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노 나가야스(平野長泰, 1559–1628) — 시즈가타케 칠본창⑥
Q: 히라노 나가야스(平野長泰)는 누구인가?
A: 시즈가타케 칠본창 가운데 끝까지 다이묘가 되지 못한 사람이다. 1559년 오와리(尾張) 츠시마(津島)에서 태어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측근 무사로 자랐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동료들과 동일한 칸조(感状, 전공을 인정하는 문서)와 3,000석의 영지를 받았다. 하지만 1595년 야마토(大和) 토이치군(十市郡)의 타와라모토(田原本) 일대 5,000석을 끝으로, 더 이상 영지가 늘지 않았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쪽에 서서 하타모토(旗本, 쇼군 직속 가신)가 되었고, 오사카 전투 때는 오사카에 있던 아들을 데려오려 했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에도에 남았다. 1628년 70세로 죽었다. 그가 받은 5,000석은 자손 대대로 다른 지역으로 옮겨지거나 규모가 줄어들지도 않았다. 1868년에는 1만 석으로 다시 산정되어 타와라모토번(田原本藩)이 되었다.
한눈에 보는 히라노 나가야스
| 항목 | 내용 |
|---|---|
| 이름 | 히라노 나가야스(平野長泰). 처음 이름은 나가카츠(長勝) |
| 통칭·관직 | 통칭 곤페이(権平). 1598년 3월 15일 종5위하 토토미노카미(遠江守) |
| 생몰 | 1559년(에이로쿠 2) – 1628년 5월 7일(간에이 5). 향년 70세 |
| 출신 | 오와리 츠시마. 아버지 나가하루(長治)는 공가 키요하라(清原) 가문 출신이라는 계보가 있음 |
| 칠본창 | 1583년 6월 5일 칸조, 3,000석 |
| 영지 | 1584년 4월 그중 480석이 다른 가신에게 넘어감. 1595년 8월 17일 야마토 토이치군 5,000석 |
| 세키가하라 | 도쿠가와 쪽. 5,000석 유지 |
| 오사카 전투 | 1614년 겨울·1615년 여름 모두 에도에 남음 |
| 죽음 | 1628년 5월 7일. 법명 료무(了無). 에도 시바(芝)의 센가쿠지(泉岳寺)에 묻힘 |
| 가문의 이후 | 코타이요리아이(交代寄合)로 10대 이어짐. 1868년 1만 석 다이묘(타와라모토번) |
히라노 나가야스는 이 블로그에서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카타기리 카츠모토에 이어 여섯 번째로 다루는 시즈가타케 칠본창이다. 앞의 다섯 사람은 성과 큰 영지를 얻었거나 도요토미 가문의 살림을 맡았다. 하지만 나가야스는 5,000석의 영지를 가진 하타모토의 신분으로 생을 마쳤다. 그렇다 보니 그는 “시즈가타케 칠본창 가운데 혼자 다이묘가 되지 못한 사람”으로 불리게 됐다.
이 글은 왜 그런 말이 나오게 됐는지, 또 그는 5,000석의 영지를 가지고 실제로 어떻게 살았는지를 따라가 본다. 기준으로 삼은 것은 히데요시가 그에게 내린 문서들, 그의 사촌뻘인 공가 후나바시 히데카타(舟橋秀賢)의 일기 『게이초 닛켄로쿠(慶長日件録)』, 이에야스의 외교 승려 콘치인 스덴(金地院崇伝)의 일기 『혼코코쿠시 닛키(本光国師日記)』에 실린 편지, 그리고 막부가 1812년에 완성한 계보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줄여서 『간세이후(寛政譜)』)다. 이 시리즈에서 대조해 온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의 『한칸후(藩翰譜)』는 다이묘 가문을 다룬 책이라 하타모토였던 히라노 가문의 항목이 없기에 참고할 수 없었다.
1. 츠시마의 히라노 가문과 히데요시의 측근
1-1. 공가의 피가 섞인 무사 집안
『간세이후』에 따르면 히라노 가문은 오와리의 히라노 마을(平野邑)을 물려받아 그 이름을 성으로 삼은 무사 집안이고 뒤에 츠시마로 옮겨 살았다. 츠시마는 오와리 서쪽, 츠시마 신사 앞에 있는 강가의 포구 마을이다. 할아버지 대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밀려 떠돌다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같은 책에 나온다.1
아버지 나가하루(長治)의 출신이 눈에 띈다. 『간세이후』 본문에는 그가 “실은 후나바시 에다카타(船橋枝賢)의 아들”로 히라노 집안에 양자로 들어왔다고 나온다. 에다카타는 대대로 유학 경전을 가업으로 삼은 공가 키요하라(清原) 가문의 당주였다. 다만 같은 책에 에다카타의 아버지 나리카타(業賢)의 아들이라는 설, 그 위 대인 노부카타(宣賢)의 아들이라는 설이 둘 다 실려 있어서 어느 쪽이 사실인지 판단하기는 어렵다.2
후나바시와 히라노 두 집안이 혈연관계임을 직접 증명하는 기록은 없지만 두 집안이 가족처럼 서로 드나든 것은 분명하다. 에다카타의 손자 후나바시 히데카타의 일기에는 1600년대 초 “히라노 오이 뉴도 이운사이(平野大炊入道已雲齋)”, 곧 출가한 나가하루의 집을 찾아가거나 “히라노 토토미노카미”가 새해 예물을 들고 와서 묵어 가는 장면이 거듭 나온다. 나가야스의 형 나가토키(長時)가 가토 기요마사의 가신으로 있다가 상경해 아버지 집에서 옛이야기를 나눴다는 내용도 있다. 이 일기가 『간세이후』의 가족 구성과 하나하나 맞아떨어진다.3
나가야스는 1559년에 태어났다. 생년을 직접 적은 기록은 없으나 1628년에 70세로 죽었다는 기록에서 거꾸로 계산한 것이다. 『간세이후』에 실린 형제 순서로 보면 셋째 아들이다. 형 나가토키는 기요마사를, 둘째 형 나가카게(長景)는 훗날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를 섬겼다. 동생 나가시게(長重)는 형을 따라 히데요시 밑에서 싸웠다. 한 집안의 형제들이 도요토미와 그 주변 다이묘 가문으로 흩어져 나갔다.1
1-2. 히데요시 곁의 젊은 무사
나가야스가 히데요시를 섬기기 시작한 해는 1579년이다. 막부가 1643년에 엮은 계보 『간에이 쇼카케이즈덴(寛永諸家系図伝)』에 “덴쇼 7년, 히데요시를 뵈었다”고 나온다. 누구의 주선이었는지는 남아 있지 않다. 아버지 나가하루가 이미 히데요시 밑에 있었다는 『간세이후』 기록이 배경으로 짐작될 뿐이다.4
그의 신분이 드러나는 가장 이른 기록은 시즈가타케 전투 반년 뒤인 1583년 11월, 히데요시 곁의 문인 오무라 유코(大村由己)가 쓴 『시바타 다이지키(柴田退治記)』다. 야나가세에서 가장 먼저 창을 맞댄 사람들의 명단에 “히라노 곤페이 나가야스”가 있다. 유코는 이들을 “모두 측근 무리”라고 소개한다. 이 무렵 그는 이미 나가야스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다.5
이듬해 1584년 4월 코마키·나가쿠테 전투 이야기에도 그가 나온다. 후대 편찬물 여러 곳에서 그는 평소 히데요시의 우마마와리(馬廻, 주군 곁을 지키는 기마 무사)였는데, 히데요시의 조카 미요시 노부요시(三好信吉, 훗날의 도요토미 히데츠구)가 그를 아꼈기 때문에 가쿠덴(楽田)에서 히데츠구의 진을 문안하러 갔다가 도쿠가와군의 기습에 휘말려 싸우게 됐다고 나온다. 적 하나를 베었다는 기록과 공이 없었다는 기록이 엇갈린다.6 나가쿠테의 패전 한가운데에 그가 있었다는 데까지는 여러 기록이 일치한다.
2. 시즈가타케의 칸조 3,000석
2-1. 아홉 명의 용사가 받은 똑같은 칸조
1583년 6월 5일, 히데요시는 “히라노 곤페이”에게 칸조를 보냈다. 문서는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를 편찬할 때 「히라노 문서(平野文書)」로 채록되었다. 원본은 지금 타와라모토초 지정문화재로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7
今度三七殿依謀叛、濃州大柿令居陣處ニ、柴田修理亮到柳瀨表罷出候條、爲可及一戰、一騎懸馳向候之處ニ、心懸深付而、早懸著候而、秀吉於眼前合一番鑓、其動無比類候條、爲褒美三千石宛行訖、彌向後奉公之依忠勤、可遣領知者也、仍如件、 天正十一 六月五日 秀吉(花押) 平野權平殿
이번에 산시치 님(오다 노부타카)이 모반해 내가 미노 오가키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시바타 슈리노스케(카츠이에)가 야나가세 쪽으로 나왔다. 일전을 벌이려고 말 한 필로 달려갔는데, 그대는 마음가짐이 깊어 일찍 달려와 히데요시의 눈앞에서 일번창(一番鑓, 가장 먼저 적과 창을 맞댄 공)을 세웠다. 그 활약이 비할 데 없으므로 상으로 3,000석을 준다. 앞으로도 봉공에 힘쓰면 영지를 더 주겠다.
