이지키』에 4월 20일로 나오고 일본어 위키백과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清秀)」 항목도 이바라키시 교육위원회 자료(1985)와 다니구치 가쓰히로(谷口克広, 1995)를 근거로 20일 이른 아침으로 본다. 4월 19일로 된 것은 일본어 위키백과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 본문뿐이다.15 이날의 나카가와 키요히데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 다카야마 우콘 등이 물러나자고 권했으나 키요히데가 거절했다는 이야기, 시바타 측 무장 곤도 무이치(近藤無一)가 벤 것은 사실 키요히데가 아니라 그 동생이었고 키요히데는 성으로 돌아가 자결했다는 이야기 등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에도 시대 기록이나 향토 전승 수준이고, 동시대의 근거는 없다.16

4-4. “철수 명령”은 어디에 있는가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사쿠마 모리마사 하면 따라붙는 이야기가 있다. 카츠이에가 오이와야마만 빼앗고 즉시 돌아오라고 단단히 일렀는데도 모리마사가 승리에 취해 따르지 않다가 예상보다 빠르게 귀환한 히데요시군을 맞닥뜨렸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문헌별로 맞춰 보면 다음과 같다.

문헌성립철수 명령비고
『시바타 다이지키』1583년 11월없음. 편자의 사후 평만 있음”이때 서둘러 철수했다면 일단 승리의 몫이었을 것이나, 그대로 진에 머물렀다”
『가와스미 다이코키』1621–1625년경없음(읽은 범위)모리마사는 카츠이에와 함께 물러나지 않고 산 오솔길로 츠루가 쪽으로 빠졌다는 내용만 있음
호안 『다이코키』 권61625/26있음. 사자를 거듭 보내 “서둘러 철수하라”고 했으나 따르지 않음카츠이에가 성에 돌아와 “곧바로 철수하지 않아 실수를 범했다”고 한탄하고, 모리마사도 처형 직전 “카츠이에의 지시대로 곧바로 본진에 돌아갔다면”이라고 말함
『센가쿠 갓센키(賤岳合戦記)』에도기, 사본 발문 1819있음. 19일 정오 협의, “오늘 안에 철수하라”는 조건부 허락, 사자 수차례발문 자체에 “백 년 뒤에 지은 듯한 것도 있다”, 의심스러운 점이 많다는 말이 있음
『고스가 규베에 이야기(小須賀九兵衛話)』성립 연도 불명있음. 사자 6명, 모리마사의 답변 “오니 시바타는 소규모 접전 때 이야기”
『에혼 다이코키(絵本太閤記)』1797–1802있음. 사자 5–6회, “카츠이에는 늙어 분별을 잃었는가”성립이 가장 늦은 단계
『신쇼 다이코키(真書太閤記)』18세기 후반적진 깊숙이 들어가는 기습(中入り) 논의의 각색모리마사가 먼저 진언하고 카츠이에가 반대하다 허락하는 장면

철수 명령을 담은 동시대 서장은 확인되지 않는다. 철수 명령이 나오는 문헌으로는 호안 『다이코키(甫庵太閤記)』가 가장 이르다. 『사쿠마군키(佐久間軍記)』의 원문은 직접 대조하지 못해 호안보다 앞선 출전이 있는지는 확정하지 못한다. 일본어 위키백과 「사쿠마 모리마사(佐久間盛政)」 항목에는 기습 논의에서 카츠이에가 반대하고 모리마사가 설득하는 장면이 “사료에 전무하다”는 설명이 있다.17

표를 놓고 보면 사쿠마 모리마사는 4월 20일 오이와야마를 빼앗았고 그 뒤에도 진을 거두지 않았으며, 그 사이에 히데요시가 돌아왔다. 『시바타 다이지키』의 “그대로 진에 머물렀다”라는 이야기는 전투로부터 반년 뒤에 승자가 붙인 평가다. 이 기록을 “모리마사가 카츠이에의 명령을 어겼다”라는 이야기의 가장 이른 원형으로 볼 여지는 있지만, 이 문장에 카츠이에의 명령은 존재하지 않는다. “카츠이에의 명령”은 40여 년 뒤에 쓰인 호안 『다이코키』에서 사자를 거듭 보냈다는 형태로 처음 확인되고, 그 뒤의 에도 시대 책들에서 카츠이에가 보낸 사자의 수와 인물들의 대사가 덧붙여졌다. 카츠이에가 실제로 철수를 명했는지는 동시대 사료로 알 수 없다.

5. 미노 대회군(美濃大返し) — 오가키에서 기노모토까지 반나절

5-1. 『시바타 다이지키』의 한 문장

히데요시의 귀환을 처음 기록한 사람도 오무라 유코다. 나카가와 키요히데의 사망 소식을 들은 히데요시가 “그동안 시바타는 험한 곳에 틀어박혀 싸움을 피해 왔다. 이제 이긴 기세를 타고 나왔으니, 진을 굳히기 전에 들이치면 쉽게 쳐부술 수 있다. 천하의 승부가 이번에 갈린다”라며 달렸다는 이야기에 이런 문장이 이어진다.

垂井。関原。藤川。早路逸足而過伊吹山之麓。…申刻立大柿。戌刻木本着陣。三十六丁路十三里。二時半時懸着事。古今希有之働也。

타루이·세키가하라·후지카와를 지나 이부키산 기슭을 빠르게 지났다. 신각(申刻)에 오가키를 출발해 술각(戌刻)에 기노모토에 도착했다. 36정(1리)길로 13리, 두 시진 반에 달려갔으니 고금에 드문 움직임이다.18

우리에게 익숙한 단위로 환산하면 52킬로미터를 5시간에 주파한 셈이다. 13리는 약 51–52킬로미터이고 신각은 오후 3시에서 5시경, 술각은 오후 7시에서 9시경이다. 두 시진 반(二時半)을 한 시진 2시간으로 계산하면 5시간이다. 히데요시 군이 시속 10킬로미터가 넘는 속도로 행군한 것이니 놀라운 속도다.

5-2. 출발 시각은 기록마다 다르다

문헌마다 출발 시각은 아래와 같이 다르다.

문헌·연구자출발 시각
『시바타 다이지키』(1583)신각(오후 3–5시경) 출발, 술각(오후 7–9시경) 도착
『센가쿠 갓센키』(에도기)한 문장 안에서 “미(未)의 각(오후 1–3시)“과 “신(申)의 하각(오후 5시경)” 출발을 모두 나옴
『가와스미 다이코키』(1620년대)19일 밤 출발, 시즈가타케 산 아래 도착은 20일 밤. 다른 문헌보다 하루 빠름
오타 히로시(太田浩司)정오 출발, 5시간 남짓에 도착(『도요토미 히데요시 사전(豊臣秀吉事典)』 2007, 위키백과 재인용)
『크로닉 전국 전사(クロニック戦国全史)』(일본어 위키백과 인용)오후 2시경 출발, 오후 7시경 선두 도착

이처럼 출발 시각은 정오, 오후 2시·4시·5시에서 전날 밤까지 제각각이고 그 범위도 넓다. 지금 남은 사료로는 이 가운데 하나를 골라 정설처럼 쓰기는 어렵다.19

와타나베 다이몬은 5시간 52킬로미터에 회의적이다. 2023년 기고에서 그는 1만 5천 명이 한꺼번에 이동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고, 히데요시가 중심이 된 선발대가 말을 타고 먼저 빠르게 이동하고 후속 부대가 줄줄이 뒤따랐다고 보아야 한다고 썼다. 2026년 8월 기고에서는 “5시간이라고 단정하기보다 후대 이야기책 식의 표현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히데요시가 4월 20일 오가키 쪽에 있었다는 것은 서장으로 확인되지만 구체적인 시각과 소요 시간은 대부분 『시바타 다이지키』에 의존한다는 점도 지적했다.20 1만 5천이라는 병력 수치는 『센가쿠 갓센키』에 나오고 『시바타 다이지키』에는 숫자가 없다.

소나무에 기대 앉은 갑주 차림의 무장이 소라고둥을 불고 있다. 뒤로 산과 호수가 있고 달이 두 개로 보인다.
츠키오카 요시토시, 「월백자(月百姿) 시즈가타케의 달 히데요시」(1888). 달 아래 소라고둥을 불어 군사를 부르는 히데요시.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소장, 퍼블릭 도메인.

5-3. 횃불, 주먹밥, 도로 정비

이 히데요시 군의 귀환 과정에 관해서는 세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1) 길가 마을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마중 나왔다, 2) 주먹밥을 미리 만들어 두었다가 병사들에게 먹였다, 3) 히데요시가 미리 길을 정비하게 했다. 이 이야기들의 출전이 어디인지 하나씩 찾아보았다.

