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 1525?–1586) — 노부나가의 숙장, 혼노지 뒤 2년의 몰락
Q: 다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는 누구인가?
A: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중신으로, 1582년 간토 방면을 맡았다. 어디서 누구의 아들로 태어났는지는 기록마다 다르고, 노부나가를 섬기기 전의 행적은 거의 알 수 없다. 1569년 이세(伊勢) 공략에서 처음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낸 뒤 이세 북부를 맡았고, 1575년부터 1581년까지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와 함께 기나이와 각지의 전역에 거듭 투입됐다. 1582년 다케다(武田) 가문을 멸망시키는 전쟁에서 다케다 카츠요리(武田勝頼) 일행을 포위해 그 수급을 노부나가에게 보냈고, 그 공으로 고즈케(上野) 한 곳과 시나노(信濃) 두 군을 받아 간토 방면을 맡았다. 그러나 그해 6월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죽자 간나가와(神流川)에서 호조(北条) 군에게 크게 지고 이세로 돌아왔다. 이후 노부나가의 후계를 정하는 키요스 회의에 들지 못했고, 1583년에는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 쪽에 섰다가 거성 나가시마(長島)를 내주었다. 1584년에는 히데요시 측에 서서 오다 노부카츠(織田信雄) 쪽의 가니에성(蟹江城)을 손에 넣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에게 포위되어 물러났다. 출가한 뒤 뉴안(入庵)이라 불렸고 1586년에 죽었다.
한눈에 보는 다키가와 카즈마스
| 항목 | 내용 |
|---|---|
| 이름 | 통칭 사콘(左近), 뒤에 사콘노쇼겐(左近将監)·이요노카미(伊予守). 출가 후 호 뉴안(入庵) |
| 생몰 | 1525년?–1586년 9월 9일. 생년은 『간세이후(寛政譜)』(1812)에 실린 향년 62세에서 거꾸로 센 것 |
| 출신 | 오미 코가(近江甲賀)설이 많고 오와리(尾張) 출생설도 있음 |
| 첫 기록 | 『신초코키(信長公記)』 첫 권의 춤 행사에 나오는 “다키가와 사콘의 무리” |
| 근거지 | 이세 북부(1574–1583). 1569년 오카와치성(大河内城) 공방, 1573–1574년 북이세·나가시마 공략 뒤 거점으로 삼음 |
| 주요 전역 | 나가시노(1575), 에치젠(1575), 텐노지(1576), 사이카(1577), 하리마 간키성(1578), 아리오카성(1578–1579), 이가(1581) |
| 다케다 정벌·간토 부임 | 1582년 다케다 카츠요리 일행 포위. 고즈케와 시나노의 치이사가타(小県)·사쿠(佐久) 2군을 받고 간토 여덟 지방을 지킨다는 뜻의 “간토 팔주 방위(関東八州の御警固)“와 동국 다이묘와 노부나가 사이의 연락을 뜻하는 “동국 취차(東国の儀御取次)“를 맡음 |
| 몰락 | 1582년 6월 간나가와 패전, 1583년 나가시마 퇴성, 1584년 7월 가니에성에서 퇴각 |
| 만년 | 1584년 7월 3,000석(石, 쌀 생산량으로 매긴 영지 단위). 아들 카즈토키(一時)가 1만 2,000석을 주는 판물(判物, 직접 서명한 문서)을 받음 |
| 후손 | 직계는 막부 하타모토(旗本, 쇼군 직속 가신)로 이어짐 |
다키가와 카즈마스는 이 블로그에서 조연으로 두 번 나왔다. 시즈가타케 전투 글에서는 이세에서 히데요시를 붙잡아 둔 시바타 쪽 장수였고, 코마키·나가쿠테 전투 글에서는 이에야스의 배후를 노리고 가니에에 상륙했다가 쫓겨난 노장이었다. 그의 이력을 보면 두 전투 모두 그에게는 마지막 국면이었다. 그보다 앞서 노부나가 아래에서 보낸 십수 년이 있었고, 그 가운데 1582년 봄의 석 달은 그가 오다군 전선의 동쪽 끝을 맡았던 때였다.
다키가와 카즈마스를 두고는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노부나가가 그를 무로마치 막부의 간토 지방을 통치하는 직책인 “간토칸레이(関東管領)“에 임명했다는 이야기, 카즈마스가 영지 대신 명물 차이레(茶入, 차 가루를 담는 작은 항아리)를 원했다가 거절당했다고 하며, 공격할 때 앞장서고 물러날 때 뒤를 막는 것도 그였다 하여 “진격도 다키가와, 퇴각도 다키가와(進むも滝川、退くも滝川)“라고 했다고도 한다.
이 글은 오다 노부나가의 측근이었던 오타 규이치(太田牛一)가 쓴 『신초코키』와 이에야스의 가신 마츠다이라 이에타다(松平家忠)의 일기 『이에타다 닛키(家忠日記)』, 그리고 카즈마스가 주고받은 서장을 기준으로 이 이야기들이 언제 생겼는지 확인하고, 그의 실제 행적을 추적한다. 1702년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가 쓴 『한칸후(藩翰譜)』에는 카즈마스 자신의 가문 항목이 없지만, 그의 성을 물려받은 다키가와 카츠토시(滝川雄利) 가문의 항목과 그와 엮인 다른 가문의 항목에 그의 이름이 여러 번 나온다. 본문의 『한칸후』 인용 문구를 누르면 한칸후 원문(일본어)의 해당 부분이 새 탭에서 열린다.
1. 출신과 노부나가를 섬기기까지
1-1. 출신에 관한 네 가지 설
카즈마스가 태어난 해를 적은 동시대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막부가 1812년에 완성한 계보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줄여서 『간세이후(寛政譜)』)에 1586년 9월 9일에 62세로 죽었다고 나와 있어, 여기서 거꾸로 세어 1525년생으로 본다.1 출신에 관한 설은 모두 후대인 17세기 이후의 계보와 지리지에서 처음 나오는 이야기들이고, 그나마 서로 일치하지 않아 어느 것이 맞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 출전 | 성립 | 출신 이야기 |
|---|---|---|
| 『간에이 쇼카케이즈덴(寛永諸家系図伝)』, 『간세이후』 | 1643, 1812 | 가와치(河内)의 기(紀) 성씨 계통이 오미 코가군의 이치우노(一宇野)로 옮겨 와 다키(瀧)성에 살면서 다키가와를 칭했다 |
| 『세이슈 군키(勢州軍記)』, 『오미노쿠니 요치시랴쿠(近江國輿地志略)』 | 17세기, 1734 | 코가군 오하라(大原) 사람. 반(伴) 성씨를 칭하는 무리의 후예 |
| 『한칸후』 | 1702 | 오하라 사람으로 슈고(守護, 지방 장관) 롯카쿠(六角) 가문에게 죄를 입고 오다 가에 와서 섬겼다 |
| 셋째 아들 다키가와 타츠마사(滝川辰政)가 오카야마번에 낸 선조서 | 17세기 | 뿌리는 코가에 있으나 카즈마스 본인은 오와리 가이사이군(海西郡)에서 태어났다 |
기록마다 출신이 다르다는 점은 아라이 하쿠세키도 이미 짚었다. 하쿠세키는 『한칸후』에 카즈마스가 옛 무사 반노 스케카네(伴資兼)의 후손으로, 코가군 오하라에 살다가 “슈고 롯카쿠에게 죄를 입어 오다 님 집안에 와서 섬겼다고 한다(守護六角に罪蒙りて織田殿の家に來り仕ふといふ)“고 적은 뒤 의문을 남겼다. 당시 무사 집안은 “다키가와” 같은 당대에 쓰는 집안 이름과 별도로, 조상이 어느 옛 씨족에서 나왔는지를 나타내는 성씨를 내세웠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정에 낸 문서에 “미나모토노 이에야스(源家康)“라고 쓴 것과 같다. 전승대로 카즈마스가 반노 스케카네의 후손이라면 그의 성씨는 반(伴)이어야 하는데, 지금의 다키가와 집안은 기(紀) 성씨라고 하니 어찌 된 일이냐는 것이다.2 다만 반 성씨인지 기 성씨인지를 떠나, 카즈마스의 집안이 코가에 연고가 있다는 것은 네 가지 설이 모두 공유한다.
흥미로운 점은 다키가와 카즈마스가 “코가 출신”이라는 데서 “닌자 출신”이라는 이미지가 나왔다는 것이다. 현대의 만화 등에서도 흔히 접할 수 있듯 코가라는 지역이 닌자로 유명한 지역이다 보니 연결이 된 것인데 이와 관련해 사료로 확인이 되지는 않는다. 1978년 구와타 다다치카(桑田忠親)의 다도 관련 저작과 1990년 소설 『닌자 다키가와 카즈마스(忍の人・滝川一益)』 등에서 볼 수 있는 해석이지만, 오다 가신 연구자 다니구치 가쓰히로(谷口克広)는 출신이 코가 무사라는 것 말고는 근거가 없다며 이 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3
1-2. “다키가와 사콘의 무리”
『신초코키』에서 카즈마스가 처음 나오는 곳은 노부나가가 아직 오와리를 통일하기 전의 일을 모은 첫 권이다. 어느 해 7월 18일 노부나가가 연 춤 행사에서 붉은 귀신은 히라테 나이젠의 무리, 검은 귀신은 아사이 빗추노카미의 무리, 그리고 “아귀(餓鬼)는 다키가와 사콘의 무리(瀧川左近衆)“가 맡았다.4 이 “다키가와 사콘”이 카즈마스다. 사콘(左近)은 그가 쓰던 통칭으로, 『신초코키』는 그를 줄곧 이 이름으로 부른다. 이 행사는 1556년 무렵 사건 바로 뒤에 실려 있어서, 역사학자 가네코 히라쿠(金子拓)는 카즈마스가 1550년대 후반에는 이미 노부나가를 섬기고 있었다고 본다. 첫 권은 연도 배열이 정확하지 않고 “사콘”이라는 호칭도 뒤에 붙은 것이라 시점을 확정할 수는 없다. 그래도 그가 이미 자기 “무리(衆)“를 거느린 존재였다는 것은 알 수 있다.
노부나가가 그를 어떻게 발탁했는지는 근세의 책마다 다르게 나온다. 오제 호안(小瀬甫庵)은 『다이코키(太閤記)』(1626년 무렵)에서 히데요시는 미천한 신분에서, “다키가와 규스케는 철포 쏘는 이들 가운데서(鐵炮はなしの內より)” 노부나가가 뽑아 올렸다고 썼다.4 카즈마스를 철포의 명수로 보는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해 『간에이 쇼카케이즈덴』의 “어려서부터 철포에 능했다”, 『오미노쿠니 요치시랴쿠』의 “철포의 달인”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모두 17세기 이후의 책이고, 동시대 기록에서 그의 사격 실력을 묘사한 것은 확인되지 않는다.