같은 날짜, 같은 문장의 칸조가 가토 요시아키, 카타기리 카츠모토, 가스야 타케노리 등 아홉 명에게 나갔다.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5,000석을 받은 것 말고는 수신인만 다를 뿐, 3,000석이라는 석고와 문서 끝의 “앞으로도 봉공에 힘쓰면 영지를 더 주겠다”는 약속까지 모두 똑같다. 3,000석이 어디였는지는 칸조에 적혀 있지 않으나, 『간세이후』에는 나가야스가 받은 영지가 “오미(近江)와 카와치(河内) 두 곳”으로 나온다.7
동생 나가시게도 시즈가타케에 참전했다. 『간세이후』에는 그가 “형 나가야스를 이어 창을 맞대” 공을 세우고 셋츠(摂津)에서 200석을 받았다고 나온다. 형제가 나란히 야나가세 언덕을 올라갔던 것이다.8
2-2. 정확히 무슨 공을 세웠는지는 문서에 나와 있지 않다
칸조가 정형 문서인 만큼 그날 나가야스가 구체적으로 누구와 싸웠는지는 이 문서로 알 수 없다. 전투 뒤 수십 년 사이에 나온 기록들도 칠본창을 한 무리로 묶어 “앞다투어 나아가 적을 무너뜨렸다”고만 쓰는 수준이다. 오제 호안(小瀬甫庵)의 『다이코키(太閤記)』(1625년경)와 다케나카 시게카도(竹中重門)의 『호칸(豊鑑)』(1631)이 그렇다.9
나가야스가 시바타군의 누구를 찔러 쓰러뜨렸다는 식의 구체적인 무용담은 이번에 대조한 자료 가운데 18–19세기의 역사소설에서 처음 확인된다. 사쿠마 모리마사(佐久間盛政)의 동생과 맞붙었다거나 “오하라 신시치(小原新七)“라는 무사를 베었다는 이야기가 다 그런 식이다. 막부 말 우키요에의 설명문에도 이 줄거리가 그대로 실렸다. 칠본창 일곱 사람을 한 장씩 그린 연작에서도 히라노 판은 다른 동료들의 그림과 인물만 조금 다를 뿐 구도가 거의 같다.10
문서로 확인되는 그날의 나가야스는 히데요시의 눈앞에서 가장 먼저 창을 맞댄 측근 무리의 한 사람이었고 그 상으로 측근 무사로서는 큰 영지인 3,000석을 받았다. 전투 전 그의 녹봉이 150석이었다는 기록도 500석이었다는 기록도 모두 후대 것이지만 어느 쪽이든 녹봉이 단번에 여러 배로 뛰어오른 셈이다.11
2-3. 받은 지 열 달 만에 다른 가신에게 넘어간 480석
시즈가타케에서의 전공으로 받은 이 3,000석의 영지는 오래가지 않았다. 1584년 4월 3일, 히데요시는 측근 이토 나가자네(伊東長実)에게 슈인조(朱印状, 붉은 도장을 찍은 명령 문서)를 내렸다.
平野權平當知行分之内ヲ以、四百八拾石遣之、都合九百六拾石令扶助訖
히라노 곤페이가 지금 지행하는 몫 가운데 480석을 주어, 모두 960석을 내린다.
시즈가타케 칸조를 받은 지 열 달 만에 나가야스의 영지 일부가 다른 가신에게 넘어간 것이다. 이 문서에는 이유가 적혀 있지 않아 알 수 없고, 이를 대신해 다른 곳의 땅을 받았는지도 알 수 없다.12
타와라모토초 교육위원회가 히데요시 문서를 문화재로 지정하며 붙인 해설에는 나가야스가 그 뒤 히데요시의 노여움을 사 지행이 1,000석까지 줄었다고 나와 있다. 노여움의 내용과 시기, 근거 문서는 해설에 밝혀져 있지 않다. 1차 사료인 480석 문서로 확인되는 것은 시즈가타케 직후 지행 일부가 다른 가신에게 넘어갔다는 데까지다. 대신 받은 땅이 없었다면 영지가 줄어든 셈이지만, 그 여부는 문서로 알 수 없다.13
3. 5,000석에서 멈춘 칠본창
3-1. 1595년 8월 17일
열두 해 뒤인 1595년 8월 17일, 히데요시는 나가야스에게 새 슈인조를 내렸다. 접어서 쓰는 오리가미(折紙) 형식의 이 문서도 타와라모토초 지정문화재로 남아 있다. 본문이 “별지”로 넘긴 지행목록(知行目録) 원본은 없어졌지만 사본에는 야마토 토이치군의 일곱 마을, 곧 지금의 타와라모토초 일대 합계 5,000석이 적혀 있다.14
이때 얼마를 더 받았는지는 기록마다 다르다. 에도 시대 계보 『가이센 쇼카케이후(改選諸家系譜)』에는 “시즈가타케의 옛 공을 생각해 2,000석을 더 주어 5,000석”으로 나온다. 타와라모토초 해설에는 1,000석으로 줄어 있던 영지에 4,000석을 더해 5,000석이 되었다고 되어 있다. 『간세이후』에는 더한 양 없이 “5,000석을 지행했다”고만 나온다. 1584년의 480석 이전을 포함해 그 사이 영지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밝혀지지 않아 어느 쪽 계산이 맞는지 정하기 어렵다. 여하튼 이전의 영지가 얼마였든지 간에 1595년 8월 17일 문서로 5,000석이 정해진 것만은 확실하다.15
이날 영지를 더 받은 사람은 나가야스만이 아니었다. 카타기리 카츠모토도 같은 날 “지난날 시즈가타케에서 애쓴 일을 떠올리시어”라는 명목으로 5,800석을 더 받아 1만 석이 되었고 가스야 타케노리도 같은 날 6,000석을 더 받아 1만 2,000석이 되었다고 한다. 7월에 간파쿠(関白, 최고 귀족 관직) 도요토미 히데츠구가 자결한 직후, 야마토 일대의 검지(토지 조사)가 진행되던 때였다. 세 사람이 같은 날, 같은 시즈가타케의 옛 공을 명분으로 영지를 받았다. 그런데 두 사람은 1만 석을 넘어 다이묘가 되었고 나가야스만 5,000석에 머물렀다.16
3-2. 후시미의 측근 37인
5,000석의 나가야스는 히데요시 곁에서 무슨 일을 했을까. 카타기리처럼 검지나 다이칸(代官, 직할령 관리)을 맡았다는 기록, 부교(奉行) 직함으로 문서에 이름이 오른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간에이 쇼카케이즈덴』과 『간세이후』에 이 시기 나가야스에 대한 기록은 “히데요시가 출진할 때마다 따라가 여러 번 공을 세웠다”는 한 줄뿐이다. 규슈 정벌, 오다와라 정벌, 조선 출병 등 다른 시즈가타케 칠본창들이 굵직한 활약을 한 전장에서 그가 어디에 있었는지조차 구체적으로 남아 있지 않다.17
이 긴 시간 속에서 그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건 1598년 정월의 편지 한 통 정도다. 조선 울산성에서 막 농성을 풀고 나온 아사노 요시나가(浅野幸長)가 후시미의 히데요시 측근들에게 보낸 답장이다. 수신인은 37명이다. 가스야 타케노리, 후루타 오리베(古田織部), 히지카타 카츠히사(土方雄久) 같은 이름 사이에 “히라노 곤페이”가 있다. 같은 달 7일 자 편지는 나가야스를 포함한 네 사람에게 보낸 답장으로, 이들이 앞서 편지와 먹 열 자루를 조선으로 보내 준 데 대한 인사다. 나가야스는 후시미성에서 히데요시를 모시며 바다 건너 장수들과 소식을 주고받는 측근 무리에 있었다.18
이 편지에서 그는 아직 “곤페이”로 불린다. 두 달 뒤인 1598년 3월 15일에는 종5위하 위계와 토토미노카미 관직을 받았다. 이때 조정 서임 문서에 적는 성으로 도요토미(豊臣)도 하사받았지만, 평소 쓰는 이름은 그대로 히라노였다. 이후로는 “히라노 토토미노카미”로 불린다. 3월 15일은 히데요시가 다이고(醍醐)에서 꽃놀이를 연 바로 그날이다. 이 서임을 1597년으로 적은 자료가 많은데 이는 게이초 3년을 서력으로 잘못 옮긴 탓이다. 히데요시는 이로부터 다섯 달 뒤 세상을 떠났다.19
3-3. “성정이 사나워서”라는 설명은 어디서 왔나
나가야스의 영지가 왜 끝까지 5,000석에 머물렀는지를 두고는 오래된 설명이 있다. 그 설명이 이어져 온 과정을 시기순으로 표에 정리했다.