장면처음 확인되는 문헌비고
횃불 마중『센가쿠 갓센키』(에도기)후지카와 부근에서 해가 지자 마을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마중 나왔다”고 외쳤다는 이야기. 『가와스미 다이코키』에도 횃불 이야기는 있으나 적을 속이려고 억새에 불을 붙였다는 이야기
주먹밥『가와스미 다이코키』(1620년대)히데요시가 쇼야(庄屋, 마을의 우두머리)들에게 창고를 열어 밥을 짓게 하고 소금물로 간을 하라고 지시하는 장면
식량『시바타 다이지키』(1583)행군 중에 비각으로 알린 내용. “집 한 채마다 쌀 한 되씩 밥으로 지어 기노모토로 가져오라. 은혜는 잊지 않고 포상하겠다”
도로 정비 사전 명령근거 없음어느 사료에서도 확인하지 못했다

동시대 기록인 『시바타 다이지키』에 따르면 식량은 미리 준비해 둔 것이 아니라 군량 수송이 병력의 이동 속도를 따라오지 못해 인마가 굶주리는 상황에서 길 위에서 비각으로 알려 모은 것이다. 책에는 “따르는 군량 수송이 없어 인마가 굶주리고 지쳤다”는 문장이 바로 앞에 있다. 일본어 위키백과 「미노 대회군(美濃大返し)」 항목에는 이 이동이 상정 범위 안에 있었고 즉흥일 리 없다는 추정이 있지만, 근거 서장은 제시돼 있지 않다.19

히데요시가 4월 20일에 오가키에 있었고 4월 21일 야나가세에서 시바타 군과 싸웠다는 것은 서장으로 확정된다. 오가키에서 오미 북부까지 대략 50킬로미터 안팎의 거리를 하루 안에 움직였다는 것도 동시대 기록인 『시바타 다이지키』에 나온다. 다만 5시간이라는 정확한 시간으로 해석하는 것은 후대의 해설자료에 의한 단순 환산이고, 사전에 도로를 정비하고 주먹밥을 쌓아 두었다는 준비는 동시대 근거가 없다.

6. 4월 21일 야나가세 — 하루의 합전

6-1. 몇 시에 시작됐나

야나가세 합전의 시작 시각은 사료마다 4시간쯤 어긋난다. 『시바타 다이지키』에는 “날이 밝은 21일, 오늘 합전에 히데요시 일생의 천운이 걸렸다”는 문장이 있고, 이어 “묘(卯)의 상각에서 미(未)의 하각까지 다섯 번 일곱 번 합전했다”는 구절이 온다. 대략 오전 5시경에서 오후 3시경까지다. 한편 와타나베 다이몬이 소개하는 4월 21일자 히데요시 서장(다카기 사다토시 앞)에서 히데요시는 “사(巳)의 각”, 곧 오전 9–11시에 전투가 시작됐다고 썼다. 와타나베는 이 서장 시각이 『시바타 다이지키』보다 약 4시간 늦다고 지적했다. 이 서장의 원문은 확인하지 못했다.21

6-2. 사람이 없었다는 진

『시바타 다이지키』가 전하는 4월 21일의 싸움에는 문학적 수사가 많다. 카츠이에가 오이와야마 승리의 기세로 요고산 능선에 4개 지방의 병력을 늘어세웠고(3-1의 6만여 기), 히데요시는 창을 든 돌격대를 세 부대로 나누어 적진 한복판으로 돌격했다. 그 뒤로 히데요시 쪽에는 지휘관이나 병력이 부족했다는 설명이 길게 이어진다. 츠츠이와 나가오카는 영지에 있었고 모리 테루모토와는 화담이 됐으나 마음을 놓을 수 없어 미야베는 이나바에, 센고쿠는 아와지에, 이케다는 네고로·사이카 대비로 남겨 뒀다는 것이다. 측근 병사들도 먼 길을 달리느라 뒤처진 자가 많았고, 깃발과 말갑옷 같은 장비는 모두 벗어 던진 채 달려왔다고 한다. 히데요시가 돌격대와 함께 달려들었으나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고 있던 적군이 “한 개의 표주박 우마지루시(一瓢之馬験)“를 수상히 여겨 보다가 갑자기 두려워했다는 구절도 있다. 우마지루시는 대장의 위치를 알리려고 세우는 표지이고, 표주박은 하시바 히데요시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적군은 그 표지를 보고서야 히데요시가 직접 왔음을 짐작했다는 뜻이다.22

이는 압도적으로 불리한 조건에서의 싸움을 히데요시의 지략과 용기로 뒤집었다는 승자 입장에서의 서사다. 있는 그대로 역사적 사실이라 보기는 어렵다. 이 책에 기록된 전투 경과 자체는 굉장히 단순하다. 한동안 양측이 지쳐 휴식하던 중 히데요시가 측근의 젊은 무사 200–300기를 모아 시바타 군 한가운데로 돌격시켰고, 적군 천여 기와 접전이 벌어졌다. 이때 공을 세운 무사들을 “일번창(一番鑓)“(시즈가타케 칠본창의 유래가 되는데 7-1 참고)이라 부른다는 설명도 『시바타 다이지키』에 적혀 있다. 시바타 군은 결국 붕괴하여 북쪽으로 퇴각했고 추격해 전사시킨 수가 5천–6천이며 남은 병력은 기노메 고개(木目峠) 동서의 덤불 속으로 숨어 도망쳤다. 카츠이에는 100여 기에 불과한 측근과 함께 말을 달려 기타노쇼성으로 돌아갔다.22

6-3. 히데요시의 서장

히데요시 자신의 서장이 남아 있다. 4월 21일자 서장(다카기 사다토시 앞)에서 히데요시는 카츠이에와 모리마사 등을 “한 명도 빠짐없이 모조리 쳤다”고 적었지만 이 시점에 두 사람은 아직 살아 있었다. 와타나베 다이몬은 같은 서장에 카츠이에가 4–5기만 데리고 도망쳤다는 구절도 소개한다. 같은 숫자는 원문이 확인되는 4월 24일자 서장(8-1)에도 나오는데, 『시바타 다이지키』의 100여 기와는 맞지 않는다. 여하튼 와타나베 다이몬이 지적했듯 승전 직후의 서장이 정확한 정보전달보다는 승리의 인상을 과장하여 강조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21

8일 후에 쓴 4월 29일자 서장은 조금 다르다. 우에스기 가게카츠의 가신 나오에 카네츠구와 가노 히데하루에게 보낸 이 서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문서집(豊臣秀吉文書集)』 1에 실려 있다. 이 서장은 원문을 확인할 수 있다.

去廿一日於柳瀬表合戦様子并柴田切腹相果趣、委細景勝へ申入候之間、委不及申

지난 21일 야나가세 방면에서의 합전 상황과 시바타가 할복해 죽은 경위는 가게카츠에게 자세히 전했으므로 길게 쓰지 않겠다는 뜻이다.

21일 합전이 야나가세 방면에서 있었다는 점, 카츠이에가 죽었다는 점이 이 서장으로 동시대에 확인된다.23

6-4. 마에다 도시이에의 전선 이탈 문제

야나가세 합전에서 가장 논쟁이 되는 문제는 마에다 도시이에의 전선 이탈이다. 이 문제는 별도의 글에서 자세히 다뤘으므로 여기서는 문헌마다 무엇이 다른지만 정리한다. 『시바타 다이지키』에는 도시이에의 이탈 장면이 없다. 4월 22일 에치젠 후추(현 후쿠이현 에치젠시, 마에다 도시이에의 성이 있던 곳)에서 마에다 마타자에몬(도시이에), 도쿠야마 고효에, 후와 가와치노카미 등이 항복했고 히데요시는 카츠이에를 먼저 치기 위해 이들을 사면했다는 내용만 있다. 『가와스미 다이코키』에는 히데요시와 도시이에가 사전에 교신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반면 『센가쿠 갓센키』에는 이탈 장면 없이 도시이에가 시게야마 기슭에 2천 병력을 둔 것으로 나온다.24 카츠이에 군이 무너진 원인과 시점이 문헌마다 다르므로, 도시이에의 움직임이 붕괴의 결정적 원인이었다는 주장은 확정된 사실이 아니다.