일부 사전은 그의 통칭을 히코에몬(彦右衛門)이라 한다. 그러나 『신초코키』 1569년 오카와치성 포위 진형에는 “다키가와 사콘(瀧川左近)“이 장수들 사이에, “다키가와 히코에몬(瀧川彦右衛門)“이 노부나가의 친위 무사들 사이에 따로 나온다. 다니구치 가쓰히로는 같은 시기 같은 성을 쓴 다른 사람과 혼동한 것으로 본다.5
2. 이세를 맡다 (1569–1575)
2-1. 오카와치성에서 맡은 일
『신초코키』에서 카즈마스가 연도와 함께 처음 나오는 것은 1569년 8월, 노부나가가 이세의 코쿠시(国司, 조정이 임명하던 지방관 직함을 대대로 이어 온 가문) 기타바타케(北畠) 가문을 치러 간 때다. 8월 26일 기노시타 토키치로(木下藤吉郎, 훗날의 히데요시)가 아사카성(阿坂城)을 떨어뜨리자 그곳에 “다키가와 사콘의 군사를 들여보내 두었다(瀧川左近人數入置)”. 노부나가 본대는 작은 성들을 건너뛰고 기타바타케 부자가 틀어박힌 오카와치성으로 갔다. 9월 9일에는 카즈마스가 명을 받아 다게다니(多芸谷)의 코쿠시 저택을 비롯해 모조리 불태우고 논밭의 작물을 베어 버렸다. 이른바 효로제메(兵糧攻め, 군량을 끊어 성을 굶기는 공성)로 항복을 받아 내려는 것이었다. 10월 4일 기타바타케 부자가 성을 나가자 오카와치성을 “다키가와 사콘과 츠다 카몬 두 사람에게(瀧川左近・津田掃部兩人に)” 넘겼다. 노부나가는 둘째 아들 차센(茶筅, 훗날의 오다 노부카츠)을 기타바타케의 양자로 들여 오카와치 성주로 삼고, 카즈마스에게는 아노츠(安濃津)·시부미(渋見)·고즈쿠리(木造) 세 곳을 지키게 했다.6
이 기록에서 카즈마스의 역할은 공성전의 선봉이 아니다. 점령한 성에 군사를 배치하고, 적의 보급 기반을 태워 없애고, 항복한 성을 접수하고, 새로 얻은 땅의 요지를 방어하는 역할이다. 『시료소란(史料綜覧)』에는 1567년 봄 카즈마스가 북이세 경계의 성들을 공략했다고 정리돼 있지만, 근거로 든 것은 『세이슈 군키』 같은 에도 시대 기록들뿐이고 당대 기록인 『신초코키』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1569년에 세운 공으로 북이세의 5군을 받았다는 설명도 일본어 위키백과 등에 보이는데, 『신초코키』에 실려 있는 카즈마스의 1569년 배치 지역은 이세 중부다.
2-2. 이름을 내준 사람들
노부나가군의 이세 공략에는 내부의 협력자가 있었다. 기타바타케 일족인 고즈쿠리(木造) 가문이 노부나가 쪽으로 돌아섰고, 그 과정에 승려 겐조인 슈겐(源浄院主玄)이 관여했다. 『한칸후』에는 이 승려가 곧 환속해 “오다 님의 사무라이 대장 다키가와 카즈마스의(織田殿の侍大將瀧川一益が)” 성을 청해 받아 다키가와 효부쇼유(兵部少輔, 관직명에서 딴 통칭)라 했다고 나와 있다.7 그가 뒤에 노부카츠의 가로(家老, 중신)가 되는 다키가와 카츠토시(滝川雄利)다. 그와 카즈마스는 혈연 관계가 전혀 없다. 카즈마스의 가로 기마타 타다즈미(木全忠澄)의 아들 타다유키(忠征) 역시 카즈마스를 섬기며 공을 세워 “가호(家號, 집안 이름)를 받아 다키가와를 칭했다”고 『간세이후』에 나와 있다.7
전국시대에 주군이 공이 있는 가신에게 자기의 성을 내려 주는 일은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다키가와 가문이 특이한 점이라면 뒤에 보겠지만 이렇게 이름을 받은 두 사람의 다키가와 가문이 카즈마스 직계보다 더 높은 자리로 에도 시대를 살았다는 것이다.
2-3. 북이세와 나가시마
1573년 가을 카즈마스는 시바타 카츠이에와 함께 북이세의 사카이성(坂井城)을 포위해 10월 6일 항복을 받았고, 이어 곤도성(近藤城)을 공격할 때는 땅굴을 파고 들어가 항복시켰다. 북이세가 평정되자 노부나가는 야다성(矢田城)을 튼튼히 고치게 하고 카즈마스를 그곳에 두었다.8 이듬해 1574년 7월 나가시마의 잇코잇키(一向一揆, 정토진종 문도들의 무장 봉기)를 칠 때는 “구키 우마노조(九鬼嘉隆)는 아타케부네, 다키가와 사콘·이토 산조·미즈노 겐모츠도 아타케부네(あたけ舟)“를 이끌었다. 아타케부네는 망루를 올린 대형 군선이다. 『시료소란』에는 9월 29일 나가시마가 떨어진 뒤 노부나가가 북이세의 땅을 카즈마스에게 주었다고 정리돼 있다. 『신초코키』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8 이후 카즈마스는 나가시마성을 거성으로 삼았다. 다만 그가 나가시마성에 들어간 날짜와 북이세 “5군”의 구체적인 범위를 적은 동시대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세에서 그가 무엇을 다스렸는지 보여 주는 문서는 많지 않다. 1575년 12월 카즈마스는 히나가(日永) 고쇼지(興正寺) 경내의 사방 경계를 정하고, 그 안의 땅을 잇신덴(一身田)의 사찰 센주지(専修寺)에 기증하며 연공과 여러 역(役)을 면제하는 문서를 발행했다.9 같은 달 누군가가 칙원사(勅願寺, 천황을 위한 기도를 올리는 절)인 이세 곤고지(金剛寺)의 영지를 몰수하려다 조정의 제지를 받은 일이 있는데, 『시료소란』에는 그 사람이 “다키가와 이요노카미”로만 나와 있어 카즈마스인지는 알 수 없다.9 이세의 지역 공동체에 보낸 카즈마스의 서장을 소개한 논문도 있다. 남아 있는 문서의 수가 많지는 않지만, 이세 북부가 1583년까지 그의 근거지였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3. 시바타·사쿠마 다음 줄 (1575–1581)
3-1. 기나이를 돌아다닌 군단
1575년부터 1581년까지 『신초코키』에서 카즈마스가 등장하는 전역을 모아 보면 다음과 같다.10
| 연도 | 전역 | 『신초코키』에 나오는 카즈마스의 역할 |
|---|---|---|
| 1575.5 | 나가시노 | 하시바 히데요시·니와 나가히데와 함께 아루미하라(あるみ原)에 진을 침. 말을 막는 목책은 “이에야스와 다키가와 진지 앞에” 세움 |
| 1575.8–9 | 에치젠 잇코잇키 | 진입 부대 명단에서 사쿠마·시바타 다음. 기타노쇼 진지 공사를 니와 등과 함께 맡음 |
| 1576 봄 | 아즈치성 | 거석을 히데요시·니와와 1만여 명으로 사흘 밤낮 끌어올림 |
| 1576.5 | 텐노지 | 노부나가의 3단 편성 중 2단 |
| 1577.2–3 | 사이카 | 해안로 부대. 스즈키 마고이치의 거성을 포위 |
| 1578.4–7 | 단바, 하리마 간키성 | ”다키가와·고레토·고레즈미” 3인이 함께 투입됨. 간키성에서 땅굴·공성 망루·대철포로 공격하고 니와와 함께 동쪽 구루와(曲輪, 성곽의 구역)로 돌입 |
| 1578.11–1579.12 | 아리오카성(아라키 무라시게) | 이타미 공격, 고야노 옛 성에 부성(付城, 포위용 성) 배치. 조로즈카 조략(調略, 내응 공작). 아라키 일족 처형 집행 |
| 1580.3 | 호조와의 교섭 | 호조 우지마사의 사자를 노부나가에게 연결하는 취차(取次) |
| 1581.9–10 | 이가 | 코가 방면 부대의 첫머리. 항복자가 바친 명물 차 항아리 “야마자쿠라”를 하사받음 |
명단 속 순서는 기록자의 관행이라 엄밀한 서열의 증거는 아니다. 그래도 이 시기 카즈마스는 사쿠마·시바타 다음에, 히데요시·아케치 미츠히데(고레토)·니와 나가히데(고레즈미)와 같은 줄에 거듭 나온다. 1578년 정월 노부나가가 아즈치에서 차를 내린 열두 명 가운데 그가 있었고, 1578년 봄부터 이듬해까지는 아케치·니와와 셋이서 단바·하리마·셋츠를 오가며 노부나가가 급히 병력을 보내야 하는 곳에 투입됐다.
1575년부터 1581년까지 『신초코키』가 카즈마스 혼자의 공으로 기록한 일은 한 가지다. 조략(調略)은 적 쪽 사람을 꾀어 내통하게 만들어 싸우지 않고 성을 손에 넣는 공작이다. 1579년 10월 15일 아리오카성에서 “다키가와 사콘이 조략으로(瀧川左近以調略)” 가신 사지 신스케(佐治新助)를 사자로 보내 성 안의 나카니시 신파치로를 끌어들였고, 나카니시의 주선으로 아시가루 대장 네 명이 모반해 조로즈카(上臈塚) 구역으로 다키가와 군을 들어오게 했다. 깜짝 놀란 수비병들은 물건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성 안쪽으로 달아났다.11 1년 가까이 굳건히 버티던 아리오카성은 이 사건을 계기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3-2. 철포대 지휘와 철갑선
일본어 위키백과와 인터넷의 인물 소개에 나오는 두 가지 이야기는 『신초코키』와 맞지 않는다. 첫째, 나가시노에서 그가 철포대를 총지휘했다는 이야기다. 『신초코키』에 철포 1,000정 정도를 맡긴 부교(奉行, 책임자)로 나오는 사람은 삿사 나리마사·마에다 도시이에·노노무라·후쿠즈미·반 다섯 명이고, 카즈마스는 이 명단에 없다.12
둘째, 1578년 구키 요시타카와 함께 철갑선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신초코키』에는 구키가 대선 6척을 지을 때 “다키가와 사콘의 대선 1척, 이것은 흰 배로 꾸몄다(瀧川左近大船一艘、是は白舟に拵)“고 나와 있다. 이 배들은 6월 26일 구마노 바다로 나가 사이카의 작은 배들과 싸우고 7월 17일 사카이에 도착했다. 9월 30일 노부나가가 배를 둘러본 뒤 구키에게 상을 주고 카즈마스의 흰 배에 탔던 세 사람에게도 황금 6매를 내렸다.12 『신초코키』에는 어느 배에도 쇠로 덮었다는 말이 없다. 구키의 배를 쇠로 덮은 배로 보는 일본의 해설서들이 근거로 드는 것은 나라(奈良) 고후쿠지의 승려가 소문을 적은 일기 『다몬인 닛키(多聞院日記)』에 적힌 전해 들은 이야기뿐이다. 카즈마스의 배가 철갑으로 덮여 있었다는 근거는 더욱 찾기 어렵다.