| 시기 | 문헌 | 내용 |
|---|---|---|
| 1625년경 | 오제 호안 『다이코키(太閤記)』 | “성정이 사나워 히데요시 경을 거스른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그래서 영지가 적었다고 한다.” 영지를 요시노(芳野)로, 가스야를 3만 석으로 잘못 씀 |
| 1673년 | 야마가 소코 『부케지키(武家事紀)』 | “히라노·카타기리·가스야 세 사람은 가라앉아 겨우 5,000석, 3,000석을 다스렸다.” 히라노 혼자가 아니라 셋을 묶음 |
| 18세기 | 도요토미 시대 녹봉 장부(太閤秀吉公御時代分限帳) 사본 | ”제멋대로인 사람이라 출세하지 못했다” |
| 1942년 | 『하가쿠레(葉隠)』 해설서 | ”히라노 곤페이는 다이묘도 되지 못하고 이에야스의 하타모토였다.” 『하가쿠레』 원문에는 없는 대비 |
| 현대 | 대중 역사 잡지·웹 해설 | ”단 한 사람, 다이묘가 되지 못한 칠본창” |
이유를 처음 설명한 호안은 문장 끝을 ”…라고 한다(とかや)“로 맺어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말로 처리했다. 같은 문단의 다른 숫자들도 틀려 있다. 가스야를 3만 석으로 부풀린 채 “히라노만 적다”고 대비했다. 그 뒤의 녹봉 장부에서는 이것이 “제멋대로인 사람”이라는 성격 탓으로 이어졌다. “무공은 있으나 행정 능력이 없었다”는 요즘 해설에 자주 보이는 설명은 에도 시대 문헌에서 출전이 확인되지 않는다.20
사료로 확인되는 것은 결과뿐이지 원인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없다. 1584년에 지행 일부 480석이 다른 가신에게 넘어갔고 1595년에 동료 둘이 1만 석을 넘을 때 그는 5,000석에서 멈췄다. 그 사이에 히데요시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598년 정월에도 그는 여전히 히데요시 곁의 측근 무리 안에 있었지 미움을 받아 쫓겨난 것은 아니었다.
4. “곤페이 오천 석” — 일화 속의 나가야스
4-1. 툇마루에서 오줌을 누다
5,000석의 나가야스를 주인공으로 한 일화로는 “곤페이 오천 석” 이야기가 가장 널리 퍼졌다. 사가 번사 야마모토 츠네토모(山本常朝)의 구술을 1716년 무렵 엮은 『하가쿠레(葉隠)』에 이런 내용이 있다.
어느 날 나가야스가 호소카와 가문의 초대를 받아 갔다. 주인이 말했다. “곤페이 님의 무용은 일본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이런 용사를 지금처럼 소신(小身, 녹봉이 적은 처지)으로 두는 것은 아깝습니다. 우리 가신이 되시면 영지 절반을 드리겠소.” 나가야스는 대답 없이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툇마루로 나가더니 버티고 서서 오줌을 누며 말했다.
御手前の家中に成りては、爰から小便する事がならぬ
당신 가신이 되면 여기서 오줌을 눌 수가 없지 않소.
가신이 되면 이 집 주인이 곧 주군이니 지금처럼 거리낌 없이 굴 수 없다는 뜻이다.
에도 후기의 수필집들에는 같은 이야기가 주인공만 바뀌어 실려 있다. 가토 요시아키의 집에 옛 동료들이 모인 자리에서 가토 기요마사가 “곤페이, 5,000석으로는 궁색하겠지. 내게 오면 가로로 삼아 3만 석을 주겠다”고 하자 나가야스가 서원 장지를 열고 선 채로 오줌을 누며 “히고까지 내려가면 자네 눈치 보느라 이렇게 서서 오줌도 못 누겠으니 그만두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권한 사람이 호소카와에서 기요마사로, 조건이 영지 절반에서 3만 석으로 바뀌었을 뿐 줄거리는 같다.21
이 일화가 실제 있었던 일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하가쿠레』에 이 이야기가 실린 것으로 보아, 18세기 초에는 나가야스가 출세하지 못해 한탄하는 사람보다 작은 녹봉이라도 남의 가신이 되기는 싫다며 큰 제안을 걷어차는 사람으로 이야기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이야기를 전한 쪽의 생각일 뿐 나가야스 본인의 마음을 보여 주는 기록은 아니다. “곤페이 오천 석”이라는 말은 시바 료타로의 단편 소설 제목이 되기도 했다.22
4-2. “원숭이도 5,000석, 곤페이도 5,000석”
에도 후기의 잡록에는 조금 결이 다른 이야기도 있다. 나가야스가 죽마고우인 가토 요시아키의 집에 갔을 때, 둘이 코타츠에 발을 넣고 높은 베개를 베고 누워 옛 싸움 이야기를 나눴다. 나가야스가 요시아키의 가신으로 아명이 “원숭이”였던 사람에게 지행을 얼마나 주었느냐고 묻자 요시아키가 5,000석이라고 답했다. 나가야스는 코타츠 가장자리를 발로 두드리며 “원숭이도 5,000석, 곤페이도 5,000석” 하고 장단을 맞췄다고 한다.23
옛 동료의 가신과 자기 녹봉이 같다는 이 농담은 나가야스 자신이 처지를 한탄하는 모습이 가장 직접 드러나는 일화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도 그는 웃고 있다.
5. 세키가하라 이후 — 후시미의 하타모토
5-1. 이에야스를 따르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나가야스는 도쿠가와 쪽에 섰다. 『간세이후』에는 “세키가하라 싸움 때 도쇼구(이에야스)를 따랐다”고만 나온다. 그가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의 나카센도 군에 있다가 본전에 늦었다는 이야기가 일본어 해설에 보이지만 출전이 확인되지 않는다. 전공에 대한 기록은 없다. 동생 나가시게가 후쿠시마 마사노리 부대에서 싸워 300석을 더 받았다고 나오지만 형 나가야스에게는 그런 기록이 없다.24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의 5,000석이 그대로였던 것만은 기록으로 확인된다. 반대편인 서군에 가담한 가스야 타케노리가 영지를 모두 잃은 것과 대비되는 결과다. 세키가하라를 계기로 도요토미 가문의 측근 무사였던 나가야스는 도쿠가와의 하타모토가 되었다.
5-2. 후시미의 집, 공가 친구들
『간세이후』에 나오는 이 시기의 나가야스에 대한 기록은 “그 뒤 에도로 가서 다이토쿠인(히데타다)을 섬겼다”는 한 줄뿐이다. 그러나 동시대 일기에 나오는 나가야스의 활동 무대는 에도가 아니라 교토 주변의 기나이(畿内)였다.
후나바시 히데카타의 일기 『게이초 닛켄로쿠』에는 1603년부터 1606년 사이의 나가야스가 여러 번 나온다. 1603년 정월 3일 나가야스가 새해 인사를 와서 종이 두 묶음과 돈을 주고 술을 한 잔 나눈 뒤 후시미로 돌아갔다. 같은 해 8월 히데카타는 오사카에서 “히라노 토토미노카미 집”에 가서 목욕물을 데워 대접받고 하룻밤을 묵었다. 1605년 정월 말에는 히데카타가 나가야스의 집에 며칠을 머물렀고 그사이 간파쿠·셋쇼(摂政)를 배출한 최고위 공가인 고노에 가문의 당주(近衛殿)가 그 집에 와서 렌가(連歌, 여럿이 번갈아 구절을 이어 짓는 시) 모임이 열렸다. 1606년 2월에는 히데카타가 오사카로 가는 길에 후시미의 나가야스 집에 들러 배를 빌렸다.25
일기 속 나가야스는 후시미와 오사카에 집을 두고 교토의 공가들과 어울리던 사람이다. 공가 출신이라는 아버지의 집안 내력이 이러한 교류의 배경이었을 것이다. 타와라모토 측의 해설에도 나가야스가 다도와 와카, 노가쿠에 소양이 있었고 호소카와 가문, 후나바시 가문과 교류했다는 기록이 소개되어 있다.26
5-3. 다이리와 니조성의 공사
하타모토로서 나가야스가 맡은 일로는 공사가 확인된다. 1611년 막부는 다이리(内裏, 천황의 궁궐) 조영을 여러 다이묘와 하타모토에게 나눠 맡겼는데, 그 명단에 그의 이름이 있다. 이듬해 1612년 9월부터는 교토 니조성(二条城) 공사를 맡았다. 1613년 3월과 6월에 쇼군 히데타다가 두 차례 노고를 위로하는 편지를 보냈다. 공사가 끝난 6월에는 오고쇼(大御所, 은퇴한 쇼군) 이에야스의 편지도 받았다.27
6. 타와라모토와 쿄교지 — 사원 마을을 허가한 영주
6-1. 1601년의 청원
1595년 나가야스가 받은 토이치군 5,000석의 중심은 타와라모토 마을이었다. 나라(奈良) 분지 한가운데, 옛 간선도로 시모츠미치(下ツ道)가 남북으로 지나가는 평지 마을이다.
