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시마의 언덕에서 내려다본 짙푸른 도바만. 왼쪽에 숲이 덮인 반도와 해안 마을, 가운데와 오른쪽에 작은 섬들과 송전탑이 있고, 바다 위로 배 한 척이 흰 물살을 끌며 지나간다(Alpsdake 촬영, 2016, CC BY-SA 4.0)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1542–1600) — 노부나가의 수군 대장, 아들과 적이 된 마지막 가을

Q: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는 누구인가?

A: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휘하에서 수군을 담당한 무장이다. 시마(志摩, 지금의 미에현 동쪽 끝 반도)의 작은 해상 세력 집안에서 차남으로 태어났고, 형과 조카가 차례로 당주를 지내는 동안 이웃 토호들과 싸웠고, 조카가 죽은 뒤 가문을 이어 노부나가 측에 섰다. 노부나가의 명에 의해 큰 배 여섯 척을 이세에서 건조해 1578년 오사카만으로 끌고 가 노부나가와 10년 동안 싸운 정토진종의 본산 혼간지(本願寺)로 들어가는 바닷길을 막았고, 그해 11월 2차 키즈가와구치(木津川口) 해전에서 혼간지를 돕던 주고쿠 지방의 다이묘 모리(毛利) 가문의 함대를 물리쳤다. 히데요시 정권에서는 기이·규슈·오다와라 정벌과 임진왜란에 수군으로 참전했고, 시마 도바(鳥羽)에 바다에 면한 성을 쌓았다. 1597년 아들 모리타카(守隆)에게 가문을 물려준 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때 이시다 미츠나리 쪽 서군에 서서 이에야스의 동군에 속한 아들과 싸웠고, 서군이 진 뒤 도바만의 섬 도시지마(答志島)에서 할복했다.

한눈에 보는 구키 요시타카

항목내용
이름통칭 우마노조(右馬允), 뒤에 오스미노카미(大隅守). 둘 다 조정 관직명에서 딴 호칭. 위계는 종5위하
생몰1542년–1600년 10월 12일(음력). 생년은 『간세이후(寛政譜)』의 “덴분 11년 출생”과 『한칸후(藩翰譜)』의 향년 59세가 일치
집안시마 나키리(波切)·다시로(田城)를 근거로 한 구키 가문. 사다타카(定隆)의 차남
첫 기록『신초코키(信長公記)』 1574년 7월 나가시마 공격에 아타케부네(安宅船, 망루를 올린 대형 군선)를 끌고 온 “구키 우마노조”
대표 전투2차 키즈가와구치 해전(1578), 가니에성 공방(1584), 기이(1585)·규슈(1587)·오다와라(1590) 정벌, 임진왜란 안골포해전(1592)
영지이세·시마의 3만 5천 석(石, 쌀 생산량으로 매긴 영지 단위. 『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도바시 교육위원회 자료)
본거지 성도바성
은거1597년. 모리타카가 3만 석을 잇고 요시타카는 은거료 5천 석
최후1600년 세키가하라 때 서군. 동군 아들 모리타카와 싸운 뒤 도시지마 와구(和具)에서 자결, 59세
사후모리타카가 2만 석을 더 받고 아버지의 은거료 5천 석을 합쳐 5만 5천 석. 1633년 손자 대에 가문이 셋츠 산다(三田)와 단바 아야베(綾部)로 나뉘어 옮겨 감
검은 예복을 입고 관을 쓴 중년 무장이 다다미 위에 앉아 오른손에 홀을 쥐고, 허리에 금빛 장식 칼을 차고 있다. 배경은 주황색이다
구키 요시타카 초상화. 1672년 손자 구키 타카스에가 1607년 원본을 베껴 그리게 한 사본(도바 조안지 소장, 퍼블릭 도메인).

구키 요시타카는 이 블로그의 여러 글에 이미 나왔다. 키즈가와구치 해전 글에서는 노부나가의 큰 배를 이끌고 오사카만에 들어왔고, 다키가와 카즈마스와 코마키·나가쿠테 전투 글에서는 카즈마스와 함께 가니에에 상륙했다가 배를 타고 물러났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가토 요시아키 글에서는 임진왜란에서 두 사람과 함께 조선 수군과 바다에서 싸웠다. 이번 글에서는 요시타카의 생애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룬다.

요시타카에게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몇 가지 있다. 노부나가를 위해 “철갑선”을 만들었다는 이야기, 임진왜란 때 일본 수군의 “총대장”이었다는 이야기, 세키가하라 때는 가문을 살리려고 아들과 일부러 각기 다른 편으로 참전했다는 이야기다. 이 글에서는 이 이야기들의 출처를 확인하고 요시타카가 실제로 한 일을 정리했다. 기준으로 삼은 사료는 노부나가의 측근 오타 규이치(太田牛一)가 쓴 『신초코키』, 히데요시가 내린 슈인조(朱印状, 붉은 도장을 찍은 명령서), 이순신의 장계(狀啓, 임금에게 올린 보고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서장은 『시료소란(史料綜覧)』의 강문(綱文, 사료편찬소가 쓴 사건 요약문)과 현대어역으로 확인했고, 막부가 편찬한 계보 『간세이후』와 1702년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가 쓴 다이묘 가문사 『한칸후』도 함께 대조했다. 『한칸후』에는 구키 가문 항목이 따로 있다. 본문의 『한칸후』 인용 문구를 누르면 한칸후 원문(일본어)의 해당 부분이 새 탭에서 열린다.

1. 시마의 구키 가문

1-1. 구마노에서 시마로

구키 가문의 유래를 언급하는 가장 이른 기록은 도쿠가와 막부가 편찬한 계보다. 1812년의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줄여서 『간세이후』)에 인용된 1643년의 『간에이 쇼카케이즈덴(寛永諸家系図伝)』은 구키 가문이 기이 남쪽 구마노(熊野)의 장원을 관리하던 여덟 토호 집안 “하치쇼지(八庄司)” 가운데 하나에서 나왔다고 하고, 『간세이후』는 대대로 기이 무로군(牟婁郡)의 구키우라(九鬼浦, 지금의 미에현 오와세시 구키초)에 살아 구키를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아라이 하쿠세키도 같은 설을 옮기면서 하치쇼지 여덟 집안의 이름을 늘어놓은 뒤 “구키의 선조가 그중 어느 쇼지인지는 모른다고 한다”라고 덧붙였다. 『간세이후』에도 구키 가문이 직접 제출한 새 계보에는 선조의 출신이 자세히 나와 있지 않다고 되어 있다.1

『한칸후』와 『간세이후』에 따르면 구키 가문은 요시타카로부터 몇 세대 전에 바다를 건너 시마로 들어왔다. 선조 타카요시(隆良)가 시마 남쪽 끝 나키리에 자리 잡고 이웃한 일곱 해안 마을의 토호들, 이른바 “칠도(七島)의 무리”와 싸워 나키리·아제나(畔名)·다테가미(立神) 일대를 차지했고, 손자 대에 도시군(答志郡)까지 영지를 넓혔다. 요시타카의 할아버지 야스타카(泰隆)는 가모고(加茂郷)에 다시로성(田城城)을 쌓아 본거지로 삼았고, 이세 남부를 다스리던 기타바타케(北畠) 가문 편에서 싸워 후타미(二見) 일대의 땅을 받았다.2 다만 이 이야기는 모두 17세기 이후 기록에 나오는 것이고, 시마의 토호들을 “칠도”라는 이름으로 묶은 동시대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1-2. 형과 조카

요시타카는 1542년 시마에서 사다타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3 집안을 이은 사람은 형 키요타카(浄隆)였다. 할아버지 대에는 기타바타케 편에서 싸웠지만, 키요타카 대에는 칠도의 무리가 기타바타케 가문에게서 원병을 얻어 다시로성을 공격했고, 키요타카는 성을 지켜 냈지만 공방이 이어지던 중 성 안에서 죽었다. 『한칸후』에는 “싸움 중에 죽었다”고만 나와 있고, 『간세이후』에는 병에 걸려 성 안에서 죽었다고 나와 있다.4

키요타카의 아들 스미타카(澄隆)는 숙부 요시타카와 함께 다시로성에서 버텼으나 결국 성을 잃고 아사마다케(朝熊岳)로 달아났다. 두 사람은 그 뒤 여러 번 싸워 다시로성을 되찾았다. 조카 스미타카가 죽은 뒤엔 요시타카가 가문을 이었는데, 스미타카가 언제 죽었는지는 기록마다 다르다. 『한칸후』의 흐름대로라면 1569년 이전이고, 『간세이후』에는 덴쇼 12년(1584) 11월 23일로 나와 있다. 1911년에 나온 향토지 『도바시(鳥羽誌)』에는 같은 날짜에 연도만 덴쇼 2년(1574)으로 되어 있다. 『간세이후』는 같은 항목에서 스미타카가 죽은 뒤 요시타카가 가문을 잇고 노부나가를 섬겼다고 하므로, 1584년이라는 연도는 그 흐름과 맞지 않는다.5

『도바시』에는 여기에 더해 요시타카가 위세가 커진 조카를 시기해 사람을 보내 죽였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고, 지금의 관광 해설문에도 이 암살설이 실려 있다. 18세기에 쓰인 『구키 시마 군키(九鬼志摩軍記)』에도 요시타카가 혈육을 해친 업보로 집안에 재앙이 이어졌다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반면 『한칸후』와 막부 계보 『간세이후』에는 요시타카가 조카를 죽였다는 이야기가 없으며 동시대 기록 또한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구키 가문이 스미타카의 혼령을 달래려고 다시로성 터에 사당을 세우고 대대로 참배했다는 것은 사실로 보이며, 지금의 미에현 도바시 이와쿠라초의 구키 이와쿠라 신사(九鬼岩倉神社)가 그 자리다.6

1-3. 노부나가 측에 서다

요시타카가 노부나가 쪽에 선 것은 1569년 무렵으로 보인다. 아래 세 기록 가운데 둘이 1569년 오카와치성 공격을 그 계기로 든다. 그해 가을 노부나가는 기타바타케 토모노리(北畠具教)가 버티던 이세의 오카와치성(大河内城)을 공격했고, 토모노리는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 노부카츠(信雄)를 양자로 들이는 조건으로 화친했다. 요시타카가 어떤 계기로 노부나가에게 가게 됐는지는 기록마다 다르다.

출전성립노부나가에게 간 경위
『한칸후』17021569년 오카와치성 공격 때 요시타카 등이 “코쿠시(国司)를 배반하고 오다 님 편에 섰다”(코쿠시는 이세를 다스리던 기타바타케 가문)
『시요랴쿠시(志陽略誌)』1713시마 토호들의 연합 공격에 나키리 요새를 잃고 이세 아노츠(安濃津)에 숨어 지내다 노부나가의 본거지 오와리로 가서 노부나가의 중신 다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를 통해 노부나가를 섬겼다. 1569년 오카와치 공격에 수군으로 참가
『간세이후』1812조카 스미타카가 죽어 가문을 이은 뒤 노부나가가 교토에 올라왔을 때 찾아가 휘하에 들었다(연도는 나와 있지 않다)

세 책 모두 사건으로부터 130년 넘게 지난 시점에 나온 기록이다. 카즈마스를 통해 노부나가를 섬기게 됐다는 이야기는 지금까지 확인된 것 가운데 『시요랴쿠시』가 가장 이르다. 또한 당대 측근이 쓴 『신초코키』의 1569년 오카와치성 공격에는 카즈마스의 이름은 있어도 요시타카의 이름이나 바다 쪽 작전은 나오지 않는다.7 『신초코키』에 요시타카가 처음 나오는 것은 그로부터 5년 뒤인 1574년이다.