3-3. 호조와의 연락 담당
1580년 3월 호조 우지마사(北条氏政)가 노부나가에게 매 13마리를 바쳤을 때 “이때의 취차는 다키가와 사콘(此時之御取次 滝川左近)“이었다. 호조 가문과의 혼인 교섭에도 카즈마스가 사자 세 명 가운데 하나로 나섰고, 6월 호조가 말을 바쳤을 때도 그가 취차를 맡았다.13 취차는 다이묘와 노부나가 사이의 연락과 교섭을 맡는 역할이다. 이세 나가시마는 오다 영역에서 동쪽으로 향하는 바닷길의 입구였고, 나가시마를 다스리던 카즈마스는 이미 동국 세력과의 창구 역할을 맡고 있었다. 2년 뒤 그가 간토로 보내진 것도 이런 경험이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4. 다케다를 끝내고 간토로 (1582)
4-1. 다노에서 카츠요리를 에워싸다
1582년 2월 노부나가는 다케다 카츠요리를 치기 위해 장남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를 먼저 보냈다. 『신초코키』에는 2월 12일 노부타다가 기후를 떠나 14일 이와무라에 이르렀고, 이때 카즈마스·가와지리 히데타카(河尻秀隆)·모리 나가히데(毛利長秀) 등이 함께 “보내졌다(被差遣)“고만 나와 있다.14 군마현의 자료 등 일본의 해설에는 카즈마스가 이 원정의 군감(軍監, 감독관)이었다고 나오는데, 『신초코키』에 그런 역할이 따로 적혀 있지 않다. 군감 역할을 했다는 근거로 드는 것은 2월 23일 노부나가가 가와지리에게 보낸 서장이다. 노부타다가 노부나가가 직접 출진하기 전에 함부로 앞서 나가지 않도록 “다키가와와 상의해 단단히 일러 두라”는 내용이 있다. 스물다섯 살의 노부타다가 서두르지 않도록 쉰 살을 훌쩍 넘긴 카즈마스에게 맡긴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이 서장은 개인 사이트에 옮겨 실린 글로만 확인된다.14
『신초코키』의 다카토성(高遠城) 공략과 도리이 고개 전투 부분에는 카즈마스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그의 이름이 다시 나오는 것은 다케다 가문의 마지막 날이다. 『신초코키』에 따르면 3월 11일 카즈마스는 카츠요리 부자와 아내·일족이 산속으로 들어갔다는 정보를 듣고 험한 산길을 헤치고 들어가 찾았다. 그들은 다코(田子, 지금의 야마나시현 고슈시 다노) 평지에 잠시 목책을 치고 머물고 있었다. 카즈마스는 선봉 다키가와 기다유(瀧川儀大夫)와 사사오카 헤이에몬(篠岡平右衛門)에게 지시해 이들을 에워쌌고, 사시(巳刻, 오전 10시 무렵)에 일행은 모두 죽었다. 카츠요리 부자의 수급은 “다키가와 사콘 쪽에서(瀧川左近かたより)” 노부타다에게 보였다가 노부나가에게 진상되었고, 3월 16일에는 카츠요리가 마지막에 차고 있던 칼도 카즈마스가 노부나가에게 바쳤다.15
이 장면은 일본에서 “덴모쿠산(天目山) 전투”로 불리지만 『신초코키』에 나오는 지명은 다코뿐이고, 그 밖에는 산속이라고만 나온다. 카츠요리의 목을 벤 사람도 『신초코키』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카즈마스의 가신이 카츠요리의 목을 베었다는 이야기는 후대 편찬물에서 처음 등장한다.
4-2. “간토 팔주의 방위”
3월 23일 노부나가는 카즈마스를 불러 상을 내렸다. 『신초코키』의 원문은 이렇다.
瀧川左近被召寄、上野國幷信州之內二郡被下候、年罷寄遠國へ被遣候事痛雖被思食候、關東八州之御警固を申付、老後之覺に上野に在國仕、東國之儀御取次彼是可申付之間、上意忝も御秘藏之ゑひか毛之御馬被下、此御馬に乘候而入國仕候へと御諚、都鄙之面目此節也
다키가와 사콘을 불러 고즈케 한 곳과 시나노 가운데 두 군을 내리셨다. 나이 든 몸을 먼 곳으로 보내는 것을 딱하게 여기셨지만, 간토 팔주의 방위를 맡기고, 노후의 명예로 고즈케에 머물며 동국의 일을 취차하여 이것저것 처리하라는 뜻이었다. 황송하게도 아끼시던 에비카게(海老鹿毛) 말을 내리시며 이 말을 타고 들어가라고 하셨으니, 도성에서나 시골에서나 이때가 가장 면목이 섰다.16
3월 29일 영지 배분에서 시나노 두 군은 치이사가타와 사쿠로 정해졌다.16 이때 카즈마스는 향년에서 거꾸로 센 나이로 50대 후반이었다. 노부나가가 “나이 든 몸을 먼 곳으로 보낸다”고 한 말은 공치사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맡은 일은 두 가지로 적혀 있다. 하나는 간토 여덟 지방의 방위(警固)이고, 다른 하나는 동국 다이묘들과 노부나가 사이의 취차다. 동국 쪽 사람들도 이 역할을 알고 있었다. 아이즈(会津)의 다이묘 아시나 모리타카(蘆名盛隆)의 가신 가나가미 모리스에(金上盛備)는 5월 29일 카즈마스에게 보낸 답장에서 “귀하께서 조슈(上州, 고즈케)에 머무시는 것(貴殿上州御在國之儀)“을 경하하고 “이번 동국 일통(今度東國御一統之儀)“이 더없이 만족스럽다고 썼다.17 아시나는 오다 정권이 동국을 하나로 묶게 된 것을 반기고 있었다. 노부나가는 동국 다이묘들과의 연락을 카즈마스를 거치도록 했다.
4-3. “간토칸레이”라는 이름
일본의 일부 사전과 군마현 마에바시시의 안내문은 이 지위를 “간토칸레이(関東管領)“라고 부른다. 간토칸레이는 무로마치 시대에 막부가 간토를 다스리려고 둔 가마쿠라 구보(鎌倉公方)를 보좌하던 직책으로, 16세기에는 우에스기(上杉) 가문이 그 이름을 이어받고 있었다. 그런데 확인되는 범위에서 『신초코키』와 동시대 서장에는 이 말이 나오지 않는다.
| 문헌 | 성립 | 카즈마스의 지위 |
|---|---|---|
| 『신초코키』 | 17세기 초 정리, 저자는 노부나가 측근 | ”간토 팔주의 방위”, “동국의 일을 취차” |
| 가나가미 모리스에 서장 | 1582.5.29 | ”조슈에 머무심”, “동국 일통” |
| 『호조 고다이키(北条五代記)』 | 1641 간행 | ”간토 관령직에 임명되어(関東官領職にふせられ)“ |
| 『간에이 쇼카케이즈덴』 | 1643 | ”카즈마스가 간토 관령직이 되어(一益關東の管領職となりて)” (나가사키 가문 항목) |
| 『한칸후』 | 1702 | ”동국의 수호로서 우마야바시성에 내려왔다(東國の守護として厩橋の城に下向す)“ |
| 『간핫슈 고센로쿠(関八州古戦録)』 | 1726 | 항목 제목부터 “간토 관령직에 임명되어(補關東管領職)“ |
| 『간세이후』 | 1812 | ”간토 관령직이 되어(關東の官領職となり)” |
확인되는 범위에서 “관령직”이라는 말이 처음 나오는 것은 사건 59년 뒤 호조 가문 쪽 사람이 쓴 『호조 고다이키』이고, 144년 뒤의 『간핫슈 고센로쿠』에서는 이 말이 항목 제목이 되었다.18 에도 시대 중기의 아라이 하쿠세키는 이 말을 쓰지 않았지만, 막부가 편찬한 두 계보에는 이 말이 나온다. 도쿄대학 사료편찬소가 낸 『시료소란』에는 이날의 일이 “노부나가가 고즈케와 시나노 2군을 카즈마스에게 주어 간토를 진정시키게 했다(關東ヲ鎭セシム)“로 정리돼 있다. 더군다나 노부나가는 1573년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교토에서 쫓아낸 사람인데, 그런 그가 무로마치 막부의 직책을 내렸다고 보기도 어렵다. 역사학자 히라야마 유(平山優)도 동시대 사료에 간토칸레이 임명을 보여 주는 것이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18 “간토칸레이”는 그가 간토에서 맡은 역할을 후대 사람들이 익숙한 직함에 빗대 부른 이름으로 보인다.
5. 석 달의 간토 (1582)
5-1. “지옥에 떨어졌다”는 편지
영지를 받은 지 열흘 남짓 지난 4월 4일, 카즈마스는 타로고로(太郎五郎)라는 다인(茶人)에게 답장을 썼다. 1922년 역사학자 하나미 사쿠미(花見朔巳)가 개인 소장 문서로 소개하며 활자로 옮겨 놓은 편지다. 연도는 적혀 있지 않지만 “이번에 다케다를 쳐 없앴다”는 구절로 1582년임을 알 수 있다.
存知より候はぬ地獄へおち候、宇治も彌とをく成候條、茶も如何とはかりがたく候、…別の所作もならぬ國にて候、…今度武田討果し候、自然望も有之かと御尋も候はゝ、小なすびをと可申上覺悟候處、さはなく遠國にをかせられ候條、茶の湯冥加はつき候
생각지도 못한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우지(宇治)도 더 멀어졌으니 차도 어찌 될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입니다. …이번에 다케다를 쳐 없앴으니, 혹시 바라는 것이 있느냐고 물으시면 작은 가지(小なすび)를 청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그렇게 되지 않고 먼 곳에 두셨으니 다도의 운은 다했습니다.19
“작은 가지”는 가지(茄子) 모양의 차이레(茶入, 말차 가루를 담는 작은 도자기 항아리)를 가리킨다. 노부나가는 명물 다기를 모아 공 있는 가신에게 내렸고, 그것을 받는 것은 큰 영예였다. 카즈마스도 1581년 이가에서 명물 차 항아리를 받은 적이 있다. 그는 다케다를 친 공으로 차이레나 하나 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교토·사카이·우지의 다도 문화에서 멀리 떨어진 간토 지역의 일을 맡게 돼버린 것이다. 그래서 큰 영지를 받은 날로부터 2주가 채 지나지 않아, 그는 다도 친구에게 지옥에 떨어진 거나 다름없다고 너스레를 떤 것이다.
일본어 위키백과와 다도 사전에는 이 편지가 “카즈마스가 영지 대신 명물 ‘주코 코나스(珠光小茄子)‘를 원했으나 노부나가가 거절하고 간토칸레이에 임명했다”는 일화로 소개돼 있다. 그러나 편지는 “물으시면 청하려 했다”는 가정형의 푸념이고, 실제로 무엇을 청했다거나 거절당했다는 말은 없다. “주코”라는 이름도 없고 그냥 “작은 가지”다. 이 편지를 “명예로운 간토의 도독 자리보다 하찮은 작은 가지 하나를 바랐으니 얼마나 초연하고 고결한가”라고 읽은 것은 1920년 역사학자 다나카 요시나리(田中義成)였다. 다나카 자신도 농담 투가 섞인 말이라고 단서를 달았다. 이후 『다도대사전(茶道大辞典)』 신판(2010)은 이것을 “은상으로 구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대신 간토칸레이에 임명되었다”는 일화로 정리했다.20 편지 원본의 현재 소재는 확인되지 않고, 사료편찬소는 이 편지를 참고 자료로 분류했다.
5-2. 미노와와 우마야바시
카즈마스는 4월 2일까지 가이(甲斐)에 있었다. 노부나가가 다이가하라로 진을 옮길 때 거처를 고쳐 짓고, 따라온 일행 수백 명이 묵을 가건물을 세워 극진히 뒷바라지한 사람이 그였다.15 그 뒤 고즈케로 들어가 처음에는 미노와성(箕輪城)에, 이어서 우마야바시성(厩橋城, 지금의 마에바시)에 자리를 잡았다. 우마야바시로 옮긴 정확한 시점은 4월 중순과 5월 하순으로 자료마다 다르다.