1601년, 당시 이웃 사미타(佐味田) 마을에 있던 정토진종 사찰 쿄교지(教行寺)의 주지 켄세이(顕誓)가 영주 나가야스에게 청원을 올렸다. 타와라모토 마을 안에 사원 마을, 곧 지나이마치(寺内町)를 세우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지나이마치는 혼간지 계열 사찰을 중심으로 문도와 상인이 모여 사는 마을로, 전국시대 기나이 곳곳에 생겨났다. 나가야스는 이듬해 1602년 이를 허가하며 네 가지를 약속했다.28
- 사방 3정(町, 약 330m) 구역의 각종 부역 면제
- 연공은 80석으로 고정
- 사방 1정을 쿄교지의 경내 땅으로 영구히 기증
- 마을 운영을 쿄교지에 맡김
지명 사전에는 나가야스가 “혼간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영주”로 소개되어 있다. 『간세이후』에 따르면 그의 딸은 니시혼간지의 고위 가신 시모츠마 나카토라(下間仲虎)의 아내였다. 영주 쪽에서 보면 부역을 면제하고 연공을 낮게 묶는 대신 상인과 문도가 모여드는 마을을 얻는 거래였다.29
6-2. 영주가 살지 않은 영지
『간세이후』에는 나가야스가 1595년 5,000석을 받고 “타와라모토에 살았다”고 나오지만 같은 계보의 뒷부분에는 그가 1615년에야 “처음으로 영지에 가는 휴가를 받았다”고 나온다. 앞서 본 일기대로 그의 집은 후시미와 오사카에 있었다. 타와라모토초의 자료에도 나가야스가 타와라모토에 살지 않고 쿄교지에 지나이마치 운영을 맡겨 대신 다스리게 했다는 설명이 있다. 그는 진야(陣屋, 소영주의 관청 겸 거처)도 짓지 않았다.30
영주가 자리를 비운 사이 마을을 키운 것은 절과 그 문도들이었다. 타와라모토의 진야마치를 다룬 역사지리학 연구에서는 이 지나이마치가 뒷날 진야마치(진야를 중심으로 생긴 마을)의 바탕이 되었고 상가가 펼쳐지는 기반이 되었다고 본다. 나가야스가 1602년에 쿄교지가 지나이마치를 세우도록 허락한 것이 타와라모토가 시장 마을로 자라는 첫 단계였던 셈이다.31
6-3. 그 뒤의 마을
히라노 나가야스가 죽은 뒤에는 방침이 바뀌었다. 2대 나가카츠(長勝)는 1635년 마을 동쪽에 진야를 짓기 시작했고, 마을 운영권을 둘러싸고 쿄교지와 다툰 끝에 절을 마을에서 내보냈다. 쿄교지는 지금의 코료초(広陵町) 하시오(箸尾)로 옮겨 갔다. 나가카츠는 쿄교지가 떠난 터의 남쪽 절반에 1651년 엔조지(円城寺)를 세웠다. 이 절이 지금의 조쇼지(浄照寺)다.32
이후 타와라모토는 히라노 가문 진야의 마을로 성장했다. 야마토강으로 흘러드는 데라강(寺川)의 수운과 시모츠미치의 길목이라는 입지 덕에 도매상이 늘어서는 물류 거점이 되었고 “야마토의 오사카”라 불릴 만큼 번성했다.33
7. 오사카 전투 — 아들을 데려오려던 아버지
7-1. 1614년 10월 6일의 편지
1614년 가을, 이에야스가 오사카를 치기로 했다. 에도에 있던 나가야스는 쇼군 히데타다의 명을 받고 슨푸로 달려갔다. 그가 슨푸에 도착한 직후인 10월 6일, 이에야스의 측근 혼다 마사즈미(本多正純)가 에도에 있는 아버지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에게 편지를 썼다. 콘치인 스덴의 일기에 사본이 실려 있다.
平野遠江殿、當府迄上着候、子息大坂ニ被罷在候を呼のけ申度內存ニて、可罷登々との義ニ候へ共、從是主舍弟被指遣、遠州へ〔云々ヵ〕と江戶ニ被罷在、公方樣御出馬之時、御供可然との義ニ付て、主も尤と申、歸參之事可然樣ニ御取成可被仰上候
히라노 토토미 님이 이곳 슨푸에 도착했습니다. 아드님이 오사카에 있는데 그를 빼내 오고 싶다는 속내로 올라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쪽에서 본인의 동생을 대신 보내고, 토토미 님은 에도에 머물러 있다가 쇼군께서 출진하실 때 수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자 본인도 그게 옳다고 했습니다. 에도로 돌아가는 일을 잘 주선해 아뢰어 주십시오.
위의 마사즈미 편지에 쓰여 있는 것처럼 당시 나가야스의 아들이 오사카에 있었다. 후대 기록에는 이 아들이 적자 나가카츠이고 겨울의 진 때 성 안에 있었다고 나온다. 나가카츠는 1603년생이니 이때 열두 살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러 오사카로 가겠다고 했다. 이에야스 측은 그를 보내는 대신 동생을 보내기로 하고 나가야스를 에도로 돌려보냈다. 편지 끝에는 “토토미 님에게 좋도록 주선해 달라”는 추신까지 붙어 있다.34
7-2. 막힌 길
두 달 뒤인 12월 4일, 와카야마 영주 아사노 나가아키라(浅野長晟)가 오사카를 포위한 진중에서 나가야스에게 답장을 보냈다.
一御子息之儀、我等國へ罷着候と、そのまゝ、高臺院樣へ文を進上申候へハ、はや大坂へ之通路無之候間、被仰事不成候由御返事參候、(中略)休無も(中略)大坂へ兩三度迄人を御遣候へ共、不成候由御申、(中略)細川內記殿へ、以書狀申候へハ、本佐州、本上州へ被仰候て可有御覽との儀候
아드님 일은, 제가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코다이인 님께 편지를 올렸더니, 이미 오사카로 통하는 길이 없어 말씀하신 일은 할 수 없다는 답장이 왔습니다. (중략) 큐무(休無) 님도 크게 애를 써서 오사카로 두세 번이나 사람을 보냈으나 안 되었다고 합니다. (중략) 호소카와 나이키(内記) 님께 편지로 말씀드렸더니, 혼다 사도노카미·혼다 코즈케노스케께 말씀해 보라는 뜻이었습니다.
나가야스는 히데요시의 정실 코다이인(高台院, 흔히 ‘네네’라 부르는 인물)에게까지 줄을 대어 아들을 빼내려 했다. 큐무는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의 맏아들 타다타카(細川忠隆), 나이키는 그 동생 타다토시(細川忠利)다. 타와라모토초 자료가 소개한 호소카와 가문과의 교류가 이 편지에서 실제로 확인된다. 그러나 12월 초까지도 길은 열리지 않았다.35
겨울의 진 동안 오사카에서 빼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나가야스의 아들 나가카츠는 살아남았다. 『간세이후』에는 그가 이듬해 1615년 열세 살로 쇼군 히데타다에게 처음 인사를 올렸다고 나온다. 18세기 편찬물에는 그가 겨울의 진 동안 성 안에 있다가 화의가 맺어진 뒤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반면 나가야스의 둘째 형 나가카게는 히데요리를 섬기다 오사카성이 함락될 때 전사했다.36
7-3. 에도에 남은 사람들
에도로 돌아간 나가야스는 전쟁에 나가지 않았다. 『도쿠가와짓키(徳川実紀)』에는 1614년 10월 23일 히데타다가 에도를 떠날 때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요시아키,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 히라노 나가야스 등을 에도에 남겼다고 나온다. 그 옆에는 “세상에 전하기로는, 모두 도요토미 가문의 공신이므로 일부러 에도에 남겼다고 한다”는 설명이 작은 글씨로 붙어 있다. 이듬해 여름의 진 때도 나가야스는 후쿠시마와 함께 에도성을 지키는 명단에 들었다. 가토와 구로다는 여름 명단에는 없다.37
같은 칠본창 출신 후쿠시마, 가토와 나란히 에도에 남았다는 점에서 나가야스는 도요토미 가문의 옛 공신으로 취급된 셈이다. 다만 같은 시대의 기록인 『도다이키(当代記)』에는 겨울의 진 때 에도에 남은 사람으로 후쿠시마·구로다·가토 세 다이묘만 나오고 나가야스는 없다. 5,000석 하타모토였던 그가 후쿠시마, 가토 같은 인물들과 같은 중요도로 의식되었는지는 기록마다 다르다.38
7-4. “히데요리 측에 서겠다”는 이야기
오사카 공격 당시 아들을 데려오겠다고 청한 일이 훗날 “히라노가 도요토미 측에 서겠다고 이에야스에게 청했다”는 충신 무사의 미담으로 퍼졌다. 기록마다 어떻게 다른지는 아래 표와 같다.