7. 시즈가타케 칠본창의 유래

7-1. 동시대 기록은 아홉 명

시즈가타케 하면 칠본창이다.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타기리 카츠모토(당시 이름 나오모리), 히라노 나가야스, 가스야 타케노리의 일곱 명이다. 그런데 사건 반년 뒤에 쓰인 『시바타 다이지키』에는 야나가세에서 “일번창”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 아홉 명 나오고, ‘칠본창’이라는 말은 없다. 칠본창으로 알려진 일곱 명 외에 사쿠라이 사키치(桜井左吉, 이에카즈)가 있고, 이시카와 효스케(石川兵助, 카즈미츠)는 “일번으로 뛰어들어 투구 안을 찔려 전사했다”고 적혀 있다. 전사한 이시카와 효스케는 동생 나가마츠(長松)를 불러내 가독을 잇게 했다는 것도 기록돼 있다. 아홉 명 모두에게 영지와 황금, 비단, 칸조(感状, 공을 인정하는 문서)이 내려졌다.25

칸조의 문언은 이 책에 원문이 실려 있다. “이번에 산시치(三七, 노부타카) 님의 모반으로 미노 오가키로 진을 옮겼을 때 시바타 슈리노스케가 야나가세에 나왔다. 일전을 벌이려 히데요시가 한 기로 달려가자 마음 씀이 얕지 않아 신속히 달려와 눈앞에서 일번창을 맞대 비할 데 없는 활약을 했다. 포상으로 어떤 이에게는 5천 석, 어떤 이에게는 3천 석을 준다. 앞으로 군무에 충근하면 공훈에 따라 헤아리겠다.” 날짜는 덴쇼 11년 7월 1일, 서명은 “히데요시 판(判)“이다.25

말 탄 무사들이 창을 맞대고 엉킨 장면을 담은 삼연폭 목판화. 오른쪽에 잘린 머리들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다.
우타가와 쿠니츠나, 「태평기 칠본창 고명(太平記七本鎗高名)」.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소장, 퍼블릭 도메인.

7-2. ‘칠본창’이라는 이름

칠본창이라는 이름이 문헌에 나오기 시작하는 것은 1620년대 중반이다. 『가와스미 다이코키』에 “칠본창의 무리(七本鎗の衆)“가 나오고, 오제 호안(小瀬甫庵)의 『호안 다이코키』 권6에는 “이상 일곱 명을 칠본창이라 부르며 칸조가 있었다(右之七人を七本鑓と号して、感状有)“고 나와 있다. 『가와스미 다이코키』는 1621년에서 1625년경 성립으로 추정되고, 『호안 다이코키』는 초판이 1625년 또는 1626년으로 자료마다 갈려, 둘 중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확정하지 못한다.26

호안 자신도 일곱이라는 묶음에 의문이 있다는 점을 전한다. 같은 권의 평(評)에 이런 문장이 있다. 사쿠라이 사키치와 이키 한시치로도 보통을 벗어난 활약이 있었고, 특히 이시카와 효스케는 일곱 명보다 먼저 창을 맞대 여러 곳에 중상을 입고 창 아래서 죽었다. 살아 있었다면 이 사람이 일번창으로 이름이 높았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어서 “일곱 명이 나란히 일번이라니 어떠한가라고 이 방면에 밝은 사람이 말했다”며 그 의문을 전하고, 실로 선후는 있었을 것이라고 동조한다. 일번창이라는 것은 적과 가장 먼저 창을 맞댔다는 뜻이라 엄밀히 말해 여럿이 모두 “일번창”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지적이다. 같은 평에서 호안은 “아즈키자카의 칠본창(小豆坂の七本鑓)“도 비교 대상으로 든다. 아즈키자카 칠본창(1542년)은 한 세대 앞선 오다 노부히데(노부나가의 아버지)의 사무라이 일곱 명을 가리키는 별칭으로, 용사들을 일곱 명 묶어서 칭송하는 것이 이전부터 일본에 존재했음을 보여 준다.26

7-3. 일곱 명의 구성은 문헌마다 다르다

문헌성립구성
『시바타 다이지키』1583년 11월아홉 명. 후쿠시마, 와키자카, 가토 요시아키, 가토 기요마사, 히라노, 가타기리, 가스야, 사쿠라이. 이시카와는 전사자로 따로 적음
『호안 다이코키』1625/26통설의 일곱 명(가토 기요마사, 가토 요시아키, 후쿠시마, 와키자카, 가스야, 히라노, 가타기리). 사쿠라이·이키·이시카와는 “일곱 명보다 앞선 자”로 별도 언급
『소후 모노가타리(祖父物語)』1642년 발문가타기리 대신 도다 사부로시로(戸田三郎四郎)가 들어 있음. 사본의 머리 주석은 “가타기리 스케사쿠 나오모리를 더해야 한다”고 붙임
『이치야나기케키(一柳家記)』17세기 후반 추정가장 먼저 적진에 뛰어든 무사(先懸) 14명 열거. 일본어 위키백과 요약에 따르면 이시다 미츠나리와 오타니 요시츠구까지 포함. 원문은 대조하지 못함

이 표만 봐도 일곱이라는 숫자가 사실에 근거해서 나왔다기보다는 후대에 이야기를 옮기면서 정리하다 보니 나온 결과임을 짐작할 수 있다.27 하지만 현재 일본의 사전류에도 호안이 정리한 일곱 명이 그대로 실려 있는데, 후대에 들어 이 별칭과 인물들이 너무 유명해지다 보니 실재하는 개념처럼 굳어져 버린 것으로 보인다. 디지털 다이지센(デジタル大辞泉)과 브리태니커 소항목사전이 그렇다.27

7-4. 칠본창이 받은 포상

칠본창이 얼마의 석고를 포상으로 받았는지는 기록마다 다르다.

문헌포상시즈가타케 이전
『시바타 다이지키』 칸조”어떤 이는 5천 석, 어떤 이는 3천 석”언급 없음
『호안 다이코키』일곱 명 전원 5천 석200석 안팎
『가와스미 다이코키』전원 3천 석(가증)200석
『소후 모노가타리』여섯 명 3천 석, 후쿠시마 5천 석150석(가스야는 500석)

후쿠시마 마사노리만 5천 석이라는 이야기는 『소후 모노가타리』와, 일본어 위키백과가 근거로 드는 후쿠시마 가문 쪽 사료(『후쿠시마케 계보(福島家系譜)』 등)의 내용에 가깝다. 『소후 모노가타리』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무슨 이유로 2천 석을 적게 주는가, 이번에 내가 창으로 세운 공은 이치마츠(후쿠시마 마사노리의 아명)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며 슈인(朱印)을 받지 않고 항의했고, 히데요시가 “도라노스케(가토 기요마사의 아명)는 대체로 멍청한 놈이다”라면서도 후쿠시마 마사노리 같은 대우를 맞춰 주겠다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일화는 『소후 모노가타리』에만 있고 확인한 다른 문헌에서는 찾지 못했다.28

칸조와 영지 지급 날짜도 서로 어긋난다. 일본어 위키백과 각 인물 항목 기준으로 6월, 6월 5일, 7월 1일, 8월 1일 등이 섞여 있다. 칸조와 지행 수여가 단계적으로 이뤄졌을 가능성은 있지만 사료로 확정하지 못했다.

7-5. 공이 불어난 방식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가장 먼저 창을 들이대고 적장 하이고 이에요시(拝郷家嘉)의 목을 벴다”는 이야기는 후쿠시마 가문 쪽 기록에 주로 나온다. 하지만 호안이 쓴 글에는 후쿠시마가 하이고를 쓰러뜨렸다는 내용이 없다. 오히려 하이고가 선두로 창을 찔러 넣자 이시카와 효스케가 이름을 대고 나와 창을 맞댔고, 둘 다 전사했다고 나와 있다. 『가와스미 다이코키』에서는 후쿠시마 다이후가 수급을 먼저 취했다는 데까지 확인된다. 이 블로그의 후쿠시마 마사노리 글에서도 지적했듯 후쿠시마의 일번창·일번수 서사는 가문 쪽에서 쓴 기록이라 어느 정도 선조를 미화한 것을 감안해야 한다.29

칠본창에 포함되지 않은 이시카와 효스케에 관한 이야기에 살이 붙은 것은 더 세월이 흐른 뒤다. 『시바타 다이지키』에는 “투구 안을 찔려 전사”라고만 나오고, 호안도 하이고와 함께 죽었다고만 썼다. 전날 밤 후쿠시마 이치마츠와 말다툼하고 “내일 내 뒷모습을 보라”고 했다는 이야기(『조잔키단(常山紀談)』, 1739–1770년 사이에 성립), 가토 요시아키에게 투구를 주려다 거절당하고 투구 없이 돌격했다는 이야기(『부케지키(武家事紀)』, 1673년 서문)는 모두 에도 시대에 쓰인 책에 나오는 일화다. 사쿠라이 사키치와 관련된 이야기도 비슷하다. 『가와스미 다이코키』에는 히데나가의 시동으로 오가키에 와 있다가 히데요시에게서 말을 받고 선두에 나서 가슴판을 찔리고도 일어나 수급을 취했다고 나와 있는데, 이는 후대인 에도 시대 초기에 옛 이야기를 수집해 전해 들은 대로 적은 기록이다. 같은 책에는 그가 3년 뒤 병사했다고 나와 있지만 일본어 위키백과 「사쿠라이 이에카즈(桜井家一)」 항목에는 1596년 8월 병사로 되어 있어 서로 맞지 않는다.29