이 석 달 동안 그가 한 일은 몇 통의 문서로 확인된다.21
- 4월 4일, 시모츠케의 우츠노미야 쿠니츠나(宇都宮国綱)에게 출병을 재촉했다. 쿠니츠나는 이 일을 사타케 요시시게와 의논했다.
- 5월, 시나노 사쿠군의 류운지(龍雲寺)에 이와무라다·오치아이 등 합계 168관(貫, 토지 수익을 돈으로 환산한 단위)의 땅을 새 사령으로 주었다. 문서 끝에 “다키가와 사콘 카즈마스(滝川左近一益)“라는 서명과 화압(花押, 서명 대신 쓰는 도안)이 있다.
- 5월 29일, 아시나 가문의 가나가미 모리스에에게서 “동국 일통”을 축하하는 답장을 받았다.
- 6월 11일, 호조 우지마사에게서 서장을 받았다(6-1에서 다시 다룬다).
그의 위세를 보여 주는 장면도 남아 있다. 우마야바시성의 성주 키타조 타카히로(北条高広)를 수행했던 사람의 기록 『이시카와 타다후사 도메가키(石川忠総留書)』에 따르면, 카즈마스가 우마야바시성을 빌려 옮기고 싶다고 하자 키타조는 거리낌이 없다는 표시로 둘째 아들을 인질로 보냈다. 카즈마스가 우마야바시로 옮기자 인근의 크고 작은 영주들이 찾아와 인사를 올리고 그의 휘하에 들었다. 5월 상순에는 본성에서 노(能) 공연을 하는 행사를 열어 카즈마스 본인이 직접 〈다마카즈라(玉鬘)〉를 추었고 맏아들이 소고(小鼓, 어깨에 메고 치는 작은 북)를 쳤다. 기록자는 자신도 수행해서 구경했다고 썼다.22 『호조 고다이키』에는 고즈케의 영주 열한 명이 모두 다키가와의 지휘를 따르고 인질을 미노와성에 들였다며 그 기세가 “여우가 호랑이 위세를 빌린 것 같았다”고 깎아내린 표현이 있다.
역사학자 시바 히로유키(柴裕之)는 카즈마스의 고즈케 지배를 본거지에서 떨어진 성을 맡아 그 일대를 스스로 판단해 다스리는 “지성령주(支城領主)“의 지배로 보고, 그가 간토 다이묘들에게 싸움을 멈추게 한 조치를 뒤에 히데요시가 다이묘끼리의 사적인 싸움을 금한 소부지(惣無事)에 견줄 만한 정전령으로 평가한다.23 카즈마스는 3개월 만에 고즈케의 영주들을 휘하에 두고, 시모츠케와 아이즈까지 연락망을 넓혔다.
6. 간나가와에서 가니에까지 (1582–1584)
6-1. 감춰진 소식과 간나가와
6월 2일 교토 혼노지에서 노부나가가 죽었다. 소식이 카즈마스에게 닿은 날은 6월 7일, 6월 9일 저녁 등 자료마다 다르다. 『호조 고다이키』에는 카즈마스가 오다와라의 호조 가문에 사자를 보내 노부나가가 죽어 상경하니 성을 넘겨줄 테니 받으러 오라고 알렸다고 나오고, 그를 의리를 지킨 대장이라고 칭찬하는 문장이 이어진다. 하지만 동시대 문서가 보여 주는 것은 반대 방향이다. 6월 11일 호조 우지마사는 카즈마스에게 서장을 보내 다른 경로로 교토 소식을 들었는데 사실이냐고 묻고, 자기 쪽을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말라고 했다. 다음 날 카즈마스는 고즈케의 영주 토미오카 로쿠로시로(富岡六郎四郎)에게 “교토의 일은 그 뒤로 아무것도 듣지 못했고 별일 없다고 한다(京都之儀、其以後何共不承候、無別條之由候)“고 답장했다.24 그는 적어도 일부 영주에게는 사실을 감추고 있었다. 동요를 막으려는 뜻이었을 것이다.
싸움은 6월 중순에 벌어졌다. 날짜와 경과는 서명과 수신인이 떨어져 나간 6월 22일자 서장에 남아 있다. 6월 16일 우지마사의 아들로 호조 가문 당주인 우지나오(北条氏直)가 구라가노 방면으로 움직였고, 18일 무사시의 가나쿠보·혼조 들판에서 벌어진 첫 싸움에서는 “교토 군세”(다키가와군)가 이겨 호조 쪽 하치가타 무리 300여 명을 베었다. 19일 다시 싸웠을 때는 우지나오 쪽이 다키가와군을 진지 가까이 끌어들인 뒤 뒤에 있던 병력까지 합쳐 덤벼 무너뜨렸고, “다키가와 부자는 손쓸 방도 없이 신슈 산속으로 물러났다”.25 일본어 위키백과 등에 나오는 “호조 5만 대 다키가와 1만 8천”이라는 숫자는 에도 시대 책에서 나온 것이고 동시대 문서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시카와 타다후사 도메가키』에는 고즈케 무리가 어제까지 호조를 따르던 몸이라 호조에게 활을 당기기를 꺼리는 기색이어서, 카즈마스가 “간토 무리는 믿지 않겠다, 내 직속 무사들만으로 싸워 보이겠다”며 우지나오 본대로 돌격했다고 나와 있다. 이 싸움에서 다케다 카츠요리를 에워쌌던 선봉 사사오카 헤이에몬이 전사했다.
6-2. 돌아오는 길과 키요스
패전 뒤 카즈마스는 미노와를 떠나 우스이 고개를 넘어 고모로로 갔고, 기소지(木曽路)를 거쳐 이세로 돌아갔다. 고즈케와 시나노 영주들에게서 받아 둔 인질을 언제 어디서 돌려주었는지는 에도 시대 기록마다 다르고, 나가시마에 닿은 날은 7월 1일이라는 기록이 많다.26 『한칸후』에는 그가 떠나기 전 누마타성(沼田城)을 옛 성주에게 돌려주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옛 성주 후지타 노부요시가 누마타성을 돌려 달라고 하자 카즈마스는 처음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 다케다 가문의 옛 가신으로 누마타를 차지하고 있던 영주) 손에서 받은 성이니 “사나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眞田にこそ返し渡さめ)“며 허락하지 않았다.26
에도 시대 책들은 적은 군사로 적지를 빠져나와 군을 데리고 돌아온 이 퇴각을 높이 평가했다. 『간핫슈 고센로쿠』에는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거동이 아니었다는 평이, 『호조 고다이키』에는 의리를 무겁게 여겨 모두가 감탄했다는 평이 나온다. 그러나 그가 돌아왔을 때 오다 가문의 판은 이미 바뀌어 있었다. 6월 27일 오와리 키요스성에서 노부나가의 후계와 영지 재분배를 정하는 회의가 열렸다. 히데요시는 뒤에 쓴 서장에서 이 회의의 결정 주체를 “네 원로 중신(四人之宿老)“이라고 했다. 여기서 말한 네 사람은 시바타 카츠이에·하시바 히데요시·니와 나가히데·이케다 츠네오키 네 사람이고, 다키가와 카즈마스의 이름은 들어 있지 않다.27
이 중요한 자리에 카즈마스가 왜 빠졌는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마다 해석이 갈린다. 다니구치 가쓰히로는 패주하는 중이라 참석하지 못했다고 보고, 오와다 데쓰오는 간토에서 패하고 물러났다는 이유로 참석을 거부당했다는 설을 소개했다. 시바 히로유키는 6월 26일 히데요시가 카즈마스에게 이에야스와 함께 호조를 막으라고 요구한 서장이 있으니 처음부터 소집 대상이 아니었다고 본다.27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결과는 같았다. 노부나가 생전에 시바타·히데요시·니와와 나란히 오다 가문의 중신으로 꼽히던 그는 노부나가 사후의 판을 짜는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고, 간토에서 잃은 영지를 대신할 영지도 배정받지 못했다.
6-3. 나가시마를 내주다
키요스 회의 뒤 히데요시와 시바타 카츠이에가 대립하자 카즈마스는 시바타와 노부나가의 셋째 아들 오다 노부타카 쪽에 섰다. 히데요시 쪽과 노부타카·카즈마스 쪽의 대립은 1582년 말에 이미 문서에 드러난다. 12월 26일 히데요시·니와·이케다는 노부타카의 가신 고지마 민부쇼유(小島民部少輔)에게 서장을 보내, 카즈마스의 지시로 고지마가 쌓은 성채를 허물라고 요구했다. 노부타카가 노부카츠와 화해했으니 더는 성채가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28
이듬해 1583년 1월 카즈마스는 이세에서 히데요시에 맞서 군사를 일으켰다. 발단이 된 것은 나가시마 서남쪽 스즈카군의 가메야마성(亀山城)이었다. 이 성의 주인 세키(関) 가문에는 후계 다툼이 있었다. 『한칸후』의 세키 가문 항목에 따르면, 당주 세키 모리노부(関盛信)는 가신 다수가 밀던 둘째 아들을 두고 출가해 있던 맏아들을 환속시켜 카즈마사(一政)라는 이름으로 후계로 세웠다. 둘째는 그 무렵 시바타 카츠이에에게 몸을 의탁해 에치젠에 있었다. 모리노부 부자가 히데요시를 만나러 교토로 간 사이, 둘째를 주인으로 세우려던 가신 43명이 “카즈마스를 불러들여 가메야마성에 틀어박혔다(一益を呼び迎て龜山の城に立籠る)”. 카즈마스는 가신 사지 신스케(佐治新助)를 들여보내 성을 지키게 했다. 모리노부 부자는 교토로 가던 길을 돌려 오미의 가모 카타히데(蒲生賢秀)에게 의지해 히데요시에게 원군을 청했다.
히데요시의 반격은 2월에 시작됐다. 2월 16일 히데요시는 다키가와 쪽의 미네성(峯城)·구와나 등을 공격하고 가메야마성을 에워쌌고, 3월 3일 사지 신스케가 성을 넘기고 나가시마로 물러났다. 그사이 시바타 군이 오미 북부로 나오자, 3월 17일 히데요시는 이세에서 곧장 군사를 돌려 나가하마로 갔다가 야나가세에서 시바타 군과 마주했다(시즈가타케 전투 참고). 4월 17일에는 미네성을 지키던, 카즈마스의 조카로 전해지는 다키가와 기다유가 힘이 다해 성을 히데요시 편에 선 오다 노부카츠에게 넘겼다.
4월 21일 시즈가타케에서 시바타가 지고 24일 기타노쇼성에서 자결했다. 5월 2일에는 노부타카도 오와리 우츠미(内海)에서 자결해 카즈마스는 혼자 남았다. 나가시마성을 열고 항복한 날짜는 확인되지 않는다. 7월 27일 하치스카 마사카츠가 쓴 서장에 “다키가와 님이 성에서 물러나셨다(瀧川殿御退城候て)“는 말이 있어, 그 전에 성을 내준 것만 알 수 있다.28 『간세이후』에는 히데요시가 옛 벗인 그의 목숨을 살려 주었다고 나와 있고, 에도 시대의 여러 책에는 그가 먹고살 몫으로 오미 지역에 영지 5,000석을 받았다고 나온다.