| 시기 | 문헌 | 나가야스가 원한 것 | 결말 |
|---|---|---|---|
| 1614년 10월 | 혼다 마사즈미 편지 | 오사카에 있는 아들을 빼내 오기 | 동생을 대신 보내고 본인은 에도로. 본인도 수긍 |
| 1614년 12월 | 아사노 나가아키라 편지 | 코다이인·호소카와 가문을 통해 아들 구출 | 오사카로 가는 길이 막혀 실패 |
| 17세기 말 | 일화집 『부코잣키(武功雑記)』 등 | 타이코의 은혜 때문에 공격군에 끼기 싫어 병을 핑계로 불참. 아들이 농성하자 영지에서 군량을 넣어 줌. 아들을 못 데려오면 자신도 농성하겠다고 함 | 이에야스가 허락하지 않음 |
| 시기 미상 | 일화집 『오키나 모노가타리(翁物語)』 | 히데요리에게 의리를 다하고 무사답게 싸우다 죽겠다 | 이에야스가 “고금에 다시없는 무사”라고 칭찬하고 에도로 보냄 |
| 1740년 | 『부토쿠 헨넨슈세이(武徳編年集成)』 | 가족이 오사카에 있으니 히데요리에게 속하겠다 | 측근들이 설득에 실패하고, 막역한 벗 호소카와 타다토시가 찾아가 설득함 |
| 1812년 | 막부 계보 『간세이후』 | 언급 없음 | 히데타다의 명으로 슨푸에 갔다가 에도로 돌아가 성을 지킴 |
출발점이 된 1614년의 편지에서 나가야스가 원한 것은 아들을 데려오는 일이었다. 80여 년 뒤의 일화집에서 여기에 타이코의 은혜와 무사의 의리가 덧붙었다. 18세기 편찬물에서는 극적인 설득 장면이 더해졌다. 막부가 엮은 공식 계보 『간세이후』에는 반대로 아들을 빼내 오려 했던 사정이 실려 있지 않다. 동시대 편지로 확인되는 나가야스의 목적은 전쟁이 시작될 때 오사카에 있던 아들을 데려오는 일이었다. 이를 히데요리 측에 서겠다는 뜻으로 넓힐 근거는 이 편지에 없다.39
8. 만년과 죽음, 남은 가문
8-1. 처음 받은 영지행 휴가
오사카 전투가 끝난 1615년, 나가야스는 처음으로 영지에 다녀오라는 휴가를 받았다. 『간세이후』에는 이 문장 뒤에 “이후 대대로 같다”는 말이 붙어 있다. 영지를 받은 지 스무 해 만이었다. 히라노 가문 당주들이 에도와 영지를 오가는 관행은 여기서 시작되었다.40
이듬해 1616년 12월, 히데타다는 오다·도요토미 가문을 섬긴 노장들을 골라 자신의 이야기 상대인 오단반(御談伴)으로 삼았다. 나가야스도 그 명단에 들었다. 시즈가타케에서 창을 들었던 측근 무사가 이제 쇼군의 말벗이 되었다.41
8-2. 1628년 5월 7일
히라노 나가야스는 1628년 5월 7일 70세로 죽었다. 법명은 료무(了無)다. 에도 시바의 센가쿠지에 묻혔다. 『간세이후』에는 죽은 곳이 나와 있지 않다. 타와라모토초의 자료에는 그가 슨푸 성 아래 안자이(安西)에 받은 집에서 죽었다고 소개되어 있지만 근거는 밝혀져 있지 않다. 센가쿠지는 3대부터 히라노 가문 대대의 묘소가 되었다. 타와라모토의 혼세이지(本誓寺)에는 2대 나가카츠와 9대 당주의 영묘가 남아 있다.42
8-3. 끊긴 혈통, 남은 5,000석
히라노 가문의 2대 나가카츠는 1668년 66세로 죽었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1656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나(徳川家綱)의 명으로 히라노 나가마사(平野長政)가 양자로 들어왔다. 이에츠나의 외삼촌 마시야마 마사토시(増山正利)의 동생으로 입적해 있던 사람이다. 나가야스의 직계는 2대에서 끊겼지만 가문과 영지는 그대로 이어졌다.43
히라노 가문은 5,000석 하타모토이면서 다이묘처럼 영지에 진야를 두고 에도와 영지를 오가는 코타이요리아이(交代寄合)로 대우받았다. 에도성에 오르면 야나기노마(柳間, 외양 다이묘와 일부 하타모토가 대기하던 방)에서 기다리는 가문이었다. 1615년의 첫 영지행 휴가가 대대로 이어진 결과다. 언제 정식으로 코타이요리아이가 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가문은 10대 280년 가까이 이어졌고 그동안 영지를 옮기지도 깎이지도 않았다.44
1868년, 10대 나가히로(長裕)는 일찍 신정부에 귀순했다. 원래 영지 5,003석에 그동안 개간한 신전(新田) 4,998석을 더해 석고를 1만 1석으로 고쳐 매기는 청원을 올려 인정받았다. 그해 7월, 히라노 가문은 1만 석 다이묘가 되었다. 타와라모토번의 시작이다. 영지가 늘어난 것은 아니고 장부상 석고를 다시 매긴 것이다. 그래도 1583년 시즈가타케에서 3,000석을 받은 지 285년 만에 이 가문은 다이묘의 반열에 올랐다. 번은 1871년 폐번치현으로 3년 만에 사라졌다. 나가히로의 아들은 1884년 남작이 되었다.45
8-4. 히라노 가문은 남았다
칠본창 일곱 가문은 그 뒤 저마다 다른 길을 갔다.46
| 인물 | 시즈가타케 칸조 | 본인 최대 석고 | 가문의 이후 |
|---|---|---|---|
| 가토 기요마사 | 3,000석 | 히고 약 52만 석 | 아들 대 1632년 개역, 다이묘 가문으로는 소멸 |
| 후쿠시마 마사노리 | 5,000석 | 아키·빈고 49만 8,000석 | 본인 대 1619년 개역, 자손은 하타모토 |
| 가토 요시아키 | 3,000석 | 아이즈 40만 석 | 아들 대 1643년 영지 반납, 손자가 1만 석 다이묘로 존속 |
| 와키자카 야스하루 | 3,000석 | 이요 오즈 5만 3,500석 | 다이묘로 존속 |
| 카타기리 카츠모토 | 3,000석 | 약 4만 석 | 본가는 하타모토로 줄어듦, 동생 계통 코이즈미번 존속 |
| 가스야 타케노리 | 3,000석 | 1만 2,000석 | 1600년 서군에 가담해 개역 |
| 히라노 나가야스 | 3,000석 | 5,000석 | 5,000석 그대로 존속, 1868년 1만 석 다이묘 |
1595년 지행목록 사본에 적힌 토이치군의 일곱 마을 이름은 막부 말 히라노 가문의 영지 목록에도 모두 나온다. 타와라모토초는 2026년 가을, 합병 70주년 기획전을 열며 제목을 「히라노 가문은 남았다(平野家は残った)」로 붙였다. 칠본창 가운데 가장 작게 끝난 사람의 가문이 1595년에 받은 땅을 끝까지 그대로 지켰다.47
출처
1차·준1차 사료 (쪽 이미지 또는 활자 번각본으로 확인한 것)
- 히데요시 칸조(1583년 6월 5일, 「히라노 문서(平野文書)」), 히데요시 슈인조(1584년 4월 3일, 이토 나가자네 앞, 「오가와 에이이치 소장 문서(小川榮一氏所藏文書)」, 『비추 이토 가보(備中伊東家譜)』 이설), 『시바타 다이지키(柴田退治記)』, 『간에이 쇼카케이즈덴(寛永諸家系図伝)』, 『호칸(豊鑑)』, 『소후 모노가타리(祖父物語)』, 『세이쇼키(清正記)』, 『모리 요시마사 케이즈덴(森可政系圖傳)』, 『카시와자키 모노가타리(柏崎物語)』: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4책·6책·7책(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 도쿄대학 사료편찬소 쪽 이미지)