2. 노부나가의 배

2-1. 나가시마의 아타케부네

1574년 7월 노부나가는 이세만 안쪽 나가시마(長島)의 잇코잇키(一向一揆, 정토진종 문도들의 무장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대군을 동원했다. 『신초코키』에는 15일에 “구키 우마노조가 아타케부네를” 끌고 왔고, 다키가와 사콘(카즈마스)·이토 산조·미즈노 겐모츠도 아타케부네를, 다른 이들은 방패를 두른 배를 갖추었으며, 오와리와 이세의 포구마다 배를 모아 나가시마를 바다에서 에워쌌다고 나와 있다.8 요시타카는 여기서 여러 수군 지휘관 가운데 한 명으로 이름만 언급될 뿐 전공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없다. 『간세이후』에는 그가 아타케부네 10여 척을 이끌고 노부카츠 휘하에서 오시마(大嶋)의 요새를 깨뜨려 노부나가의 칭찬을 받았다고 나와 있지만, 이 이야기는 『신초코키』와 『한칸후』에는 없다.

2년 뒤인 1576년 7월, 노부나가와 싸우던 오사카의 혼간지에 병량을 공급하기 위해 주고쿠 지방의 대다이묘 모리 가문 쪽 수군 7–800척이 오사카만 키즈가와 어귀로 들어왔다. 이를 막기 위해 오다 쪽의 수군 300여 척이 출격했으나 불붙인 질그릇 폭탄인 호로쿠비야(焙烙火矢)에 타격을 입고 대패했다. 이것이 1차 키즈가와구치 해전이다. 『신초코키』에 적힌 오다 쪽 출전자 명단에는 마나베 시메노효에(真鍋七五三兵衛)·누마노 덴나이(沼野伝内) 등 셋츠·이즈미의 수군 지휘관 여덟 명이 있을 뿐 요시타카의 이름은 없다.9

2-2. 여섯 척의 대선

1차 해전에서 진 뒤 노부나가는 새로운 전함을 건조하게 했다. 『신초코키』에는 이에 대해 짧게 언급되어 있다.

勢州之九鬼右馬允に被仰付、大船六艘作立、並瀧川左近大船一艘、是ハ白舟に拵

이세의 구키 우마노조에게 명해 큰 배 여섯 척을 짓게 하고, 아울러 다키가와 사콘에게 큰 배 한 척을 짓게 했는데, 이것은 흰 배로 꾸몄다.10

일곱 척 가운데 여섯 척이 요시타카의 몫이었다. 언제 명령했는지는 나와 있지 않아서 1576년 7월 패전부터 1578년 6월 출항 사이의 언젠가로 추측할 뿐이다. 배를 건조한 곳은 『신초코키』와 『다몬인닛키(多聞院日記)』 모두 “이세”라고만 할 뿐 세부 지명은 언급하지 않는다. 이세의 오미나토(大湊)에서 지었다는 이야기나 요시타카가 배를 고안했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되는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다. 『신초코키』에서 확인되는 것은 노부나가가 명했고 요시타카가 만들었다는 것뿐이다.

1578년 6월 26일 일곱 척은 구마노 바다로 나가 기이 반도를 돌아 오사카로 향했다. 기이 북서쪽 단노와(淡輪) 앞바다에서 혼간지 편에 선 기이 사이카(雑賀)의 무리와 단노와 포구의 작은 배들이 셀 수 없이 몰려와 사방에서 활과 철포를 쏘았다. 『신초코키』에 따르면 요시타카는 큰 배 일곱 척 곁에 작은 배들을 딸리고 배를 크고 위압적으로 보이게 꾸민 뒤, 적선이 바짝 다가올 때까지 상대하는 척만 하다가 대철포(大鉄炮)를 한꺼번에 쏘아 여러 척을 부수었다. 그 뒤로는 적이 가까이 오지 못했고, 일곱 척은 7월 17일 무사히 오사카 바로 남쪽의 항구 도시 사카이(堺)에 닿았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고 한다.11

이세만에서 출발해 시마 앞을 지나 구마노 바다로 내려가 기이 반도 남단을 돌고, 기이 서해안을 따라 올라가 단노와 앞바다의 교전 지점을 거쳐 사카이에 이르는 항로를 점선으로 그린 지도. 사카이 북쪽에 오사카 혼간지가 표시되어 있다
1578년 6월 26일 이세를 떠나 7월 17일 사카이에 도착한 대선 일곱 척의 항로(개략, 령국 경계는 에도 말기 기준). 일본 인문학오픈데이터공동이용센터(CODH)의 옛 령국·군 경계 데이터를 가공, CC BY-NC 4.0

2-3. 사카이에서 막은 바닷길

배가 사카이에 들어온 다음 날인 7월 18일, 요시타카는 오사카 앞바다로 나가 요소마다 배를 세워 두고 바닷길을 막았다. 이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세 사람의 기록이 일치한다. 『신초코키』에는 “바닷길을 막았다”고, 나라(奈良) 고후쿠지(興福寺)의 승려 에이슌(英俊)의 일기 『다몬인닛키』에는 “오사카(혼간지)로 다가가 길을 막으려는 용도”라고 나와 있다. 사카이에서 직접 배를 본 예수회 선교사 오르간티노(Organtino)는 이렇게 썼다.

노부나가가 이를 짓게 한 것은 4년째 싸우고 있는 오사카의 하구에 두어 원병이나 식량을 실은 배가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 배에는 대포 3문이 실려 있었다.12

요시타카의 배는 해전보다 봉쇄를 위해 온 것이었다. 노부나가는 9월 27일 이 배를 보려고 교토를 떠났고, 30일 새벽 사카이에 도착했다. 요시타카는 큰 배에 깃발을 세우고 뱃전에 천 휘장을 둘러 꾸민 뒤 노부나가를 맞았다. 『신초코키』에는 노부나가가 요시타카의 큰 배에 “혼자만” 올라 둘러본 뒤 사카이의 거상이자 다인(茶人) 이마이 소큐(今井宗久)의 집에 들렀고, 요시타카를 불러 황금 20매, 옷 10벌, 기러기 고기 두 상자를 내리고, 1천 명을 먹일 만큼의 녹미(扶持)를 주라고 명했다고 나와 있다. 다키가와의 흰 배에 탄 세 사람에게도 황금 6매와 옷이 내려졌다.13 이 포상은 승리한 2차 해전보다 한 달 남짓 앞선다. 노부나가가 내린 상은 해전 승리가 아니라 배를 만들고 끌고 와서 바닷길을 막는 작전에 성공한 데 대한 상으로 보인다.

요시타카는 그 뒤에도 사카이에 머물렀다. 해를 넘긴 1579년 정월 5일, 그는 사카이에서 노부나가가 거성을 둔 아즈치로 올라가 노부나가에게 새해 인사를 했다. 노부나가는 “지금 틈이 있을 때 영지에 가서 가족을 보고 곧 다시 올라오라”며 말미를 주었고, 요시타카는 기뻐하며 이세로 내려갔다.14

3. 키즈가와구치와 철갑선

3-1. 2차 키즈가와구치 해전

1578년 11월 6일, 모리 측의 배 600여 척이 다시 혼간지로 가는 길목인 키즈 앞바다로 나왔다. 요시타카가 응전하러 나가자 적선이 그를 에워쌌고, 진시(오전 8시 무렵)부터 오시(정오 무렵)까지 바다 위에서 싸움이 이어졌다. 『신초코키』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初ハ九鬼支合候事難成見え候、六艘之大船に大鐵炮餘多在之、敵船を間近く寄付、大將軍の舟と覺しきを大鐵炮を以て打崩候へハ、是に恐れて中々不寄付、數百艘を木津浦へ追上、見物之者共、九鬼右馬允手柄成と感せぬハなかりけり

처음에는 구키가 버티기 어려워 보였다. 여섯 척의 큰 배에 대철포가 많이 있었는데, 적선을 가까이 끌어들인 뒤 대장선으로 보이는 배를 대철포로 부수자 적이 겁을 먹고 좀처럼 다가오지 못했고, (구키는) 수백 척을 키즈 포구로 몰아붙였다. 구경하던 이들 가운데 구키 우마노조의 공이라며 감탄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15

이날 싸운 큰 배는 『신초코키』에 여섯 척으로 나와 있고, 다키가와의 흰 배는 언급되지 않는다. 싸움을 가른 것은 적의 대장선을 노려 깨뜨린 대철포였다. 적선 24척을 사로잡았다거나 요시타카가 “적은 적어도 500척, 우리는 겨우 6척”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는 『신초코키』가 아니라 구키 가문의 기록 『구키 고덴키(九鬼御伝記)』에서 나온 것이다.16 해전 전체의 경과와 모리 쪽 사정은 키즈가와구치 해전 글에서 다루었다.

3-2. 철갑선은 실제로 있었나

이 배들은 흔히 “철갑선(鉄甲船)“으로 불린다. 철판으로 배를 감쌌다는 근거는 『다몬인닛키』 1578년 7월 20일의 한 구절이다.

一堺浦へ近日伊勢ヨリ大船調付了、人數五千程ノル、横へ七間、竪へ十二三間も在之、鐵ノ船也、テツハウトヲラヌ用意、事々敷儀也、大坂へ取ヨリ、通路トムヘキ用ト云々

사카이 포구에 요즘 이세에서 큰 배를 만들어 왔다. 5천 명 남짓이 탄다. 너비 7간, 길이 12–13간(1간은 약 1.8m)이나 된다. 철로 된 배다. 철포가 뚫지 못하게 한 대비로, 대단한 일이다. 오사카(혼간지)로 다가가 길을 막으려는 용도라고 한다.17

동시대 기록이긴 하지만 에이슌은 지리적으로 떨어진 나라(奈良)의 절에 있었고, 배가 사카이에 들어온 지 며칠 뒤(『신초코키』의 입항일로 셈하면 사흘 뒤)에 전해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문장 끝의 “~라고 한다(ト云々)“가 그 점을 보여 준다. 반면 배를 직접 본 오르간티노는 포르투갈 배를 닮았다고 하면서 대포 3문과 수많은 대형 철포를 적었을 뿐 철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신초코키』에서도 이 배는 줄곧 “큰 배(大船)“로만 나오고, “철”이라는 글자는 대철포를 가리킬 때만 쓰였다.

그래서 이 배가 철판으로 무장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 역사학자 와타나베 다이몬은 배 전체가 철갑을 두른 건 아니었더라도 일부에 얇은 철판을 댔을 가능성은 있다고 보면서, 지금으로서는 결정적인 설이 없다고 정리한다.18 “철갑선”이라는 단어도 이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에서 이 말은 1870년대부터 서양의 장갑함을 설명하는 책에 처음 등장했고, 에도 시대 기록에서 노부나가의 배를 이렇게 부른 예는 찾지 못했다.19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배들이 당시로서는 매우 컸고, 대철포와 대포를 실었으며, 오사카만을 막으려고 만든 배였다는 것이다.