6-4. 가니에성
1584년 히데요시와 노부카츠·이에야스가 맞서자 히데요시는 카즈마스를 다시 전장으로 불러냈다. 카즈마스는 처음에 히데요시 쪽 장수 도미타 토모노부(富田知信)와 함께 이세의 고즈쿠리성(木造城)을 지켰다. 그에게 맡긴 일은 코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이에야스가 코마키산에 묶여 있는 사이 오와리 남서부 해안에 거점을 만드는 것이었다. 목표는 노부카츠의 거성 나가시마와 키요스 사이 하구에 있는 가니에성(蟹江城)이었다. 이 성은 노부카츠의 가신 사쿠마 마사카츠(佐久間正勝)가 지키고 있었다.
『한칸후』의 야마구치 가문 항목에 따르면, 마사카츠는 노부카츠의 명으로 새 요새를 지을 터를 고르러 나가면서 마에다 요주로(前田與十郎)에게 성을 맡겼다. 카즈마스는 이 틈을 타 마에다 요주로에게 편지를 보내 내통을 꾀했고, “마에다 요주로가 곧 마음을 바꾸어(前田忽に心變し)” 성을 넘기기로 했다. 같은 책의 도미타 가문 항목에 따르면, 카즈마스는 구키 요시타카와 의논해 고즈쿠리성을 떠나 두 사람의 군사 2천여 명을 큰 배에 태우고 이세 바다를 건넜다. 도쿠가와 군의 공격을 받으며 가까스로 가니에성에 들어갔다. 6월 16일 『이에타다 닛키』에는 “가니에·시모지마(下嶋, 시모이치바)·마에다 성을 다키가와가 조략으로 취했다(かにへ下嶋前田城瀧川調儀にて取候)“고 적혀 있다. 노부카츠와 이에야스의 근거지 바로 옆에 히데요시 쪽 거점이 생긴 것이다.29
이에야스는 곧장 달려와 가니에성으로 드나드는 길목을 막았다. 18일 밤에는 시모이치바성을 떨어뜨리고 배로 달아나던 구키 쪽을 덮쳐 배를 빼앗았으며, 23일에는 마에다성을 취했다. 가니에 본성만 남은 채 보름이 지났다. 7월 3일 『이에타다 닛키』는 짧다.
かにへ別心人前田與十郎ニ腹ヲきらせ候、かにへ城〔を〕さし、瀧川舟にてのき候、御味方可有之起請文かき候
가니에에서 마음을 바꾼 마에다 요주로에게 배를 가르게 하고, 가니에성을 내주고, 다키가와는 배로 물러났다. 아군이 되겠다는 기청문(起請文, 서약서)을 썼다.30
이틀 뒤 히데요시는 가스야 타케노리·가토 기요마사에게 “다키가와 부자가 교섭하여 지난 3일 구스(楠)까지 병력을 모두 이끌고 물러났다”는 보고가 왔다고 알렸다.30 카즈마스는 성이 떨어지기 전에 노부카츠·이에야스 쪽과 교섭해 가니에성을 넘겨주고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같은 날 일기에 마에다 요주로의 할복이 함께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노부카츠를 배신한 요주로를 처벌하는 것이 교섭 조건의 하나였을 가능성이 있다. 『미카와 모노가타리(三河物語)』에는 다키가와가 배를 타고 겨우 목숨을 건져 달아났고 마에다 요주로는 가족과 함께 하구에서 “남김없이 맞아 죽었다(のこらず打ころされて)“고 나와 있는데, 누가 죽였는지는 적혀 있지 않다.
교토의 신관 요시다 가네미는 7월 17일 일기에 “다키가와 사콘의 이번 오와리 작전은 엉망이었다(手遣散々之仕合也)“는 소문과 함께, 히데요시가 이를 잘못이라 하여 맏아들 산쿠로(三九郎, 카즈타다)는 영지에서 쫓아내고 둘째 오하치(御八, 카즈토키)는 용서했다는 이야기를 적고 “안타까운 일이다(無念之次第也)“라고 덧붙였다.31
6-5. “앞장서는 것도 다키가와”
가니에 이후의 카즈마스에 대해 오제 호안의 『다이코키』에는 한 가지 일화가 더 기록돼 있다. 성을 넘긴 카즈마스가 이세의 고즈쿠리성으로 물러나려 했는데, 그 전까지 함께 성을 지키던 도미타 토모노부가 가니에성을 내준 데는 모종의 뒷거래가 있었을 것이라며 카즈마스를 성에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칸후』의 도미타 가문 항목에는 같은 이야기가 도미타의 충심을 칭송하는 일화로 실려 있다. 히데요시를 위해 지키던 성을 마음대로 떠났다가 적진에서 돌아온 카즈마스를 의심해 “성 안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城中に入る事を許さず)“는 것이다. 히데요시는 이를 크게 칭찬해 도미타에게 관위를 내리고 이세의 아노츠성(安濃津城)을 주었다.32 하지만 이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는 동시대의 일기나 서장은 없다. 더군다나 『다이코키』의 흐름대로라면 카즈마스가 고즈쿠리성에 간 날은 6월 27일인데, 이때 카즈마스는 아직 가니에성에 갇혀 있었다. 가니에성을 넘긴 날은 7월 3일이고, 물러난 곳도 고즈쿠리가 아니라 구스였다. 장소를 간베성(神戸城)으로 쓰는 책도 있다.
호안은 이 장면 뒤에 평을 붙였다.
信長公御在世の時ハ、先をかくるにも瀧川、又殿ひにも瀧川とて、佳名いと香しく、果敢決斷もいみしかりしか、今の形勢いとあはれなり、吁時なるかな
노부나가 공이 살아 계실 때는 앞장서는 것도 다키가와, 뒤를 지키는 것도 다키가와라 하여 이름이 높았고 과감한 결단도 대단했는데, 지금의 모습은 참으로 애처롭다. 아아, 시운이 다했구나.33
오늘날 카즈마스의 별명처럼 쓰이는 “진격도 다키가와, 퇴각도 다키가와”는 이 평을 바꿔 쓴 말로 보인다. 카즈마스 생전에 이런 말이 쓰였다는 기록은 없다. 재미있는 건 호안이 1626년 무렵 이 표현을 쓴 건 카즈마스의 전성기를 칭찬하려던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랬던 사람이 이렇게 되었다”라고 한탄하는 문장이었다.
7. 뉴안의 만년과 다키가와라는 이름 (1584–1586)
7-1. 3,000석의 뉴안
가니에 사건 직후인 7월 12일 히데요시는 카즈마스의 둘째 아들 카즈토키에게 판물(判物, 히데요시가 직접 서명한 문서)을 내렸다. 뉴안(入庵)에게 약속했던 지행(知行, 영지) 1만 5,000석 가운데 3,000석은 뉴안 몫으로 하고 나머지 1만 2,000석은 카즈토키가 다스리라는 내용이다.34 이 문서에서 카즈마스는 이미 출가한 후의 호(號)인 뉴안으로 불리고 있다. 일부 사전과 에도 시대 책에는 그가 가니에에서 진 뒤 교토 묘신지(妙心寺)에서 머리를 깎았다고 나오는데, 이 판물로 미루어보아 늦어도 7월 12일에는 출가를 한 모양이다. 1583년 항복 때 출가했다는 설명도 있으나 그쪽도 동시대 근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 판물에는 3,000석의 땅이 어디였는지는 적혀 있지 않은데, 『간세이후』에는 그가 에치젠(越前) 오노군(大野郡)에 은거하여 지냈다고 나와 있다. 만년에도 그는 히데요시와 동국 다이묘들 사이의 연락책으로 쓰였다는 연구도 있다.34
1586년 9월 9일 카즈마스는 62세로 죽었다. 법명은 도에이(道榮)다.35 에도 초기의 편년 기록 『도다이키(当代記)』에는 1584년 말 다키가와 부자가 함께 병들어 죽었다고 나오지만, 『간세이후』의 1586년 사망과 맞지 않고 카즈토키는 1603년까지 살았다. 죽은 곳은 에치젠 오노라고 나오는 사전이 많으나 『간세이후』에는 은거한 후 지낸 곳이 오노라고만 나와 있다. 『간세이후』에는 고야산에 묻었다고 나오고, 교토 묘신지 조코인(長興院), 에치젠 레이센지(霊泉寺), 마츠에 신라쿠지(信楽寺) 등에도 그의 묘라고 전해지는 것이 있다. 에도 중기 이후의 책에는 그가 에치젠에서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동시대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7-2. 하타모토로 남은 직계
카즈마스의 직계는 다이묘로 남지 못했다. 1만 2,000석을 받은 카즈토키는 히데요시와 노부카츠가 화친한 뒤 히데요시의 동생 하시바 히데나가에게 맡겨졌고, 뒤에 이에야스를 섬겨 시모사(下総)에서 2,000석을 받았다. 1만 2,000석이 어떻게 2,000석으로 줄었는지는 『간세이후』에 나와 있지 않다. 1603년 그가 36세로 죽자 뒤의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용자의 자손은 특히 도와야 할 터인데 불행히 일찍 세상을 떠났다(勇者の子孫ことに扶助あるべきを、不幸にして世をはやくせし)“며 애석해했다고 『간세이후』에 나와 있다.36 카즈마스의 명성이 에도 막부 초기에도 기억되고 있었던 것이다.
카즈토키가 죽을 때 아들 카즈노리(一乗)는 두 살이었다. 막부는 카즈마스의 맏아들 카즈타다의 아들 카즈미치(一積)를 대리 당주로 세워 2,000석 가운데 1,750석을 주고 카즈노리에게는 250석만 남겼다. 카즈노리는 자란 뒤 소송을 내 750석을 되찾아 1,000석이 되었다. 카즈노리의 계통은 1,200석까지 늘었다가 두 집으로 나뉘어 에도 시대 말까지 하타모토로 이어졌다. 카즈미치의 아내는 사나다 마사유키의 딸, 곧 오사카 전투에서 막부와 싸운 사나다 유키무라(真田幸村)의 누이였다. 카즈미치는 아내의 조카인 유키무라의 딸을 양녀로 삼아 다른 다이묘의 가신에게 시집보냈는데, 이 일로 1632년 개역(改易, 영지 몰수)당했다. 이 집안은 1663년에야 녹봉 300표(俵, 쌀가마니 단위)로 다시 막부를 섬겼다.36 셋째 아들로 전해지는 타츠마사의 자손은 오카야마번의 번사(藩士, 다이묘 가문의 가신)로 이어졌다.
7-3. 이름을 받은 사람들
다키가와 가문과 혈연 관계가 아니지만 카즈마스에게 다키가와라는 성(姓)을 받은 사람들의 집안은 직계보다 높은 자리로 에도 시대를 살았다. 이세의 승려였다가 카즈마스에게 성을 청해 받아 다키가와 효부쇼유가 된 카츠토시는 노부카츠의 가로를 거쳐 히데요시를 섬겼고, 에도 시대 초에는 히타치(현 이바라키현) 가타노(片野)의 2만 석 다이묘였다. 그 자손은 다이묘 자리를 내놓은 뒤에도 4,000석의 하타모토로 이어졌다. 다키가와 가문 가로의 아들로 성을 하사받은 다키가와 타다유키는 막부의 부교를 지낸 뒤 1616년 오와리번의 부가로(附家老, 막부가 다이묘 가문에 붙인 가로)가 되었다.37
8. 인물평
에도 초기의 의사 에무라 센사이(江村専斎)의 회고를 담은 『로진 자와(老人雑話)』에는 “노부나가 때 천하의 정무는 네 사람 손에 있었다. 시바타, 히데요시, 다키가와, 니와다”라는 말과 함께, 간토 여덟 지방 사람들이 다키가와라는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했으나 끝에 가서는 엉망인 모양새였다는 평이 남아 있다.33 출신도 분명하지 않은 사람이 이세에 영지를 얻고 천하제일 오다 노부나가군의 방면군 사령관의 자리에 올랐으나, 노부나가가 쓰러지자 그의 세력은 2년 남짓 만에 와해돼버렸다. 그는 그 뒤로도 2년을 더 살았으나 한때 오다 가문에서 어깨를 나란히 했던 히데요시가 천하를 손에 넣는 것을 멀리서 바라볼 뿐이었다.