-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약칭 『간세이후(寛政譜)』) 권510 히라노 가문(國民圖書 1923년 활자본 제3집, 715–717쪽 쪽 이미지). 할주에 인용된 『조쿄 가키아게(貞享書上)』 포함
- 『가이센 쇼카케이후(改選諸家系譜)』 히라노 나가야스 항(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소장 사본, 쪽 이미지)
- 『게이초 닛켄로쿠(慶長日件録)』(후나바시 히데카타, 1939년 활자본):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 OCR 전문
- 아사노 요시나가 서장(1598년 정월 4일·7일): 『다이니혼코몬조(大日本古文書)』 이에와케 2 『아사노가 문서(浅野家文書)』(1906)
- 혼다 마사즈미 서장(1614년 10월 6일, 『혼코코쿠시 닛키(本光国師日記)』 수록), 아사노 나가아키라 서장(1614년 12월 4일), 『도다이키(当代記)』, 『츠치야 토모사다 시키(土屋知貞私記)』, 『에이닛키(永日記)』(『부코잣키(武功雑記)』와 같은 글), 『오키나 모노가타리(翁物語)』, 『부토쿠 헨넨슈세이(武徳編年集成)』: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2편 15책(쪽 이미지)
- 『도쿠가와짓키(徳川実紀)』 「다이토쿠인도노 고짓키(台徳院殿御実紀)」 및 부록(經濟雜誌社 1907년판)
- 『멘코슈로쿠(綿考輯録)』(호소카와 가문 기록, 1778):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
- 오제 호안(小瀬甫庵), 『다이코키(太閤記)』 권6: 『시세키슈란(史籍集覧)』 저본 전문
- 히데요시 슈인조(1595년 8월 17일, 카타기리 카츠모토 앞): 『시세키슈란(史籍集覧)』 수록 카타기리 가문 문서 사본(이 블로그의 카타기리 카츠모토 글 작성 때 확인)
- 야마가 소코(山鹿素行), 『부케지키(武家事紀)』(1673): 1918년 활자본
- 도요토미 시대 녹봉 장부(太閤秀吉公御時代分限帳) 사본(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소장): 쪽 이미지
- 『하가쿠레(葉隠)』 기키가키 제10(1937년 이와나미 활자본)
- 『쿠후조시(工夫双紙)』 권3, 『추코소쇼 벳폰(中古叢書別本)』(사본), 『오슈쿠잣키(鶯宿雑記)』: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쪽 이미지·OCR
- 『신쇼 다이코키(眞書太閤記)』·『에혼 다이코키(繪本太閤記)』 계열 역사소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전문 검색으로 해당 이야기의 존재만 확인
- 오치아이 요시이쿠, 「태평기영용전(太平記英勇伝)」 71 「히라노 곤페이 나가야스(平野権平長康)」(1867년경, 도쿄도립도서관 소장, 위키미디어 커먼즈), 우타가와 토요쿠니(1대) 칠본창 연작(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츠키오카 요시토시 「무라사키노 다이토쿠지 쇼코노즈(紫野大徳寺焼香之図)」(위키미디어 커먼즈)
현대 연구·사료집 (신뢰도 A–B)
- 土平博, 「야마토 타와라모토 진야마치의 지역 구조(大和国田原本陣屋町の地域構造)」, 『역사지리학(歴史地理学)』 155(1991)
- 타와라모토초사 편찬위원회(田原本町史編さん委員会), 『타와라모토초사 사료편(田原本町史 史料編)』 제1권(1988): 히라노 관계 문서 목록(서지·문서명)만 확인
- 마쓰다 다카유키(松田敬之), 『〈화족 작위〉 청원인명사전(〈華族爵位〉請願人名辞典)』(吉川弘文館, 2015): 일본어 위키백과 「히라노 가문(平野氏)」의 인용으로만 확인
- 야마모토 히로후미(山本博文)·소네 유지(曽根勇二)·호리 신(堀新) 편, 『도요토미 정권의 정체(豊臣政権の正体)』(柏書房, 2014): 일본어 위키백과 「가스야 타케노리(糟屋武則)」의 인용으로만 확인
- 『코료초사(広陵町史)』(2001): 일본어 위키백과 「쿄교지(教行寺, 広陵町)」의 인용으로만 확인
공식·표준 참고자료 (신뢰도 B)
- 타와라모토초 교육위원회, 「히라노 곤페이(나가야스) 앞 도요토미 히데요시 칸조(平野権平(長泰)宛豊臣秀吉感状)」 지정문화재 해설, 타와라모토초 「마을 개요(町の概要)」
- 『고호 타와라모토(広報たわらもと)』 2016년 9월호 특집 「칠본창의 오천 석 히라노 곤페이 나가야스(七本槍の五千石 平野権平長泰)」
- 『일본역사지명대계(日本歴史地名大系)』 「타와라모토초(田原本町)」·「타와라모토 마을(田原本村)」, 『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 「타와라모토(田原本)」, 『세계대백과사전(世界大百科事典)』 「히라노 나가야스(平野長泰)」·「후나바시 히데카타(舟橋秀賢)」·「코타이요리아이(交代寄合)」, 『일본인명대사전(日本人名大辞典)』 「히라노 나가야스(平野長泰)」·「히라노 나가히로(平野長裕)」(코토뱅크)
- 나라현 정보 사이트 「나랏코(奈良っこ)」 기획전 「히라노 가문은 남았다(平野家は残った)」 안내
- CODH 「막부 말 근세 마을(幕末期近世村)」 데이터 「코타이요리아이 히라노 가문(交代寄合平野家)」
전문 사이트·대중 매체 (신뢰도 C–E)
- 와타나베 다이몬(渡邊大門), 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 기고(2025년 11월 24일)
- PHP 『레키시카이도(歴史街道)』 웹 글(2017년 5월 7일)
- 마쓰나미 지로(松波治郎), 『하가쿠레 무사도(葉隠武士道)』(1942)
-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 「곤페이 오천 석(権平五千石)」, 『사무라이와 고와이(侍はこわい)』(고분샤 문고) 수록: 서지만 확인
- 일본어 위키백과 「히라노 나가야스(平野長泰)」·「가스야 타케노리(糟屋武則)」·「히라노 가문(平野氏)」·「쿄교지(教行寺, 広陵町)」 항목과 그 각주가 인용한 『관보(官報)』(1884): 출처 추적용으로만 사용
- 위키미디어 커먼즈 사진: 혼세이지 영묘·조쇼지 산문(KENPEI, CC BY-SA 3.0)
확인하지 못한 것
- 1595년 8월 17일 슈인조의 본문(활자 번각)과 그때 더해진 석고(2,000석인지 4,000석인지).
- 1584년 480석이 넘어간 이유와 타와라모토초 해설이 말하는 “노여움”의 내용·시기.
- 규슈 정벌·오다와라 정벌·조선 출병 때의 구체적 행적.
- 1614년 11월 4일 히라노가 쿄교지에 보낸 편지(『타와라모토초사 사료편(田原本町史 史料編)』 수록)의 내용.
- 오사카에 대신 보낸 동생이 누구였는지.
- 죽은 장소(슨푸 안자이설의 근거), 센가쿠지의 묘가 지금도 남아 있는지.
- 히라노 가문이 정식으로 코타이요리아이가 된 시기와 경위.
- 쿄교지가 타와라모토를 떠난 해(1635·1637·1647년설).