7-6. 팩트로 확인되는 것

1583년 4월 21일 야나가세에서 히데요시와 히데나가의 측근 무사 아홉 명이 일번창이라 불리는 공을 세웠다. 이들은 7월 전후로 3천–5천 석의 영지와 칸조를 받았다. 이 중 이시카와 효스케는 그 자리에서 전사해 동생이 가독을 이었다. 이 아홉 명 가운데 일곱 명이 에도 시대 초기부터 칠본창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전투 이후 칠본창 개개인의 행보는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글에 있다. 한 가지만 덧붙이면, 일본어 위키백과 항목에 따르면 가스야 타케노리는 1595년에 6천 석, 히라노 나가야스는 같은 해 2천 석을 더 받았는데 둘 다 “시즈가타케의 전공을 추상(追賞)하는 명분”이었다고 한다. 12년 뒤에도 시즈가타케의 전공이 포상 명분으로 쓰인 셈이다.30

8. 기타노쇼의 마지막 밤, 그리고 오사카까지

8-1. 사흘 만의 낙성

날짜의 큰 줄기는 히데요시 자신의 서장으로 확인된다. 에치젠 사료를 연구한 후지이 조지(藤井讓治)의 2017년 논문에 이 서장들의 원문이 인용돼 있다.31

서장내용
4월 24일자 요시무라 우지요시 앞”지난 22일 에치젠 후추성에 도착했더니 시바타는 말 4–5기로 기타노쇼로 도망쳐 들어갔다. 어제 23일 내가 몰아붙여 천수의 토대까지 공격해 다가갔다. 오늘 내일 중에 시바타 슈리의 목을 벨 것이다.” 낙성 전에 쓴 서장
4월 28일자 고쿠시 모토타케 앞”시바타가 기타노쇼로 도망쳐 들어가므로 추격해 본성을 무너뜨렸더니 천수에 올라 부인들을 비롯한 이들을 찔러 죽이고 할복해 죽었다”
7월 29일자 다가야 시게츠네 앞”24일 인시(오전 4시경)에 본성에 달려들어 오시(정오)에 본성에 쳐들어가 목을 베었다”

4월 22일 후추에 도착했고 23일 천수 아래까지 공격했다. 24일 새벽에 공격을 시작해 정오에 본성에 들어갔다. 『시바타 다이지키』에는 기타노쇼의 수비 병력이 3천여 명, 낙성 시각은 신각(申刻, 오후 3–5시경)으로 되어 있다. 후대 편찬물에는 오후 5시로도 나오므로 시각은 “오후”로만 남겨 두려 한다.31 이 책에는 히데요시의 측근 노신이 카츠이에를 살려 신하로 삼자고 간언했으나 “연못에 독사를 풀고 뜰에 호랑이를 기르는 격”이라며 공격을 서둘렀다는 이야기도 실려 있다. 히데요시 쪽으로 편향된 작가가 일부러 히데요시의 단호함을 부각시킨 장면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8-2. 천수의 하룻밤

낙성 전날 밤은 『시바타 다이지키』에서 길게 다뤄진다. 카츠이에는 천수에 오랜 신하 80여 명을 불러 “내일이 내 운명의 끝이다”라며 새벽까지 술자리를 벌였다. 이 장면에는 백거이의 「장한가(長恨歌)」 구절(漁陽鼙鼓動地来 驚破霓裳羽衣曲)과 사면초가(四面楚歌), 항우와 우희의 고사가 인용돼 있다.

한밤이 지나 카츠이에 부부가 안방에 들었고 카츠이에는 오이치에게 말했다. “당신은 노부나가 공의 일족이고, 히데요시도 노부나가 공의 후손을 가엾이 여겨 늘 가까이 대해 온 사람이니, 내일 아침 성을 나가 적진으로 몸을 의탁해도 무슨 지장이 있겠는가.”

오이치는 이 말을 따르지 않고 울며 대답했다. “한 나무 그늘에 쉬고 한 강물을 마시는 것도 전생의 인연이라 하는데, 하물며 우리는 여러 해에 걸친 인연이 아닌가. 저승길도 함께 따르겠다. 여자의 몸이지만 뜻은 남자에 못지않다. 함께 자해하겠다.”32

그 뒤 두견새 소리가 들릴 즈음 읊은 노래가 이 책에 두 수 실려 있다. 오이치는 “안 그래도 잠깐 졸 만큼 짧은 여름밤인데 꿈길로 나를 이끄는구나, 두견새여”라고 읊었고 카츠이에는 “여름밤처럼 덧없는 꿈길 같은 삶이지만 뒤에 남을 이름만은 구름 위까지 올려 다오, 산 두견새야”라고 답했다. 확인한 범위에서 카츠이에의 사세구가 실린 가장 이른 문헌이 이 책이다. 이어서 사다리를 걷어 올리고 천수 9층에 올라가 “카츠이에는 지금 곧 할복할 터이니 적진 안에 마음 있는 무사는 앞뒤로 조용히 지켜보고 그 이름을 천하에 전하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곁에 있던 나카무라 분카사이(中村文荷斎)에게 지난밤 오이치의 노래와 자기 답가를 들려주자, 분카사이가 눈물을 흘리며 붓을 들어 받아 적고 끝에 한 수를 덧붙였다고 한다. “마음 맞는 이들과 함께 가는 길의 길잡이가 되어 다오, 죽음의 산 두견새야.”32

카츠이에는 오이치를 비롯한 여성들을 한 사람씩 찔러 죽이고 자기 배를 갈라 내장까지 꺼낸 뒤, 분카사이를 불러 목을 치게 했다. 분카사이는 그 칼로 할복해 죽었고 나머지 80여 명은 서로 찌르거나 자해했다. “덴쇼 11년 4월 24일 신각, 그 성에 농성한 시바타 일족은 모두 죽었다”는 문장으로 장면이 끝난다.32

후쿠이시 시바타 신사 경내. 석축 위 단상에 창을 든 청동 무사상이 앉아 있고 뒤로 시가지 건물이 보인다.
후쿠이시 시바타 신사 경내(기타노쇼성터). 사진 출처: Wikimedia Commons, CC0.

8-3. 오이치는 자결했는가

이 장면은 문학적 수사로 가득하다. 신하 80여 명, 뇨보(女房, 시중드는 여성) 3천여 명 같은 숫자가 곳곳에 쓰였고 한시와 고사가 겹쳐 있어, 일어난 일을 있는 그대로 적은 기록으로 보기 어렵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책을 쓴 사람은 히데요시의 어용 작가다. 하지만 이 책을 쓴 시기는 기타노쇼성 낙성 7개월 뒤로 확인한 범위에서는 가장 이른 시점에 완성된 기록이다. 또한 후대의 기록들은 대부분 이 책을 기준점으로 삼는다.

같은 책 안에서도 오이치의 죽음이 두 가지로 그려진다. 오이치는 “함께 자해하겠다”고 말하지만, 실제 장면에서는 카츠이에가 “한 사람씩 찔러 죽였다”고 나와 있다. 히데요시도 4월 28일자 서장에 “부인들을 비롯한 이들을 찔러 죽이고(刺殺)“라고만 썼을 뿐 오이치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오이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사료와 맞지 않으며 오이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카츠이에의 손에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책에서 확인되는 것은 오이치가 카츠이에와 함께 죽었다는 점뿐이다. 오이치 본인의 의지에 대한 기록도 『시바타 다이지키』의 대화 장면 외에는 확인되는 것이 없다.

『시바타 다이지키』 전문을 대조했지만 구출 이야기를 비롯한 오이치의 세 딸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다. 도미나가 신로쿠로(富永新六郎)가 딸들을 데리고 히데요시에게 갔다는 이야기는 에도 시대 문헌과 『케이신인문(渓心院文)』 같은 회상 문서에 나온다. 보호자 역시 히데요시였는지 노부카츠였는지 연구자 사이에 의견이 갈린다.33 이 딸들이 살아남아 큰딸 차차(茶々)가 훗날 히데요시의 측실이 되고 막내 고(江)가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아내가 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 글에서 다룰 범위는 아니니 넘어간다.

8-4. 영지는 어떻게 나뉘었나

히데요시는 낙성 다음 날인 4월 25일 가가로 출마했고 28일 가나자와성에 들어갔으며 5월 3일 기타노쇼로 돌아왔다.31 이 동안에도 시바타 가문이 갖고 있던 영지에 대한 처분은 이어졌다. 4월 27일자 서장(미조구치 히데카츠 앞)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에치젠과 가가의 에누마·노미 두 군을 니와 고로자에몬(나가히데)에게 잇쇼쿠(一職, 영지 전체를 맡김)로 정했는데, 에누마군은 귀하에게 주었다고 하니 히데요시도 그것이 좋다고 본다.”