3-3. 포상과 영지

2차 해전 뒤 요시타카가 받은 상은 『신초코키』에 나오지 않는다. 『간세이후』에는 노부나가가 그 공으로 시마의 칠도와 셋츠의 노다(野田)·후쿠시마(福島)에서 7천 석을 더 주었다고 나와 있고, 지금 도바시 교육위원회 자료도 이를 따라 이 무렵부터 요시타카가 시마 전체를 다스리게 된 것으로 본다. 반면 『시요랴쿠시』는 1569년 직후 노부나가가 시마 토호들에게서 빼앗은 땅을 주어 시마를 평정하게 했다고 하니, 이쪽 기록을 따르면 시마 전체를 손에 넣은 시점은 10년 가까이 앞당겨진다.20

키즈가와구치 전투 후 봉쇄가 이어지던 끝에 1580년 혼간지는 노부나가와 화친하는 조건으로 오사카를 내어주고 물러나게 된다. 이때까지 요시타카가 무엇을 했는지는 『신초코키』에서 더 찾을 수 없다.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죽은 뒤 요시타카는 이세를 물려받은 오다 노부카츠의 휘하에 남았다.

4. 히데요시의 바다

4-1. 가니에에서 배로 물러나다

1584년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카츠가 세력을 키워 가던 히데요시와 틀어져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손잡고 맞서자 요시타카는 노부카츠를 떠나 히데요시 측에 섰다. 『한칸후』에는 이 일에 대해 “기타바타케(노부카츠)를 배반하고 히데요시 편이 되었다”고만 짧게 나와 있을 뿐, 왜 돌아섰는지는 나오지 않는다.21 그해 4월 요시타카의 배는 미카와 해안의 요시고(吉胡)와 와지(和地)를 습격했고, 5월에는 이세 앞바다에서 도쿠가와 쪽 수군과 맞붙었다.22

6월에는 다키가와 카즈마스와 함께 이세에서 큰 배로 군사를 싣고 건너가 오와리 남서쪽 해안의 가니에(蟹江) 일대 성들을 손에 넣었다. 이에야스가 곧장 달려와 가니에로 드나드는 길목을 끊었고, 18일 밤 이에야스는 구키·카즈마스 쪽이 차지했던 시모이치바성(下市場城)을 무너뜨렸다. 이에야스의 가신 마츠다이라 이에타다(松平家忠)의 일기 『이에타다 닛키(家忠日記)』에는 이튿날 “구키 쪽이 배를 타고 달아나자 우리 편이 큰 배로 덮쳐 적의 배를 빼앗았다”고 나와 있다.23 『한칸후』의 오카베(岡部) 가문 항목에는 이때 도쿠가와 쪽 가신 오카베 나가모리(岡部長盛)가 요시타카의 조카를 사로잡았고 “요시타카는 크게 무너져 물러갔다”고 나와 있다. 이 작전은 다키가와 카즈마스 글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4-2. 기이·규슈·오다와라

이 뒤로 히데요시가 바다 쪽 병력이 필요한 전쟁을 벌일 때마다 요시타카가 나갔다. 1585년 3월 기이의 사이카·네고로 세력을 친 기이 정벌에서는 센고쿠 히데히사(仙石秀久)·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一氏)·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함께 기이 남쪽 해안을 공략했다.24 1587년 시마즈 가문을 친 규슈 정벌 때는 고니시·와키자카 야스하루·가토 요시아키와 함께 수군을 이끌고 사츠마로 들어가 히라사성(平佐城)을 공격했다. 4월 27일 네 사람이 사츠마 미야우치(宮内)에 함께 낸 금제(禁制, 군대의 난폭 행위를 금하는 포고문)에는 그의 이름이 “구키 오스미노카미”로 나온다. 그가 오스미노카미에 임명된 해를 1585년으로 보는 설명이 많은데 이를 뒷받침하는 문서는 확인되지 않으며, 지금 확인되는 문서 가운데서는 이 금제가 이 관직명이 문서에 나오는 가장 이른 예다.25

1590년 호조 가문을 친 오다와라 정벌 때는 와키자카·가토 요시아키·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와 함께 수군으로 2월 27일 스루가 시미즈항에 들어갔고, 4월 1일 이즈의 시모다성(下田城)을 공격했고, 성은 그 뒤 항복했다.26 이 무렵 히데요시 정권의 수군은 대체로 요시타카·와키자카·가토 요시아키 등 몇 사람이 함께 움직였다. 그 가운데 요시타카는 노부나가 시절부터 큰 배를 다뤄 와 비교적 경력이 긴 편이었다.

4-3. 도바성과 시마의 영주

히데요시 아래에서 요시타카의 영지는 이세·시마 두 지역 안에서 3만 5천 석이었다. 『간세이후』와 『일본대백과전서』, 도바시 교육위원회 자료에 모두 같은 숫자가 나오지만, 히데요시가 이 영지를 준 문서는 확인되지 않아서 언제 3만 5천 석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27 1597년 아들에게 3만 석을 넘기고 은거료로 5천 석을 남겼다는 숫자도 이 합계와 맞는다.

그의 거성은 도바만에 면한 도바성이었다. 도바시 교육위원회는 요시타카가 도바성을 완성한 해를 1594년으로 보면서도, 구키 가문 시대의 성 모습은 알 수 없는 점이 많고 천수(天守, 성의 중심 망루)가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고 밝힌다. 발굴에서는 분로쿠·게이초 연간(1590년대 이후)까지 올라가는 기와가 나와 요시타카와 모리타카 시대에 성을 고친 흔적이 드러나고 있다. 정문을 바다 쪽으로 낸 “바다의 성” 모습은 미에현 문화재 자료에 따르면 구키 가문이 떠난 뒤 1633년에 들어온 나이토(内藤) 가문이 바깥 구역을 정비하면서 갖춘 것이라고 한다.28

바다로 둘러싸인 다각형의 성곽과 그 왼쪽 해안을 따라 늘어선 성하 마을, 산지를 그린 채색 고지도
에도 시대 『쇼코쿠 토조노즈(諸国当城之図)』의 도바성. 구키 가문이 떠난 뒤 정비된 모습일 수 있다(히로시마시립중앙도서관 아사노 문고, 퍼블릭 도메인).

시마의 영주로서 요시타카가 한 일을 보여 주는 동시대 기록은 많지 않다. 1596년 3월 이에야스가 후시미에 있는 요시타카의 저택을 찾아갔고, 1598년 정월에는 요시타카가 고래고기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받는 사람은 기록에 나오지 않는다). 고래고기 헌상은 아들 모리타카 대에도 이어졌다.29 도바시 교육위원회는 구키 가문의 문서가 적고 그나마 대부분 미에현 밖에 흩어져 있다고 밝힌다.

5. 조선의 바다

5-1. “상의해서 움직여라”

1592년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을 시작했을 때 요시타카의 위치는 히데요시의 문서에 분명하게 나와 있다. 3월 13일 슈인조에서 그는 핫토리 하루야스(服部春安)와 함께 쓰시마(対馬, 대마도)에 머무는 후나부교(船奉行, 배와 수송을 맡은 관리)로 배치됐다. 4월 10일에는 히데요시의 직신으로 수군도 맡은 토도 타카토라(藤堂高虎) 등과 함께 출병 기지인 히젠 나고야(名護屋)에 도착했다. 4월 19일 슈인조에서는 기이의 호위선(警固船, 수송선을 지키는 군선)은 토도에게 맡기고, 요시타카·와키자카 야스하루·가토 요시아키와 비젠(備前, 지금의 오카야마현)의 호위선도 거듭 보내니 “각자 상의해서 건너가라”고 했다. 이때 그가 이끈 병력은 1,500명이었다.30

조선 수군이 일본 수송선을 잇달아 깨뜨리자 6월 23일 히데요시는 와키자카에게 “구키·가토(요시아키)와 세 사람이 상의해 실수 없이 서둘러 무찌르라”고 명했다. 한산도에서 와키자카 함대가 진 뒤인 7월 14일에도 “구키 오스미노카미·가토 사마노스케(요시아키)와 상의해” 성을 쌓고 지키라고 했다.31 이번 글을 쓰면서 찾아본 히데요시의 문서에는 요시타카를 다른 두 사람의 상관으로 두는 표현이 없다. 1593년 3월 “후나테슈(舟手衆)” 명단에서 그의 이름이 맨 앞에 있기는 하지만, 병력은 1,000명으로 토도의 1,400명보다 적고 지휘 관계를 정한 문구도 없다.32

요시타카를 임진왜란 일본 수군의 “총대장”이라고 부르는 설명은 일본어 위키백과 같은 현대의 글에 흔히 보인다. 이 말에 가장 가까운 옛 표현은 『한칸후』의 “언제나 바닷길의 대장을 맡았다”는 문구이고, 이는 전쟁으로부터 100년이 지난 후 나온 책의 표현이다. 동시대 문서에서 요시타카는 와키자카·가토와 동급의 지위로서 함께 의논하도록 명령받은 수군 지휘관 세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5-2. 안골포

1592년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와키자카 함대가 이순신에게 크게 졌다. 와키자카가 혼자 먼저 출진하게 된 사정은 와키자카 야스하루 글에서 다루었다. 그 무렵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아키는 가덕도 건너편 웅천의 안골포(安骨浦)에 함대를 정박시키고 있었다. 이순신 함대는 이튿날 이 소식을 듣고 7월 10일 새벽 안골포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 대해서는 이순신의 장계와 일본 쪽 기록이 함께 남아 있다.

이순신의 장계 「견내량파왜병장(見乃梁破倭兵狀)」에는 안골포에 왜선 42척이 있었고, 그 가운데 3층 누각을 올린 큰 배 1척과 갑판 위를 2층으로 올린 큰 배 2척이 포구 밖을 향해 떠 있었다고 나와 있다. 조선 수군이 번갈아 드나들며 종일 공격하자 누각선과 2층 배에 탄 왜적은 “거의 다 죽거나 다쳤고”, 남은 자들은 밤을 틈타 닻줄을 끊고 달아났다고 했다.33 작자와 성립 연대를 알 수 없는 일본 쪽 기록 「코라이센센키(高麗船戦記)」에는 조선 쪽 기록보다 하루 이른 9일 진시(오전 8시 무렵)부터 유시(오후 6시 무렵)까지 싸움이 이어졌고 “(요시타카가 탄 큰 배) 닛폰마루(日本丸)의 망루에 오스미노카미 님이 계셨는데 이시비야(石火矢, 대포)가 하나도 맞지 않았으니 신기한 일”이라고 나와 있다. 그러면서 “키슈쿠선(鬼宿船)에도 다치고 죽은 이가 많아 그날 밤 안으로 부산포로 돌아갔다”고 맺는다.34

와키자카 가문의 기록 『와키자카카덴키(脇坂家伝記)』에는 “여기서도 아군이 져서 구키의 배 돛대가 부러졌다”고 적혀 있다. 조선과 일본 양쪽의 기록이 일치하는 것은 조선 수군이 종일 공격했고 큰 배들이 집중적으로 맞았으며, 일본 수군이 그날 밤 안골포를 버리고 부산 쪽으로 물러났다는 것이다. 다만 일본의 후대 기록에서는 승패를 다르게 판단하기도 했는데 일본 근대의 사료 편찬물 『시료소란(史料綜覧)』과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전사 연표에는 구키·가토가 조선 수군을 물리쳤다고 나와 있지만, 1939년의 『히데요시노 초센케이랴쿠(秀吉の朝鮮経略)』 본문에는 승부가 나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35

5-3. 닛폰마루

「코라이센센키」에 나오는 닛폰마루는 요시타카가 탄 큰 배다. 이 배의 이름을 처음에는 “키슈쿠(鬼宿)“라고 지었는데 나고야에 왔을 때 히데요시가 가장 뛰어난 배라며 닛폰마루로 이름을 바꾸게 했다는 이야기가 지자체 해설과 일본어 위키백과에 실려 있다. 그러나 1592년 안골포 싸움을 전하는 「코라이센센키」에는 닛폰마루와 키슈쿠선이 서로 다른 배로 함께 나온다. 같은 배의 이름을 바꾼 것이라는 이야기는 이 기록과 맞지 않고, 히데요시가 이름을 바꿔줬다는 이야기의 원래 출전도 확인되지 않는다.36

비늘이 촘촘한 용이 구름 위에서 몸을 S자로 틀고 앞발로 구슬을 쥔 목조 조각의 흑백 사진
닛폰마루의 뱃머리를 장식했다고 전하는 녹나무 용 조각. 1945년 전쟁 중 불타 사진만 남았다(『진구 초코칸 진레츠힌 즈로쿠(神宮徴古館陳列品図録)』 1941, 퍼블릭 도메인).