Footnotes
-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 권510 히라노 가문(1923년 활자본 715–716쪽). 할아버지 만큐(萬久)가 “오다 우다이진(노부나가) 때문에 몰락”해 떠돌다 츠시마로 돌아왔다는 내용, 형제 나가토키·나가카게·나가야스·나가시게(나가하루의 넷째 아들로 명기)·나가토모·부에몬의 순서가 실려 있다. 나가야스를 셋째 아들이라고 명기하지는 않았다. ↩ ↩2
-
같은 책 나가하루 항. “實は船橋三位枝賢が男、萬久が養子となる”의 할주에 『조쿄 가키아게(貞享書上)』의 “枝賢が父業賢が男”, 간세이 때 집안이 낸 계보의 “業賢が父侍從宣賢が男”를 병기했다. 키요하라 가문이 후나바시를 성으로 쓴 것은 히데카타 대(1601년경)부터라 “船橋三位枝賢”은 후대 호칭이다(코토뱅크 『세계대백과사전(世界大百科事典)』 「후나바시 히데카타(舟橋秀賢)」). 『일본인명대사전(日本人名大辞典)』은 나가야스의 “본성은 키요하라”라고 하고, 『간세이후(寛政譜)』는 히라노 가문을 다이라(平) 성 호조 계통으로 분류한다. ↩
-
『게이초 닛켄로쿠(慶長日件録)』(1939년 활자본) 게이초 9년(1604) 4월 “平野已雲齋嫡男五郞左衛門、加藤主計頭家中ニ居住之、今度被上畢、已雲齋宅ニテ出逢、舊時之事共令雜談” 등.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OCR 전문으로 확인했고 쪽 이미지는 대조하지 않았다. 일기에서 히데카타가 히라노 집안 사람을 숙부·사촌 같은 친족어로 부르는 대목은 찾지 못했다. ↩
-
『간에이 쇼카케이즈덴(寛永諸家系図伝)』 히라노 나가야스 항 “天正七年、秀吉にまみゆ”(『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4책 186쪽 수록). 출생지 츠시마도 같은 항목의 “生國尾張津島”에 따랐다. ↩
-
『시바타 다이지키(柴田退治記)』(1583). 야나가세 일번창 명단의 “平野權平長泰”와 “悉近習之輩也”. 『세계대백과사전(世界大百科事典)』도 1579년 출사로 적는다. ↩
-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6책 덴쇼 12년(1584) 4월 9일 조 수록 오제 호안 『다이코키(太閤記)』(“つねは秀吉の御馬廻たりしかども、孫七郎殿常々御目をかけられし故、見廻として樂田より來たり”, 적 하나를 벰), 『모리 요시마사 케이즈덴(森可政系圖傳)』(“先手に加り高名あり”), 『카시와자키 모노가타리(柏崎物語)』(“然れとも高名はなし”). 모두 후대 편찬물이다. ↩
-
히데요시 칸조, 1583년 6월 5일 “平野權平殿” 앞.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4책 596쪽 「히라노 문서(平野文書)」(쪽 이미지 판독). 같은 쪽에 가토 요시아키 앞 칸조가 같은 문면으로 실려 있다. 원본 소장은 타와라모토초 교육위원회 지정문화재 해설. 3,000석의 소재지는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 “近江河内兩國のうちにをいて采地三千石”. ↩ ↩2
-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 나가시게 항 “天正十一年志津嶽の合戰に、兄長泰につゞいて鎗を合せ……攝津國武庫、川邊兩郡のうちにをいて、采地二百石”. ↩
-
오제 호안 『다이코키(太閤記)』 권6(1625년경 성립), 다케나카 시게카도 『호칸(豊鑑)』(1631)의 “加藤左馬助、同肥後守、糟屋内膳、平野遠江、脇坂中書、石川兵助、片桐市正七人、先に進て敵をなびかし名をあぐる”(『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4책 137쪽). 1583년 장면에서 “토토미”로 부른 것은 1598년 서임 이후 호칭을 거슬러 쓴 것이다. ↩
-
“오하라 신시치”를 베었다는 이야기는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전문 검색에서 『신쇼 다이코키(眞書太閤記)』·『에혼 다이코키(繪本太閤記)』 계열에서만 확인된다. 오치아이 요시이쿠의 「태평기영용전(太平記英勇伝)」(1867년경) 설명문에도 사쿠마 쪽 무사와 맞붙어 오하라 신시치를 찔렀다는 줄거리가 있다. ↩
-
『소후 모노가타리(祖父物語)』 “其節マテ領知百五十石宛”(일곱 명 모두 150석), 『세이쇼키(清正記)』 “平野權平五百石”.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4책 수록. ↩
-
히데요시 슈인조, 1584년 4월 3일 “伊藤甚太郞(長實)” 앞, 「오가와 에이이치 소장 문서(小川榮一氏所藏文書)」.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6책 440–441쪽(쪽 이미지 판독). 『비추 이토 가보(備中伊東家譜)』에는 460석. ↩
-
타와라모토초 교육위원회 지정문화재 해설 “権平は、その後秀吉の勘気をこうむり、知行高も千石に減らされていましたが”. ↩
-
같은 해설. 1595년 8월 17일 오리가미 슈인조(46.3×66.5cm)와 지행목록 사본의 토이치군 佐味·竹田·保津·田原本·薬王寺·秦楽寺·飯高 일곱 마을 합계 5,000석. 『타와라모토초사 사료편(田原本町史 史料編)』 제1권 312쪽에 문록 4년 8월 17일 슈인조와 9월 21일 지행목록 사본이 실려 있다(서지로 확인). ↩
-
『가이센 쇼카케이후(改選諸家系譜)』 “文禄四年乙未思志津嶽之旧功加恩二千石於和州十市郡賜五千石”(쪽 이미지, “恩”은 흘림 판독).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 “文祿四年ふたゝび志津嶽の舊功を賞し感狀を賜ひ、恩賞の地をくはへられ、大和國十市郡のうちにをいて五千石を知行し、田原本に住す”. 타와라모토초 해설은 “四千石を加増”. ↩
-
카타기리는 1595년 8월 17일 슈인조(『시세키슈란(史籍集覧)』 수록 카타기리 가문 문서 사본)로 이 블로그의 카타기리 카츠모토 글에서 확인했다. 가스야의 같은 날 6,000석 가증은 일본어 위키백과 「가스야 타케노리(糟屋武則)」가 『도요토미 정권의 정체(豊臣政権の正体)』(2014)를 인용한 것으로, 원서는 확인하지 못했다. ↩
-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 “其のち太閤出陣每にしたがひしば〳〵戰功あり”, 『간에이 쇼카케이즈덴(寛永諸家系図伝)』 “其後秀吉出陣の度ことに供奉して、戰功もいともおほし”. 가스야가 검지 부교와 직할령 다이칸을 맡았다는 해설은 와타나베 다이몬의 기고(2025)에 있다. ↩
-
아사노 요시나가 서장, 게이초 3년(1598) 정월 4일(수신 “已上卅七人一通”)·정월 7일(谷出羽·平野權平·大岡勘平·平野新八 앞). 『아사노가 문서(浅野家文書)』(1906) 활자본. ↩
-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 “慶長三年三月十五日豐臣氏をあたへられ、從五位下遠江守に叙任す”. 『가이센 쇼카케이후(改選諸家系譜)』도 같은 날짜. 일본어 위키백과는 “1597년”으로 적었다. ↩
-
오제 호안 『다이코키(太閤記)』 권6 “糟屋助右衛門尉後号内膳正、領三万石、平野権平後号遠江守、於和州芳野、領五千石、其心猛くして、秀吉卿に背く事度々有しなり、因之領知少しとかや”. 야마가 소코 『부케지키(武家事紀)』 가스야 항 “平野長泰・片桐且元・糟屋三人ハ沈淪メワツカ五千石三千石ヲ領ス”. 녹봉 장부는 “気随の人にて立身無之”. 마쓰나미 지로 『하가쿠레 무사도』(1942) “平野權平は大名にもなれず、家康の旗本であつた”. PHP 『레키시카이도(歴史街道)』 웹 글(2017)의 “ただ一人、大名になれなかった”. ↩
-
『하가쿠레(葉隠)』 기키가키 제10 “平野權平殿は、賤ケ嶽七本槍の內なり。後に家康公御旗本に召成され候。或時細川殿へ振廻に參り候……御手前の家中に成りては、爰から小便する事がならぬ”. 기요마사 판본은 카지 시잔(加治紫山) 편 『쿠후조시(工夫双紙)』 권3, 『추코소쇼 벳폰(中古叢書別本)』, 『오슈쿠잣키(鶯宿雑記)』 등 에도 후기 잡록에 실려 있다. ↩
-
시바 료타로의 단편 「곤페이 오천 석(権平五千石)」은 단편집 『사무라이와 고와이(侍はこわい)』(고분샤 문고)에 수록되어 있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서지 검색으로만 확인했다. ↩
-
『추코소쇼 벳폰(中古叢書別本)』 9·10(사본) “小出宗三郎予に物語に、左馬助殿江権平殿振廻に被参候、竹馬之友故互ニ火燵に両足を入……猿も五千石、権平も五〔千〕石と被申候由”. 두 번째 숫자는 흘림 글씨라 판독이 불확실하다. 『오슈쿠잣키(鶯宿雑記)』에도 같은 이야기가 있다. ↩
-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 나가야스 항 “五年關原陣の時東照宮にしたがひたてまつり、其後江戶にいたりて台德院殿に勤仕す”, 나가시게 항 “正則が手にありて戰功あり……丹波國桑田郡にをいて采地三百石を加賜”. 일본어 위키백과의 “히데타다 나카센도 군 소속” 서술에는 각주가 없다. ↩
-
『게이초 닛켄로쿠(慶長日件録)』 게이초 8년(1603) 정월 3일 “平野遠江守來、杉原二束鵝目百疋給之……其後伏見へ被歸了”, 8월 14일 “平遠州許へ行、風呂興行、卽一宿”, 게이초 10년(1605) 정월 29일–2월 2일 “平遠江守許へ近衞殿御成、連哥令興行”, 게이초 11년(1606) 2월 24일 “大坂へ下向、先伏見平遠州許へ行、舟令借用”. OCR 전문으로 확인했다. ↩