출처
동시대 기록과 문서 (활자 번각본·쪽 이미지로 확인한 것)
- 오타 규이치(太田牛一), 『신초코키(信長公記)』: 호키야마 가게오(甫喜山景雄) 간본(1881,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 쪽 이미지), 『시세키슈란(史籍集覧)』 19 수록본, 위키문헌 「我自刊我書」본(메이지 시대 활자본, 독음 미확인)
- 마츠다이라 이에타다(松平家忠), 『이에타다 닛키(家忠日記)』: 1897년 활자본 제3책(쪽 이미지)
-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1·3·4·7책(도쿄대학 사료편찬소): 호조 우지마사 서장(1582.6.11), 토미오카 앞 카즈마스 서장(1582.6.12), 6월 22일 서장, 히데요시 서장(1582.10.18), 하치스카 마사카츠 서장(1583.7.27), 히데요시 슈인조(朱印状, 붉은 인장을 찍은 문서, 1584.7.5), 히데요시 판물(1584.7.12, 『간에이 쇼카케이즈덴(寛永諸家系図伝)』 수록), 『가네미 쿄키(兼見卿記)』, 『다몬인 닛키(多聞院日記)』 등 수록분
- 『시료소란(史料綜覧)』 권10·11·12(도쿄대학 사료편찬소)
- 가나가미 모리스에(金上盛備) 서장(1582.5.29): 『엣사시료(越佐史料)』 권6(1931)
- 카즈마스→타로고로 답장(4월 4일): 하나미 사쿠미(花見朔巳), 『니혼분카시(日本文化史)』 제9권(1922) 136쪽 주4
- 류운지(龍雲寺) 사령 급여장(1582.5): 사나다 보물관(真田宝物館) 해설
- 『이세 고쇼지 문서(伊勢興正寺文書)』(1575.12 다키가와 카즈마스 기진장): 『시료소란(史料綜覧)』 권11 요약과 욧카이치시 문화재 해설로 확인
에도 시대 편찬물
- 『이시카와 타다후사 도메가키(石川忠総留書)』: 『엣사시료(越佐史料)』 권6·『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1책 인용분
- 오제 호안(小瀬甫庵), 『다이코키(太閤記)』(1626년 무렵): 『카이테이 시세키슈란(改定史籍集覧)』 6,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7책 수록분
- 『미카와 모노가타리(三河物語)』(1622): 위키문헌
- 『도다이키(当代記)』: 『시세키잣산(史籍雑纂)』 2(1911)
- 『호조 고다이키(北条五代記)』(1641 간행): 위키문헌
- 『간핫슈 고센로쿠(関八州古戦録)』(1726): 『시세키슈란(史籍集覧)』 수록본
- 『간에이 쇼카케이즈덴(寛永諸家系図伝)』(1643)
-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1812, 약칭 『간세이후(寛政譜)』) 권649 기 성씨 다키가와: 국민도서(國民圖書) 1923년 활자본 제4집 442–449쪽
-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한칸후(藩翰譜)』(1702): 다키가와(본성 고즈쿠리)·후지타·도미타·야마구치·우에스기 항목
- 『오미노쿠니 요치시랴쿠(近江國輿地志略)』(1734): 1915년 활자본
- 『로진 자와(老人雑話)』: 위키문헌
- 『세이슈 군키(勢州軍記)』, 『기타바타케 모노가타리(北畠物語)』, 『요다키(依田記)』, 『치쿠마노 마사고(千曲之真砂)』, 『무토쿠 헨넨 슈세이(武徳編年集成)』, 『이에타다 닛키 조호(家忠日記増補)』, 『부케지키(武家事紀)』, 『신펜 아이즈 후도키(新編会津風土記)』(히데요시 슈인조 수록):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시료소란』 수록분 또는 인용분
- 오카야마번 『가추 쇼시 가후 고온요세(家中諸士家譜五音寄)』, 『비요 잣키(尾陽雑記)』: 일본어 위키백과 경유 재인용
- 쿠리하라 노부미츠(栗原信充), 『쇼조슈(肖像集)』(에도 후기,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현대 연구 (신뢰도 A–B)
- 시바 히로유키(柴裕之), 「오다 정권의 간토 처리(織田政権の関東仕置)」, 『하쿠산 사학(白山史学)』 37(2001). 본문은 열람하지 못했고, 같은 저자의 박사논문 『전국·쇼쿠호기 다이묘 도쿠가와 가문의 영국 지배(戦国・織豊期大名徳川氏の領国支配)』(도요대학, 2015) 심사 요지로 요지를 확인했다
- 다나카 요시나리(田中義成), 『코쿠시노 헨에이(国史の片影)』(1920) 162쪽
- 다니구치 가쓰히로(谷口克広), 『오다 노부나가 가신 인명사전(織田信長家臣人名辞典)』 제2판(2010), 시바 히로유키, 『키요스 회의(清須会議)』(2018), 히라야마 유(平山優), 『덴쇼 진고의 난(天正壬午の乱)』(증보개정판 2015), 오와다 데쓰오(小和田哲男)의 견해, 가네코 히라쿠(金子拓), 『‘신초키’와 노부나가·히데요시의 시대(『信長記』と信長・秀吉の時代)』(2012), 사이토 신이치(齋藤慎一), 『전국시대의 종언(戦国時代の終焉)』(2005), 구와타 다다치카(桑田忠親), 『전국무장과 다도(戦国武将と茶道)』(1978): 일본어 위키백과 각주를 거친 재인용. 원서 미열람
- 지에다 다이시(千枝大志), 「고가쿠칸대학 소장 ‘가와사키 로분추 앞 다키가와 카즈마스 서장’에 대하여(皇學館大学所蔵「川崎老分中宛瀧川一益書状」について)」, 『고가쿠칸 사학(皇學館史学)』 23(2008): 서지만 확인
공식·표준 참고자료 (신뢰도 B)
- 『군마현사(群馬県史)』 통사편 3(1989), 『코가시사(甲賀市史)』 8권(2016), 『다케후시사(武生市史)』 자료편 8, 『하나조노 묘신지(花園妙心寺)』(1977), 『전국사원명감(全国寺院名鑑)』(1969): 일본어 위키백과 경유 재인용
- 『다도대사전(茶道大辞典)』 신판(단코샤, 2010): NDL 레퍼런스 협동 데이터베이스 경유
- 코토뱅크 「다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 오쿠노 다카히로 집필, 『개정신판 세계대백과사전(改訂新版 世界大百科事典)』 고지마 히로쓰구 집필, 『디지털 대사천(デジタル大辞泉)』, 『일본인명대사전+Plus(日本人名大辞典+Plus)』 등)
- 사이타마현 「나카센도 볼거리(中山道 見どころ)」, 일본 국토교통성 「일본의 강: 간나가와(日本の川 神流川)」
전문 사이트·대중 매체 (신뢰도 C–E)
- 일본어 위키백과 「다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가니에성 전투(蟹江城合戦)」·「키요스 회의(清洲会議)」·「다키가와 카츠토시(滝川雄利)」·「다키가와 타다유키(滝川忠征)」·「다키가와 타츠마사(滝川辰政)」 항목과 그 각주: 출처 추적용
- NDL 레퍼런스 협동 데이터베이스 「주코 코나스(珠光小茄子)」
- 도쿠나가 신이치로(徳永真一郎), 『닌자 다키가와 카즈마스(忍の人・滝川一益)』(마이니치신문사, 1990): 소설, CiNii 서지만 확인
- 위키미디어 커먼즈: 츠키오카 요시토시 「무라사키노 다이토쿠지 쇼코노즈(紫野大徳寺焼香之図)」, 쿠리하라 노부미츠 『쇼조슈』(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케이사이 에이센 「기소카이도 69역(木曽海道六拾九次)」 혼조 숙(일본 국립국회도서관), 가니에성 터(Asturio Cantabrio, CC BY-SA 4.0)
확인하지 못한 것
- 생년과 출생지, 노부나가를 섬기기 시작한 시점.
- 북이세 “5군”의 구체적 범위와 나가시마성에 들어간 날짜.
- 사콘노쇼겐·이요노카미에 임명된 시기. 1575년 12월의 “다키가와 이요노카미”가 카즈마스인지.
- 1582년 2월 23일 노부나가 서장의 원문과 수록처.
- 타로고로 앞 답장 원본의 현재 소재와 진위 논의.
- 우마야바시성으로 옮긴 날짜, 6월 11일 조쇼지(長昌寺) 노 공연이 실제로 열렸는지.
- 간나가와 전투의 양군 병력.
- 1583년 거병일과 항복일, 항복 뒤 받은 영지.
- 1584년 “불간(不干)” 서장의 귀속, 1584–1586년 동국 외교 서장의 원문.
- 3,000석 영지의 위치, 죽은 곳과 묘소.
- 군마현립역사박물관 도록 『오다 노부나가와 고즈케(織田信長と上野国)』(2018)에 실린 카즈마스 수발급 문서 집성.