닛폰마루는 귀국 뒤 도바에 정박해 있었다고 하고, 배의 망루에 쓰였다는 판자문 네 짝이 지금 도바의 고가쿠지(光岳寺)에 남아 도바시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배의 길이는 일본 선박사 연구자 이시이 겐지(石井謙治)의 계산으로는 약 32미터, 도바시 교육위원회 자료에는 약 33미터로 나온다.37

5-4. 안골포 왜성과 정유재란

1593년 2월 요시타카는 와키자카·가토와 함께 웅천(熊川)에 있으면서 포구로 쳐들어온 이순신 함대의 배를 사로잡았다.38 그해 말 안골포 왜성에는 와키자카가 남고 요시타카와 가토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1594년 봄 요시타카는 다시 바다를 건너 와키자카와 교대해 안골포 왜성을 지켰고, 이듬해 봄 다시 와키자카와 자리를 바꾸어 돌아왔다.39 쉰을 넘긴 나이에 그는 조선 남해안의 성에서 한 해를 보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요시타카는 조선에 건너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해 2월 21일 히데요시가 임명한 수군 지휘관은 토도·가토 요시아키·와키자카 세 사람이었다. 1598년 정월 가토 기요마사가 지키던 울산성이 명군에게 포위되자 히데요시는 구원군으로 “구키 부자”, 곧 요시타카와 모리타카에게도 출진을 명했으나, 적이 물러났다는 소식에 명령을 거두었다.40 『일본대백과전서』에는 요시타카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모두에서 수군으로 공을 세웠다고 나와 있지만, 정유재란에 관한 한 히데요시의 문서와 맞지 않는다.

6. 은거와 세키가하라

6-1. 은거와 이나바 미치토오와의 소송

요시타카는 1597년 아들 모리타카에게 가문을 넘겼다. 『간세이후』에는 게이초 2년(1597)에 물러나 이세 안에서 은거료 5천 석을 받았고 모리타카가 3만 석을 이었다고 나와 있다. 그해 초 모리타카가 시마에 있는 땅을 이세 신궁에 기증한 기록이 있는데 이 무렵 영주가 요시타카에서 모리타카로 바뀐 것과 시기가 들어맞는다.41 그러나 앞서 본 대로 이듬해 정월 히데요시는 울산 구원군에 “구키 부자”를 함께 불렀다. 도바시 교육위원회는 사카이시박물관 소장 문서 가운데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등 다섯 부교(奉行, 정무를 나눠 맡은 중신)가 요시타카·모리타카 부자에게 머리를 깎고 출가해 물러나지 말라고 한 게이초 3년(1598) 무렵의 서장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42 가문을 넘긴 뒤에도 히데요시 정권은 요시타카를 여전히 불러다 쓸 수 있는 즉시전력감의 장수로 보고 있었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인 1599년, 요시타카는 이웃 영주 이나바 미치토오(稲葉道通)와 다툼이 생겨 히데요시 사후 정무를 맡은 이에야스에게 판정을 구했다. 『한칸후』에는 이에야스가 요시타카의 주장을 근거 없다고 판정하자 “요시타카가 크게 노해 아들 나가토노카미 모리타카에게 가문을 물려주고 들어앉았다”고 나와 있다. 그보다 30여 년 앞서 막부가 편찬한 역사서 『조쿠혼초츠간(続本朝通鑑)』(1670)에는 다툼의 내용이 영지의 산림 목재 문제였고, 이에야스가 “이세는 멀어 경계 다툼을 판정할 겨를이 없다”며 아예 판정을 하지 않아 요시타카가 원한을 품었다고 나와 있다. 1713년에 나온 『세키가하라 군키 다이세이(関原軍記大成)』에는 다른 책을 끌어와, 이나바 영지의 주민들이 목재 뗏목을 강에 띄워 내려보내며 해마다 구키 가문에 내던 통행세를 히데요시가 죽은 뒤 내지 않게 된 것이 발단이었다는 이야기도 실려 있다.43 그런데 『간세이후』와 『일본대백과전서』에는 요시타카가 이미 1597년에 은거했다고 나와 있다. 소송은 그 2년 뒤의 일이므로, 소송에 화가 나서 은거했다는 『한칸후』의 이야기는 시기가 맞지 않는다.

6-2. 세키가하라와 도바성

1600년 여름 모리타카는 이에야스를 따라 아이즈(지금의 후쿠시마현 서부)의 다이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를 치러 동쪽으로 갔다. 이에야스는 8월 14일 모리타카에게 남이세 5군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문서를 내렸다.44 그사이 히데요시가 죽은 뒤 실권을 쥔 이에야스를 치려고 이시다 미츠나리가 거병했다. 미츠나리 쪽에는 모리 테루모토를 총대장으로 세우고 우키타 히데이에·고니시 유키나가 등 주로 서일본의 다이묘들이 모였고, 이에야스 쪽에는 모리타카처럼 아이즈 원정에 따라갔던 후쿠시마 마사노리·구로다 나가마사 등이 섰다. 미츠나리 쪽을 서군, 이에야스 쪽을 동군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에야스 편에 선 아들과 달리 도바에 남아 있던 요시타카는 서군에 섰다. 그가 왜 서군에 섰는지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설명이 다르다.

출전성립서군에 선 이유
『조쿠혼초츠간』1670아들이 이에야스에게 붙은 것에 노해서
『한칸후』1702평소 이에야스를 원망하는 것을 알고 미츠나리가 서장을 보내서
『세키가하라 군키 다이세이』1713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위해. 저자는 소송에 대한 원한 때문이라는 설은 믿기 어렵다고 함
『간세이후』(구키 가문 제출 계보)1812늙고 은퇴한 몸이라 처음엔 거절했으나 미츠나리가 거듭 청하고 서군에 선 기이 신구의 영주 호리우치 우지요시(堀内氏善)의 병력을 붙여 주겠다고 하자, 더 사양하면 목숨을 아끼는 것 같다며 응했다

어느 쪽이든 그 뒤의 행동은 기록들이 대체로 일치한다. 요시타카는 아들이 원정을 떠난 사이 도바성을 차지하고 호리우치 우지요시를 불러들여 성을 맡겼다. 배를 모아 이세만의 포구들을 돌며 병량을 빼앗아 미노·오와리의 서군 성들에 넣었고, 사이가 나빴던 이나바 미치토오의 이와데성으로 쳐들어갔다.45

6-3. 실제로 싸운 부자

모리타카는 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와 도바성에 사자를 보내 성을 돌려 달라고 했지만 요시타카는 듣지 않았다. 『시료소란』에 따르면 모리타카는 아노리(安乗)의 옛 성터에 들어가 서군 배의 왕래를 막고 있다고 8월 29일 이에야스에게 알렸다. 9월 7일 이에야스는 답장에서 도바성을 되찾지 못해 근처에 거점을 쌓겠다는 모리타카의 계획을 옳다고 하고, 도바의 요시타카를 단단히 감시하라고 지시했다. 같은 날 이나바 미치토오에게도 요시타카가 본성 밖에 세운 요새를 깨뜨린 공을 치하하는 서장을 보냈다.46 『한칸후』의 표현대로 “부자가 동서로 갈라져 밤낮으로 싸웠다”.

모리타카는 요시타카를 도우러 온 구와나(桑名)의 서군을 물리치고 벤 머리를 이에야스에게 보냈다. 이에야스가 서쪽으로 출진한 뒤 처음 받은 수급이라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간세이후』에는 부자가 가모(加茂)에서 여러 번 맞붙어 모리타카 쪽 무사 세 사람이 죽었다고 그 이름까지 나와 있다.47 『세키가하라 군키 다이세이』에는 9월 11일의 싸움에서 요시타카가 “적이 무너져도 길게 쫓지 말고, 적의 본진까지 화살이 넘어가지 않게 쏘라”고 명했는데, 아들을 죽이게 될까 걱정해서였다고 나와 있다.

요시타카와 모리타카가 가문을 살리려고 미리 짜고 양쪽으로 갈라섰다는 해석도 있다. 역사 작가 가와이 아쓰시의 대중서와 일본 관광청의 다국어 해설문, 일본어 위키백과에 이 해석이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조쿠혼초츠간』·『한칸후』·『세키가하라 군키 다이세이』·『간세이후』에는 부자가 미리 짰다는 내용이 없다. 싸움이 눈속임에 불과했다는 이야기는 1713년에 엮은 시마의 지방지 『시요랴쿠시(志陽略誌)』에 등장한다. 성 안의 병사들이 모리타카 쪽 병사들과 본래 부자·형제·친척 사이여서 몰래 탄환 없는 조총을 쏘며 막는 척만 했는데, 이에 반해 모리타카 쪽은 사사로운 정을 잊고 맹렬히 공격해 요시타카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는 것이다. 1911년 『도바시』에도 이를 따라 “요시타카가 몰래 탄환 없는 총을 쏘며 겉으로만 막는 척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하지만 부자가 가문을 살리기 위해 사전에 미리 짜고 양군으로 갈라서서 싸웠다는 내용은 두 책 어디에도 없다.48

현대어역으로 확인한 이에야스의 9월 7일 답장과 『간세이후』에 실명으로 남은 전사자는 부자가 실제로 싸웠음을 보여 준다. 다만 『간세이후』에 실린, 요시타카가 죽기 전에 남겼다는 유언은 이 싸움을 “부모 곁에서는 부모를 위하고 주군 곁에서는 주군을 위한다”고 정리한다. 부자가 각자 자기 자리에서 도리를 다했을 뿐이라는 이 설명은 뒤에 구키 가문이 이 일을 어떻게 기억하고 싶었는지 보여 준다.