『시바타 다이지키』 말미에는 영지 배치 목록이 실려 있다. 니와 나가히데는 에치젠 전역과 가가 절반, 마에다 도시이에는 노토 전역과 가가 절반, 삿사 나리마사는 엣추를 맡았다. 미노에는 이케다 츠네오키가 슈고(守護)로 앉았고 장남 이케다 모토스케가 기후에 자리했으며, 호리 히데마사는 사와야마, 모리 나가요시는 가나야마, 가모 우지사토는 히노에 있었다. 노부카츠는 이가·이세·오와리 세 지방의 주인으로 이세 나가시마를 거성으로 삼았다. 이 나가시마성은 원래 다키가와 카즈마스의 성이다. 『시바타 다이지키』에는 다키가와가 나가시마성을 넘기겠다며 항복을 청하자 히데요시가 이를 허락했다고 나와 있다.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카즈마스는 나가시마성에서 버티다가 7월에 항복했고, 영지를 모두 잃은 뒤 교토 묘신지에서 머리를 깎았다.34

중부 일본 지도. 에치젠은 진한 갈색, 가가는 갈색과 청록 사선 줄무늬, 노토는 청록, 엣추는 황토, 미노는 보라, 이가·이세·오와리는 파랑으로 칠해져 있고 나머지 령국은 회색이다. 기타노쇼와 사와야마, 히노, 기후, 가나야마, 나가시마가 표시돼 있다
『시바타 다이지키』 영지 배치 목록에 따른 전후 영지(령국 경계는 에도 말기 기준). 일본 인문학오픈데이터공동이용센터(CODH)의 옛 령국·군 경계 데이터를 가공, CC BY-NC 4.0

일본어 위키백과 「시즈가타케 전투」 항목에는 니와 나가히데·이케다 츠네오키·모리 나가요시·가모 우지사토·호리 히데마사·하세가와 히데카즈 같은 오다 가문의 옛 가신들이 크게 영지를 늘렸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실려 있다. 위 목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히데요시는 자기 가신만이 아니라 오다 가문의 중신들과 함께 이겼고, 전후 처리도 연합한 그들과 나눴다. 이케다 츠네오키는 본전투에는 오지 않았지만 셋츠 오사카·아마가사키·효고 일대 12만 석에서 5월에 미노 13만 석으로 옮겼다. 프로이스가 이 이동을 “그의 소망에 반해” 이뤄진 것으로 기록했다는 내용이 위키백과에 인용돼 있다.34

8-5. 사쿠마 모리마사, 시바타 카츠토시, 오다 노부타카

카츠이에의 적자 시바타 곤로쿠(權六, 카츠토시)와 사쿠마 모리마사는 에치젠 후추의 산림에서 생포됐다(『시바타 다이지키』). 후일의 증거로 삼기 위해 인근 성들에 끌고 다녔고, 곤로쿠는 오미 사와야마에서 처형했다. 모리마사는 “이번 모순(矛楯, 갈등)의 장본인이고 죄가 많다”며 수레에 태워 교토 시내를 돌린 뒤 로쿠조 강가에서 처형했고 곤로쿠의 목과 함께 고쿠몬(獄門, 효수)에 걸었다.35 처형 장소는 문헌마다 다르다. 일본어 위키백과 「사쿠마 모리마사」가 정리하기로는 『가와스미 다이코키』와 다니구치 가쓰히로는 마키시마, 『간세이 중수 제가보(寛政重修諸家譜)』는 산조 강가다. 일자도 5월 12일설과 5월 7일설이 있어 “5월 중”이라고만 정리하려 한다.

모리마사가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들어오라는 제안을 거절했다는 이야기와 그가 죽기 전 남겼다는 사세구 “세상을 다 돌지도 못한 작은 수레가 불난 집의 문을 나서는구나”는 모두 에도 시대 이야기책이나 후대 편찬물이 출전으로 동시대 기록에서는 확인하지 못했다.

시바타 카츠이에가 패망한 뒤 노부카츠가 군세를 이끌고 기후를 공격하자 노부타카는 위기에 몰렸다. 그 최후는 『시바타 다이지키』에 “산시치 노부타카도 장군의 아들로 지용이 남보다 뛰어나니 자해를 어찌 사양하겠는가. 머리를 감고 몸을 깨끗이 하고 향을 피운 뒤 장군이 내리신 태도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역심으로 망한 것은 천명이 아니겠는가”로 되어 있다. “저 산에서”라는 문구 때문에 장소를 기후(이나바야마)로 읽게 되는데,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이를 오류로 본다. 노부타카는 오와리 치타군 노마(野間) 오미도지(大御堂寺)의 안요인(安養院)에서 자결했다고 하며, 날짜는 4월 29일설과 5월 2일설이 병존한다. 사세구 두 수는 둘 다 에도 시대 이후의 책에 실려 있다.35

8-6. 오사카 천수의 토대

이렇게 오다 가신의 영지를 재배치한 결과는 오사카성 건설로 이어진다. 이케다 츠네오키의 영지를 미노로 옮기면서 히데요시는 이케다의 영지였던 오사카 일대를 손에 넣었고, 1583년 축성에 착수했다. 그 공사 모습이 『시바타 다이지키』 말미에 나온다.

唯今所成大坂普請者。先天守之土台也。…三十余ケ国之人数近国遠郷打散陸路舟路。大石小石集来者。似群蟻入垤。

지금 이뤄지고 있는 오사카 공사는 우선 천수의 토대다. 30여 개 지방의 인원이 가까운 곳 먼 곳에서 육로와 뱃길로 모여 크고 작은 돌을 모아 오는 모습이 개미가 흙더미에 들어가는 듯하다.

오사카를 거점으로 다섯 지방인 고키나이(五畿內)를 소가마에(外構, 바깥 둘레)로 삼아 지키게 한 배치도 같은 곳에 그대로 나온다. 야마토에 츠츠이 준케이, 이즈미에 나카무라 카즈우지, 셋츠에 미요시 히데츠구, 이바라키에 나카가와 히데마사, 마키시마에 히토츠야나기 나오스에, 교토 안팎의 정무는 마에다 겐이가 맡는다는 것이다.36 히데요시가 11월 5일자 서장에서 “오사카는 기나이에서도 요지라 거성으로 정했다”고 썼다는 내용이 『오사카부사(大阪府史)』를 거쳐 위키백과에 인용돼 있다.

8-7. 한 사람의 천하, 넉 달

『시바타 다이지키』에서 영지 목록과 오사카 공사 설명이 끝나는 자리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此先争権妬威輩。如意令退治。為秀吉一人之天下事。快哉快哉。

권력을 다투고 위세를 시기하던 무리를 뜻대로 퇴치해 히데요시 한 사람의 천하가 됐으니 통쾌하다는 뜻이다.

책이 쓰인 때는 1583년 11월이다. 이때 오다 가문의 이름을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은 산포시의 후견 역을 맡은 노부카츠였다. 그런데 일본어 위키백과 「오다 노부카츠(織田信雄)」 항목에 따르면 5월 21일 노부카츠는 마에다 겐이를 교토 쇼시다이에 임명하면서 “모든 일은 히데요시의 지시를 따르라”는 취지를 덧붙였고, 삿사 나리마사의 서장에는 노부카츠가 오다의 뒤를 이었으나 히데요시가 만사를 지도한다는 말이 나온다고 소개된다.36

한 사람의 천하라는 선언이 나온 지 넉 달 뒤인 1584년 3월 6일, 노부카츠가 히데요시와 내통했다는 혐의로 자기 가로 세 명을 죽이면서 코마키·나가쿠테 전투가 시작된다. 이 전쟁에서 시즈가타케에 오지 않았던 이케다 츠네오키는 4월 9일 나가쿠테에서 아들 모토스케, 사위 모리 나가요시와 함께 전사한다. 시즈가타케 직후 미노 13만 석을 받은 츠네오키는 이듬해 4월 하루 사이에 목숨을 잃었다. “한 사람의 천하”라는 문장이 나왔을 때 오사카에서는 아직 천수의 토대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그 공사가 시작되고 일 년을 채 넘기기도 전에 산포시의 후견 역이던 노부카츠가 이에야스와 손잡고 히데요시에게 맞섰다.

출처

이번 조사에서 『시바타 다이지키』, 『가와스미 다이코키』, 호안 『다이코키』, 『소후 모노가타리』, 『센가쿠 갓센키』는 일본어 위키문헌의 번각 원문을 직접 대조했다. 그 밖의 1차 사료(『다몬인 닛키』, 『겐켄쿄키』, 히데요시 서장 대부분)는 원문을 직접 열람하지 못했고, 아래 연구자 기고나 위키백과를 거친 2차 인용이다. 시각·날짜·병력·처형지는 “그렇게 전한다” 수준으로 읽어야 한다.