-
『고호 타와라모토(広報たわらもと)』 2016년 9월호 특집. ↩
-
『도쿠가와짓키(徳川実紀)』 「다이토쿠인도노 고짓키(台徳院殿御実紀)」 게이초 16년(1611) 3월 다이리 조영 조역 명단, 게이초 18년(1613) 6월 21일 조 “平野遠江守長泰は、去年九月より京二條の城搆造の助役して……兩御所より御書を給ふ”.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 “十七年より二條城の普請をつとむ”, 1613년 3월 25일·6월 7일 히데타다, 6월 20일 이에야스의 편지. ↩
-
『일본역사지명대계(日本歴史地名大系)』 「타와라모토초(田原本町)」의 「쿄교지 문서(教行寺文書)」 요약 “慶長六年当時佐味田村にあった教行寺の住持顕誓は、田原本村のうちに寺内町を立てる計画を、本願寺に密接な関係をもつ領主平野長泰に願い、翌年町立が許可された”(코토뱅크). 문서 원문은 확인하지 못했다. 일본어 위키백과 「쿄교지(教行寺, 広陵町)」는 『타와라모토초사(田原本町史)』를 인용해 1600년 히라노와 켄세이의 회담을 소개한다. ↩
-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 나가야스 항 “女子 西本願寺の臣下間刑部仲虎が妻”. ↩
-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 “凱旋ののちはじめて采地にゆくのいとまを賜ふ”. 『고호 타와라모토(広報たわらもと)』 2016년 9월호 “長泰は田原本には住まず、京都伏見に屋敷を構え、教行寺に寺内町を築かせて田原本の地を統治しました”. 土平博(1991)도 “近世初期には平野氏が寺に統治を任せており”라고 한다. ↩
-
土平博(1991) 결론 “陣屋設置以前,教行寺を中心とする寺内町が形成されつつあった。寺内町は陣屋町形成の基盤となり,町屋を展開させる要素となった”. ↩
-
土平博(1991), 『고호 타와라모토(広報たわらもと)』 2016년 9월호. 쿄교지가 떠난 해는 1635년(土平), 1637년(『코료초사(広陵町史)』를 인용한 일본어 위키백과), 1647년(여러 해설)으로 갈린다. 현재의 하시오로 옮긴 것은 1653년이라는 설명이 많다. ↩
-
『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 「타와라모토(田原本)」 “寛永年間以後は平野氏5000石の陣屋町となり、大和川に注ぐ寺川の水運を利用する市場町としても栄えた”. “야마토의 오사카”는 타와라모토초 「마을 개요(町の概要)」와 『고호 타와라모토(広報たわらもと)』가 진야마치 시기의 번영으로 소개한다. ↩
-
『혼코코쿠시 닛키(本光国師日記)』 수록 혼다 마사즈미 서장, 게이초 19년(1614) 10월 6일, 혼다 마사노부 앞.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2편 15책 190쪽(쪽 이미지 판독). “遠州へ” 다음 두 글자는 활자가 흐려 판독이 불확실하다.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편자도 이 조의 표제를 “히라노 나가야스가 아들을 오사카에서 빼내려 서쪽으로 올라가려 하자, 이에야스가 나가야스를 에도로 돌아가게 했다”로 달았다. 나가카츠의 생년은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 “元和元年台德院殿に拜謁す。時に十三歳”에서 거꾸로 셈했다. ↩
-
아사노 나가아키라 서장, (게이초 19년) 12월 4일, “平遠江守” 앞.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2편 15책 202쪽(쪽 이미지 판독,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는 참고 자료로 분류). “一御子息之儀、我等國へ罷着候と、そのまゝ、高臺院樣へ文を進上申候へハ、はや大坂へ之通路無之候間、被仰事不成候由御返事參候……休無も……大坂へ兩三度迄人を御遣候へ共、不成候由御申……細川內記殿へ、以書狀申候へハ、本佐州、本上州へ被仰候て可有御覽との儀候”. ↩
-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 나가카츠 항, 나가카게 항 “豐臣秀賴に仕へ、大坂落城の時戰死す”. 나가카츠가 화의 뒤 성을 나왔다는 것은 『부토쿠 헨넨슈세이(武徳編年集成)』(1740) “長泰カ子權平長勝ハ、當冬大坂ニ籠城ス、御和融濟デ後退去セシム”. 『간세이후(寛政譜)』에는 히라노 집안의 양녀가 히데요리 가신 마노 요지베에(眞野與次兵衛)의 아내였다는 내용도 있다. ↩
-
『도쿠가와짓키(徳川実紀)』 게이초 19년 10월 23일 조 “福島左衛門大夫正則。加藤左馬助嘉明。黑田甲斐守長政。平野遠江守長泰。谷出羽守衛友は江戶にとゞめらる。(世に傳ふる所。……みな豐臣家功臣なるがゆへ。わざと江戶へとゞめられしといふ。)”, 겐나 원년(1615) 4월 10일 조 에도 루스 명단.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 “元和元年御出陣のときもまた江戶城の御留守をつとめ”. ↩
-
『도다이키(当代記)』 “福島左衞門大夫、黒田筑前守、加藤左馬助、是三人被殘江戶”. 히라노를 넣은 것은 『츠치야 토모사다 시키(土屋知貞私記)』 “福島左衞門大夫 黒田筑前守 加藤左馬助 平野遠江守 右四人冬御陣江戶ニ被召置”이다. 모두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2편 15책 10월 8일 조 수록. ↩
-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2편 15책 10월 6일 조에 수록된 『에이닛키(永日記)』(편자 주: 『부코잣키(武功雑記)』와 같은 글), 『오키나 모노가타리(翁物語)』 전집 6, 『부토쿠 헨넨슈세이(武徳編年集成)』 권66.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편자는 앞의 둘을 “나가야스가 종군하지 않은 데 대한 일설”, “나가야스가 오사카에 들어가기를 이에야스에게 청했다는 설”로 분류했다. 호소카와 가문의 『멘코슈로쿠(綿考輯録)』(1778)는 『부토쿠 헨넨슈세이(武徳編年集成)』를 그대로 옮겼다. ↩
-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 “凱旋ののちはじめて采地にゆくのいとまを賜ふ。のち代々おなじ”. ↩
-
『도쿠가와짓키(徳川実紀)』 「다이토쿠인도노 고짓키(台徳院殿御実紀)」 부록 권3, 겐나 2년(1616) 12월 21일 조의 오단반 명단. 슨푸 안자이에 집을 받은 노장들(안자이슈)과 에도의 노숙한 사람들을 섞어 골랐다고 하며, 히라노가 어느 쪽이었는지는 문면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
-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 “寛永五年五月七日死す。年七十。法名了無。芝の泉岳寺に葬る”, 3대 나가마사 항 “葬地長泰におなじ。のち代々葬地とす”, 나가카츠 항 “十市郡田原本の本誓寺に葬る”. 안자이에서 죽었다는 설은 『고호 타와라모토(広報たわらもと)』 2016년 9월호. 혼세이지 영묘의 주인은 위키미디어 커먼즈 사진 설명과 같은 특집에 따랐다. ↩
-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 나가카츠 항 “寛文八年十二月九日死す。年六十六”, 나가마사 항 “實は七澤氏が長男、母は增山氏が女。はじめ增山彈正忠正利が弟となり、明暦二年十二月八日嚴有院殿の仰によりて長勝が養子となる”. 마시야마 마사토시는 이에츠나의 생모 오라쿠노카타(お楽の方)의 오빠다. ↩
-
『세계대백과사전(世界大百科事典)』 「코타이요리아이(交代寄合)」(코토뱅크)는 제도의 기원 자체가 분명하지 않다고 한다.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 나가즈미(長純) 항 “代々柳間に候す”. 『고호 타와라모토(広報たわらもと)』는 “明治まで平野家十代”라 한다. ↩
-
土平博(1991) “明治元(1868)年に平野長裕が旧領5000石を石直しして,計1万石として藩を成立させている”, 『일본인명대사전(日本人名大辞典)』 「히라노 나가히로(平野長裕)」 “旗本から,慶応4年大和田原本藩主となった。1万石”. 원래 석고 5,003석여와 신전 4,998석여, 7월 14일 제후 승격은 마쓰다 다카유키(2015)를 인용한 일본어 위키백과 「히라노 가문(平野氏)」에 따랐다. 1884년 남작이 된 것은 나가히로가 아니라 그 아들이다(일본어 위키백과, 『관보(官報)』 인용). ↩
-
각 가문의 이후는 이 블로그의 칠본창 시리즈 각 글 참조. 표의 석고는 같은 시리즈 각 글과 코토뱅크 『일본인명대사전(日本人名大辞典)』·『세계대백과사전(世界大百科事典)』 각 항목. 가스야의 1600년 이후 행방은 사전마다 다르다. ↩
-
1595년 일곱 마을은 14번 각주의 지행목록 사본, 막부 말 영지 열한 마을(飯高·田原本·薬王寺·保津·十六面·西竹田·竹田南方·佐味·満田·秦楽寺·九品寺)은 CODH 「막부 말 근세 마을(幕末期近世村)」 데이터 「코타이요리아이 히라노 가문(交代寄合平野家)」. 기획전은 나랏코 안내(2026년 10월 17일–12월 13일, 카라코·카기 고고학 뮤지엄). ↩
댓글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