7. 도시지마의 마지막과 바다를 떠난 구키 가문

7-1. 10월 12일

9월 15일 세키가하라에서 서군이 무너졌다. 서군에 서서 이세만의 포구를 휩쓸고 이나바의 성까지 공격한 요시타카는 이제 죽을죄를 진 몸이 됐다. 이에야스는 그가 있는 곳을 찾아내라고 엄명을 내렸다. 요시타카는 도바성을 버리고 몸을 숨겼다. 『한칸후』에는 호리우치와 함께 기이 신구로 달아났다고 나와 있고, 『간세이후』에는 도바만의 섬 도시지마의 와구에, 『세키가하라 군키 다이세이』에는 도시지마에 숨었다고 나와 있다. 그가 죽은 곳과 무덤이 와구에 있으므로 도시지마 쪽 기록이 맞아 보인다.49

아들 모리타카는 약속받은 땅을 내놓는 대신 아버지의 목숨을 살려 달라고 이에야스에게 청했다. 그러나 사면 소식이 닿기 전인 1600년 10월 12일, 요시타카는 와구에서 할복했다. 쉰아홉 살이었다. 『간세이후』에 실린 유언은 이렇다.

守隆かつてより關東に仕へて貳なく、忠をつくす。わが庭訓の及ぶところなり。今齡すでにかたぶき、我子忠孝を全うす、いさゝかおもひをく事なければ、すみやかに切腹すべし

모리타카는 일찍부터 간토(이에야스)를 섬겨 두 마음 없이 충을 다했다. 내 가르침이 미친 바다. 이제 나이도 기울었고 내 아들이 충효를 다했으니 조금도 미련이 없다. 곧 할복하겠다.50

이 유언은 사건 뒤 200년 넘게 지나 『간세이후』에 실린 것이다. 그가 실제로 무슨 말을 남겼는지는 알 수 없다.

나무 그늘 아래 돌 울타리 안에 오륜탑 하나가 서 있고, 앞에 노란 국화와 보라색 꽃이 꽂힌 꽃병 두 개가 놓여 있다. 오른쪽에 나무 표지 기둥이 서 있다
도시지마 와구에 있는 요시타카의 동총(胴塚) 오륜탑. 미에현 지정 사적(Asturio Cantabrio 촬영, 2020, CC BY-SA 4.0).

7-2. 늦게 닿은 사면

모리타카는 오사카로 가서 이에야스를 만나 8월에 약속받은 남이세 5군과 맞바꿔 아버지의 목숨을 살려 달라고 청했다. 이를 이에야스가 받아들여 사면을 내렸고, 모리타카에게는 5군 대신 이세에서 2만 석의 영지를 더 내렸다. 누구를 통해 청했는지는 기록마다 다르다. 『조쿠혼초츠간』과 『한칸후』에는 동군 다이묘 이케다 테루마사(池田輝政)를 통해 청했다가 허락받지 못하자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와 테루마사가 함께 다시 청해 허락을 얻었다고 나와 있고, 『간세이후』에는 후쿠시마만, 『세키가하라 군키 다이세이』에는 모리타카와 사나다 노부유키(真田信之)가 함께 청했다고 나와 있다.51

『한칸후』 본문에는 모리타카가 곧 신구에 있던 요시타카에게 사자를 보내 이 일을 알렸는데 “요시타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참혹한 일이다”라고만 나와 있어, 사자가 닿기 전인지 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쿠세키는 그 뒤에 세상에 전해지는 이야기를 따로 붙였다. 모리타카가 도바성 수비를 맡겼다가 성을 요시타카에게 내준 가로(家老, 가신의 우두머리) 도요다 고로에몬(豊田五郎右衛門)이 사면이 났다고 속여 숨은 곳에서 그를 데리고 나온 뒤, 길에서 “실은 나이후(內府, 이에야스)의 분노가 깊어 가문이 망하게 되었다”고 말해 할복하게 했고, 그 목을 들고 가다가 “이세의 묘조(明星) 찻집에서 요시타카를 사면하는 교서와 마주쳤다”는 것이다. 『한칸후』는 이 가신의 성을 “도요오카(豊岡)“로 적었지만 『조쿠혼초츠간』·『세키가하라 군키 다이세이』·『간세이후』에는 모두 “도요다(豊田)“로 나온다.

가신 도요다가 요시타카의 죽음에 관여했고 모리타카가 뒤에 그를 처형했다는 것은 아래 네 기록이 같다. 그러나 도요다가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는 기록마다 다르다.

출전성립요시타카의 죽음
『조쿠혼초츠간』1670그를 숨겨 준 가신 도요다가 사면이 닿기 전에 직접 베었다
『한칸후』에 실린 세간의 이야기1702도요다가 사면이 났다고 속여 데리고 나온 뒤 할복하게 했다
『세키가하라 군키 다이세이』1713도요다가 이케다 쪽 가신에게서 온 소식을 실제보다 나쁘게 부풀려 전했고, 요시타카가 스스로 판단해 자결했다. 사면 사자는 하인들에게 습격당해 늦어졌다
『간세이후』1812모리타카 쪽에 있으면서 요시타카와 몰래 통하려다 꾸지람을 들은 도요다가 그 일이 드러날까 두려워 모리타카의 명이라 속이고 할복을 권했다

이야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요시타카가 사면을 알지 못한 채 죽었다는 것과 그 과정에 가신 한 사람이 끼어 있었다는 점은 동일하다.52

7-3. 수총과 동총

요시타카의 목이 어디로 갔는지도 기록마다 다르다. 『간세이후』에는 교토로 보냈다고, 『세키가하라 군키 다이세이』에는 묘조 찻집까지 왔다고 나와 있고, 『한칸후』의 세간 이야기에는 이에야스가 딱하게 여겨 목을 돌려주었다고 나와 있다. 도시지마 와구에는 지금 무덤이 두 곳 있다. 몸을 묻었다는 동총(胴塚)과 머리를 묻었다는 수총(首塚)이다. 수총은 도바성이 보이는 곳에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언덕 위에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동총의 오륜탑(五輪塔, 돌 다섯 덩이를 쌓은 무덤 탑)에는 1600년 10월 12일이라는 날짜와 모리타카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1669년 손자 구키 타카스에(九鬼隆季)가 다시 새겼다는 글이 있다. 이 무덤은 1941년 미에현 사적으로 지정됐다.53

7-4. 바다를 떠난 구키 가문

모리타카는 2만 석을 더 받고 아버지의 은거료 5천 석까지 합쳐 5만 5천 석의 영주가 됐다. 그는 아버지처럼 바다를 맡았다. 1609년 이에야스가 서국 다이묘들의 큰 배를 몰수할 때 그 배들을 넘겨받는 일을 맡았고, 1614년 도요토미 가문을 친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는 수군을 이끌고 오사카의 노다·후쿠시마를 공격해 적선을 빼앗았다. 노다와 후쿠시마는 36년 전 노부나가가 요시타카에게 상으로 주었다는 땅이다.54

1632년 9월 모리타카가 죽자 셋째 아들 타카스에와 다섯째 아들 히사타카(久隆)가 후계를 두고 다투었다. 이듬해 3월 막부는 영지를 나누어 히사타카에게 셋츠 산다 3만 6천 석을, 타카스에에게 단바 아야베 2만 석을 주고 둘 다 도바에서 옮기게 했다. 하쿠세키는 『한칸후』에서 요시타카가 서군에 설 때 손자 타카스에를 후계로 삼으려 해서 모리타카가 타카스에를 꺼렸다는 어떤 책의 이야기를 소개하고는 “크게 틀린 것 아닌가”라고 비판했다.55 산다와 아야베는 둘 다 바다가 없는 산간 지역이다. 도바시 교육위원회는 이로써 구키 가문이 수군으로서의 역할을 마쳤다고 평가한다.56

바다를 떠난 뒤에도 구키 가문은 요시타카를 잊지 않았다. 아야베로 간 손자 타카스에는 할아버지가 죽은 지 69년 뒤인 1669년 도시지마 동총의 명문을 다시 새기게 하고, 와구의 암자에 석탑과 등불 비용을 바치라고 명했다. 1672년에는 이세 아사마산 콘고쇼지(金剛證寺)에 있던 할아버지의 초상화를 그림 위에 써넣은 찬문까지 그대로 베껴 그리게 해 도바에 있는 구키 가문의 보리사(菩提寺, 조상의 위패를 모신 절) 조안지(常安寺)에 바쳤다.57 이 글 첫머리의 초상화가 그것이다. 바다가 없는 아야베에서 손자는 바다를 다스리던 할아버지의 무덤과 초상화를 끝까지 챙겼다.

출처

동시대 기록과 문서

  • 오타 규이치(太田牛一), 『신초코키(信長公記)』: 호키야마 가게오(甫喜山景雄) 간본(1881) 상·중·하책(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 쪽 이미지)
  • 에이슌(英俊), 『다몬인닛키(多聞院日記)』: 쓰지 젠노스케(辻善之助) 편, 산쿄쇼인(三教書院)판 제3권
  • 오르간티노(Organtino) 서한(1578): 무라카미 나오지로(村上直次郎) 역, 『야소카이시 니혼츠신(耶蘇會士日本通信)』 하(1928)
  • 마츠다이라 이에타다(松平家忠), 『이에타다 닛키(家忠日記)』: 1897년 활자본 제3책
  • 도요토미 히데요시 슈인조(1592–1598): 참모본부 편, 『니혼센시 초센에키(日本戦史 朝鮮役)』 문서·보전(1924) 수록본(쪽 이미지)
  • 이순신(李舜臣), 「견내량파왜병장(見乃梁破倭兵狀)」: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권2(1795), 한국고전종합DB
  • 도쿠가와 이에야스 서장(1600년 8–9월): 원문은 보지 못했고 『시료소란(史料綜覧)』 강문과 다카하시 요스케의 현대어역으로 확인
  • 『사츠한 큐키 고슈(薩藩旧記後集)』(미야우치 금제), 『세이칸로쿠(征韓録)』(4월 19일 슈인조 수록): 도쿄대학 사료편찬소 「史料稿本」과 『니혼센시 초센에키(日本戦史 朝鮮役)』 수록분
  •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12편, 『시료소란(史料綜覧)』(도쿄대학 사료편찬소 데이터베이스 강문과 쪽 이미지)

에도 시대 이후 편찬물

  • 「코라이센센키(高麗船戦記)」(성립 연대 미상): 『니혼센시 초센에키(日本戦史 朝鮮役)』 보전 제39 수록
  • 『와키자카카덴키(脇坂家伝記)』
  • 『간에이 쇼카케이즈덴(寛永諸家系図伝)』(1643): 『간세이후(寛政譜)』 인용분
  • 하야시 가호(林鵞峰) 등, 『조쿠혼초츠간(続本朝通鑑)』(1670): 『혼초츠간(本朝通鑑)』 제15(국서간행회, 1919)
  •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한칸후(藩翰譜)』(1702): 구키·오카베·이나바·구루시마·와키자카 항목
  • 『시요랴쿠시(志陽略誌)』(1713 자서):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사본
  • 미야가와 나오코(宮川尚古), 『세키가하라 군키 다이세이(関原軍記大成)』(1713): 『고쿠시 소쇼(国史叢書)』본(1916)
  • 『구키 시마 군키(九鬼志摩軍記)』(18세기): 기타가미 마사오 번각
  • 『구키 고덴키(九鬼御伝記)』: 일본어 위키백과의 『도바 시사(鳥羽市史)』 경유 인용으로만 확인
  •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1812, 약칭 『간세이후(寛政譜)』) 권951 구키: 1520권 사본(일본 국립국회도서관)과 국민도서 1923년 활자본
  • 『도바시(鳥羽誌)』(1911)