1차·준1차 사료 (직접 대조한 원문)

  • 『시바타 다이지키(柴田退治記)』 — 오무라 유코(大村由己), 1583년 11월. 『덴쇼기(天正記)』 중 『시바타 갓센키(柴田合戦記)』로도 불린다. 히데요시 측이 쓴 승자의 기록
  • 『가와스미 다이코키(川角太閤記)』 — 1621–1625년경 성립 추정(위키백과 「가와스미 다이코키(川角太閤記)」)
  • 『다이코키(太閤記)』(『호안 다이코키(甫庵太閤記)』) 권6 — 오제 호안(小瀬甫庵), 1625–1626년경
  • 『소후 모노가타리(祖父物語)』 — 1642년 발문
  • 『센가쿠 갓센키(賤岳合戦記)』 — 에도 시대, 사본 발문 1819(『시세키슈란』 제13책 수록)
  • 『고스가 규베에 이야기(志津ケ岳合戦事小須賀九兵衛話)』 — 성립 연도 불명

1차·후대 사료 (연구자 기고·위키백과를 거친 2차 인용)

  • 『다몬인 닛키(多聞院日記)』, 『겐켄쿄키(兼見卿記)』, 『난코잣로쿠(南行雑録)』,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4책
  • 히데요시 서장 — 4월 21일자 다카기 사다토시 앞, 4월 24일자 요시무라 우지요시 앞, 4월 27일자 미조구치 히데카츠 앞, 4월 28일자 고쿠시 모토타케 앞, 4월 29일자 나오에 카네츠구·가노 히데하루 앞, 7월 29일자 다가야 시게츠네 앞
  • 『에혼 다이코키(絵本太閤記)』, 『신쇼 다이코키(真書太閤記)』, 『조잔키단(常山紀談)』, 『부케지키(武家事紀)』, 『이치야나기케키(一柳家記)』, 『사쿠마군키(佐久間軍記)』, 『간세이 중수 제가보(寛政重修諸家譜)』, 『케이신인문(渓心院文)』, 『기타바타케 모노가타리(北畠物語)』, 『오사카부사(大阪府史)』, 『기후시사(岐阜市史)』

현대 연구자·언론 기고

  • 후지이 조지(藤井讓治), 「에치젠에서 내려진 히데요시의 금제(越前に出された秀吉の禁制)」, 『후쿠이현 문서관 연구 기요(福井県文書館研究紀要)』 14, 2017
  • 시바 히로유키(柴裕之), 『키요스 회의 히데요시 천하 취하기의 조략전(清須会議 秀吉天下取りへの調略戦)』, 에비스코쇼 출판(戎光祥出版), 2018 (와라쿠 웹(和樂web) 해설 경유)
  • 와타나베 다이몬(渡邊大門), 야후 뉴스 전문가 기고(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 기고(2023년, 2026년 8월 25일 외)
  • 사카이 나오토(坂井尚登), 「지형으로 읽는 시즈가타케 전투(地形から読み解く 賤ヶ岳の戦い)」, 『역사군상(歴史群像)』 2022년 8월호 (서지 확인)
  • 다니구치 가쓰히로(谷口克広)(1995), 미야모토 요시미(宮本義己)(2010·2014), 오타 히로시(太田浩司)(2007), 다카야나기 미쓰토시(高柳光寿)·마쓰다이라 도시카즈(松平年一)(1981), 오쿠노 다카히로(奥野高広)(1990), 미쓰나리 준지(光成準治)(2016), 니시가야 야스히로(西ヶ谷恭弘)(2000)의 인용은 모두 일본어 위키백과 각 항목을 거친 것이다

공식·표준 참고자료

  • 일본어 위키문헌: 「시바타 다이지키(柴田退治記)」, 「가와스미 다이코키(川角太閤記)」, 「다이코키 권6(太閤記/巻六)」, 「소후 모노가타리(祖父物語)」, 「센가쿠 갓센키(賤岳合戦記)」, 「고스가 규베에 이야기(志津ケ岳合戦事小須賀九兵衛話)」
  • 일본 문화청 국지정문화재 데이터베이스 「겐바오성(우치나카오야마성) 터(玄蕃尾城(内中尾山城)跡)」(1999년 사적 지정)
  • 일본어 위키백과: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 「키요스 회의(清洲会議)」, 「미노 대회군(美濃大返し)」, 「겐바오성(玄蕃尾城)」, 「기타노쇼성 전투(北ノ庄城の戦い)」,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시바타 카츠토요(柴田勝豊)」, 「오다 노부타카(織田信孝)」, 「오다 노부카츠(織田信雄)」, 「사쿠마 모리마사(佐久間盛政)」,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清秀)」, 「가스야 타케노리(糟屋武則)」, 「히라노 나가야스(平野長泰)」, 「사쿠라이 이에카즈(桜井家一)」, 「이시카와 카즈미츠(石川一光)」,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 「이케다 츠네오키(池田恒興)」, 「다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 「오사카성(大坂城)」, 「오이치(お市の方)」, 「아사이 삼자매(浅井三姉妹)」, 「조잔키단(常山紀談)」, 「가와스미 다이코키(川角太閤記)」 (모두 2차 요약이며 각주 출처는 원문 대조 전 인용하지 않았다)
  • kotobank 「시즈가타케 칠본창(賤ヶ岳の七本槍)」(디지털 다이지센(デジタル大辞泉)·브리태니커 국제대백과사전 소항목사전(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
  • 이미지: 나가하마성 역사박물관 소장 「시즈가타케 합전도 병풍」(Wikimedia Commons, 퍼블릭 도메인), 우타가와 쿠니츠나 「태평기 칠본창 고명」(일본 국립국회도서관, 퍼블릭 도메인), 츠키오카 요시토시 「월백자 시즈가타케의 달」(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퍼블릭 도메인), 요고호 사진(Alpsdake, CC0), 시바타 신사 사진(Wikimedia Commons, CC0)

전문 사이트·향토 자료

  • 쇼묘지 문서·진성 일람을 소개한 향토 사이트(ibukiyama1377.sakura.ne.jp). 문서 소장처 미확인이라 보조 용도로만 썼다
  • 히데요시 서장 번각 전재 블로그(japanesehistorybasedonarchives.hatenablog.com)

확인하지 못한 것

  • 『다몬인 닛키』·『겐켄쿄키』·프로이스 『일본사』 해당 일자 원문, 4월 21일 다카기 사다토시 앞 서장 원문
  • 시즈가타케 자체의 사적 지정 여부(겐바오성은 확인)
  • 『사쿠마군키』 원문(호안 『다이코키』보다 앞선 철수 명령 출전이 있는지)
  • 일본 학계의 칠본창 비판 논문과 한국어 번역서·한국 독자 사이의 오해 사례(근거를 찾지 못했다)

Footnotes

  1. 시바 히로유키(柴裕之), 『키요스 회의 히데요시 천하 취하기의 조략전(清須会議 秀吉天下取りへの調略戦)』(에비스코쇼 출판(戎光祥出版), 2018). 이 연구의 내용은 와라쿠 웹(和樂web) 「키요스 회의(清須会議)」 해설(https://intojapanwaraku.com/culture/311748/)을 거쳐 확인했고 책 본문은 열람하지 못했다. 『가와스미 다이코키』의 성립 추정은 일본어 위키백과 「가와스미 다이코키(川角太閤記)」(https://ja.wikipedia.org/wiki/川角太閤記). ↩

  2. 『다몬인 닛키(多聞院日記)』 해당 구절은 일본어 위키백과 「키요스 회의(清洲会議)」(https://ja.wikipedia.org/wiki/清洲会議)와 와라쿠 웹(和樂web) 해설이 공통으로 인용하는 형태다. 원문의 날짜와 어순은 직접 대조하지 못했다. ↩

  3. 키요스회의 후 영지 배분, 노부나가 장례: 일본어 위키백과 「키요스 회의(清洲会議)」, 「오다 노부타카(織田信孝)」(https://ja.wikipedia.org/wiki/織田信孝),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https://ja.wikipedia.org/wiki/豊臣秀吉). 모두 2차 요약이며 1차 서장 원문은 확인하지 못했다. ↩ ↩2