Foot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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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세이후(寛政譜)』 권649 기 성씨 다키가와 카즈마스 항목 “十四年九月九日死す。年六十二。法名道榮。高野山に葬る”(국민도서 1923년 활자본 제4집 442–443쪽,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쪽 이미지). 『간에이 쇼카케이즈덴(寛永諸家系図伝)』에서 역산해도 같다는 것은 일본어 위키백과 경유 재인용. ↩
-
『간세이후(寛政譜)』 같은 항목 계보 “はじめて近江國一宇野城にうつり住す”, “久助一勝がとき、瀧の城に住して瀧川を稱す”, 카즈마스 항목 “河内國にをいて一族高安某をころし、去て所々を遊歷し”. 『오미노쿠니 요치시랴쿠(近江國輿地志略)』 권96 인물부 “瀧川左近將監一益 甲賀郡大原の人也。…是を伴の黨と云。一益は鐵砲の達人也”(1915년 활자본 178–179쪽). 『한칸후(藩翰譜)』 f204.p006(저본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780526, 91쪽). 『세이슈 군키(勢州軍記)』의 오하라 출생설, 오카야마번 『가추 쇼시 가후 고온요세(家中諸士家譜五音寄)』의 오와리 가이사이군 출생설, 『코가시사(甲賀市史)』 8권(2016) 330쪽의 “오하라 다키가와” 서명 소개는 일본어 위키백과 경유 재인용. ↩
-
구와타 다다치카(桑田忠親), 『전국무장과 다도(戦国武将と茶道)』(1978) 65쪽과 다니구치 가쓰히로(谷口克広), 『오다 노부나가 가신 인명사전(織田信長家臣人名辞典)』 제2판(2010)의 견해는 일본어 위키백과 경유 재인용. 도쿠나가 신이치로(徳永真一郎), 『닌자 다키가와 카즈마스(忍の人・滝川一益)』(마이니치신문사, 1990)는 CiNii 서지로 확인.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 전문 검색에서 “瀧川一益”와 “忍術”·“忍者”를 함께 쓴 전근대·전전 문헌은 나오지 않았다. ↩
-
『신초코키(信長公記)』 첫 권 “七月十八日おどりを御張行。一、赤鬼 平手内膳衆。一、黒鬼 浅井備中守衆。一、餓鬼 瀧川左近衆”(1881년판 권지상 9장 앞면,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781192, 14쪽). 1550년대 후반 출사 추정은 가네코 히라쿠(金子拓), 『‘신초키’와 노부나가·히데요시의 시대(『信長記』と信長・秀吉の時代)』(2012)를 일본어 위키백과 경유 재인용. 오제 호안 『다이코키(太閤記)』 범례 뒤 “或問” “瀧川久助〔左近將監後號〕は鐵炮はなしの內より、信長公取出し”(『카이테이 시세키슈란(改定史籍集覧)』 6, 226쪽 OCR). 『간에이 쇼카케이즈덴(寛永諸家系図伝)』 “幼年より鉄炮に長す”는 재인용.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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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초코키(信長公記)』 권2 에이로쿠 12년 오카와치성 포위 진형 “南の山に織田上野守・瀧川左近・津田掃部…”, 친위 무사 순번 “山田彌太郎・瀧川彦右衛門・山田左衛門尉”(일본 국립국회도서관 781192, 28쪽). 다니구치 가쓰히로의 판정은 일본어 위키백과 경유 재인용. 코토뱅크 『디지털 대사천(デジタル大辞泉)』·『일본인명대사전+Plus(日本人名大辞典+Plus)』는 지금도 “통칭 히코에몬”으로 적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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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초코키(信長公記)』 권2 “廿六日あさかの城…瀧川左近人數入置”, “九月九日 瀧川左近被仰付、多藝谷國司の御殿を初として悉燒拂、作毛薙捨”, “十月四日 大河内之城、瀧川左近・津田掃部兩人に相渡”, “あのゝ津・しぶみ・小作三ヶ所に瀧川左近をかせられ”(일본 국립국회도서관 781192, 28–29쪽 쪽 이미지). 1567년 북이세 공략은 『시료소란(史料綜覧)』 권10 에이로쿠 10년 봄 요약이 『세이슈 군키(勢州軍記)』 등 에도 시대 책만을 근거로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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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칸후(藩翰譜)』 f204.p005 “現常院頓て還俗して織田殿の侍大將瀧川一益が〔後に左近/將監を云〕名字を請て、瀧川兵部少輔と名のる”. 『간세이후(寛政譜)』 권649 다키가와 타다유키 항목 “初め木全を稱し、忠征がときに瀧川伊豫守一益が家號を讓りうけて瀧川と稱す”, 부친 다다즈미 “のち瀧川一益が家老となり”(제4집 447쪽, 쪽 이미지).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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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초코키(信長公記)』 권6 덴쇼 원년 “柴田修理・瀧川左近兩人者さか井の城…降參申十月六日退出”, “矢田之城御普請丈夫に被仰付、瀧川左近被入置”(781192, 45쪽). 권7 덴쇼 2년 “十五日に九鬼右馬允あたけ舟、瀧川左近・伊藤三丞・水野監物是等もあたけ舟”(같은 책 48쪽). 『시료소란(史料綜覧)』 권11 덴쇼 2년 9월 29일 “尋デ、信長、北伊勢ノ地ヲ瀧川一益ニ宛行フ”.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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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료소란(史料綜覧)』 권11 덴쇼 3년 12월 “是月、瀧川一益、伊勢興正寺ニ同寺境內ヲ安堵セシム”(전거 『이세 고쇼지 문서(伊勢興正寺文書)』), 12월 28일 “信長ノ將瀧川伊豫守ノ、勅願寺伊勢金剛寺領ヲ闕所ト爲スヲ停止セシメラル”(전거 교토어소 히가시야마 고분코 기록). 두 원문서 모두 열람하지 못했다. 고쇼지 문서의 내용은 욧카이치시 지정 문화재 「다키가와 카즈마스 기진장(滝川一益寄進状)」 해설(욧카이치시 누리집)로 확인했고, 『시료소란』은 이를 경내 안도로 정리했다. 지에다 다이시 논문(2008)은 서지만 확인했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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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초코키(信長公記)』 권8(나가시노·에치젠), 권9(아즈치 거석·텐노지), 권10(사이카), 권11(아즈치 다회·단바·간키성·아리오카), 권12(아리오카·아라키 일족 처형), 권13(호조), 권14(이가) 해당 날짜 기사(일본 국립국회도서관 781193·781194). 나가시노 “家康・滝川陣取の前に馬防の為柵を付させられ”, 간키성 “滝川左近・惟住五郎左衛門両手より東之丸へ乗入”, 이가 “山桜之御壺被止置、滝川左近被下候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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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초코키(信長公記)』 권12 덴쇼 7년 10월 15일 “滝川左近以調略、佐治新介使を仕、中西新八郎を引付、中西以才覚、足軽大将之星野・山脇・隠岐・宮脇致謀叛、上臈塚へ滝川人数引入、余多切捨候”(781194, 12쪽 쪽 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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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초코키(信長公記)』 권8 나가시노 철포 부교 “佐々内蔵介・前田又左衛門・野々村三十郎・福富平左衛門・塙九郎左衛門”(781193, 6쪽). 권11 덴쇼 6년 “勢州之九鬼右馬允に被仰付大船六艘作立、並瀧川左近大船一艘、是は白舟に拵”, 9월 30일 “瀧川左近大船白舟上乘仕候犬飼助三・渡邊佐內・伊藤孫大夫三人に黄金六枚御服相添被下”(781193, 25·27쪽. 이 간본은 뒤쪽을 “滝川右近”으로 찍었다). 『다몬인 닛키(多聞院日記)』 덴쇼 6년 7월 20일 “鉄ノ船”은 원문을 확인하지 못했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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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초코키(信長公記)』 권13 덴쇼 8년 3월 “此時之御取次 滝川左近”, “御使衆 二位法印・滝川左近・佐久間右衛門 三使”, 6월 “滝川左近御取次”(781194, 19·3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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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초코키(信長公記)』 권15 “二月十二日 三位中將信忠卿御馬を被出…十四日に岩村に至て御着陣 瀧川左近 河尻與兵衞 毛利河內守 水野監物 水野宗兵衞 被差遣”(위키문헌 「我自刊我書」본). 2월 23일 노부나가 서장 “城介事…むさとさきへ不越之様、滝川相談堅可申聞候”는 개인 사이트 전재본만 확인했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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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초코키(信長公記)』 권15 3월 11일 “瀧川左近承り嶮難節所之山中へ分入被相尋候處に田子と云所平屋敷に暫時柵を付居陣候則先陣瀧川儀大夫篠岡平右衞門下知を申付取卷候”, “巳刻各相伴討死也 四郞父子之頸 瀧川左近かたより三位中將信忠卿へ被懸御目候”, 3월 16일 “武田四郞勝賴最後にさゝれたる刀瀧川左近かたより信長公へ上被申候”, 4월 2일 “瀧川左近將監申付上下數百人之御小屋懸置御馳走不斜”. 『시료소란(史料綜覧)』은 카츠요리의 최후를 “自殺”로 요약해 『신초코키(信長公記)』의 “討死”와 다르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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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초코키(信長公記)』 권15 덴쇼 10년 3월 23일 「다키가와 사콘 고즈케 배령의 일(瀧川左近上野國拜領之事)」, 3월 29일 영지 배분 “上野國 瀧川左近被下”, “同 チイサカタ サク 二郡 瀧川左近被下”(위키문헌 「我自刊我書」본,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781194, 42쪽 대조).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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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가미 모리스에(金上盛備, 서명 “盛滿”) 서장, 덴쇼 10년 5월 29일, 다키가와 앞 “殊更貴殿上州御在國之儀、珍重候…今度東國御一統之儀、於吾等式も滿足此時候”(사카타 문서(坂田文書), 『엣사시료(越佐史料)』 권6, 19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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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 고다이키(北条五代記)』 권5 “其上関東官領職にふせられ。奥州までも手柄しだひ。切取べき命旨を請”(위키문헌). 『간핫슈 고센로쿠(関八州古戦録)』 권11 「瀧川左近將監一益補關東管領職前東上野入部事」(『시세키슈란(史籍集覧)』 수록본). 『한칸후(藩翰譜)』 f196.p001. 『시료소란(史料綜覧)』 권11 덴쇼 10년 3월 23일 “信長、上野及ビ信濃二郡ヲ瀧川一益ニ與ヘ、關東ヲ鎭セシム”. 히라야마 유, 『덴쇼 진고의 난(天正壬午の乱)』 증보개정판(2015) 72쪽의 견해는 일본어 위키백과 경유 재인용.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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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미 사쿠미(花見朔巳), 『니혼분카시(日本文化史)』 제9권 아즈치모모야마 시대(大鐙閣, 1922) 136쪽 주4 “畑柳平氏所藏文書、卯月四日、一益より太郞五郞への返書中に”(일본 국립국회도서관 969909, 쪽 이미지). 인용문의 ”…”는 하나미가 줄인 부분과 이 글이 줄인 부분이다. 『시료소란(史料綜覧)』 권11 덴쇼 10년 3월 23일 요약은 이 문서를 〔참고〕로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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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요시나리(田中義成), 『코쿠시노 헨에이(国史の片影)』(1920) 162쪽 “名譽ある關東の都督よりも眇たる一小茄子を望まんとしたのは、何んと超然高潔の風を帶びて居るではないか”, “諧謔の語氣を帶びては居るが”. 『다도대사전(茶道大辞典)』 신판(단코샤, 2010)의 “恩賞にこれを求めたが叶わず、代わりに関東管領に任じられたという逸話もある”는 NDL 레퍼런스 협동 데이터베이스 「주코 코나스(珠光小茄子)」 회답 경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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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료소란(史料綜覧)』 권11 덴쇼 10년 4월 4일 “瀧川一益、下野宇都宮國綱ノ出兵ヲ督促ス、是日、國綱、之ヲ佐竹義重ニ議ル”(전거 宇都宮氏家蔵文書), 5월 “瀧川一益、信濃龍雲寺ニ寺領ヲ安堵セシム”. 류운지 문서 “都合百六十八貫、新寺領として宛行ふ…天正十年五月日 滝川左近一益(花押)“는 사나다 보물관 해설의 훈독문으로 확인했다. 이 해설은 “새 사령으로 준다”로, 『시료소란(史料綜覧)』은 “안도”로 요약해 표현이 다르다. 