현대 연구 (신뢰도 A–B)

  • 와타나베 다이몬(渡邊大門), 철갑선 관련 칼럼 두 편(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 2021·2023)
  • 기타가미 마사오(北上真生), 「『구키 시마 군키(九鬼志摩軍記)』 번각과 해제(『九鬼志摩軍記』翻刻と解題)」, 『도시샤 고쿠분가쿠(同志社国文学)』 96(2022)
  • 다카하시 요스케(高橋陽介), 『신 세키가하라(シン・関ヶ原)』 발췌 글(gendai.media)
  • 참모본부 편, 『니혼센시 초센에키 게이카 이치란효(日本戦史 朝鮮役 経過一覧表)』(1924), 『히데요시노 초센케이랴쿠(秀吉の朝鮮経略)』(1939)

공식·표준 참고자료 (신뢰도 B)

  • 도바시 교육위원회: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개요(참고문헌 도요다 쇼조 2023), 「수군의 장수 구키 요시타카(水軍の将 九鬼嘉隆)」, 「구키 모리타카(九鬼守隆)」, 「도바성 터(鳥羽城跡)」, 「발견! 구키 요시타카·모리타카에 관한 서장(発見!九鬼嘉隆・守隆に関する書状)」, 문화재 해설(구키 요시타카 묘 수총·동총, 구키 요시타카 상, 닛폰마루 판자문, 구키 문서)
  • 미에현 문화재 데이터베이스: 「구키 요시타카 묘(九鬼嘉隆墓)」, 「도바성 터(鳥羽城跡)」
  • 코토뱅크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 하라다 요시오 집필, 『세계대백과사전(世界大百科事典)』, 『정선판 일본국어대사전(精選版 日本国語大辞典)』)
  • 일본 관광청 다언어 해설문 데이터베이스: 「구키 이와쿠라 신사(九鬼岩倉神社)」, 「닛폰마루(日本丸)」, 구키 요시타카 관련 해설

전문 사이트·대중 매체 (신뢰도 C–E)

  • 일본어 위키백과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2차 키즈가와구치 전투(第二次木津川口の戦い)」, 「닛폰마루(안택선)(日本丸 (安宅船))」, 「철갑선(鉄甲船)」, 「산다번(三田藩)」
  • 가와이 아쓰시(河合敦), 『가와이 아쓰시의 저도 모르게 말하고 싶어지는 전국 무장(河合敦の思わず話したくなる戦国武将)』: 사라이(serai.jp) 2017년 1월 20일 소개 글로 확인
  • 『도바 시사(鳥羽市史)』 상권(1991)과 이시이 겐지(石井謙治)의 닛폰마루 크기 계산: 일본어 위키백과 경유 재인용
  • 『가이군 엔카쿠론(海軍沿革論)』(1871), 『보카이 신론(防海新論)』(1875): “철갑선” 낱말 용례 확인용(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자료)
  • 관광미에(kankomie.or.jp) 「구키 요시타카 수총(九鬼嘉隆首塚)」
  • 위키미디어 커먼즈: Alpsdake 촬영 도바만 사진, Asturio Cantabrio 촬영 동총 사진, 「구키 요시타카 화상(九鬼嘉隆画像)」(조안지), 『쇼코쿠 토조노즈(諸国当城之図)』 도바성(아사노 문고), 닛폰마루 선수상 사진(『진구 초코칸 진레츠힌 즈로쿠(神宮徴古館陳列品図録)』 1941)

확인하지 못한 것

  • 출판사가 구키 가문의 첫 통사라고 소개하는 도요다 쇼조(豊田祥三), 『구키 요시타카와 구키 수군(九鬼嘉隆と九鬼水軍)』(에비스코쇼슛판, 2023)은 열람하지 못했다. 이 글에서는 이 책을 참고한 도바시 교육위원회 자료를 통해서만 반영했다.
  • 이나모토 노리아키(稲本紀昭), 「구키 가문에 대하여(九鬼氏について)」(『미에 현사 연구(三重県史研究)』 창간호, 1985), 오가와 유(小川雄), 「오다 정권의 해상 군사와 구키 요시타카(織田政権の海上軍事と九鬼嘉隆)」(『가이지시 겐큐(海事史研究)』 69, 2012)는 서지만 확인했다.
  • 노부나가 귀속 경로, 오스미노카미 임명 시기, 3만 5천 석을 받은 시점과 문서, 도바성 착공 연도.
  • 조카 스미타카의 사망 연도.
  • 1580년 혼간지 퇴거 때 요시타카의 역할.
  • 1600년 이시다 미츠나리가 요시타카에게 보낸 서장과 이에야스 서장의 원문, 사면장의 존재.
  • 닛폰마루의 정확한 크기와 “키슈쿠에서 닛폰마루로” 개명 일화의 원래 출전.

Footnotes

  1. 『한칸후(藩翰譜)』 구키 항목 f108.p001–p002(일본 국립국회도서관 780524, 41쪽). 『간세이후(寛政譜)』 권951 구키 항목 첫머리 “寛永系図に家伝を引ていはく、先祖は紀伊国熊野八庄司か其一なり。今の呈譜に先祖の出所を詳にせす。代々紀伊国牟婁郡九鬼浦に住するにより九鬼をもつて家号とすといふ”(1520권 사본 제221책,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2577513, 4–5쪽 쪽 이미지). ↩

  2. 『한칸후(藩翰譜)』 f108.p003 “守隆八代の祖隆良が時に當りて、志摩國英虞の郡に押渡て、石川七嶋の輩と戰ひ、終に波切田畔立神等の地を打隨ふ、其孫大和守隆次、又答志の郡を合せ領し、其子山城守泰隆が時、始て加茂の鄕田城の城を構へて住む”. 『간세이후(寛政譜)』 권951 타카요시 항목 “当国浦・相差・国府・甲賀・和具・越賀・浜島村七島の徒党を追討し、波切・名田・畔名・立神村を領す”(2577513, 5쪽). “칠도”는 『한칸후』·『간세이후』에, “13지토(地頭)“는 18세기에 쓰인 『구키 시마 군키(九鬼志摩軍記)』에 나오는 표현이다. ↩

  3. 『간세이후(寛政譜)』 권951 요시타카 항목 “実は定隆か二男。天文十一年志摩国に生る”(2577513, 7쪽). 『한칸후(藩翰譜)』 f108.p003 할주 “年五十九歲”. ↩

  4. 『한칸후(藩翰譜)』 f108.p003 “淨隆が武勇いみじきに依て、終に城をば落されず、戰の中にぞ死したりける”. 『간세이후(寛政譜)』 권951 키요타카 항목 “このとき浄隆病にかゝり某年六月四日城中にをいて死す”(2577513, 6쪽). ↩

  5. 『한칸후(藩翰譜)』 f108.p003은 “再ひ田城を攻取て、幾程なくて死しければ、右馬允嘉隆、家繼き” 다음에 1569년 일을 이어 적는다. 『간세이후(寛政譜)』 권951 스미타카 항목 “天正十二年十一月二十三日田城にをいて死す”(2577513, 6–7쪽 쪽 이미지). 『도바시(鳥羽誌)』(1911) 33쪽(일본 국립국회도서관 765839) “時に天正二年十一月二十三日なり”. 『간세이후』는 같은 항목에서 스미타카가 죽은 뒤 요시타카가 가문을 잇고 그 뒤 노부나가를 섬겼다고 해서, 1584년 몰년과 앞뒤가 맞지 않는다. ↩

  6. 『도바시(鳥羽誌)』 33쪽 “澄隆長ずるに及び武を好み膂力人に絶す頗る威望あり、嘉隆之を嫉み人を遣し之を暗殺せしむ”. 일본 관광청 다언어 해설문 데이터베이스 「九鬼岩倉神社(田城城跡)」(R2-00767, 2020). 기타가미 마사오, 「『九鬼志摩軍記』翻刻と解題」, 『도시샤 고쿠분가쿠(同志社国文学)』 96(2022) 87–100쪽의 해제는 이 책이 요시타카의 혈육 살해와 그 업보, 혼령 위무를 주제로 삼았고 산다·아야베 두 번주가 근세 내내 참배했다고 설명한다. 다만 번각된 미에현립종합박물관본에서 요시타카가 죽인 상대는 “兄”과 “聟”로 나오고 스미타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37丁ウ “大隅は兄をうち聟を討”). 『도바시』에는 1626년 사령 10석 기증, 1703년 “総領権現” 신호 수여가 나와 있다. ↩

  7. 『한칸후(藩翰譜)』 f108.p003. 『시요랴쿠시(志陽略誌)』 권상 “舟行至勢州安濃津、潜居待時、然後行于尾張国、依頼滝川一益、奉仕織田信長公矣、永禄十二年之秋、信長公出軍於勢州、攻討大河内城、時右馬允将船軍而有武功”(사본,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2558195, 17쪽). 『간세이후(寛政譜)』 권951 “姪澄隆死するにより其家を相続し、のち織田右府京師に出張のとき見参し麾下に属す”(2577513, 7쪽). 『신초코키(信長公記)』 권2 에이로쿠 12년 오카와치성 공격(1881년 간본 상책,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781192). ↩

  8. 『신초코키(信長公記)』 권7 덴쇼 2년 “十五日に九鬼右馬允あたけ舟、瀧川左近・伊藤三丞・水野監物是等もあたけ舟、島田所助・林佐渡守両人も圍舟を拵、其外浦々の舟をよせ”(781192, 48쪽 쪽 이미지). 이 간본은 출진일을 “六月十三日”로 인쇄했으나 앞뒤 날짜로 보아 7월의 오식으로 보인다. 『간세이후(寛政譜)』 권951 “安宅船十餘艘を催し伊勢浦より長嶋に攻入、織田信雄の手に属して大嶋の城にむかひ、終に其要害を破りしかは右府感賞あり”(2577513, 8쪽). 같은 곳 할주에 따르면 『간에이 쇼카케이즈덴(寛永諸家系図伝)』은 이 출진을 겐키 원년(1570)으로 적었다. ↩

  9. 『신초코키(信長公記)』 권9 덴쇼 4년 “打向人數、まなべ七五三兵衛・沼野傳內・沼野伊賀・沼野大隅守・宮崎鎌太夫・宮崎鹿目介・尼崎小畑・花くまの野口、是らも三百余艘乘出し、木津川口を相防候”(중책,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781193, 15쪽 쪽 이미지). 요시타카가 1576년 해전에 나갔다는 이야기는 18세기 『구키 시마 군키(九鬼志摩軍記)』의 “天正四年” 기사(기타가미 2022 번각 15丁)와 일부 영어권 개설서에 보인다. ↩

  10. 『신초코키(信長公記)』 권11 덴쇼 6년(781193, 25쪽 쪽 이미지). ↩

  11. 『신초코키(信長公記)』 권11 “寅六月廿六日、熊野浦へ押出し、大坂表へ乘廻し候之處、谷之輪海上にて…九鬼右馬允、七艘之大船に小船を相添、山の如く飾立、敵舟を間近く寄付、あいしらふ様に持なし、大鉄炮一度に放懸、敵舟餘多打崩候之間、其後ハ中々寄付不及行ニ、無難、寅七月十七日、堺の津へ着岸候也、見物驚耳目候也”(781193, 25쪽). 『한칸후(藩翰譜)』 f108.p003에는 이 싸움에서 “兵船三十餘艘を奪取る”라고 나와 있으나 『신초코키』에는 빼앗은 배의 수가 없다. ↩