  4. 『시바타 다이지키(柴田退治記)』, 『속군서류종(続群書類従)』 제20집하 합전부 수록. 일본어 위키문헌 번각본(https://ja.wikisource.org/wiki/柴田退治記) 전문을 직접 대조했다. 오무라 유코(大村由己)가 1583년 11월에 지었고(본문 말미에 「덴쇼 11년 11월 길일 오무라 유코가 삼가 적다(天正十一年十一月吉辰 大村由己謹誌之)」), 『덴쇼기(天正記)』에 들어갈 때는 『시바타 갓센키(柴田合戦記)』로도 불린다. 히데요시의 어용 문필가가 쓴 승자 쪽 기록이다. 이 글의 이 책 인용은 모두 위 번각본에서 직접 옮겼고 한국어 번역은 필자가 했다. 번각에는 이본 주기(イ)와 의문 표기(熊カ 등)가 섞여 있다. ↩ ↩2 ↩3

  5. 와타나베 다이몬(渡邊大門), 야후 뉴스 전문가 기고(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10월 6일 서장 관련, https://news.yahoo.co.jp/expert/articles/36de83c84ff8ad8c6128ab5a1255b2e9bbbbd95f). 10월 16일 각서와 18일 서장은 일본어 위키백과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https://ja.wikipedia.org/wiki/賤ヶ岳の戦い)와 「키요스 회의(清洲会議)」의 요약이다. 『난코잣로쿠(南行雑録)』 원문은 직접 대조하지 못했다. ↩ ↩2

  6. 오미 북부 쇼묘지(称名寺) 문서를 소개한 향토 사이트 「시즈가타케 합전(賤ヶ岳の合戦)」(http://www.ibukiyama1377.sakura.ne.jp/shizugatake/4-2.html). 마스타 나가모리·이시다 미츠나리 서장과 히데요시 게치조(下知状)를 현대어로 풀어 소개한 사이트이며 문서의 소장처와 번호는 확인하지 못했다. ↩ ↩2

  7. 『시바타 다이지키』 앞부분의 나가하마 출진·카츠토요 항복과 병사·기후 공략·윤1월 아즈치·이세 3로 진군·가메야마성과 미네성 공략·덴진야마성 방화 대목(번각본 직접 대조). ↩ ↩2 ↩3 ↩4

  8. 일본어 위키백과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 「시바타 카츠토요(柴田勝豊)」(https://ja.wikipedia.org/wiki/柴田勝豊), 「오다 노부타카(織田信孝)」, 「다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https://ja.wikipedia.org/wiki/滝川一益),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https://ja.wikipedia.org/wiki/前田利家),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항목끼리도 날짜가 갈리고 양력 변환이 틀렸을 가능성이 있다(덴쇼 11년에는 윤1월이 있다). 이세 출병일은 1월 23일(『무토쿠 헨넨 슈세이(武徳編年集成)』 요약 사이트), 2월 10일, 2월 12일(전국 연표 사이트)로 갈린다. 모리 측 동향은 위키백과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 서술로, 오쿠노 다카히로(奥野高広),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신장판, 요시카와코분칸(吉川弘文館), 1990) 272쪽과 미쓰나리 준지(光成準治),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미네르바쇼보(ミネルヴァ書房), 2016) 162쪽을 인용한다. 두 책 모두 본문은 열람하지 못했다. 카츠이에가 요시아키를 통해 출병을 요청한 서장 날짜는 3월 4일과 14일로 요약마다 다르다. 노부타카 생모의 책형은 위키백과 「오다 노부타카(織田信孝)」(https://ja.wikipedia.org/wiki/織田信孝)가 『기타바타케 모노가타리(北畠物語)』와 니시가야 야스히로(西ヶ谷恭弘), 『고증 오다 노부나가 사전(考証織田信長事典)』(2000) 243쪽을 근거로 든 서술이며, 딸의 처형 여부는 이 항목에 나오지 않는다. ↩ ↩2 ↩3 ↩4 ↩5 ↩6

  9. 『시바타 다이지키』 12월 기후 출병 대목과 4월 20–21일 대목(번각본 직접 대조). ↩

  10. 와타나베 다이몬(渡邊大門), 야후 뉴스 전문가 기고(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https://news.yahoo.co.jp/expert/articles/71869d6e9beed204213a87b06d0ba7080cd2218b). 연구자 개인의 추정이며 학계의 합의 수치가 아니다. 일본어 위키백과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의 3만·5만 수치에도 출전이 명시돼 있지 않다. ↩

  11. 『시바타 다이지키』 포진 대목(선진 13번 편성과 이후 진지 배치), 귀국 조치와 카츠토요 병사 대목(번각본 직접 대조). 원문의 「同木山」에는 이본 주기(木本山)가 붙어 있으나, 같은 진에 기무라 하야토노스케를 교체 투입했다는 대목과 맞춰 도기야마(堂木山)로 읽었다. ↩ ↩2

  12. 일본어 위키백과 「겐바오성(玄蕃尾城)」(https://ja.wikipedia.org/wiki/玄蕃尾城), 일본 문화청 국지정문화재 데이터베이스 「겐바오성(우치나카오야마성) 터(玄蕃尾城(内中尾山城)跡)」(https://kunishitei.bunka.go.jp/bsys/maindetails/401/3229, 검색으로 지정 사실을 확인했고 본문은 열람하지 못했다). 사카이 나오토(坂井尚登), 「지형으로 읽는 시즈가타케 전투 왜 『산악 기동전』이 되었나(地形から読み解く 賤ヶ岳の戦い なぜ『山岳機動戦』になったのか)」, 『역사군상(歴史群像)』 2022년 8월호(CiNii 서지 확인, 본문 미열람). ↩ ↩2

  13. 『시바타 다이지키』 4월 17일 오가키행·야마지 쇼겐 배반·4월 20일 오이와야마 공격 대목(번각본 직접 대조). 야마지 배반일 4월 13일은 위키백과 요약이며 서장 원문은 확인하지 못했다. ↩ ↩2 ↩3 ↩4

  14. 와타나베 다이몬(渡邊大門), 야후 뉴스 전문가 기고(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 2026년 8월 25일 기고(https://news.yahoo.co.jp/expert/articles/23a1b53c4e78b58ddd822549f681841fb8371af2). 『겐켄쿄키(兼見卿記)』·『다몬인 닛키』 내용과 4월 18일자 히데요시 서장도 이 기고를 거친 2차 인용이다. ↩

  15. 일본어 위키백과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清秀)」(https://ja.wikipedia.org/wiki/中川清秀; 이바라키시 교육위원회(茨木市教育委員会) 1985, 다니구치 가쓰히로(谷口克広) 1995 인용), 「사쿠마 모리마사(佐久間盛政)」(https://ja.wikipedia.org/wiki/佐久間盛政;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4책 63쪽 각주). 위키문헌 『센가쿠 갓센키(賤岳合戦記)』(https://ja.wikisource.org/wiki/賤岳合戦記)는 19일 정오 협의와 20일 새벽 출발로 서술해 하루 차이가 생길 수 있다. ↩

  16. 일본어 위키백과 「사쿠마 모리마사(佐久間盛政)」(宮本義己 2014 『시즈가타케 투장전(賤ヶ岳闘将伝)』 인용), 향토 정리 사이트(http://www.ibukiyama1377.sakura.ne.jp/shizugatake/4-4.html). 동시대 사료 근거는 확인하지 못했다. ↩

  17. 위키문헌 『센가쿠 갓센키』(『시세키슈란(史籍集覧)』 제13책 수록본), 『고스가 규베에 이야기(志津ケ岳合戦事小須賀九兵衛話)』(https://ja.wikisource.org/wiki/志津ケ岳合戦事小須賀九兵衛話), 『가와스미 다이코키』(https://ja.wikisource.org/wiki/川角太閤記), 호안 『다이코키』 권6(https://ja.wikisource.org/wiki/太閤記/巻六)을 직접 대조했다. 『에혼 다이코키』·『신쇼 다이코키』의 장면은 일본어 위키백과 「사쿠마 모리마사(佐久間盛政)」를 거친 것이다. 와타나베 다이몬(渡邊大門) 2026년 8월 기고는 철수를 조건으로 허락했다는 이야기를 후대 기록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 그대로 사실이라 하기 어렵다고 했다(각주 14의 기고). 『사쿠마군키(佐久間軍記)』 원문은 직접 대조하지 못했다. ↩

  18. 『시바타 다이지키』 4월 20일 귀환 대목(번각본 직접 대조). 환산(36정=1리, 13리≒51–52km, 한 시진=2시간)은 필자의 계산이다. ↩

  19. 『센가쿠 갓센키』·『가와스미 다이코키』 원문 대조. 오타 히로시(太田浩司),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전(豊臣秀吉事典)』(2007) 255쪽(위키백과 「사쿠마 모리마사(佐久間盛政)」 각주 경유), 『크로닉 전국 전사(クロニック戦国全史)』 477쪽(위키백과 「미노 대회군(美濃大返し)」 https://ja.wikipedia.org/wiki/美濃大返し 경유). 2차 인용이며 원서는 열람하지 못했다. 횃불·주먹밥·식량 대목은 『센가쿠 갓센키』, 『가와스미 다이코키』, 『시바타 다이지키』 원문을 직접 대조했다. 도로 정비 사전 명령은 근거 사료를 찾지 못했다. ↩ ↩2