우마야바시 이동 시기는 『이시카와 타다후사 도메가키(石川忠総留書)』가 4월 중순, 『군마현사(群馬県史)』 통사편 3(1989)이 5월 하순(일본어 위키백과 경유 재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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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카와 타다후사 도메가키(石川忠総留書)』 “厩橋城御借被成候者移リ申度候之由…某次男ニテ候於千連ヲ證人トシテ進ノ由”, “四月中旬ニ厩橋エ被移、近國ノ大小名出仕申サレ候、五月上旬ニ、於本城能興行、其內玉かつらヲ左近殿仕舞被致、小鼓ハ左近殿ノ嫡子於長殿…北條モ被參候付、拙者儀致供見物仕候”(『엣사시료(越佐史料)』 권6 덴쇼 10년 5월 23일 인용분, OCR 판독). 『호조 고다이키(北条五代記)』 권5 “皆もつて滝川が下知にしたがふ。此等の者の人じちを取て。箕輪の城に入をく。其いきほひのいかめしさ。狐が虎の威をかるがごと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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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 히로유키 박사논문 『전국·쇼쿠호기 다이묘 도쿠가와 가문의 영국 지배(戦国・織豊期大名徳川氏の領国支配)』(도요대학, 2015) 심사 요지(도요대학 학술정보 리포지토리 공개 PDF). 같은 주제의 「오다 정권의 간토 처리」(『하쿠산 사학(白山史学)』 37, 2001)는 본문을 열람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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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 우지마사 서장(덴쇼 10년 6월 11일, 다키가와 사콘노쇼겐 앞) “今十一未刻、自深谷之臺、一庵書狀被指越候、抑京都之樣子…實儀候哉…當方へ毛頭御疑心有間敷候”(다카하시 가즈오 소장 문서), 카즈마스 서장(6월 12일, 토미오카 로쿠로시로 앞) “京都之儀、其以後何共不承候、無別條之由候”(토미오카 가문 문서):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1책 덴쇼 10년 6월 11·12일(일본 국립국회도서관 3450624, 408쪽 쪽 이미지). 소식 도착일은 『이시카와 타다후사 도메가키(石川忠総留書)』가 6월 9일 저녁, 『치쿠마노 마사고(千曲之真砂)』가 6월 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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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수신인이 떨어져 나간 6월 22일 서장 “同十八日かなくほ本庄之原ニ而被及一戰候之處、京勢存儘ニ被得利…同十九日、重而被及一戰…京勢を陣城ゑ近々引掛、後陣之人數合懸遂一戰、忽京勢切崩…瀧川父子不及了簡、信州山奧ニ被引退候”(마츠다이라 요시유키 소장 문서,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1책 덴쇼 10년 6월 19일). 같은 곳의 『이시카와 타다후사 도메가키(石川忠総留書)』 “瀧川手人數貳千七八百計ニテ…關東衆賴入申間敷候、瀧川旗本計ヲ以テ、致一戰見セ申由…其刻瀧川家老笹岡平右衞門討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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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1책 덴쇼 10년 6월 19일에 실린 『요다키(依田記)』(6월 23일 고모로 출발), 『간핫슈 고센로쿠』(7월 1일 이세 도착), 『무토쿠 헨넨 슈세이(武徳編年集成)』 등. 『한칸후(藩翰譜)』 f196.p001 “瀧川初め眞田が手より取りたる城なり、眞田にこそ返し渡さめとて許さず”.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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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요시 서장(덴쇼 10년 10월 18일) “宿老共清須まて令談合候處…四人之宿老共”(『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1책 덴쇼 10년 6월 27일, OCR 판독). 다니구치 가쓰히로·오와다 데쓰오(小和田哲男)·시바 히로유키(『키요스 회의(清須会議)』, 2018, 57–59쪽)의 해석은 일본어 위키백과 「키요스 회의(清須会議)」·「다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 경유 재인용.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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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료소란(史料綜覧)』 권11 덴쇼 10년 12월 26일(고지마 문서. 노부타카·노부카츠의 화해를 알리며 성채 파각을 요구), 덴쇼 11년 1월(전거 『한칸후(藩翰譜)』·『기타바타케 모노가타리(北畠物語)』 등 에도 시대 편찬물. 거병 날짜를 뒷받침하는 동시대 기록은 확인하지 못했고, 『한칸후』에는 사지 신스케의 이름이 없다), 2월 16일, 3월 3일, 3월 17일 “羽柴秀吉、伊勢ニ在リ、柴田勝家近江ニ出ヅト聞キ、直ニ軍ヲ長濱ニ班シ、進ンデ柳瀨ニ對陣ス”, 4월 17일, 5월 2일 “信孝、大御堂寺ニ自刄ス” 요약(일본 국립국회도서관 2994257, 168·170·175쪽 OCR 대조). 『한칸후(藩翰譜)』 f189.p001 세키 가문 항목. 『한칸후』는 카즈마사의 교토행을 “三七殿失せ給ひしのち”(노부타카가 죽은 뒤)로 적어 1월의 일과 시기가 맞지 않는다. 사지 신스케의 이름은 시즈가타케 전투 글과 맞춰 佐治新助로 적었으나, 『신초코키(信長公記)』와 『시료소란(史料綜覧)』에는 佐治新介로 나온다. 하치스카 마사카츠 서장(7월 27일) “瀧川殿御退城候て、于今此方逗留仕候”(『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4책 818쪽, 쪽 이미지). 오미 5,000석은 『기타바타케 모노가타리(北畠物語)』 “江州南郡において堪忍分として五千石を給る”와 오제 호안 『다이코키(太閤記)』 권9.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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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타다 닛키(家忠日記)』 덴쇼 12년 6월 16일 “かにへ下嶋前田城瀧川調儀にて取候、則家康かけつけられ小口ヲとられ候”(1897년 활자본 제3책,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772515, 35쪽.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7책 번각 대조). 6월 19일 “昨日戌刻ニ下嶋城責崩…九鬼ハ舟ニて落候を、此方衆大舟にてのりかけ敵舟をとり”(같은 책 35쪽). 사쿠마 마사카츠의 부재는 『시료소란(史料綜覧)』 권12 덴쇼 12년 6월 16일 요약. 『한칸후(藩翰譜)』 f069.p001, 구키와 함께 큰 배로 건넌 것은 f179.p001 “九鬼大隅守嘉隆と相談して…大船に取り乘て尾張の國に押渡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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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타다 닛키(家忠日記)』 덴쇼 12년 7월 3일 “かにへ別心人前田與十郎ニ腹ヲきらせ候、かにへ城〔を〕さし、瀧川舟にてのき候、御味方可有之起請文かき候”(772515, 36–37쪽. “を”는 판독 불확실). 히데요시 슈인조(7월 5일) “瀧左父子曖候て、去三日ニ、楠まて悉人數召連取退候由注進候”(『신펜 아이즈 후도키(新編会津風土記)』 수록,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7책 687–688쪽). 『미카와 모노가타리(三河物語)』 “ゑ口にて女房子共、もろともに、のこらず打ころされて汐にうかび而ぞ有ける”(위키문헌). 이에야스가 요주로의 목을 화의 조건으로 내걸고 카즈마스의 조카 겐파치로(源八郎)가 그를 죽였다는 이야기는 『이에타다 닛키 조호(家忠日記増補)』·『부케지키(武家事紀)』·『무토쿠 헨넨 슈세이(武徳編年集成)』 등 에도 시대 편찬물에 나온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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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미 쿄키(兼見卿記)』 덴쇼 12년 7월 17일 “傳聞、瀧川左近、今度於尾州手遣散々之仕合也、就其自筑州曲事之旨被申遣、息三九郎者拂分國云々、舍弟御八許容云々、無念之次第也”(『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7책 68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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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제 호안 『다이코키(太閤記)』 권9 「尾州蟹江の城瀧川以隱謀忍入之事」 “同廿七日勢州木造之城へのき行けるが、其前は富田左近丞と兩人此城に在しか共、富田云やうは蟹江の城を退しに付て、いかやうの堅約も有らん、此城へはえこそ入まじけれ”(『카이테이 시세키슈란(改定史籍集覧)』 6, 323쪽). 『한칸후(藩翰譜)』 f179.p001. 간베성설은 일본어 위키백과 「가니에성 전투(蟹江城合戦)」·「도미타 이치하쿠(富田一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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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제 호안 『다이코키(太閤記)』 권9 같은 곳의 평(『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7책 690쪽 쪽 이미지 확인, 『카이테이 시세키슈란(改定史籍集覧)』 6 OCR은 “先をかくるにも瀧川、又殿も瀧川”. “殿ひ”는 후미를 뜻하는 しっぱらい로 읽힌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 전문 검색에서 “進むも瀧川”·“退くも瀧川”의 전근대·전전 용례는 나오지 않았다. 『로진 자와(老人雑話)』 “信長の時は、天下の政道四人の手にあり。柴田、秀吉、瀧川、丹羽也。左近武勇は無雙の名ありて、度々關八州を引受て合戰す。關八州の者は瀧川の名を聞ても、おそれし程なりし。末に至て散々の體也”(위키문헌).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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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요시 판물(덴쇼 12년 7월 12일, 다키가와 하치 앞) “入庵ゟ壹万五千石令契約知行、今度改三千石之通入庵ゟ遣候、相殘而壹万二千石分其方可有領知”(『간에이 쇼카케이즈덴(寛永諸家系図伝)』 수록,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7책 761쪽). 묘신지 출가설은 『로진 자와(老人雑話)』, 『이에타다 닛키 조호(家忠日記増補)』, 일부 사전. 1584년 6월 사타케 요시시게에게 히데요시의 간토 출마 의향을 전한 “불간(不干)” 서명 서장(『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7책 덴쇼 12년 6월 4일, 사타케 문서)은 사료편찬소가 카즈마스의 것으로 판정했으나 사쿠마 마사카츠의 호와 겹쳐 다툼이 있다. 카즈마스의 것이라면 출가는 가니에 이전이 된다. 만년의 동국 외교 역할은 사이토 신이치(齋藤慎一), 『전국시대의 종언(戦国時代の終焉)』(2005)을 일본어 위키백과 경유 재인용.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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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세이후(寛政譜)』 권649 카즈마스 항목(주1과 같음) “勝家滅亡ののち一益は太閤の舊友たるにより、領地を沒收せらるゝといへども、死を宥められて越前國大野郡に閑居す。十二年七月十二日太閤より三千石の地をたまはる”. 『도다이키(当代記)』 덴쇼 12년 “其年の暮、瀧河親子共令病死”(『시세키잣산(史籍雑纂)』 2). 묘소 가운데 묘신지 조코인·레이센지·신라쿠지는 일본어 위키백과가 『하나조노 묘신지(花園妙心寺)』(1977), 『다케후시사(武生市史)』 자료편 8, 『전국사원명감(全国寺院名鑑)』(1969)을 근거로 든 것을 재인용했다. 에치젠 아사(餓死)설은 일본어 위키백과 「가니에성 전투(蟹江城合戦)」가 인용한 『비요 잣키(尾陽雑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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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세이후(寛政譜)』 권649 카즈토키 항목 “勇者の子孫ことに扶助あるべきを、不幸にして世をはやくせしとの御諚ありてこれを惜ませたまふ”, 카즈미치 항목 “九年七月十六日、さきに眞田左衞門佐幸村が女を養女とし、松平中務大輔忠知が家臣に嫁せしことをとがめられて改易せらる。妻は眞田安房守昌幸が女”(제4집 443–446쪽). 타츠마사 계통은 오카야마번 가보(일본어 위키백과 경유).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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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키가와 카츠토시의 가타노 2만 석과 자손의 하타모토 존속, 다키가와 타다유키의 오와리번 부가로 취임은 일본어 위키백과 「다키가와 카츠토시(滝川雄利)」와 『간세이후(寛政譜)』 권649 타다유키 항목(제4집 447–449쪽)을 따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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