  12. 『신초코키(信長公記)』 권11 “翌日大坂表へ乘出し、要々に舟を懸置、海上之通路を止、堅固仕候也”(781193, 25쪽). 『다몬인닛키(多聞院日記)』 덴쇼 6년 7월 20일(주17). 오르간티노 서한(1578년 9월 30일자 프로이스 서한에 수록), 『야소카이시 니혼츠신(耶蘇會士日本通信)』 하(이코쿠 소쇼 제3, 1928) 434쪽(일본 국립국회도서관 1186699). 번역은 1928년 일본어 역에서 옮겼다. 오르간티노는 노부나가가 이세에서 짓게 한 배라고만 하고 구키의 이름은 적지 않았다. ↩

  13. 『신초코키(信長公記)』 권11 “九鬼大船へ只御一人めされ御覽有之、それより今井宗久所へ御成…九鬼右馬允被召寄、黄金二十枚・御服十・菱喰折二行拜領、其上千人つゝ御扶持被仰付、並瀧川左近大船白舟上乘仕候犬飼助三・渡邊佐內・伊藤孫太夫三人に黄金六枚御服相添被下”(781193, 27쪽 쪽 이미지). “千人つゝ御扶持”가 정확히 어떤 셈법인지는 해석이 갈릴 수 있다. ↩

  14. 『신초코키(信長公記)』 권12 덴쇼 7년 “正月五日、九鬼右馬允、堺の津より罷上、安土御山にて年頭の御禮申上の處、今の透に在所へ罷越、妻子見候て頓て上國可仕の旨、御暇被下、滿足にて勢州へ罷下也”(하책,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781194, 5쪽). ↩

  15. 『신초코키(信長公記)』 권11 덴쇼 6년 11월 6일(781193, 27–28쪽 쪽 이미지). ↩

  16. 『구키 고덴키(九鬼御伝記)』의 내용은 일본어 위키백과 「第二次木津川口の戦い」가 『도바 시사(鳥羽市史)』 상권(1991) 313쪽을 출처로 들어 인용한 것으로만 확인했고 원본은 보지 못했다. ↩

  17. 『다몬인닛키(多聞院日記)』 덴쇼 6년 7월 20일(산쿄쇼인판 제3권,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1207471, 인쇄 21–22쪽 쪽 이미지). ↩

  18. 와타나베 다이몬, 「織田信長が大坂本願寺攻めで用いた九鬼水軍の鉄甲船とはどんな船なのか」(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 2021년 1월 28일), 같은 필자의 2023년 2월 22일 칼럼 “限られた箇所に薄い鉄の装甲が施されたと考えられている”, “現時点では決定的な説がない”. ↩

  19.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자료 전문 검색에서 “鐵甲船”은 『가이군 엔카쿠론(海軍沿革論)』(1871), 『보카이 신론(防海新論)』(1875) 등 서양 장갑함을 다룬 책부터 나온다. 노부나가의 배에 이 말을 처음 쓴 예는 찾지 못했다. 도바시 교육위원회 「九鬼嘉隆」 개요도 “「鉄甲船」としても知られているが、謎も多い”라고 쓴다. ↩

  20. 『간세이후(寛政譜)』 권951 “右府其功を賞して志摩国七嶋・摂津国野田・福島等にをいて七千石の地を加増あり”(2577513, 9쪽). 도바시 교육위원회 「九鬼嘉隆」 개요. 『시요랴쿠시(志陽略誌)』 권상 “信長公嘉隆右馬允戦功、賜所掠取之地、以平均志摩国”(2558195, 17쪽). ↩

  21. 『한칸후(藩翰譜)』 f108.p003 “信長うせ給ひて後、北畠に背き、秀吉の方人して”. ↩

  22.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7책 강문(덴쇼 12년 4월 17일 “九鬼嘉隆、三河吉胡、和地等を襲ふ”, 5월 5일 “小浜景隆、間宮信高等、伊勢生津、村松に九鬼嘉隆と戦ふ”). ↩

  23. 『이에타다 닛키(家忠日記)』 덴쇼 12년 6월 19일 “昨日戌刻ニ下嶋城責崩…九鬼ハ舟ニて落候を、此方衆大舟にてのりかけ敵舟をとり”(1897년 활자본 제3책,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772515, 35쪽). 『한칸후(藩翰譜)』 f064.p001(오카베) “九鬼右馬允嘉隆うしろ矢射んとて、兵船に取り乘て押寄す、長盛一勢馳せ向て戰ひ、九鬼が甥長兵衞尉を生捕り”, f179.p001(도미타) “一益嘉隆が軍兵都合二千餘人、大船に取り乘て尾張の國に押渡り”. 『한칸후』 오카베 항목의 날짜 “6월 19일”은 『이에타다 닛키』와 하루 다르다. ↩

  24.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14책 강문(덴쇼 13년 3월 25일 “羽柴秀吉、仙石秀久・中村一氏・九鬼嘉隆・小西行長等を遣して、紀伊奥郡を徇へしむ”). ↩

  25. 『시료소란(史料綜覧)』 덴쇼 15년 4월 28일 강문 “秀吉、水軍の将小西行長、加藤嘉明、脇坂安治、九鬼嘉隆をして、桂忠昉を薩摩平佐城に攻めしむ”. 미야우치 금제의 연서 “九鬼大隅守・脇坂中務少輔・加藤左馬助・小西日向守”(『사츠한 큐키 고슈(薩藩旧記後集)』, 도쿄대학 사료편찬소 「史料稿本」 덴쇼 15년 4월 28일). 1585년 서임설은 일본어 위키백과 등에 있으나 출전이 없다. ↩

  26. 『시료소란(史料綜覧)』 덴쇼 18년 2월 27일 “脇坂安治、九鬼嘉隆、加藤嘉明、長宗我部元親、水軍を率ゐ、遠江今切湊を経て、駿河清水港に著す”, 4월 1일 “水軍を率ゐて清水正令を伊豆下田城に攻む…尋で、正令、降る”. ↩

  27. 코토뱅크 「九鬼嘉隆」(『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 하라다 요시오(原田好雄) 집필 “伊勢・志摩両国のうち3万5000石を領知”, “97年(慶長2)所領3万石を子守隆に譲り”). 『간세이후(寛政譜)』 권951 “伊勢志摩両国のうちにをいて三万五千石を領す”. 도바시 교육위원회의 「九鬼嘉隆」 개요와 「水軍の将 九鬼嘉隆」은 3만 5천 석이 된 시점을 서로 다르게 쓴다. ↩

  28. 도바시 교육위원회 「鳥羽城跡(三重県史跡)」 안내문 “九鬼嘉隆が鳥羽城を築城したのは、文禄3(1594)年とされていますが、九鬼氏の段階の城の様子は不明な点が多く、この時に天守閣も建てられたのかどうかなど詳しいことはわかっていません”. 미에현 문화재 데이터베이스 「鳥羽城跡」(1965년 12월 9일 현 지정 사적) 해설. ↩

  29. 『시료소란(史料綜覧)』 강문: 게이초 원년 3월 16일 “徳川家康、志摩鳥羽の九鬼嘉隆の山城伏見の亭に赴く”, 게이초 3년 정월 12일 “志摩鳥羽の九鬼嘉隆、鯨肉を獻ず”, 게이초 15년 1월 12일 “志摩鳥羽城主九鬼守隆、鯨を献ず”. ↩

  30. 덴쇼 20년 3월 13일 히데요시 슈인조(「鍋島侯爵家所蔵文書」, 『니혼센시 초센에키(日本戦史 朝鮮役)』 문서 제21호,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936356 쪽 이미지). 4월 19일 슈인조 “紀伊國警固船、藤堂佐渡守被仰付、竝九鬼大隅守脇坂中務少輔、加藤左馬介·備前之警固船、重而被仰出、被遣候條、各申談令渡海”(활자본은 “加藤左馬介”와 “備前之警固船” 사이에 병렬점을 찍었다)(『세이칸로쿠(征韓録)』 수록, 같은 책 문서 제24호). 『시료소란(史料綜覧)』 분로쿠 원년 4월 10일 강문 “水軍の将九鬼嘉隆、藤堂高虎等、肥前名護屋に著陣す”. 병력 1,500명은 『히데요시노 초센케이랴쿠(秀吉の朝鮮経略)』(1939)가 인용한 진립표. ↩

  31. 6월 23일 슈인조(와키자카 앞, 「脇坂家譜」, 『니혼센시 초센에키(日本戦史 朝鮮役)』 문서 제46호) “九鬼・加藤嘉明兩三人相談、無越度樣令行、早速可討果候”. 7월 14일 슈인조(같은 책 문서 제48호) “からいさんニ城を拵、九鬼大隅守・加藤左馬助申談、堅固在番可仕候”. ↩

  32. 분로쿠 2년 3월 10일 슈인조(「浅野家文書」, 『니혼센시 초센에키(日本戦史 朝鮮役)』 문서 제103호, 쪽 이미지). ↩

  33. 이순신, 「견내량파왜병장(見乃梁破倭兵狀)」,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권2 “其中三層有屋大船一隻,二層大船二隻。浦口向外浮泊…有屋大船及二層大船所載之倭。幾盡死傷…賊倭等蒼黃絶碇。乘夜逃遁”. 안골포의 왜선은 대선 21척·중선 15척·소선 6척이다. ↩

  34. 「코라이센센키(高麗船戦記)」, 『니혼센시 초센에키(日本戦史 朝鮮役)』 보전 제39 「九鬼嘉隆安骨浦ノ戰功」(936356 쪽 이미지) “日本丸の矢藏に大隅守殿御座候鐵砲はなし候石火矢一ツも中らず是れ不思議なる事そかし鬼宿船·左馬の大船とて面にかけ小船共は其內に懸く”, “鬼宿船にも手負死人數多候間其夜の内に釜山浦へ御歸陣候”. ↩

  35. 『시료소란(史料綜覧)』 분로쿠 원년 7월 7일 강문 “安治、李舜臣と全羅道見乃梁に戦ひて敗走す、尋で、嘉隆、嘉明、同道安骨浦に之を破る”. 참모본부 『니혼센시 초센에키 게이카 이치란효(日本戦史 朝鮮役 経過一覧表)』 “九鬼嘉隆敵ノ水軍ヲ安骨浦ニ擊退ス”. 『히데요시노 초센케이랴쿠(秀吉の朝鮮経略)』(1939) 본문 “砲擊を交へたゞけで勝負なく”(일본 국립국회도서관 1687152, OCR로 확인. 같은 책 연표는 “九鬼嘉隆の水軍に却けらる”). 『와키자카카덴키(脇坂家伝記)』 “爰にても又味方打負て、九鬼か船の帆柱をも打折けり”(일본 국립국회도서관 1920302). ↩

  36. 일본 관광청 다언어 해설문 데이터베이스 「日本丸」(R2-00769). 일본어 위키백과 「日本丸 (安宅船)」은 참고문헌으로 『도바 시사(鳥羽市史)』(1991) 등을 들지만 개명 일화에는 개별 출전을 달지 않았다. ↩