  20. 와타나베 다이몬(渡邊大門), 야후 뉴스 전문가 기고(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 2023년 기고(https://news.yahoo.co.jp/expert/articles/c3a9ff2110fbf0ccf3b65752a5f25fe4dd357904)와 2026년 8월 기고(각주 14의 URL). 2023년 기고는 해당 서술의 출전을 밝히지 않았다. ↩

  21. 『시바타 다이지키』 4월 21일 대목. 4월 21일자 히데요시 서장(다카기 사다토시 앞)은 와타나베 다이몬(渡邊大門) 기고(https://news.yahoo.co.jp/expert/articles/71869d6e9beed204213a87b06d0ba7080cd2218b)를 거친 2차 인용이며 원문은 확인하지 못했다. ↩ ↩2

  22. 『시바타 다이지키』 4월 21일 합전 대목(번각본 직접 대조). 「이치뵤노 우마지루시(一瓢之馬験)」는 히데요시의 표주박 우마지루시를 가리키는 구절로 읽었다. ↩ ↩2

  23. 『도요토미 히데요시 문서집(豊臣秀吉文書集)』 1 수록 서장(4월 29일자, 나오에 카네츠구·가노 히데하루 앞). 번각을 전재한 블로그(https://japanesehistorybasedonarchives.hatenablog.com/entry/20181024/1540369929)를 통해 확인했고 책은 열람하지 못했다. ↩

  24. 『시바타 다이지키』 4월 22일 후추 항복 대목, 『가와스미 다이코키』·『센가쿠 갓센키』 해당 대목(원문 직접 대조). 이탈 문제의 전체 논의는 이 블로그의 마에다 도시이에는 시즈가타케에서 카츠이에를 배신했나 참조. ↩

  25. 『시바타 다이지키』 야나가세 일번창 대목(아홉 명 열거, 이시카와 효스케, 칸조 문언, 7월 1일 날짜). 번각에 의문 주기가 붙은 구절(「右九人熊設席下杯遣領知」)은 번역하지 않고 영지와 황금·비단을 내렸다는 취지로만 옮겼다. ↩ ↩2

  26. 『가와스미 다이코키』 권4(위키문헌 https://ja.wikisource.org/wiki/川角太閤記), 오제 호안(小瀬甫庵) 『다이코키』 권6(https://ja.wikisource.org/wiki/太閤記/巻六; 『시세키슈란』 제6책 수록본)을 직접 대조했다. 『가와스미 다이코키』의 성립은 위키백과 「가와스미 다이코키(川角太閤記)」, 호안 『다이코키』 초판 연도는 위키백과 「다이코키(太閤記)」(1626년)와 와타나베 다이몬(渡邊大門) 기고(1625년)가 갈린다. 아즈키자카 칠본창의 연대(1542년)는 위키백과 서술이다. ↩ ↩2

  27. 『소후 모노가타리(祖父物語)』(https://ja.wikisource.org/wiki/祖父物語, 1642년 발문, 직접 대조), 『이치야나기케키(一柳家記)』(위키백과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 경유, 원문 미대조). 사전류: kotobank 「시즈가타케 칠본창(賤ヶ岳の七本槍)」(https://kotobank.jp/word/賤ヶ岳の七本槍-73461), 디지털 다이지센(デジタル大辞泉)·브리태니커 국제대백과사전 소항목사전(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 ↩ ↩2

  28. 『소후 모노가타리』, 『가와스미 다이코키』, 호안 『다이코키』 원문 직접 대조. 날짜 불일치는 일본어 위키백과 「가스야 타케노리(糟屋武則)」(https://ja.wikipedia.org/wiki/糟屋武則),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항목(후자는 『키요마사키(清正記)』의 칸조 인용이 창작일 가능성을 언급)과 와타나베 다이몬(渡邊大門) 기고(https://news.yahoo.co.jp/expert/articles/4327542a66892735fdbeae661fed195ff9a30200)를 참고했다. 후쿠시마 가문 쪽 사료는 위키백과 경유다. ↩

  29. 호안 『다이코키』 권6, 『가와스미 다이코키』 원문 직접 대조. 일본어 위키백과 「이시카와 카즈미츠(石川一光)」, 「사쿠라이 이에카즈(桜井家一)」(https://ja.wikipedia.org/wiki/桜井家一), 『조잔키단(常山紀談)』(https://ja.wikipedia.org/wiki/常山紀談)과 『부케지키(武家事紀)』의 일화는 위키백과 경유. 이 블로그 후쿠시마 마사노리 글 각주도 같은 쟁점을 다뤘다. ↩ ↩2

  30. 일본어 위키백과 「가스야 타케노리(糟屋武則)」, 「히라노 나가야스(平野長泰)」(https://ja.wikipedia.org/wiki/平野長泰). 1595년 가증의 근거 서장 원문은 확인하지 못했다. ↩

  31. 후지이 조지(藤井讓治), 「에치젠에서 내려진 히데요시의 금제(越前に出された秀吉の禁制)」, 『후쿠이현 문서관 연구 기요(福井県文書館研究紀要)』 14, 2017(https://www.library-archives.pref.fukui.lg.jp/fukui/08/2016bulletin/images/14fujii.pdf). 히데요시 서장(『도요토미 히데요시 문서집』 1-651, 1-744·745)은 이 논문의 각주 인용을 거친 것이다. 25일 가가 출마·28일 가나자와 입성·5월 3일 귀환, 4월 27일자 미조구치 히데카츠 앞 서장도 같은 논문. 낙성 시각이 후대 편찬물에서 오후 5시로 나오는 것은 위키백과 「기타노쇼성 전투(北ノ庄城の戦い)」(https://ja.wikipedia.org/wiki/北ノ庄城の戦い). ↩ ↩2 ↩3

  32. 『시바타 다이지키』 4월 22–24일 대목(번각본 직접 대조). 한시 인용의 출전(「장한가(長恨歌)」)과 한국어 번역·노래의 의역은 필자의 것이며 노래는 해석의 여지가 있다. ↩ ↩2 ↩3

  33. 일본어 위키백과 「오이치(お市の方)」(https://ja.wikipedia.org/wiki/お市の方), 「아사이 삼자매(浅井三姉妹)」(https://ja.wikipedia.org/wiki/浅井三姉妹; 미야모토 요시미(宮本義己) 2010 인용). 『시바타 다이지키』 전문에 삼자매 언급이 없다는 것은 번각본으로 직접 확인했다. ↩

  34. 『시바타 다이지키』 말미 영지 배치 목록(번각본 직접 대조). 니와 나가히데의 영지(에치젠과 가가 2군)와 이케다 츠네오키의 이동, 프로이스 기록은 일본어 위키백과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https://ja.wikipedia.org/wiki/丹羽長秀), 「이케다 츠네오키(池田恒興)」(https://ja.wikipedia.org/wiki/池田恒興), 「오사카성(大坂城)」(https://ja.wikipedia.org/wiki/大坂城) 경유. 『니혼 야소카이 넨포(日本耶蘇会年報)』 해당 대목은 직접 대조하지 못했다. 다키가와의 나가시마성 개성은 『시바타 다이지키』(번각본 직접 대조), 7월 항복과 출가는 일본어 위키백과 「다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https://ja.wikipedia.org/wiki/滝川一益) 경유. ↩ ↩2

  35. 『시바타 다이지키』 사쿠마 모리마사·시바타 곤로쿠·노부타카 대목(번각본 직접 대조). 처형 장소·일자, 가신화 제안, 사세구, 노부타카 자결지와 날짜는 일본어 위키백과 「사쿠마 모리마사(佐久間盛政)」, 「오다 노부타카(織田信孝)」(『기후시사(岐阜市史)』 1928, 다카야나기 미쓰토시·마쓰다이라 도시카즈(高柳・松平) 1981 인용)를 거쳤다. ↩ ↩2

  36. 『시바타 다이지키』 말미 오사카 보급 대목(번각본 직접 대조). 11월 5일자 서장은 위키백과 「오사카성(大坂城)」(『오사카부사(大阪府史)』 1985 인용). 5월 21일 쇼시다이 임명과 삿사 나리마사 서장은 위키백과 「오다 노부카츠(織田信雄)」(https://ja.wikipedia.org/wiki/織田信雄), 코마키·나가쿠테 연결은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https://ja.wikipedia.org/wiki/小牧・長久手の戦い)와 이 블로그의 코마키·나가쿠테 전투.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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