  37. 도바시 교육위원회 문화재 해설 「日本丸の板戸」(1977년 시 지정, 고가쿠지 소장). 일본어 위키백과 「日本丸 (安宅船)」은 이시이 겐지(石井謙治)의 계산으로 길이 약 32m를, 도바시 교육위원회 「九鬼嘉隆」 개요는 약 33m를 든다. ↩

  38. 『시료소란(史料綜覧)』 분로쿠 2년 2월 21일 강문 “是より先、脇坂安治・加藤重勝(嘉明)・九鬼嘉隆、慶尚道熊川に在り、全羅左水使李舜臣等、港内を侵すに依り、是日、其船を捕ふ”. ↩

  39. 『와키자카카덴키(脇坂家伝記)』 “九鬼加藤い日本へ歸りぬ”. 『한칸후(藩翰譜)』 f133.p001(와키자카) “此年安治は安骨浦の城に留て守り、嘉明嘉隆本朝に召歸さる、三年の春嘉隆來て安治に代て彼城を守る、四年の春安治又嘉隆に代て守る”. 『니혼센시 초센에키 게이카 이치란효(日本戦史 朝鮮役 経過一覧表)』 분로쿠 3년 “九鬼嘉隆再ヒ渡鮮ス”. ↩

  40. 게이초 2년 2월 21일 슈인조 “船手之動、入候時者、藤堂佐渡守·加藤左馬助·脇坂中務少輔·南三人申次第”(『니혼센시 초센에키(日本戦史 朝鮮役)』 문서편). 게이초 3년 정월 17일 슈인조 “安藝中納言·增田右衞門尉·因幡·但馬·大和·紀伊國衆九鬼父子等、可罷立旨雖被仰付候、右之分候間、不及是非候”(같은 책 문서 제215호). 코토뱅크의 『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 “文禄・慶長両役には水軍の将として功績をたてた”. 『한칸후(藩翰譜)』 가토·와키자카 항목의 게이초 2년 “九鬼”도 같은 착오로 보인다. ↩

  41. 『간세이후(寛政譜)』 권951 요시타카 “慶長二年致仕し、伊勢國のうちにをいて隱栖の料五千石を領す”, 모리타카 “慶長二年封を襲、三萬石を領し”(국민도서 1923년 활자본,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1082718). 『시료소란(史料綜覧)』 게이초 2년 강문 “志摩鳥羽ノ九鬼嘉隆ノ子同守隆、同國庄村等ヲ皇大神宮鹽料所ニ寄進ス”(출전 「內宮神官所持古文書」). ↩

  42. 도바시 교육위원회 「発見!九鬼嘉隆・守隆に関する書状」. 서장 원문은 보지 못했다. ↩

  43. 『조쿠혼초츠간(続本朝通鑑)』 권225 게이초 4년 여름 “九鬼嘉隆與稻葉藏人訴論所部山木之事。神君曰。勢州去京。伏見。大坂不爲近。然則其境地之爭。不遑裁斷。由是嘉隆含恨於神君”(일본 국립국회도서관 1920511). 『세키가하라 군키 다이세이(関原軍記大成)』 권15에서 다른 책을 인용한 대목 “岩手の里民材木薪の筏を組みて、鳥羽の川を流すに依り、年々此川の運上を出しけるが、太閤薨去ありて後、此運上を曾て出さず”(『고쿠시 소쇼(国史叢書)』본,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3441734). 『한칸후(藩翰譜)』 f180.p004(이나바)는 같은 소송을 게이초 4년 “가을”로 적었다. ↩

  44. 『시료소란(史料綜覧)』 게이초 5년 8월 14일 강문(출전 「古文書集」). 『간세이후(寛政譜)』 권951 모리타카 “南伊勢五郡を宛行はるゝの御判物を下さる”. ↩

  45. 『한칸후(藩翰譜)』 f108.p003 “嘉隆まづ子息が鳥羽の城を奪ひ、賊船を催し、東海の津々浦々に押入て、兵粮おし取て、美濃尾張の城々に籠め、紀伊國新宮の住人堀内安房守氏喜を呼迎へ、鳥羽の城を守せて、我身は稻葉藏人が岩出の城に押寄たり”. 『조쿠혼초츠간(続本朝通鑑)』 권226 “九鬼嘉隆素與通道不和。故發兵攻岩手。不克而退”. ↩

  46. 『시료소란(史料綜覧)』 게이초 5년 8월 29일 강문 “嘉隆、西軍ニ應ジ、紀伊新宮ノ堀内氏善ト鳥羽城ニ據ル、守隆、之ヲ諫止スルモ聽カレザルニ依リ、畔乘城趾ニ入リ、西軍船ノ往來ヲ防止ス、是日、之ヲ德川家康ニ報ズ”(일본 국립국회도서관 2994259). 9월 7일 이에야스 서장 두 통은 원문을 보지 못했고, 다카하시 요스케 『신 세키가하라(シン・関ヶ原)』 발췌 글(gendai.media)의 현대어역으로 확인했다. ↩

  47. 『한칸후(藩翰譜)』 f108.p003 “守隆、氏家を打破り、首餘多切て、關東へ參せしに、中泉の御陣に到來す、これ此度德川殿西に向はせ給ひし後、初度に獻る首なれば、御感尤も淺からず”. 『간세이후(寛政譜)』 권951 모리타카 항목의 가모 교전과 전사자 무라타 시치다유(村田七大夫)·쿠도 스케스케(工藤祐助)·모리타 우콘(森田右近). 『세키가하라 군키 다이세이(関原軍記大成)』 권15 “敵陣假令敗績すとも、長追すべからず。又敵の本陣へ越す矢なき樣に鐵炮を打たせよと下知せらる。是は嫡子長門守を討つべきかと、覺束なく思はれし故なり”. ↩

  48. 가와이 아쓰시의 해석은 사라이(serai.jp) 2017년 1월 20일 소개 글로 확인했다. 일본 관광청 다언어 해설문 데이터베이스 R2-00774. 『시요랴쿠시(志陽略誌)』(1713 자서) 상권 “嘉隆與守隆之士卒素父子兄弟一族親友、則自城中陰飛無玉鳥銃、陽為防戦之形勢矣。守隆之兵士則重忠義忘私親、攻戦甚急。故嘉隆不知所為、脱城亡命”(일본 국립국회도서관 2558195, 1823년 사본 19쪽 이미지로 확인). 『도바시(鳥羽誌)』(1911) 41쪽 “嘉隆陰に丸なき鳥銃を放ち、陽に防戰の狀を示す”. ↩

  49. 『한칸후(藩翰譜)』 f108.p003 “嘉隆新宮に伴ひて、紀伊國へぞ落行きける”. 『간세이후(寛政譜)』 권951 “後嘉隆志摩國答志郡和具に潛居す”. 『세키가하라 군키 다이세이(関原軍記大成)』 권15 “勢州答志島に籠居”. 죽을죄는 『조쿠혼초츠간(続本朝通鑑)』 권227 “請代己軍功以贖父死罪”(각주 51), 수색 명령은 『시요랴쿠시(志陽略誌)』 상권 “大神君雖賞守隆戦功、於嘉隆則有可捜索所在之厳命”(일본 국립국회도서관 2558195, 19쪽). ↩

  50. 『간세이후(寛政譜)』 권951(1082718 쪽 이미지) “十月十二日腹切て卒す。年五十九”. 『세키가하라 군키 다이세이(関原軍記大成)』 권15 “十月十二日の夜自害せらる。行年五十九歲とぞ聞えし”. 『시료소란(史料綜覧)』 게이초 5년 10월 12일 강문. 『간에이 쇼카케이즈덴(寛永諸家系図伝)』은 사망을 게이초 12년으로 적었는데 『간세이후』가 할주에서 바로잡았다. ↩

  51. 『조쿠혼초츠간(続本朝通鑑)』 권227 “守隆詣大坂。憑池田輝政請代己軍功以贖父死罪。神君不許。守隆又憑福島正則與輝政共再請之。神君聽之。赦嘉隆死。且加賜二萬石於守隆”. 『한칸후(藩翰譜)』 f108.p003. 『간세이후(寛政譜)』 권951 모리타카 “福島左衞門大夫正則に就て請たてまつる”. 『세키가하라 군키 다이세이(関原軍記大成)』 권15. ↩

  52. 『조쿠혼초츠간(続本朝通鑑)』 권227 “未到鳥羽豐田既斬嘉隆。守隆大怒誅豐田”. 『한칸후(藩翰譜)』 f108.p004. 『세키가하라 군키 다이세이(関原軍記大成)』 권15. 『간세이후(寛政譜)』 권951 모리타카 “家臣豐田五郞右衞門をのれが罪のあらはれむことを恐れ、ひそかに謀りて嘉隆に自殺せしめ…五郞右衞門をからめとり、其罪をせめて首をはね、やがて獄門にさらす”. 톱으로 켜는 형에 처했다는 이야기는 『도바시(鳥羽誌)』(1911)에서 처음 보인다. ↩

  53. 『한칸후(藩翰譜)』 f108.p004 “德川殿も不便の次第なりと、仰ありて首をば返へし下されける”. 도바시 교육위원회 문화재 해설 「九鬼嘉隆墓(胴塚)」·「九鬼嘉隆墓(首塚)」(명문 판독 “慶長五(1600)庚子十月十二日 … 大守守隆”, 뒷면 “寛文九(1669)年十月十二日 九鬼式部少輔隆季 再彫刻之”). 미에현 문화재 데이터베이스 「九鬼嘉隆墓」(1941년 5월 22일 지정). 수총 위치의 유언 이야기는 관광미에 「九鬼嘉隆首塚」. ↩

  54. 『간세이후(寛政譜)』 권951 모리타카 “すべて五萬五千石を賜ひ”.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2편 6책 게이초 14년 강문 “家康、西国諸大名に命じて、五百石積以上の大船を淡路に廻漕せしめ、九鬼守隆等をして之を検収せしむ”. 12편 16책 게이초 19년 11월 29일 강문 “水軍九鬼守隆、向井忠勝等もまた、共に野田、福島を攻めて、敵船を捕獲す”. ↩

  55. 『시료소란(史料綜覧)』 간에이 9년 9월 15일 강문 “志摩鳥羽城主久鬼守隆卒す、三男隆季、五男久隆と嗣を争うて決せず”, 간에이 10년 3월 5일 강문 “幕府、志摩鳥羽城主九鬼守隆の遺封を分ち、五子久隆をして、三万六千石を領せしめ、三子隆季に二万石を割与し、久隆を摂津三田に、隆季を丹波綾部に移す”. 『한칸후(藩翰譜)』 f108.p006. 『한칸후』는 모리타카의 사망을 간에이 8년으로, 히사타카를 “나오타카(直隆)“로 적었다. ↩

  56. 도바시 교육위원회 「九鬼守隆」 “両地域とも、山間の海のない土地であり、これにより九鬼氏は水軍としての役目を終えることとなった”. ↩

  57. 도바시 교육위원회 문화재 해설 「九鬼嘉隆像」(2012년 시 지정. 원본은 1607년 작으로 콘고쇼지 소장, 분에이 세이칸(文英清韓) 찬)·「九鬼文書(二通)」(1972년 시 지정, 와구 어협 소장. 간분 9년 타카스에가 洞泉庵에 석탑과 등명료를 바치라고 명한 문서)·「九鬼嘉隆墓(胴塚)」. 미에현 문화재 데이터베이스 「九鬼嘉隆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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